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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인의 위대한 작곡가 더 알기 -2

정준극 2017. 12. 5. 07:10

30인의 위대한 작곡가 더 알기  -2


○ Wolfgang Amadeus MOZART(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고전시기의 작곡가. 1756년 1월 27일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잘츠부르크는 오스트리아 공국과는 별도로 추기경이 지배하는 도시국가였다. 1791년 12월 5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잘 아는 대로 모차르트의 시신은 처음에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나 이 공동묘지는 여러 시신을 한꺼번에 묻는 그야말로 공동묘지였다. 그래서 오늘날 까지도 모차르트의 정확한 묘소는 알지 못한다. 비엔나 남쪽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모차르트의 가묘를 만들어 놓았다. [인기작품]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직, 터키 행진곡, 피아노 협주곡 21번 등등 헤아릴수 없다. [대표작품] 교향곡 40번, 41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 '마술피리', '돈 조반니', '여자는 다 그래', 진혼곡과 그레이트 미사곡 C 단조,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 등등 [더 알기]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사람이다. 35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 짧은 생애 동안 6백여곡의 걸작을 작곡했다. 많은 작품을 작곡했지만 작곡으로 돈을 넉넉히 벌지는 못했다. 대표적인 음악의 신동이어서 다섯살 때에 작곡을 시작했다. 여섯 살때에는 유럽의 여러 국왕이나 왕비들 앞에서 연주했다. 모차르트는 절대음감의 소유자여서 한번 들은 음악을 그대로 암기하여 연주할수 있었으며 악보에 기록할수 있었다. 예를 들어서 그는 13세 때에 로마에 가서 시스틴 성당의 미사에 참석한 일이 있는데 이때 알레그리의 미제레레라는 미사곡을 한번 듣고서 집에 돌아와서 그대로 악보에 옮겨적었다. 당시에 바티칸의 미사곡은 절대로 외부로 유출될수 없었는데 모차르트가 기억력으로 악보를 만들었기 때문에 바티칸 역사상 초최의 유출악보가 되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연주를 끝내고 인사하는 어린 모차르트. 비엔나의 쇤브룬궁전


○ Sergei PROKOFIEV(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 현대작곡가. 1891년 4월 23일 제정러시아의 손초브카()에서 태어났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의 크라스네(Krasne)이다.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은 날에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Novodevochy)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피터와 늑대. [대표작품] 교향곡 1번, 5번, 6번, 7번, 피아노 협주곡 1번에서 5번까지, 발레곡 '로미오와 줄리엣', 발레곡 '신데렐라', 오페라 '전쟁과 평화', '오페라 '세 오렌지의 사랑'(Love for Three Oranges), 칸타타 '공포의 이반'(Ivan the Terrible)과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 [더 알기] 프로코피에프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과 '신데렐라'는 오늘날 거의 스탠다드 레퍼토리가 되어 있다. '이반 더 테리블'과 '알렉산더 네브스키'는 유명한 영화감독인 세르게이 아이젠슈타인에 의해 영화음악으로 사용되었다. 프로코피에프는 음악신동이었다. 글을 읽을 줄도 모르는 때에 작곡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홉살 때에 이미 첫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소년시절에 상트페테르부르크음악원에 입학하였으나 배우는 것이 흡족하지 않아서 자퇴하였다. 그리고 물론 학생시절에 작곡한 것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서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주로 파리에서 지냈다. 그는 작품과 관련하여 소련 당국과 마찰이 있었다. 소련 당국은 프로코피에프의 음악이 대중들에게 너무 복잡하다면서 비난하였다. 소련 당국은 그를 '인민의 공적'으로 규정하였으며 그의 작품들이 소련에서 연주되는 것을 상당기간 금지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인민의 공적'은 쇼스타코비치나 프로코피에프가 아니라 소련 당국이라고 믿었다.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는 어릴 때부터 체스 선수였다. 1914년에 비록 시범게임이지만 세계체스챔피언인 호세 라울 카파블랑카와 대전하여서 세르게이가 이긴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 Giacomo PUCCINI(자코모 푸치니). 낭만주의 작곡가. 1858년 12월 22일 이탈리아 투스카나 지방의 루카(Lucca)에서 탄생했다. 1924년 11월 29일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후두암 수술을 받은 후에 세상을 떠났다. 투스카나 지방의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에 특별히 건립한 교회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인기작품]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Nessun dorma),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어떤 갠 날'(Un bel di vedremo), 오페라 '자니 스키키'에서 '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O mio babbino caro). [대표작품] 오페라 '마농 레스코',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투란도트', '자니 스키키'. [더 알기] 푸치니의 오페라들은 이탈리아에서는 말할 나위도 없고 세계에서 가장 자주 공연되는 것들이다. 스토리가 서민적이며 서정적인 멜로디로 넘쳐 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오페라들은 모두 비극이지만 '자니 스키키'만은 코메디이다. 마지막 오페라인 '투란도트'는 미완성이었다. 이탈리아의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가 완성했다. 푸치니는 많은 재산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유산 분쟁이 있었다. 


