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더 알기/속성 역사 정복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

정준극 2018. 9. 25. 06:32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


비너 노이슈타트 전경. 가운데가 성모승천-성루프레헤트 대성당(비너 노이슈태터 돔)


오스트리아에는 비엔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 비엔나'도 있다. 비너 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이다. 글자그대로 번역하면 '비엔나 신도시'이다. 유럽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수도의 이름을 따온 신도시를 찾아보기가 힘든데(예를 들어서 신파리, 신런던, 신베를린 등) 오스트리아에는 그런 도시가 있다. '신 비엔나'라고 해서 비엔나 인근에 있는 것은 아니다.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정도 남쪽으로 가야 있다. 비엔나로부터 보면 뫼들링-바덴을 지나서 남쪽이지만 오스트리아 전체적으로 보면 동북쪽, 헝가리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그런데 행정구역상으로는 니더 외스터라이히(Nieder Österreich) 주에 속해 있다. 니더(Nieder)는 아랫쪽이란 뜻이다. 오스트리아에서 니더 외스터라이히주는 전체 국토에서 아랫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북쪽에 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비엔나에서 기차로 갈수 있으며 버스도 운행된다. 그리고 비너 노이슈타트에는 공항도 두개나 있다. 물론 그 중에서 하나는 군용비행장(West Airport)이라서 일반인들과는 관계가 없지만 다른 하나는 민간공항(East Airport)이다. 그러므로 잘만 하면 비행기로도 비너 노이슈타트를 방문할수 있다. 교통수단으로서 운하도 있다. 하지만 완성이 되지 않아서 사용하지는 않고 있다. 원래는 비너 노이슈타트로부터 도나우 등등을 거쳐 저 멀리 이탈리아의 항구도시인 트리에스테까지 운하로서 연결할 요량이었으나 사정상 성사되지 못했다. 18-19세기에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다.


비너 노이슈타트 중앙 광장의 마리엔조일레. 성모 마리아에게 역병이 물러가기를 기구하는 의미에서 세운 탑 


새로운 비엔나로서 비너 노이슈타트(뉴 비엔나)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일찍이 1194년이었다. 1194년이면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명종 24년이 된다. 잘 아는대로 명종은 무신의 난으로 의종의 뒤를 이어 왕이되었지만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등 악몽과 같은 무인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때에 유럽의 오스트리아에서는 레오폴드 5세가 비너 노이슈타트를 설치하였다. 원래 이 지역은 슈티리아 지방에 속한 곳이었다. 그러다가 1158년에 아예 공식적으로 슈티리아 공국의 군주(Margrave)인 오토카르(Ottokar)) 3세의 상속지가 되었다. 그렇게 수십년 동안 오토카르의 소유로 있다가 어찌어찌해서 오토카르 왕조가 종말을 고하게 되자 슈티리아 공국은 오스트리아를 통치하고 있던 바벤버그 왕조에 속하게 되었다. 당시에 지금의 오스트리아는 여러 조그만 공국, 또는 변경백이 다스리는 영지로 나뉘어져 있었다. 바벤버그 왕조는 지금의 니더 외스터라이히 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즉 순수 오스트리아를 관할하고 있었다. 시골 벌판에 불과했던 이곳을 마을로 만든 사람은 바벤버그 왕조의 레오폴드 5세였던 것이다. 그것이 1194년이었다. 레오폴드 5세가 이곳에 요새를 설치하고 경계를 강화한 것은 이 마을이 헝가리 국경에서 가깝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당시는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마침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Richard the Lionheart)가 십자군 전쟁에 참가했다가 영국으로 돌아가던 중 이곳을 지나가다가 간첩으로 오인되어서 체포되었다. 아마 레오폴드 5세가 의도적으로 잡아 두었는지도 모른다. '사자왕 리챠드'가 갇혀 있던 곳은 지금의 도나우 강변에 있는 뒤른슈타인이란 곳의 고성이었다. 스코틀랜드의 문호인 월터 스콧이 지은 '아이반호'에 따르면 오스트리아에 잡혀 있는 사자왕 리챠드를  아이반호가 영국에 있는 유태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몸값을 치루고 귀국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사자왕 리챠드는 거액의 몸값을 치루고 풀려나서 고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고 한다. 레오폴드 5세는 영국으로부터 받은 거액의 몸값 중에서 상당액을 비너 노이슈타트의 요새를 건설하는 등의 경비에 충당했다. 현재 비너 노이슈타트에 남아 있는 중세의 성벽은 그 때의 돈으로 구축한 것이라고 한다.


