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반시치나(Khovanshchina) - 국민적 음악드라마(National Music Drama)
코반스키 사건(The Khovansky Affair) 또는 코반스키 봉기(The Khovansky Rising)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의 미완성 5막 대서사시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러시아의 민족오페라, 또는 국민주의 오페라는 웅장하고 화려하다. 또한 멜로디, 리듬, 하모니에 있어서도 슬라브적인 독특한 매력이 있다. 서구의 나라들과는 색채가 다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옛 전설이나 역사를 내용으로 삼은 오페라에서 더욱 그러하다. 러시아의 그랜드 오페라들이다. 글링카의 오페라가 그러하고 보로딘의 오페라가 그러하다. 그리고 무소르그스키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페라들이 그러하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서 러시아의 작곡가들은 민족적 의식을 가지고 러시아 민족의 고유한 특색을 음악에 담고자 노력했다. 관현악곡인 '민둥산의 하룻밤' 또는 '전람회의 그림'으로 유명한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도 그 시대의 다른 작곡가들처럼 오페라에 있어서 러시아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무소르그스키는 특히 러시아의 역사에 바탕을 둔 오페라를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그렇게하여 나온 것이 저 유명한 '보리스 고두노프'이며 '호반시치나'이다. 그런데 '호반시치나'는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호반시치나'는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882년에 완성하였다. 림스키 코르사코프 버전은 1886년 모스크바에서 초연되었다. 1886년이라고 하면 구한말 우리나라에 신교육의 요람인 배재학당이 지금의 중구 정동에 정식으로 문을 열어 학생들에게 신학문을 교육하기 시작한 해이다.
이반 호반스키 역의 베이스 아나톨리 코체르가(Anatoli Kotscherga). 2012.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호반시치나'(영어로는 코반스키)는 무소르그스키의 종전 오페라인 '보리스 고두노프'와 마찬가지로 제정러시아의 역사적 사건에소 소재를 가져온 작품이다. 무소르그스키가 '호반시치나'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평론가 친구인 블라디미르 스타소프의 조언이 컸다. 그 사건이란 이반 호반스키(코반스키) 공자가 섭정이 소피아 알렉세예브나와 두 어린 짜르들, 즉 나중에 페터 대제라고 부르게 된 짜르 페터와 페터와 함께 공동으로 짜르의 자리에 오른 이반 5세가 러시아를 서구화하기 위해 개혁코자 하자 이에 반대하여 그를 추종하는 모스크바의 스트렐치(Streltsy)와 정교회의 구신도들(Old Believers)의 세력과 합세하여 봉기를 했던 것을 말한다. 스트렐치는 소총수라는 뜻인데 16-18세기에 러시아가 자랑하는 엘리트 보병부대를 말한다. 스트렐치는 공포의 이반(Ivan the Terrible)이 창설했다. 그리고 구신도(올드 빌리버)들이란 동방정교회의 신도들로서 오랜 전통의 전례와 의식을 고수하는 무리들을 말한다. 동방정교회의 전례와 의식은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소모적이어서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니콘이 개혁에 착수하였으나 구신도들의 반발이 극심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인들은 구신도들을 라스콜(Raskol)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분열을 의미한다. 즉, 개혁을 한다면 동방정교회에서 떨어져 나가겠다는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명예를 중시하는 스트렐치 병사들과 전통을 중시하는 구신도들은 당시의 짜르인 페로도르 3세가 여러 부문에서 개혁을 추진코자 하자 이를 반대하여 1862년에 과감히 봉기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의 봉기에는 페오도르 3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페오도르 3세의 누이인 소피아가 그의 어린 두 아들을 공동 짜르로 만들고 자기는 섭정에 오르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스트렐치와 구신도들을 부추켜서 봉기를 일으켰다고 보면 된다. 그 봉기를 후원하고 지지한 사람이 평소에 소피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이반 호반스키 공자였다.