'투란도트'의 피날레 장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무대. 푸치니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았다. 완성할 작곡가를 공모한 결과, 프랑코 알파노라는 사람이 선정되어 완성했다.


○ Sergei RACHMANINOV(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낭만주의 작곡가. 1873년 4월 1일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부근 세미요노보()에서 태어났고 전쟁 중인 1943년 3월 28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비벌리 힐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스위스의 빌라 세나르에 있는 자기의 땅에 묻히고자 했으나 2차 대전으로 여의치 못해서 뉴욕의 발할라에 있는 켄시코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피아노를 위한 전주곡 C 샤프 단조, Op 3의 2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라프소디에서 18곡의 변주곡, 보칼리제. [주요작품]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변주곡, 교향곡 2번과 3번, 교향적 무곡, 성 요한 크리소스톰 미사곡,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 '종'(),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코렐리 주제에 의한 변주곡. [더 알기] 라흐마니노프는 역사상 가장 훌륭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중에서 대부분은 피아노를 위한 곡들이다. 하지만 연주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그의 음악은 매우 로맨틱하다. 아름다운 멜로디가 감동을 주는 작품들이다.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작곡가 및 피아니스트들은 현대음악에 열중하였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낭만주의 음악에 치중하였다. 그러므로 라흐마니노프는 낭만주의의 마지막 작곡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그의 교향곡 1번을 별로 좋아하지 않자 대단히 실망하여서 그후 3년 동안 작곡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한가지 그의 작품의 특징이라고 하면 러시아의 종소리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1917년 러시아혁명 기간중에 러시아를 떠나야 했다. 그는 간단한 짐 하나만을 가지고 썰매를 타고 핀란드 국경을 건너가서 마침내 미국에 갈수 있었다. 그는 미국에서 별로 작곡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피아니스트로서, 지휘자로서 생활비를 벌었다. 사람들은 그가 나타나면 무조건 전주곡 C 샤프 단조를 연주해 달라고 요청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 Gioachino ROSSINI(조아키노 로시니).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로서 더 널리 알려졌다.  


○ Arnold SCHOENBERG(아놀드 쇤버그). 현대음악 작곡가.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도 작곡했다. 1874년 9월 13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서 미국으로 이주했고 1951년 7월 13일 로스안젤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사람들이 사랑하는 곡은 없다. [대표작품] '변형된 밤'(Verklarte Nacht), 성악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게레리더(Guerrelieder), 실내교향곡 1번과 2번, 현악4중주곡 2번, '플레아와 멜리상드', 1명이 출연하는 단막 오페라 '기다림'(Erwartung),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얘기를 하는 것처럼 소리를 내는 노래 세트 '피에로 뤼네어'(Pierrot lunaire), 바이올린 협주곡, 피아노 협주곡, 오페라 '모세와 아론'(Moses und Aron). [더 알기] 쇤버그의 현악4중주곡 2번은 과거에 나왔던 현악4중주곡에 비하여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청중들은 충격에 빠졌었다고 한다. 그런 종류의 음악은 생전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쇤버그라는 이름만 들어도 '웩!'이라는 소리를 지르게 된다. 음악을 한다는 사람들도 쇤버그의 음악이라고 하면 고개를 홰홰 내젓는다. 그러면서도 쇤버그의 음악이 대단히 클레버하다는 사실은 인정한다. 그에게는 '음악의 도깨비'(musical bogey-man)라는 말이 합당할 것이다. 사실상 그 자신도 그렇게 불렀다. 쇤버그는 과거의 작곡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작곡방법을 고안해 냈다. 시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20세기 후반의 대부분 작곡가들은 이런 스타일의 음악을 작곡했다. 물론 그런 스타일의 음악을 혐오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쇤버그는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소리를 듣고 기뻐했다. 그런 쇤버그는 재능있는 화가이기도 했다.