멜크 지방의 뒤른슈타인. 산위의 고성에 사자왕 리챠드가 감금되어 있었다고 한다.


레오폴드 5세는 슈티리아에 요새를 구축하고 비너 노이슈타트라는 지명을 붙여 주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수도 비엔나의 자매 도시라는 의미에서 여러 혜택을 받도록 했다. 비너 노이슈타트가 국경지대의 요새로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몰려와서 사는 도시로 발전시키기 위해서였다. 세금 면제 및 자치 운영 등의 특권이었다. 그로부터 비너 노이슈타트는 80년 이상이나 바벤버그의 우산 아래에 있었다. 1278년에는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는 '마르흐펠트 전투'(Schlacht auf dem Marchfeld)가 있었다. 마르흐펠트는 다른 말로 '모라비아 평원'이라고 부르는 곳이다. 당시 보헤미아는 프레미슬리드 왕조의 오토카르 2세가 통치하고 있었다. 오토카르 2세는 1250년부터 시작해서 1273년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 특히 오스트리아에 속해 있는 지역들을 공격해서 상당히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보헤미아의 영토로 만들었다. 그때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의 루돌프 1세가 군주로 있었다. 루돌프 1세는 독일 왕이라는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다. 독일 왕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말한다. 루돌프 1세는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를 가만히 두었다가는 골치 아플 것이 분명하므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1276년에 오토카르 2세에게 '제국 금지'(Reichsacht: Geächtet: Imperial ban)라는 특별한 조치를 선언했다. '제국 금지'라는 용어가 맞는 말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법률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법익피박탈자의 신분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법률상의 보호를 박탈당한다는 것을 말한다. 즉, 국가는 물론이고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제국 금지'라는 용어는 다른 말로 Vogelfreierei(포겔프라이어라이)라고 불렀다. Free as a bird(새처럼 자유스럽다)라는 뜻이다. '자유스럽다'는 말 때문에 좋아 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런 새는 누구든지 잡아 먹을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제국금지'를 선언 받으면 죽음을 의미했다. 누구든지 그런 사람의 재산을 탈취하거나 때려주어서 상처를 입히거나 심지어는 죽여도 법적인 책임을 지지 않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선언을 받은 사람을 돕거나 동조하면 그 사람도 같은 처벌을 받는다. 제국의 황제가 '제국 금지'를 선언하면 곧이어 교회는 당사자에게 '파문'을 선포하는 것이 관례였다. 교회에서 '파문'을 당하면 역시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마르흐펠트 전투가 있었던 장소에 세워진 기념 조형물. 뒤른크루트-예덴슈파이겐 전투(Schlacht bei Dürnkrut und Jedenspeigen)이라고도 한다.


신성로마제국의 루돌프 1세 황제가 보헤미아의 오토카르 2세에 대하여 '제국 금지'라는 초강경 조치를 취하므로서 오토카르 2세는 오스트리아, 카르니올라, 슈티리아 등에 있는 영토와 재산을 모두 박탈당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영토도 축소되었다. 오토카르 2세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서 결국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키기로 결심했다. 보헤미아에는 용감한 기병대가 있기 때문에 승산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1278년에 기병대를 이끌고 오스트리아를 침공했다. 당시에 오스트리아의 일부 국민들, 특히 비엔나의 일부 시민들은 합스부르크의 통치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었다. 오토카르 2세는 이들의 지지를 받아서 이 틈에 아예 오스트리아에서 합스부르크를 몰아내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루돌프 1세도 만만치 않았다. 헝가리의 라디슬라우스 4세와 연합하여 마르흐펠트에서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의 기병전을 펼친 것이다. 결과, 오토카르 자신은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하였고 보헤미아 기병대는 참패를 맛보아야 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1379년에 인네레 외스터라이히에 속한 별도의 합법적인 공국이 되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15세기에 들어와서 인구의 급작스런 증가를 보았다.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3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비엔나를 떠나 비너 노이슈타트에 거처를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많은 궁신들이 너도나도 비너 노이슈타트로 거처를 옮겼고 나머지 사람들도 말 안해도 뻔하게 옮겨와 살기 시작했다. 더구나 프레데릭 3세는 1469년에 비너 노이슈타트 교구의 설치를 허용했다. 교회가 확장되고 새로운 교구가 신설되니까 부족할 것이 없어서 사람들은 자꾸 몰려왔다.