노보데비치 수녀원의 한 방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소피아 섭정의 모습
우리는 과거에 소련이 잔학한 공산주의 국가였고 더구나 6.25 전쟁 때에 북한을 지원하여서 우리나라에 한없는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소련을 증오 내지 기피하였다. 때문에 소련의 역사, 종교, 문학, 예술에 대하여도 일부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다. 러시아라는 대국을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러시아의 오페라를 통해서 러시아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호반시치나'를 공부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수 없다. 반복하는 얘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설명하자면, 1645년부터 1676년까지 무려 31년 동안 러시아는 짜르 알렉시스 1세가 통치하였다. 알렉시스 1세는 첫번째 짜리차(황비)인 마리아 밀로슬라브스카야에게서 두 자녀를 두었다. 큰딸 소피아와 큰 아들 표도르(페오도르)였다. 알렉시스 1세는 두번째 짜리차인 나탈랴 나리시키나로부터 아들 페터와 딸 나탈랴와 테오도라를 두었다. 알렉시스 1세가 1676년에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다음 짜르의 자리는 당연히 큰 아들인 표도르에게 돌아갔으니 그가 표도르 3세이다. 표도르 3세는 러시아의 서구화를 시도하였으나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682년에 5월 7일에 21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후계자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래서 표도르의 동생들인 이반이 다음 짜르가 되는 것은 당연한데 아버지 표도르 3세가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도 무슨 사연으로 짜리차의 자리에서 물러난 마당에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없었다. 반면에 바로 아래의 이복 동생인 페터에게는 생모가 짜리차의 신분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과연 이반과 페터 중에서 누구를 다음 짜르로 삼느냐는 것이 문제였으나 다행히 타협안이 마련되어서 이반과 페터 모두 짜르로 삼기로 했다. 다만, 이반과 페터 모두 어리기 때문에 페터의 어머니인 나탈랴가 섭정을 맡았다. 그때 이반은 이반 5세로서 16세였고 페터는 페터 1세로서 10세였다.
전형적인 스트렐치(소총수부대) 병사들의 모습. 페터 1세의 여동생인 나탈랴는 페터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서구화 개혁을 지지하였다. 나탈랴는 러시아 남자들이 수염을 부수룩하게 기르는 것을 금지하는 제도를 처음으로 추진하였다.
섭정이 된 나탈랴는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계부 마트베예프를 유배에서 풀어 짜르의 자문관이라는 직위를 주어서 측근으로 삼았고 남동생 두명도 고위직으로 임명하여 세도를 누리게 했다. 그러나 화무십일홍이었다. 나탈랴가 섭정이 된지 열흘도 못되어서 스트렐치의 반란이 일어났다. 나탈랴의 계부로서 짜르의 자문관인 마트베예프와 나탈랴의 두 동생은 반란군의 손에 살해되었고 나탈랴의 친부인 나리시킨은 강제로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승이 되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나탈랴는 당장 섭정의 자리에서 쫓겨났고 이반의 누이인 소피아가 섭정이 되었다. 이때에 선대 짜르였던 알렉시스의 충복이었고 그 다음 표도르 3세 때에도 고관이었던 이반 호반스키가 스트렐치를 부추켜서 봉기를 지원하였고 소피아가 섭정이 되는 것도 지지하였다. 다만, 호반스키는 일반 페터도 이반과 함께 짜르가 되었으므로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그해 가을에 구신도들이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니콘의 개혁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며 시위를 하였다. 구신도들은 섭정인 소피아가 니콘 총대주교의 개혁을 지지하고 있다고 하면서 반대의 화살을 소피아 쪽으로 돌렸다. 소피아로서 더 곤란했던 것은 한때 동맹이었던 스트렐치가 등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호반스키는 5월의 봉기에서 소피아를 도왔으나 그로부터 반년쯤 지나자 스트렐치를 등에 업고 소피아를 섭정의 다리에서 내려앉도록 했다. 이어 스트렐치는 이반 호반스키를 섭정으로 앉혔다. 소피아는 은인자중하며 재기의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몇년이 지난후 모스크바 스트렐치의 새로운 사령관이 된 샤클로비티의 지원을 얻어 마침내 섭정의 자리를 다시 차지했다. 소피아는 호반스키를 비롯한 추종자들(이들을 호반시치나라고 불렀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소피아에 의해 반란세력이 와해되자 반란의 중심에 있었던 구신도들은 집단 자살을 택하였다(집단 자살을 했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지만 최소한 오페라에서는 그러한 내용으로 설명되었다.) 그러는 중에 페터가 성년이 되자 계몽군주였던 그는 섭정을 폐지하였다. 소피아는 노보데비치 수녀원에 들어가서 남은 생애를 보내다가 1704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였다. 소피아가 아버지인 알렉시스 1세와 마찬가지로 46세에 세상을 떠난 것을 생각하면 우연의 일치인듯 싶다. 페터 대제, 소피아 섭정, 표도르 3세, 알렉시스 1세 등등의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으므로 이만 줄인다.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호반시치나'의 스토리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두었지만 실은 여러 파트에서 내용의 차이가 있으니 양지하기 바란다.