아놀드 쇤버그(아르놀트 쇤베르크)와 가족. 리하르트 게르스틀 작. 1907년


○ Franz SCHUBERT(프란츠 슈베르트). 후기 고전시기에서 초기 낭만주의 시기의 작곡가. 1797년 1월 31일 비엔나에서 탄생. 1828년 11월 19일 비엔나에서 서거. 묘소는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마련되어 있다. [인기작품] 가곡 '보리수', 아베 마리아, 세레나데, 피아노 5중주 '송어' [대표작품] 교향곡 8번과 9번, '송어' 5중주, '죽음과 소녀' 등 현악4중주곡, 피아노 소나타(D 958, D 959, D 960), 기타 등등 [더 알기] 슈베르트는 비록 3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1천곡 이상이나 되는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고 부른다. 가곡을 6벡여곡이나 작곡했다. 슈베르트의 사후에 악보가 발견된 '미완성 교향곡'은 실제로 미완성으로 남아 있었다. 미완성이지만 완성된 교향곡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다는 말을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하지 않았다. 슈베르트는 작곡을 하고서 그 작품을 내보이는 성격이 아니었다. 많은 작품들을 선반 위에 얹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많은 작품들이 슈베르트의 사후에 발견되었다. 슈베르트는 살아 있는 동안 베토벤을 한없이 경외하였다. 그가 베토벤을 처음 만나게 되자 너무 겁이 나고 불안해 했다. 그래서 그냥 인사도 하지 않은채 도망갔다. 그런 슈베르트인데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자 장례행렬의 가장 앞에서 만기를 들고 장지까지 갔다. 슈베르트는 죽어서 베토벤의 묘지로부터 가까운 곳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그렇게 되었다. 처음 묘지인 배링공동묘지에서도 베토벤의 바로 옆에 묻혔고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어서도 베토벤의 옆에 영면하게 되었다.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구스타브 클림트. 1899년


○ Robert SCHUMANN(로베르트 슈만). 낭만주의 작곡가. 1810년 작소니 공국의 츠비카우(Zwickau)에서 태어났으며 1856년 7월 29일 본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본에 있는 알터 프리드호프(Alter Friedhof)에 있다. 부인 클라라의 묘소도 함께 있다. [인기작품] 피아노 소품집인 '어린이의 정경'(Kinderszenene) 중에서 트로이메라이(Traumerei). 가곡 '두명의 척탄병'. [대표작품] 교향곡 1번 '봄', 2번, 3번 '라인', 4번,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5중주곡, 피아노 소품들. [더 알기] 당시 독일에서 상당히 유명한 피아노 선생인 프리드리히 비크에게서 레슨을 받았다. 비크의 딸 클라라를 사랑하게 되어 여러 난관을 거치고 결혼하였다. 클라라 슈만 역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슈만은 피아노를 연주할 때 긴머리 때문에 성가시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머리를 숏 커트했다. 그리고 넷째 손가락의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끈을 매어서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나중에 손가락에 이상이 생겨서 다시는 제대로 연주하지를 못했다. 슈만은 1840년에 클라라와 결혼했는데 그 전까지는 오직 피아노 음악만을 작곡했으나 결혼후부터는 클라라의 조언을 받아서 가곡과 합창곡 등도 작곡하기 시작했다.  연가곡인 '시인의 사랑' 등은 결혼 후에 완성한 작품이다. 슈만은 1854년, 그가 44세 때에 자살하기 위해 라인강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지나가는 보트맨에게 구출되었다. 그후 그는 거의 2년 동안 정신병원에서 지내다가 뱡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여 세상을 떠났다.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 Clara Schumann(클라라 슈만).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 결혼전 이름은 Clara Wieck(클라라 비크). 1819년 9월 13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나서 1896년 5월 20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세상을 떠났다. 클라라 슈만은 본의 알터 프리드호프에 안치되어 있는 남편 로베르트 슈만과 합장되어 있다. 클라라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였다. 베스트 작품은 피아노협주곡, 피아노 트리오 Op 17, 기타 가곡들이 있다. 클라라 슈만은 고전시대에 부부가 음악가인 몇 안되는 특별한 경우의 인물이다. 클라라의 아버지인 프리드리히 비크는 당시 이름난 피아노 교사였다. 클라라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클라라의 아버지의 피아노 제자인 로베르트 슈만과 결혼하였다. 오늘날 피아노 연주회에 가서 보면 피아니스트는 대체로 악보 없이 암기로 연주를 한다. 그런 관례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클라라이다. 그 전까지는 모두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연주했지만 클라라는 미리 음악을 모두 암기하고 연주했다. 남편 로베르트 슈만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한때 슈만으로부터 레슨을 받았던 브람스가 슈만의 가족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였다. 예를 들어서 클라라가 피아노 연주 때문에 집을 비우게 되면 브람스가 가서 아이들을 봐주었다. 브람스는 클라라를 깊이 사모하였다. 클라라는 어찌보면 평생을 슬픔 속에 지낸 여인이다. 남편이 정신질환이 있어서 정신요양원에 입원했다고 세상을 떠난 것도 그렇고 자녀를 여덟 명이나 두었지만 그중에서 네 아이가 일찍 죽은 것도 그러했다.


