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비엔나의 매력

비엔나와 커피하우스

정준극 2018. 5. 28. 18:27

비엔나와 커피하우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비엔나의 커피하우스 문화


카페 센트랄. 19세기 말. 여성은 보이지 않는다. 여성이 커피하우스에 출입할수 있었던 것은 1856년 이후였다.


비엔나라고 하면 커피가 먼저 생각날 정도로 비엔나와 커피는 오랜 인연이 있다. 17세기에 터키로부터 유입된  커피는 어느 틈에 비엔나 사람들의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그로부터 비엔나 특유의 커피하우스 문화가 형성되었다. 실상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독일어로는 Das Wiener Kaffeehaus)는 독특한 비엔나 문화를 형성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한 기여 때문인지 비엔나의 커피하우스 문화는 2011년에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까지 했다. 다만, 그렇게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유네스코 본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유네스코(국가무형문화유산청)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하우스 문화가 유네스코의 우산 아래에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은 대단하고도 특별한 일이 아닐수 없다. 오스트리아 유네스코에 기록되어 있는 비엔나 커피하우스에 대한 설명을 보면 '시간과 공간이 소비되는 곳, 그러나 계산서에는 커피 값만 적혀 나오는 곳'이라고 되어 있다. 그럴듯한 설명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이것이야 공식적인 표현이지만 실제로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다른 곳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화려한 부다페스트의 카베하스(커피하우스)인 뉴욕. 1894년에 오픈했다. 부다페스트는 오랫동안 헝가리의 비엔나였다.


우선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는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만 볼수 있는 풍습과 전통이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커피하우스의 문화가 하나의 사회적인 관습으로 변천되었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독특한 용어들이 창조되었다. Obers(오버스)라고 말하면 크림을 의미한다. Schlag(슐라그)라고 하면 펀치를 뜻하기도 하지만 휘핑 크림을 말한다. Schlagobers(슐라그오버스)라고 하면 특별히 부드럽게 만든 휘핑 크림을 말한다. 크림을 마치 치즈 덩어리처럼 서브하면 이를 Gupf(구프)라고 부른다. 영어로는 Dollop(덜롭)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어떤 물건이던지 아담하고 귀여우면 단어의 끝에 -erl(에를)이라는 어미를 붙이기를 좋아한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도 애정어린 표현으로 -erl 이라는 어미를 붙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가하면 다이어트를 생각해서 커피나 음식의 양을 조금 적게 달라고 할 때에도 -erl 이라는 어미를 붙여서 주문한다. 그러면 웨이터들이 대체로 알아 듣는다. 예를 들어서 Kaffetscherl(카페체를)이라고 말하면 Kaffee를 애칭으로 부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커피의 양을 조금만 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반달모양의 빵인 Croissant(크와상)은 애칭으로 Kipferl(키페를)이라고 부른다. 비엔나 음식인 Schnitzel(슈니첼)을 애칭으로 부를 때에는 Schnitzerl(슈니체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물론 보통보다 적은 양의 슈니첼을 슈니체를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웨이터(Herr Ober)에게 주문할 때에 슈니체를이라고 말하면 알아 듣고서 조금 작은 사이즈의 슈니첼을 만들어 주는 곳도 있다.


카페 센트랄의 문을 밀고 들어가면 시인 페터 알텐버그의 모델이 마중을 한다. 페터 알텐버그는 카페 센트랄의 단골이었다.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또 하나 특징은 일반 식당처럼 음식도 서브한다는 것이다. 하기야 일반 커피하우스에서 토르테와 같은 간단한 먹을꺼리를 제공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비엔나의 웬만한 커피하우스에서는 애피타이저으로부터 시작하여 메인을 거쳐서 후식에 이르기까지 제대로의 식사가 서브된다는 것이다. 커피하우스와 식당을 겸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지만 나중에 설명키로 한다. 어떤 식사를 할수 있다는 말인가?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 서브되고 있는 메인 메뉴 몇가지만 소개한다. 카페 센트랄의 경우, Rosa gebratenes Hüfststeak(핑크 로스트 설로인 스테이크), Wiener Schnitzel(비너 슈니첼: 빵가루를 입혀서 튀긴 송아지 커틀렛), Tafelspitz(타펠슈피츠: 삶은 쇠고기), Geröstete Kalbsleber(구운 송아지 간), Faschiertes Labchen vom Waller(메기 리솔레), Rindsgulasch(쇠고기 굴라슈), Backhendl(빵가루에 튀긴 닭고기) 등이다. 식사는 서브하지 않는 커피하우스라고 하더라도 소시지라든지 이런 저런 디저트, 또는 케이크나 타르트 따위를 서브한다. 아펠슈트루델(Apfelstrudel), 밀리람슈투르델(Millirahmstrudel), 푼슈크라펜(Punschkrapfen), 린처 토르테(Linzer Torte) 등은 거의 모든 커피하우스에서 즐길수 있는 입맛꺼리이다.