마르흐펠트 전투. 독일왕(신성로마제국 황제) 루돌프 1세와 헝가리 왕 라디슬라우스 4세가 반갑게 만나고 있다. 바닥에는 보헤미아 왕 오토카르 2세가 죽어 있다.


프레데릭 3세의 포르투갈 출신 부인인 엘레아노르 왕비는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레데릭 3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1세도 이곳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막시밀리안 1세는 합스부르크의 다른 인물들이 비엔나의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어 있는 것과는 달리 비너 노이슈타트의 장크트 게오르그(St Georg)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유태인 구역으로서도 유명했다. 당시 유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랍비 이스라엘 이세를린(Israel Isserlin)이 이곳에서 지내면서 유태인들을 이끌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너 노이슈타트의 유태인들은 얼마 후인 1496년에 막시밀리안 1세가 모두 다른 곳으로 가서 살라고 하며 추방하는 바람에 사방으로 흩어지는 신세가 되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1세가 유태인들을 추방하기 10여년 전인 1487년에 합스부르크의 오랜 숙적인 헝가리의 마티아스 코르비누스(Matthias Corvinus)가 비너 노이슈타트를 점령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무려 2년 동안 공성한 끝에 마침내 점령한 일도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마티아스 왕은 비너 노이슈타트 주민들에게 승리의 상징으로 장엄한 코르비누스 컵을 기증했다고 한다. 막시밀리안 1세는 그로부터 1년 후에 헝가리를 몰아내고 비너 노이슈타트를 수복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16세기에 들어서서 부터는 황제가 비엔나로 옮겨가는 바람에 전과 같은 영화를 누리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그후로도 전략적인 요충지로서 중요성은 간과되지 않았다. 특히 터키의 침공에 대비하는 요새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코르비누스 컵. 현재는 부다페스트의 헝가리 국립박물관에 있다.


비너 노이슈타트가 다시 활기를 찾은 것은 18세기 중반부터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이곳에 제국의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부터였다. 군사학교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이름을 따서 테레지아군사학교(Theresianische Militärakademie: 테레지아니셰 밀리태르아카데미), 또는 간단히 테르밀라크(Thermilak)라고 불렀다. 말하자면 사관학교였다. 테르밀라크는 1752년에 개교하였고 오늘날까지 줄곧 오스트리아 군대의 간성들을 배출하는 전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왔다. 물론 전시 중에는 잠시 문을 닫아야만했다. 한가지 특기할 것은 오스트리아가 나치에 합병된 1938년 이후에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는 나치의 명장 에르빈 롬멜 장군도 한때 이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었다는 것이다. 테르밀라크는 1768년 갑자기 지진이 나는 바람에 건물들이 파괴된 일이 있었다. 물론 곧 다시 복구되었다. 1785년에는 교회와 수도원의 개혁을 감행하였던 요제프 2세의 정책으로 인하여 비너 노이슈타트 교구가 장크트 푈텐(St Pölten) 교구로 통합되었다. 비너 노이슈타트는 19세기에 산업도시로서 발돋움하기 시작했다. 특히 1841년에 비엔나와 비너 노이슈타트를 연결하는 오스트리아 남부철도가 개통이 되자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1909년에는 오스트리아 최초의 공식 비행장이 비너 노이슈타트의 북쪽에 오픈되었다. 주로 군용기의 시험비행장으로 활용되었다.


비너 노이슈타트 웨스트 에어포트(베스트 플루그하펜). 오스트리아 최초의 공식 비행장이었다.