○ Dmitri SHOSTAKOVICH(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현대작곡가.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1975년 8월 9일 모스크바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모스크바의 노보데비치 공동묘지에 있다. [인기작품] 제2의 왈츠(영화 '등에'에서). [대표작품] 교향곡 5번, 그리고 교향곡 7번부터 15번까지,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2번, 현악4중주 8번과 15번, 피아노를 위한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오페라 '므첸스크구의 레이디 막베스', [더 알기]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말을 장식하는 뛰어난 교향곡들과 현악4중주들을 남겼다.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을 이해하려면 당시 소련의 상황이 어떠했는지부터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소련은 두렵고 무서운 장소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공산정부와 문제가 있어서 고통을 당해야 했다. 프로코피에프, 스트라빈스키 등 여러 작곡가들이 소련 당국의 핍박을 피해서 외국으로 나가서 살았지만 쇼스타코비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떠나지 않았다. 2차 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레닌그라드(현재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위하고 있을 때에 쇼스타코비치는 소방대에 배속되어 복무해야 했다. 아래 사진은 소방대원 복장의 쇼스타코비치가 소화작업을 돕는 장면이다. 소련당국이 선전용으로 촬영한 사진이다. 쇼스타코비치는 포위된 레닌그라드에 있으면서 교향곡 7번을 작곡했다. 교향곡 7번의 부제는 '레닌그라드'이다. 교향곡 7번은 1942년 적군이 포위한 레닌그라드에서 초연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프로코피에프가 그러했던 것처럼 1948년에 다시 소련 당국과 문제가 있었다.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인민의 적'으로 만들고 그의 음악을 금지했다. 쇼스타코비치는 그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나라에서 살고 있는지를 표현한 작품들을 다수 작곡했다. 심지어 교향곡 5번도 소련 정부가 얼마나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를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미있고 웃기는 음악들을 많이 작곡했다. 심지어는 재즈풍의 작품들도 만들었다. 그리고 그는 얌전하고 수줍게 보이지만 축구광이었다.


1940년대 초. 나치 독일이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있을 때 쇼스타코비치는 레닌그라드 소방대원으로 복무했다. 소련당국이 홍보용으로 찍은 사진이다. 쇼스타코비치의 얼굴에는 불편한 심기가 가득히 표현되어 있다.


○ Richard STRAUSS(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가르미슈 파트텐키르헨에 있는 자택에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2차 대전이 끝나자 미군이 바바리아 지방에 진주하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자택연금되었다. 슈트라우스는 미군 책임자인 밀튼 웨이스 소령에게 '나는 장미의 기사와 살로메를 작곡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요'라고 말했다. 웨이스 소령은 음악애호가였다. 슈트라우스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저택 앞 잔디 마당에 '출임금지' 표지를 설치해 주었다.