              

커피하우스에서는 간단한 아침식사도 할수 있다. 사진에서 보는 의자들이 토넷 스타일의 의자들이다. 탁자는 대리석 테이블이다.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또 하나 특징은 여러 신문들을 마음대로 볼수 있다는 것이다. 멜랑즈 한잔 시켜 놓고 하루 종일 혼자 앉아서 신문만 읽고 있어도 나가라는 소리를 하지 않는 것이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풍경이다. 혼자서 자리를 차지하고 신문만 보고 있지만 종업원들은 마치 고객은 왕이라는 개념을 실현하듯 연신 글라스에 마실물을 부어준다. 고객을 최대로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것이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전통이다.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신문은 가히 국제적이다. 프랑스 신문, 독일 신문, 영국 신문, 이탈리아 신문....없는 신문이 없다. 한편,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일종의 전통적인 의식을 경험할수 있다. 연륜이 있는 커피하우스일수록 그렇다. 웨이터나 웨이트레스의 복장과 서브하는 행동에서도 일종의 격식을 느낄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커피 한잔을 서브하더라도 격식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면 '역시 비엔나에는 비엔나만의 커피하우스 문화가 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이러한 격식은 우아함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우아함이란 비엔나만의 특색인 아늑함(게뮈틀리히카이트: Gemütlichkeit)에서 발전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하기야 요즘에는 현대풍 때문에 고전적인 격조와 품위가 사라진 커피하우스도 많이 있지만 굳이 그런 격식을 존중하는 커피하우스도 아직 많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커피하우스에서는 신문들을 열심히 읽는다. 무슨 독서회와 같다.


연륜이 오래된 커피하우스의 모습에는 비슷한 점들이 있다. 탁자는 대체로 대리석으로 되어 있고 의자는 토넷(Thonet)의자이다. 토넷 의자란 19세기 오스트리아-독일의 가구 디자이너인 미하엘 토넷의 스타일로 만든 약간 고풍스러운 의자를 말한다. 그리고 커피하우스의 실내 디자인은 역사주의에 의한 것이 일반적이다. 여러 유명인사들이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분위기를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 있다. 예를 들어서 작가 슈테판 츠봐이크(Stefan Zweig)는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민주적인 클럽이다. 모든 사람에게 오픈되어 있는 곳이다. 누구나 앉아서 얘기를 나누고 글을 쓰고 카드놀이도 할수 있는 곳이다. 단골은 커피하우스를 통해서 우편물도 받을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별별 신문들이 다 준비되어 있어서 세상 소식을 쉽게 알수 있는 곳이 바로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이다'라고 말했다. 피아노 또는 바이올린을 연주해 주는 커피하우스들도 있다. 예를 들면 카페 프뤼켈(Cafe Prückel), 카페 센트랄 등이다. 날씨가 더운 계절에는 커피하우스의 앞 길거리에 탁자와 의자들을 놓는 집을 많이 볼수 있다. 노천카페이다. 이를 이 나라 사람들은 Schanigarten(샤니가르텐)이라고 부른다.