소피아 섭정이 생애의 마지막을 보낸 노보데비치 수녀원
미완성인 '호반시치나'를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1882년에 완성했다. 무소르그스키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파트를 삭제했고 또한 새로 작곡해 넣은 부분이 많아서 무소르그스키의 오리지널리티가 상실되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버전은 1886년 2월 21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되었다. 이어 1893년에는 러시아오페라협회가 주관하여 다시한번 공연되었다. 쇼스타코비치가 1959년에 무소르그스키의 보컬 스코어를 바탕으로 새로운 버전을 만들었다. 오늘날 공연되고 있는 '호반시치나'는 대체로 쇼스타코비치 버전이다. 그보다 앞서서 1913년에 파리에 있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모리스 라벨과 함께 발레 루스의 설립자이며 임프레사리오인 세르게이 댜길레프(Sergei Diaghilev)의 요청에 의해서 별도로 편곡한 '호반시치나'를 완성했다. 그런데 스트라빈스키-라벨의 스코어는 불행하게도 분실되어서 어떤 내용인지 확실히 알수가 없다. 다만, 스트라빈스키의 피날레만이 남아 있는데 오늘날 간혹 연주되고 있기도 하다. 오페라 '호반시치나'는 1682년의 모스크바 봉기와 몇 달후의 호반스키 스캔들을 다룬 것이지만 중점 주제는 페터 대제가 아직도 어린 시절에 진보주의자들과 보수적인 정치 집단과의 투쟁에 두었다고 볼수 있다. 또한 페터 대제의 서구화 정책으로 인하여 구시대적인 모스크바 기득권층이 서서히 사라져가고 있음도 주제로 삼았다. 대본은 무소르그스키 자신이 작성했다. 모스크바 초연은 1897년 러시아사립오페라단에 의해 솔로도브니코프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그후 1910년에 모스크바에서, 1911년에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각각 리바이발되었다.
구신앙 신봉자로서 빨치산 운동을 감행했던 페오도시아 모로초바가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가고 있는 장면의 그림. 모로초바는 체포되어 가면서도 두손으로 하늘을 가르키며 옛 신앙을 포기하지 말기를 바랬다. 모로초바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숨을 거두었다. 구신앙 신봉자들(올드 빌리버스)는 모로초바를 첫 순교자로 간주하고 있다.