○ Igor STRAVINSKY(이고르 스트라빈스키). 현대 작곡가. 1882년 6월 17일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의 오라니엔바움()에서 탄생했다. 1971년 4월 6일 뉴욕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이탈리아 베니스 앞 바다에 있는 산타 미켈레 섬에 안치되었다. [인기작품] 발레곡 '봄의 제전'(Le Sacre du Primntemps) [대표작품] 발레곡 '불새'(L'Oiseeau de feu), '봄의 제전', '페트루슈카'(Petrushka), '풀치넬라'(Pulcinella), '결혼'(Les Noces), '아폴로'; 오페라 ''외디푸스 왕'(Oedipus Rex), '난봉꾼의 행로'(A Rake's Progress); 시편교향곡. [더 알기] 20세기 최고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19세기에 차이코브스키의 발레곡이 있다면 20세기에는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이 있다. 스트라빈스키의 발레곡은 오늘날에도 스탠다드 레퍼토리로 되어 있다. 세 편의 발레작품, 즉 '불새' '봄의 제전' '페트루슈카'는 거장 게르게이 다이길레프(Sergei Diaghilev)가 초연의 안무를 맡았다. 발레의 전설이 되어 있다. 그의 '봄의 제전'은 모던 클래시컬 뮤직의 문을 연 작품이었다.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스트라빈스키. 왼쪽은 소련 문화장관.


'봄의 제전'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 관중들은 음악이 지나치게 거칠고 난폭하여서 충격을 받았다. 이어 공연장은 '집어 치어라'라는 소리로 난장판이 되었다. 급기야 경찰이 출동하여 폭동과 같은 소란을 진압하였다. '봄의 제전'은 과거에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음악이었다. 특히 리듬이 그러했다. 전혀 경험하지 못한 리듬이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는 그의 작곡 스타일을 자주 변경했다. 예를 들어서 '풀치넬라'와 '난봉꾼의 행로'는 '봄의 제전'에 비하여 전혀 다른 스타일의 음악이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은 또 다시 달랐다. 마치 쇤버그의 음악과 같았다. 스트라빈스키는 1910년에 제정러시아를 떠나서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는 세 나라에서 살았다. 처음에는 스위스, 그 다음에는 프랑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에서 살았다. 그는 어디를 가던지 러시아정교회의 독실한 신자였다. 스트라빈스키는 파리에서 디자이너 코코 샤넬과 러브 어페어를 가졌다. 무려 7년이나 관계가 지속되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러시아에서 추방되어 나올 때에 부안 카테리나와 네 자녀와 함께 나왔다. 이고르와 코코의 러브 어페어는 2010년에 나온 영화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에 설명되어 있다.


영화 '코코 샤넬과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한 장면. 프랑스의 안나 무글라리스(Anna Mouglalis: 1978-)와 덴마크 출신의 매즈 미켈센(Mads Mikkelsen: 1965-)이 타이틀 롤들을 맡았다.

  

○ Pyotr TCHAIKOVSKY(표트르 차이코브스키). 낭만주의 작곡가. 1840년 5월 7일 러시아의 보트킨스크(Votkinsk)에서 태어났다. 보트킨스크는 현대 우드무르트(Udmurt) 자치구에 속한 곳이다. 1893년 11월 6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더 네브스키 수도원에 있는 티크빈(Tikhvin) 묘지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1820년 서곡, 교향곡 6번 '비창', 오케스트라를 위한 '슬라브 행진곡', 발레음악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피아노 협주곡 1번. [대표작품] 교향곡 4번, 5번, 6번; 피아노 협주곡 1번,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오페라 '유진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더 알기]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은 풍부한 감정을 표현한 것이다. 누가 들어도 그런 느낌을 받는다. 가장 강렬한 감정표현은 아마도 교향곡 6번 '비창'(Ppathetique)에서일 것이다. '비창교향곡'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9일전에 처음 연주되었다. 그의 음악은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러시아를 연상케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사람들에게는 서구를 느끼게 해주는 음악이었다. 그의 발레곡들은 오늘날 전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 되었다. '호두까기 인형'에서 '사탕 요정의 춤'에는 전혀 새로운 악기가 선보였다. 첼레스타(Celesta)였다. 작은 피아노와 같은 악기로서 짤랑짤랑하는 소리를 낸다. 이 악기의 소리는 영화 해리 포터의 처음 장면에도 나온다.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차이코브스키의 대표작 중의 하나는 '1812년 서곡'이다. 제정러시아의 국가와 프랑스 국가가 나오는 장엄한 작품이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 자신은 이 작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결혼생활은 비참한 것이었다. 그의 생애는 여러 미스테리가 교차하는 것이었다. 차이코브스키의 죽음도 미스테리였다. 콜레라로 사망했다고 하지만 자살했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차이코브스키와 부인 안토니나 밀류코바. 모스크바음악원에서 차이코브스키의 제자였다.