커피하우스의 샤니가르텐


파리나 런던의 커피하우스들도 그렇겠지만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19세기와 20세기에 가히 문학서클을 방불케 하는 곳이었다. 저명한 작가, 시인들, 그리고 여러 장르의 예술가들이 모여서 열띤 토론을 벌이는가 하면 커피하우스의 한 구석에 앉아서 직접 작품을 쓰며 지내던 곳이었다. 이렇게 해서 발표된 작품들을 '커피하우스 문학'(Kaffehaus Literatur)이라는 장르로 분류하였고 그런 시인들을 '커피하우스 시인'이라고 불렀다. 작가인 칼 크라우스(Karl Kraus: 1874-1936)가 주관하여 펴낸 Die Fackel(횃불)이라는 저널은 순전히 커피하우스에서 제작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커피하우스 시인으로 명성이 높았던 인물들로서는 극작가이며 작가인 아르투르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 1862-1931), 작가인 알프레드 폴가르(Alfred Polgar: 1873-1955), 체코 출신의 작가인 에곤 에르빈 키슈(Egon Erwin Kisch: 1885-1948), 펜네임이 프리드리히 칸토인 프리드리히 토르버그(Friedrich Torberg: 1908-1979) 등을 들수 있다. 시인이며 작가인 페터 알텐버그(Peter Altenberg: 1895-1919)는 단골 커피하우스인 카페 센트랄이 집주소였다. 편지에 '카페 센트랄의 알텐버그'라고 적으면 모두 배달되었다.


20세기의 전형적인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모습. 주로 신문들을 열심히 보고 있으며 토론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미하엘러플라츠에 있는 카페 그리엔슈타이들의 광경을 그린 것. 탁자는 대리석으로 만든것이고 의자는 토넷 의자이다.


비엔나에 커피가 전래된 이야기는 본블로그에서 여러번 언급했기 때문에 굳이 재탕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한번 짚어보고자 한다. 때는 1683년이었다. 오토만 터키의 대군이 비엔나 공성을 계속하고 있어서 비엔나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른바 제2의 비엔나 공성이다. 그때 폴란드의 얀 조비에스키 왕과 합스부르크의 다른 지원군이 비엔나 북쪽의 칼렌버그 산정에 집합하여 바야흐로 오토만 터키군을 급숩하여 물리치고 비엔나를 구출하려는 작전을 펼치고자 했다. 그리하여 폴란드와 합스부르크 연합군은 비엔나 북쪽의 칼렌버그로부터 대공세를 펼쳐 터키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연합군이 터키군이 머물던 진영을 둘러보던 중에 여러개의 푸대자루를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낙타의 사료인줄 알고 모두 태워버리려고 했다. 그러는데 예르치 프란치체크 쿨치츠키(Jerzy Franciszek Kulczycki)라는 사람이 얀 조비에스키 왕에게 그 자루들을 태워버리지 말고 달라고 요청했다. 쿨치츠키는 비엔나측의 정보원으로 터키군에 잠입하여 여러 정보를 수집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터키군이 콩과 같은 열매를 볶아서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을 보았던 터여서 자루 속에 든 것이 커피공인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버리지 말고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4구 콜쉬츠키가쎄와 화보리텐가쎄의 모퉁이에 설치되어 있는 예르치 프란치체크 쿨치츠키 기념상. 커피를 서브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의 이름은 독일어로는 게오르그 프란츠 콜쉬츠키라고 한다. 


쿨치츠키는 폴란드-합스부르크 연합군이 비엔나 인근에 도착하여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위험을 무릅쓰고 비엔나에 잠입하여 전하였다. 비엔나 시민들과 병사들은 지칠대로 지쳐서 터키군에게 항복할 생각까지 했으나 쿨치츠키의 소식을 듣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텨서 결국은 조비에스키 연합군이 터키군을 몰아낼 때까지 기다려서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쿨치츠키는 그러한 공로로 비엔나에서 처음으로 커피하우스를 개설하는 권리를 얻었다. 쿨치츠키에 의한 비엔나 최초의 커피하우스는 지금의 돔가쎄 모차르트 하우스 인근에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한 내용이 기록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가톨릭 성직자인 고트프리트 울리히라는 사람이 1783년에 그의 저서인 '2차 터키 공성사'(History of the Second Turkish Siege)에서 비로소 밝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 쿨치츠키 전설에 살이 붙여졌다. 쿨치츠키가 커피에 설탕과 밀크를 넣어서 서브하기 시작했고 그렇게해서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비엔나커피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 대한 쿨치츠키의 공로를 기억하여서 아직도 비엔나의 이러저러한 커피하우스에 가서 보면 쿨치츠키의 초상화가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볼수 있다. 비엔나 4구의 콜쉬츠키가쎄(Kolschitzkygasse)는 쿨치츠키를 기념하여서 붙인 거리이름이다. 콜쉬츠키가쎄와 화보리텐슈트라쎄가 만나는 곳에 있는 건물에는 쿨치츠키가 커피를 서브하는 모습의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그런데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쿨치츠키는 2년이나 오토만 터키군의 포로로 지냈는데 이때 커피에 대한 것을 잘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비엔나에 커피하우스가 처음 생긴 때를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이 있었던 다음 해인 1684년이라고 믿었으나 최근의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비엔나에서 커피하우스가 처음으로 오픈한 것은 그로부터 1년 지나서인 1685년 아르메니아의 상인인 요한네스 디오다토(Johannes Diodato)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년 후에는 그리스 사람들이 오픈한 커피하우스가 몇군데에 생겨나서 인기를 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4구의 요한네스 디오다토 파르크는 요한네스 디오다토를 기념하는 지명이다.