'호반시치나'가 파리에서 선보인 것은 1913년이었다. 샹젤리제극장에서였다. 세르게이 댜길레프의 제작이었다. 이때에는 스트라빈스키-라벨의 버전이 무대에 올려졌다. 파리 공연에서는 도시페이의 역할을 러시아의 국보급 베이스인 표도르 샬리아핀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샬리아핀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오케스트라 버전이 아니면 도시페이를 맡지 못하겠다고 나섰다. 제작자인 댜길레프는 도시페이의 노래 부분만 림스키 코르사코프가 오케스트레이션한 것을 사용토록 했다. 이러한 하이브리드는 별로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저러나 그때의 스코어는 분실되어서 어떤 내용인지는 확실히 알수가 없다. 다만,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스트라빈스키-라벨의 버전에서는 피날레 파트의 음악만이 보존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 부분만이 1914년에 출판되었다. 오늘날 간혹 쇼스타코비치의 버전이 공연될 때에 피날레 파트만은 스트라빈스키가 만든 것으로 대체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1989년 비엔나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휘로 공연되었을 때였다. 영국 초연은 1913년이었다. 왕립 드러리 레인극장에서였다. 뉴욕 초연은 한참 후인 1931년이었다. 쇼스타코비치 버전이 처음 무대에 올려진 것은 1960년 11월 키로프 극장에서였다. '호반시치나'가 메트로폴리탄에 도착한 것은 1950년이었다. 물론 1919년 초반에 '호반시치나'의 발췌곡이 연주회 형식으로 소개되기는 했지만 메트 초연은 우리나라에서 북한 공산당에 의한 남침이 자행되어 수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당했던 1950년이었다. 메트 초연에서 마르파 역은 소프라노 리제 스티븐스(Rise Stevens)가 맡았고 로펜스 티베트가 이반 공자를, 제롬 하인스가 도시페이를 맡았다. 모두 영어 대사였다. 1950년도 메트의 '호반시치나' 공연은 4회로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35년이 지난 1985년에야 다시 볼수 있었다. 러시아어 대사였다. 러시아 오페라단의 메트 방문공연도 이루어졌다. 2007년에는 웰쉬 내셔널 오페라가 웨일스와 잉글랜드에서 공연하였고 바이에른 슈타츠오퍼는 뮌헨에서 공연하였다. 메트에서의 최근 공연은 2012년이었다. 오거스트 에버딩에 의한 새로운 제작이었다. 무대 설계는 상하이 출신의 밍 초 리(李名覺)였다. 쇼스타코비치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사용한 공연이었다.
메트로폴리탄 공연의 피날레. 구신도들이 스스로 불속에 뛰어드는 장면이 연출되었다.
반복되는 얘기지만 표도르 3세(1661-1682)가 병약하여서 부실하여서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나자 후계 문제로 혼란이 일었다. 표도르의 첫번째 부인인 아가피아는 표도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가 개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러시아 남자들의 덥수룩한 수염을 깍아서 말끔하게 보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아가피아였다. 짜리차인 아가피아는 1681년 7월에 아기씨를 생산하였다. 다음 황위 계승자였다. 아가피아는 출산 후유증으로 출산 3일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짜레비치(왕자)인 일리야는 태어난지 7일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로부터 7개월후인 1682년 2월에 표도르는 마르파 아프락시나와 재혼하였다. 표도르는 마르파와 결혼한지 3개월 후인 5월 7일에 세상을 떠났다. 아무런 후사도 남기지 못했다. 짜르 표도르 3세의 갑작스런 죽음은 곧바로 5월 15일의 모스크바 봉기의 불을 지피는 것이 되었다. 표도르의 동생인 이반과 이복 동생인 페터과 공동 짜르로서 즉위하였다. 이반은 16세였고 페터는 10세였다. 이들의 누이인 소피아가 섭정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은 누차 설명한바 있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이반 호반스키 공자의 지지가 컸다. 그러다가 얼마후 소피아는 이반 호반스키를 외면하고 대신 강력한 세력의 궁신이며 진보적인 정치인인 바실리 골리친 공자와 손을 잡았다. 