○ Giuseppe VERDI(주세페 베르디). 낭만주의 작곡가. 1813년 10월 10일 북부 이탈리아의 부세토 부근 르 론콜레(Le Roncole)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론콜레 베르디(Roncole Verdi)라는 지명이다.1901년 1월 27일 밀라노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밀라노에 그가 설립한 '은퇴음악가를 위한 집'(Casa di Riposo per Musicisti)의 한쪽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오페라 '아이다'에서 대행진곡,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 오페라 '나부코'에서 '날아라 금빛 날개를 타고'(Va, Pensiero),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에서 '축배의 노래'. [대표작품] 오페라 나부코, 막베스, 리골레토, 일 트로바토레, 라 트라비아타, 가면무도회, 운명의 힘, 돈 카를로스, 아이다, 오텔로, 활슈타프, 그리고 진혼곡. [더 알기] 베르디는 '오페라의 황제'라고 불린다. 그는 바그너와 같은 해인 1813년에 태어났다. 바그너가 뮤직 드라마를 개척한 반면에 베르디는 전통적인 낭만주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베르디는 처음에는 오페라 작곡가로서 실패를 경험하였다. 그의 첫 작품인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는 실패였다. 당시에 베르디가 실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의 작품을 만들지 못했다는 얘기다. 그의 두 아들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이어서 그의 부인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르디는 '오페라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야'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페라를 만들어서 역사에 길이 남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의 오페라는 모두 비극이지만 첫 오페라인 '왕궁의 하루'와 마지막 오페라인 '활슈타프'만은 코미디이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를 무척 존경했다.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오텔로, 막베스, 활슈타프를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리고 '리어왕'을 오페라로 만들고자 했으나 리어왕의 복잡한 심경을 음악으로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해서 포기했다. 베르디는 당시 이탈리아의 국민적 영웅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분열되고 억압받는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조국 통일이라는 염원을 불태워준 것이었다. 이 합창곡은 이탈리라의 비공식 국가로서 사랑을 받았다. 베르디의 장례식에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밀라노 시민들이 거리의 벽에 VIVA VERDI 라고 구호를 쓰고 있다. 꽃파는 아가씨가 오스트리아 군인들이 오는 것을 망을 보고 있다.


○ Antonio VIVALDI(안토니오 비발디). 바로크 작곡가. 1678년 3월 4일 베니스에서 태어났고 1741년 7월 28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는 비엔나의 외곽에 있는 어떤 병원의 사망자 묘지에 매장되었다. 현재의 4구 뷔덴 칼스키르헤(칼 교회)와 비엔나공과대학교 인근이다. [인기작품]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글로리아. [대표작품] 비발디는 약 5백편의 협주곡을 작곡했다. 그 중에서 반 이상이 바이올린을 위한 협주곡이다. 비발디는 오페라도 상당수 작곡했다. 46편이나 되었다. 비발디는 독실한 가톨릭이어서 수많은 종교음악을 작곡했다. 그는 청년시절에 이미 가톨릭 사제로서 서품을 받았다. [더 알기] 사제가 된 것은 1703년, 그러니까 그가 25세 때였다. 비발디는 오랫동안 베니스의 어떤 여학교 음악선생으로 있었다. 그는 이 기간중에 많은 작품을 작곡해서 여학생 오케스트라가 연주토록 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는 여자들이 연주하기에 합당한 것들이 많이 있다. 비발디는 바흐를 대단히 존경했다. 그래서 바흐 스타일의 음악들을 작곡했다. 그는 한창시절에 많은 대우를 받고 사례도 많이 받아서 부유한 편이었으나 말년에는 빈곤한 생활을 했다.