콜쉬츠키가 비엔나에 처음 오픈한 커피하우스인 블루 보틀의 광경. 그림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전성기는 세기말일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한다하는 문화예술가들이 비엔나의 커피히우스 문화를 새로 조각하던 때였다. 작가와 시인들이 커피하우스의 문화를 주도해 나갔다. 페터 알텐버그, 알프레드 폴가르, 칼 크라우스, 허만 브로흐, 프리드리히 토르버그 등등이다. 예술가, 과학자, 정치가들의 커피하우스 사랑도 빼놓을수 없다. 아르투르 슈니츨러, 슈테판 츠봐이크, 에곤 쉴레, 구스타브 클림트, 아돌프 로스, 테오도르 헤르츨, 알프레드 아들러, 그리고 심지어는 레온 트로츠키까지 커피하우스 파트론이었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의 우산 아래에 있는 나라들에서도 비엔나 커피하우스 스타일이 만연하게 되었다. 프라하, 부다페스트, 크라코브로부터 르비브에 이르기까지 비엔나의 커피하우스가 기세를 올렸다. 그러다가 전후인 1950년대에 이르러서 우아했던 비엔나 커피하우스 문화가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전통이 있는 커피하우스들이 하나 둘씩 문을 닫았다. 이유는 크게 두가지이다. 텔리비전 문화가 안방을 차지했기 때문이며 또 하나는 현대적인 커피집들이 우후 죽순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맥도날드가 비엔나에 상륙해서 어메리칸 스타일의 커피를 제공하기 시작했으며 얼마 후에는 스타벅스가 상륙했다. 이제 비엔나 특유의 커피하우스들은 명색을 잃어가고 있게 되었다. 그래도 전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비엔나에서도 유명한 몇몇 전통적인 커피하우스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다. 미국에서 비엔나 스타일의 커피하우스가 속속 개장되고 있다는 것이다. '율리우스 마이늘 시카고', '카페하우스 드 샤티용, 시애틀', '카페 자바르스키, 맨하튼' 등이다.


카페 콘디토라이인 아이다. 케른트너슈트라쎄


- 아이다(Aida). 전통적인 비엔나 커피와 파스트리를 서브하는 체인으로 비엔나의 여러 곳에 자리잡고 있다. 가장 유명한 곳은 슈테판스돔에서 캐른트너슈트라쎄로 올라가는 쪽에 있는 아이다일 것이다.

- 카페 브로이너호프(café Bräunerhof). 슈탈부르크가쎄 2번지에 있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한 작가 토마스 베른하르트(Thomas Bernhardt: 1931-1989)의 단골 카페였다.

- 카페 센트랄(café Central). 헤렌가쎄 14번지의 팔레 페르스텔에 자리잡고 있다. 시인 페터 알텐버그의 단골 카페였다.

- 카페 데멜(café Demel). 콜마르크트 14번지이다. 뛰어난 케이크로 유명하다. 전통있는 비엔나 커피하우스와는 조금 차이가 난다.

- 카페 그린슈타이들(café Griensteidl). 미하엘러플라츠 2번지이다. 레온 트로츠키를 비롯해서 당대의 시인묵객들이 자주 드나들었던 카페이다.