얘기에 의하면 소피아와 골리친은 연인관계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부티 오페라 '호반시치나'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무스르그스키는 '호반시치나'를 1782년부터 작곡에 착수하여 8년 후인 1880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881년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는 제정러시아 시대였고 당국은 어떤 공연작품이던지 로마노프 왕조의 인물들을 등장시키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래서 무소르그스키는 제정러시아의 황실을 상징하는 여러 심볼들에 신경을 써야 했고 주인공들에 대하여도 간접적으로 언급하는 것으로서 검열을 피하고자 했다. 어쨋든 그리하여 사실상의 주인공들인 소피아, 이반, 페터는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호반시치나'의 가장 중심되는 주제는 1막의 합창에 나타나 있다. '그대 모국 러시아의 백성들에게 화있을 진저'(Woe to thee native, Mother Russia)이다. 러시아가 외세의 침략으로 피흘리고 고통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적인 문제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이 때에 러시아는 세갈래의 내전을 겪고 있었다. 그 내전은 무려 12년 간이나 계속된 참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내전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었다. 세 갈래라는 것은 짜르의 황실, 친위대인 스트렐치, 정교회의 구신앙 신봉자 그룹을 말한다. 짜르의 황실은 서구화를 지향하였다. 서유럽의 나라들처럼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가 진흥되려면 그들의 경험과 지식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백성들은 원래 게을러서 그런지 또는 지나치게 수구적이어서 그런지 아무튼 서구화 또는 개혁을 좋아하지 않았다. 러시아 군부의 엘리트라고 하는 친위대 성격의 스트렐치가 우선 개혁을 반대하였다. 이들은 무조건적으로 이반 호반스키를 추종하였다. 호반스키는 짜르의 황실과 의견을 달리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스트렐치가 짜르의 황실과 마찰을 빚을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구신앙 신봉자들(올드 빌리버스)에 대한 것이었다. 이들은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정교회의 전례의식을 개혁코자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여 정부가 후원하는 정교회를 떠났다. 구래서 이들을 분열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은 짜르 계승에 대하여도 정당치 못하게 되었다면서 반발하였고 정교회의 러시아 총대주교도 인정할수 없다고 내세웠다. 이들의 리더가 도시페이였다. 그런데 페터 대제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러웠던 것은 스트렐치와 올드 빌리버스가 서로 비난하고 적대시하였다는 것이다. 스트렐치는 난폭하고 야비하며 퇴페적인데 반하여 올드 빌리버스는 금욕주의적이며 경건한 신앙생활을 지향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페라에서는 이 세 계층이 각가 자기들이야말로 러시아 내부에 자리잡고 있는 적에 대항하는 '진정한 러시아'라고 내세웠다. 이반 호반스키는 적법한 황족이며 러시아를 위해 용감하게 싸운 용사라는 점을 내세웠다. 도시페이는 종교를 내세웠고 샤클로비티는 짜르 페터를 지지하였다.
스트렐치와 백성들이 이반 호반스키를 지지하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소피아, 이반, 페터 등은 나오지 않는다.
- 이반 호반스키 공자(Prince Ivan Khovansky: B). 스트렐치의 수장. 알렉세이 1세 치하때부터 보야르로서 높은 직위의 귀족이었다. 스트렐치는 짜르의 친위대라고 할수 있다. 엘리트 부대이다.
- 안드레이 호반스키 공자(Prince Andrey Khovansky: T). 이반 호반스키의 아들. 개신교인 독일 처녀를 사랑하고 있다.
- 바실리 골리친 공자(Prince Vasily Golitsin: T).
- 도시페이(Dosifei: B). 구신앙 신봉자들의 지도자. 구신앙 신봉자들은 시스마틱스(Schismatics)라고 불렀는데 분리주의자라는 뜻이다. Old Believers 또는 Old Ritualists 라고 불렀다. 러시아어로는 스타로베리(Starovery)라고 했다.
- 보야르 표도르 샤클로비티(Boyar Fyodor Shaklovity: B-Bar). 보야르는 짜르 다음가는 높은 위상의 귀족을 말한다. 모스크바 스트렐치의 새로운 수장이다.