왼편은 칼스키르헤이며 오른쪽 연못을 앞에 둔 건물이 비엔나 공과대학교이다. 그 사이에 나무가 조금 있는 곳이 옛날 비엔나시립병원에서의 사망자 또는 참수형을 받은 죄수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곳이었다. 비발디도 그곳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모르며 다만 비엔나공과대학교 건물의 벽면에 이곳에 비달디의 묘소가 있었다는 명판이 설치되어 있어서 기억을 되살리게 해 주고 있다.


○ Richard Wagner(리하르트 바그너). 낭만주의 작곡가.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고 1883년 2월 13일 향년 70세로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바이로이트의 바그너 저택인 빌라 봔프리트()의 정원에 마련했다. [인기작품] 오페라 '로엔그린'에서 '신부의 합창'(Treulich geführt: 진실로서 인도하소서). 오페라 '발퀴레' 중에서 '발키리들의 기행'(Walkürenritt 또는 Ritt der Walküren ). [대표작품] 오페라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니벨룽의 반지' 전편. [더 알기] 역사적 인물 중에서 가장 많은 논평이 쓰여진 인물로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바그너이다. 바그너는 다른 어느 작곡가보다도 더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사람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그너를 마치 신처럼 떠받들고 숭배하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바그너를 혐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베르디와 쌍벽을 이루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임에 틀림없다. 바그너는 그때까지의 관례적인 오페라와는 전혀 다른 오페라를 작곡했으며 전혀 다른 연출을 했다. 바그너의 오페라는 그 어느 오페라와 비교할수 없는 특별한 것이다. 비단 오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바그너는 음악 자체를 새롭게 변혁했다. 바그너를 숭배하는 사람들을 바그너라이트(Wagnerite)라고 부른다. 바그너라이트들은 이 세상에 바그너의 음악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 어떤 음악도 표현할수 없었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한 음악이라는 것이다. 바그너 음악을 처음 듣는 사람들 중에는 전에는 단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데 이미 알고 있던 음악이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반면에 바그너 음악을 혐오하는 사람들은 바그너의 음악이 거칠고 소란하기만 하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큰 딸인 빅토리아 공주는 결혼식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진실로서 인도하소서'를 신부입장할 때의 음악으로 선정했다. 그 이후로 결혼식의 신부입장에서는 의례 '로엔그린'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세계적인 관례가 되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곡가라고 하는 리하르트 바그너. 또 하나의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인 베르디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 1813년.


[바그너의 오페라에 대한 몇가지 사항들] 대체로 공연 시간이 대단히 길다. 가장 긴 오페라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서 다섯 시간이나 걸린다. 그래서 실상 많은 사람들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루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한다. 음악은 간혹 대단히 크게 울린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너무 조용한 음악이어서 연주를 하는지 안 하는지 알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전반적으로 볼때 바그너의 오페라는 연주하기도 대단히 힘들고 지휘하기도 대단히 힘들며 특히 주역으로 출연해서 노래를 부르는 것도 대단히 힘들다. 성악가라고 해서 누구나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주역을 맡을수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바그너의 오페라에 적합한 사람만이 주역을 맡을수 있다. 그들을 바그너 소프라노, 바그너 테너...이라고 부른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하는 것은 정말로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는 것이기 때문에 벌써 여러 명의 위대한 지휘자들이 바그너의 오페라를 지휘하는 중에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다. 대표적인 경우는 1968년 독일의 요제프 카일베르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뮌헨에서 지휘하는 중에 쓰러져서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앞서 1911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지휘자인 펠릭스 모틀이 역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오페라를 지휘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정말 별 일도 다 있다. 바그너 최대의 걸작인 '니벨룽의 반지'는 네편의 개별적인 오페라로 구성되어 있는 작품이다. 하루에 모두 공연할수는 없으므로 원래는 사흘에 걸쳐서 매일 한편 씩을 공연하도록 되어 있다. 모두 공연하면 15시간이 걸린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와는 성격이 다르다. 코미디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제외한 모든 오페라들은 줄거리가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독일, 스칸디나비아, 아이슬란드의 신화에서 스토리를 가져온 것이다. 바그너 오페라의 또 하나 특징은 대본을 작곡자 자신이 썼다는 것이다. 바그너는 그래야 완벽한 작품을 창조할수 있다고 말했다.