- 카페 하벨카(café Hawelka). 도로테어가쎄 6번지이다. 비엔나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카페이다.

- 카페 란트만(café Landmann). 우니페어지태츠링 4번지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단골 카페였다.

- 카페 뮤제움(café Museum). 오페른가쎄 7번지이다. 카페 박물관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 카페 자허(café Sacher). 필하르모니커슈트라쎄 4번지, 호텔 자허 내에 있다. 슈타츠오퍼의 바로 뒷편에 있기 때문에 음악인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 카페 슈봐르첸버그(café Schwarzenberg). 캐른트너 링 17번지이다. 슈봐르첸버그플라츠에 있다.

- 카페 슈페를(café Sperl). 굼펜도르퍼슈트라쎄 11번지이다.

- 카페 프뤼켈(café Prückel). 슈투벤 링 24번지이다.

- 카페 알트 빈(café Alt Wien). 배커슈트라쎄 9번지이다. 아방 갸르드 예술활동도 펼쳐지는 곳이다.


카페 프뤼켈. 피아노 연주가 있어서 매혹적인 곳이다.


[비엔나 커피하우스 약사]

비엔나 커피하우스는 이런 저런 사연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커피하우스가 비엔나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1683년 이후에 처음 생겨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는 이미 12세기에 커피 하우스가 하나도 아니고 여럿이나 오픈되어서 영업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비엔나보다 무려 5백여년이나 앞선 것이다. 메카의 커피하우스는 중동이니까 예외로 치고, 그렇다면 유럽에서는 어느 곳에 커피하우스가 가장 먼저 생겼을까? 기록에 의하면 베니스에 1647년에 문을 열었다고 되어 있다. 비엔나보다 거의 40년이나 앞선 것이다. 런던도 비엔나보다 먼저 커피하우스를 열었다. 1650년에 첫 커피하우스가 생겼고 이어 1652년에 또 다른 커피하우스들이 문을 열었다고 되어 있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쿨치츠키에 의해서 1684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어떤 학자들은 1683년에 첫 커피하우스가 생겼다고 말했으나 별 차이는 없다. 이렇듯 비엔나는 커피하우스의 선구자가 아니지만 역사의 흐름과 함께 비엔나가 세계의 다른 어느 곳보다도 커피하우스 전통을 만들어간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비엔나라고 하면 비엔나 커피 또는비엔나 커피하우스를 우선 생각나게 만들었다.


16세기경 이슬람 국가의 커피하우스. 이스탄불


비엔나에 커피가 처음 도입된 시기를 1683년으로 산정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오토만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의 일이다. 비엔나 시민인 게오르그 프란츠 콜쉬츠키(1640-1694)가 비엔나 공성 때에 영웅적인 활동을 해서 황제로부터 커피점을 개설할수 있는 인가를 받았다는 얘기는 이미 했기 때문에 생략코자 한다. 그후에 비엔나의 커피하우스 문화가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지를 소개코자 한다. 우선 신문에 대한 사항.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 각종 신문을 구비하여서 손님들이 마음대로 읽게 한 것은 1720년, 1구에 있었던 크라머셰스 카페하우스(Kramersches Kaffehaus)가 처음이었다. 그 후로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 따듯한 음식과 주류도 판매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라고 한다. 나폴레옹 유럽에서 말을 듣지 않는 나라들에게 타격을 주기 위해서 경제봉쇄작전을 펼쳤다. 그러자 나폴레옹과 전투를 하는 나라들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도 그 중의 하나였다. 자연히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들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아야 할 형편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카페+식당이라는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서 커피하우스에서 음식도 팔아 겨우 유지할수 있었다. 나폴레옹이 쇠락해지고 1814-15년에 비엔나에서 '비엔나 회의'가 열릴 때에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다시 활기를 찾게 되었다. 그후 비더마이어 시기에는 비엔나의 커피하우스가 유럽에서도 가장 문화적이고 우아한 커피하우스로서 인식되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른 도시에서도 비엔나 커피하우스를 모델로 삼은 커피하우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프라하, 자그레브, 베로나, 트리에스테, 베니스 등지에서 비엔나 스타일의 커피하우스들이 문을 열었다. 비교적 넓은 공간, 빨간 비로도 의자, 웅장할 정도로 아름다운 샹들리에...이런 것들은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1856년부터는 여성도 커피하우스를 이용할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캐쉬어만이 커피하우스의 유일한 여성이었다.