- 마르파(Marfa: MS). 구신앙 신봉자로서 예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소르그스키는 마르파를 콘트랄토가 맡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메조소프라노가 맡았다.
- 수잔나(Susanna: S). 나이 많은 구신앙 신봉자.
- 엠마(Emma: S). 러시아에 이주해서 살고 있는 독일인 구역의 처녀. 안드레이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 목사(Pastor: Bar). 독일 루터교 목사.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독일인 마을의 루터교 목사이다.
- 바르소노프예프(Varsionofyev: Bar). 바실리 골리친 공자의 하인. 원래는 베이스가 맡는 것으로 되어 있다.
- 쿠즈카(Kuzka: T). 총사. 스트렐레츠(Strelets)
- 스트레쉬네프(Streshnev: T). 보야르(귀족)
마르파 역의 메조 소프라노 올가 보로디나. 메트로폴리탄
시놉시스를 시작하기 전에 이 오페라는 어떤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는지를 작곡자의 설명으로 소개한다.
[1막]
1. 전주곡: 모스크바 강에 새벽이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
2. 스트렐치들의 대화, 스트렐치의 한 사람인 쿠즈카의 노래
3. 서기인 스크리베의 도착. 샤클로비티가 서기에게 호반스키에 대한 탄핵 조항을 조목조목 열거하면서 받아 적도록 지시
4. 군중들이 등장하여 서기에게 포고문을 어서 읽으라고 요청
5. 이반 호반스키가 스트렐치와 함께 등장
6. 엠마, 안드레이, 마르파의 등장
7. 이반 호반스키가 엠마를 보고 욕망을 품는다. 호반스키가 돌아가고 도시페이가 등장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신앙적이지 못하다면서 책망한다.
8. 도시페이의 탄식
도시페이. 일다르 아브도라차코프. 메트로폴리탄
[2막]
1. 골리친이 소피아가 보낸 편지를 읽다
2. 골리친이 그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를 읽다
3. 골리친과 루터교 목사
4. 마르파의 예언점
5. 이반 호반스키의 도착. 말다툼
6. 도시페이의 도착
7. 마르파가 돌아가고 샤클로비티가 등장한다
8. 엔딩에 대한 설명을 적어 놓지 않았다.
샤클로비티와 하인. 메트로폴리탄
[3막]
1. 구신앙 신봉자들의 합창
2. 마르파의 노래
3. 마르파와 수난나의 대면
4. 도시페이의 관여와 마르파의 고해
5. 샤클로비티의 아리아
6. 스트렐치의 등장
7. 스트렐치의 부인들이 남편들이 술만 퍼마시는 것을 비난한다
8. 쿠즈카의 축하
9. 스크피브가 도착하여 짜르 페터가 스트렐치를 공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10. 스트렐치가 이반 호반스키에게 항의한다. 호반스키는 짜르 페터와 대적키로 결정한다
마리인스키 무대
[막간]
1. 집에 돌아온 이반 호반스키를 식구들과 하인들이 영접한다
2. 페르시아 여노예들이 이반 호반스키를 위로하기 위해 춤을 춘다
3. 샤클로비타의 도착. 이반 호반스키의 명예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 이반 호반스키가 살해된다
호반스키와 페르시아 여노예들의 춤
[4막]
1. 골리친이 유배를 떠난다
2. 도시페이와 마르파
3. 안드레이가 엠마 문제로 마르파와 대면한다
4. 스트렐치의 등장
5. 스트렐치의 부인들은 남편들을 용서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6. 프레오부라첸스키 행진곡. 스트레쉬네프가 스트렐치에 대하여 짜르 페터가 용서했다고 전한다.
더치 내셔널 오페라 무대
[5막]
1. 도시페이의 아리아
2. 안드레이가 엠마를 찾아 다닌다. 마르파가 안드레이에게 부르는 노래
3. 도시페이가 돌아온다
4. 사랑의 레퀴엠
5. 마지막 합창
피날레. 구신앙 신봉자들의 순교. 메트로폴리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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