[바그너가 창조한 또 다른 것들] 바그너는 그의 음악에서 새로운 형태의 소리를 원했다. 그래서 새로운 악기를 디자인했다. 클라리넷이었다. 바그너는 작곡만 한 것이 아니었다. 여러 논문들도 썼다. 그중에는 정치에 대한 논문도 있다. 바그너는 당국에 의해 수배되었었다. 그래서 스위스로 피신했다. 그러나 바그너의 저술 중에서 그래도 가장 귀중한 것은 오페라에 대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당시의 극장들이 '니벨룽의 반지'를 무대에 올리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극장을 지었다. 바이로이트 극장(Bayreuth Festspielhaus)이었다. 바이로이트 극장에서는 바그너의 오페라만이 공연되도록 했다. 오늘날에도 매년 여름 바그너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 열린다. 티켓이 얼마나 귀한지 신청하고서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있다. 페스티발은 바그너의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다. 극장은 페스티발 기간 중에만 오픈한다. 바그너를 비롯해서 여러 사람들은 바이로이트 극장을 바그너 오페라의 신전으로 생각했다. 바그너는 그의 작품 중에서 '파르치팔'을 성스러운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파리치팔'은 바이로이트의 신전에서만 공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바그너 생애에 대한 몇가지 사항] 바그너는 청년시절에 정치운동에 관여한 일이 있다. 1848년 왕정을 반대하는 드레스덴 봉기에 참여했었다. 그때문에 당국의 수배를 받기까지 했다. 그래서 스위스로 도피했고 스위스에서 몇 년이나 지냈다. 바그너는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결혼하기 위해 첫 부인인 여배우 민나와 이혼하였다.


[바그너에 대한 불쾌한 사항들] 바그너는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친구를 고를 때에도 돈있는 사람들을 우선으로 삼았다. 그래야 돈을 빌릴수 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대단히 오만한 성격이었다. 그는 심지어 자기의 음악으로 세상을 구할수 있다고 생각했다. 별 생각을 다 했다. 바그너는 사치를 좋아했다. 물건을 사도 비싼 것만 샀다. 바그너는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빚이 많았다. 대부분 유태인들로부터 돈을 빌리고 갚지 못했다. 바그너는 유태인들이 독일 음악을 망치고 있다는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책도 썼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사랑했다. 바그너의 음악은 나치 독일의 음악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에서는 아직도 바그너의 음악을 금지하고 있다. 바그너의 유태인 혐오증 때문이다. 그리고 2차 대전 중에 나치가 수많은 유태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추가 1인]

○ Philip Glass(필립 글라스). 미국의 현대음악 작곡가이다. 그의 음악은 간혹 미니멀리스트(Minimalist)라고 불린다. 하지만 글라스 자신은 그런 용어를 싫어했다. 대신에 그는 자기를 '반복적 구조의 음악을 작곡하는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의 음악은 계속 반복되는 짧은 비트로 만들어졌다. 필립 글라스는 1937년 메릴랜드주의 볼티모어에서 태어났고 2018년 현재 아직도 활동중이다. [인기작품] 영화 '시간'(The Hours)의 음악. [대표작품] 12파트의 음악,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 '사티아그라하', '아크나텐', 바이올린 협주곡, 교향곡 3번. [더 알기] 그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백곡을 작곡했다. 다작의 작곡가이다. 그가 첫 작품을 발표하자 사람들은 미친음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작곡가로서 생활하기가 어려워서 배관공, 택시 기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그리고 작품발표회에는 언제나 무료입장을 해야 겨우 사람들이 왔다. 그는 자신만의 음악 그룹을 만들었다. '필립 글라스 앙상블'이었다. 자기의 작품을 일반 앙상블들은 연주하기를 꺼려하므로 단독의 앙상블이 필요했다. 작곡가로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영화음악을 많이 작곡했다. 기본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바탕을 둔 영화음악이었다. 그러나 그의 현대음악도 차츰 인기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에 빠진 사람들은 더 이상 고전음악을 들으려하지 않았다. 그는 여러 계층의 음악가와 교류하였다. 팝송 음악가들과 락 밴드와도 교류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