카페 센트랄. 달콤한 케이크가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는 문학카페였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에서는 커피하우스 문학이란 별도 장르의 문학이 발전하였다. 여러 커피하우스 중에서도 중심이 되었던 곳은 호프부르크 정문 앞 광장인 미하엘러플라츠에 있는 카페 그린슈타이들(café Griensteidl)이었다. 1890년대부터 이 커피하우스에 문화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들을 이른바 '젊은 비엔나'(Jung Wien)이라고 불렀다. 후고 폰 호프만슈탈, 칼 크라우스, 아르투르 슈니츨러 등 젊은 작가들이 그린슈타이들에 연락처로 삼아서 모여 토론을 하고 작품을 구상했다. 카페 그린슈타이들에 이어 프라이융의 카페 센트랄(café Central)에도 문화예술가들이 단골로 모이기 시작했다. 청년 작가들은 헤렌가쎄 10번지에 있는 카페 헤렌호프(café Herrenhof)에서 자주 모였다. 화가들이 자주 모였던 카페는 카페 무제움(café Museum)이었다. 카페 무제움은 커피하우스 박물관이 아니라 미술사박물관 인근에 있기 때문에 그런 명칭이 되었다.  문화예술인들은 작고 좁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보니 이들은 넓고 아늑한 커피하우스를 사랑방처럼, 또한 제2의 집처럼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편, 1차 대전이 끝난후에는 비엔나에도 댄스 카페라는 것도 생겼다. 주로 어메리칸 재즈를 연주하고 춤들을 추었다. 1930년대에 극심한 경제공황을 겪을 때에는 커피하우스가 상품의 거래장소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주로 암거래였다.


미술사박물관 인근에 있는 커페 무제움. 세기 말에 젊은 화가들이 자주 모이던 곳이었고 지금도 그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가 한때 당국에 의해 수난을 당했던 일이 있었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강제합병하고 나서 커피하우스 중에서 유태인들이 운영하는 커피하우스들을 파괴하고 폐쇄하였던 것이다. 주로 유태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2구 레오폴드슈타트에서 그랬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커피하우스들은 유태인 지식인들과 문화예술가들의 제2의 집이었다. 오늘날에도 레오폴드슈타트에는 세기말의 비엔나 커피하우스의 전통을 이어가려고 하는 카페들이 여럿이나 있어서 그나마 위로를 주고 있다. 예를 들면 페트 운트 추커(Fett und Zucker), 울만스 추커배커라이(Ullmann's Zuckerbackerei), 바서비제(Wasserwiese), 룩소르(Luxor), 카페 드라이라움(café Dreiraum) 등이다.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들은 2차 대전 후인 1950년대에 또 한번의 위기를 겪었다. 이탈리아 스타일의 에스프레소 바들이 점차 인기를 끌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엔나의 전통 커피하우스들은 운영난을 겪어야 했다. 특히 새로운 패션을 선호하는 젊은 층들은 전통의 커피하우스를 낡은 세대의 것이라고 하면서 등한시했다. 비엔나의 젊은이들은 어느틈엔가 맥도날드나 버거킹, 그렇지 않으면 스타벅스의 커피 맛에 입맛이 길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1980년대에 이르러서는 오랜 연륜의 전통을 지닌 비엔나 특유의 커피하우스들이 하나둘씩 문을 닫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러면 안되겠다는 일종의 자각심이 생겨났다. 1983년에 비엔나의 커피하우스들은 창설 3백주년을 기념하였다. 이와 함께 복고풍의 커피하우스를 사랑하는 일종의 캠페인이 벌어졌다. 사람들의 사랑을 다시한번 받게 된 것이다. 그래서 2011년에는 비엔나의 커피하우스가 오스트리아 유네스코의 문화유산으로 선정되기까지 했다.


임페리알 호텔의 카페. 제국의 영화를 맛볼수 있다.


ü ö ä Ö caf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