1918년 1차 대전의 막바지에 비너 노이슈타트에서 노동자 스트라이크가 일어났다. 무기를 생산하던 다임러(Daimler) 공장의 노동자들이 노동자의 권리, 반전 등등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파업의 직접적인 이유는 밀가루 배급을 반으로 줄였기 때문이었다. 다임러의 포르셰 사장이 비엔나에 가서 정부와 식량배급에 대한 담판을 짓겠다고 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없이 돌아왔다. 다임러의 파업에는 기관차 공장, 라지에타 공장, 비행기 부품 공장, 탄약 공장 노동자들이 합세하였다. 볼셰비키 혁명의 세력들이 노동자 파업에 침투하였다. 그해 1월 14일에는 거의 1만명의 육박하는 노동자들이 비너 노이슈타트의 시청 앞에 모여 당국의 처사를 규탄하고 전쟁종식을 주장하였다. 비너 노이슈타트 노동자들의 파업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를 1918년 오스트로-헝가리의 1월 파업이라고 불렀다. 2차 대전 중에도 비너 노이슈타트는 많은 고난을 당했다. '비너 노이슈타트 비행기공장'(WNF: Wiener Neustädter Flugzeugwerke)을 비롯한 군수 공장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찌나 많은 폭격을 받았던지 도시 전체의 건물 4천 동 중에서 18동만이 남아 있었을 정도였다.


2차 대전 중의 WNF(비너 노이슈태터 플루그초이그베르케) .

              

비너 노이슈타트의 랜드마크는 아무래도 돔(Dom)이다. 비노 노이슈타트 전시가지를 압도하는 장대한 건물이다. 돔의 종탑은 두개가 있다. 후기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원래의 교회 명칭은 '마리아 승천 및 성루프레헤트 대성당'이다. 독일어로는 Dom Maria Himmelfahrt und Sankt Ruprecht 라고 하며 영어로는 Cathedral of the Assumption of Mary and St Ruprecht라고 한다. 간단히는 비너 노이슈태터 돔(Wiener Neustädter Dom)이라고 부르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냥 돔이라고 부른다. 1207년에 건축을 시작하여 1279년에 봉헌되었다. 고틱 양식의 성가대석(Choir)과 좌우 날개와 같은 건물(Transept: 수랑)은 14세기에 완성된 것이다. 15세기 후반에는 열두사도상이 교회당 동쪽 끝에 쑥 내민 반원형의 부분에 추가되었다. 비너 노이슈타트에는 또 하나의 대성당이 있다. 성게오르그 대성당(Cathedral of St George)이다. 이 대성당은 군종교회였다. 이곳에 테레지아군사학교가 있기 때문에 군인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해서 만들어진 교회이다. '슈페르의 성베드로 교회'(St eter an der Sperr)는 13세기에 세워진 건물이지만 15세기에 한차례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거쳤고 19세기에는 교회건물로 더 이상 사용치 않고 전시회 공간 등으로 사용하고 있다.

 

비너 노이슈태터 돔의 위용. 비너 노이슈타트의 랜드마크이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테레지아군사학교(테르밀라크)는 13세기에 세워진 네개의 탑을 가진 요새였다. 그후 합스부르크의 프레데릭 3세가 거처로 삼았다. 15세기 중엽에는 군종 교회인 성게오르그 교회가 추가되었다. 교회내부의 스테인드 글래스 작품이 화려하며 막시밀리안 1세 황제의 묘소가 있다. 군사학교가 된 것은 1752년부터였다. 2차 대전 중에는 폭격을 받아 건물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으나 현재는 오리지널 형태로 복원되었다.


테레지아군사학교. 말하자면 사관학교이다.


비너 노이슈타트에는 볼거리들이 몇가지 더 있다. 고문 탑이라는 탑이 있다. Reckturm이라고 부른다. 13세기 초반에 죄인들을 고문하던 곳이다. 지금은 중세 무기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에도 비엔나와 마찬가지로 카푸친교회가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비엔나의 카푸친교회 지하에는 합스부르크 황족들의 납골당이 있는데 이곳의 카푸친교회에는 그런 것은 없다. 13세기에 지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모와 성야고보상은 이 교회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성물이다. 이밖에 병원박물관, 산업박물관, 항공박물관(아비아티쿰), 시립박물관 등이 있다.


여름밤 중앙광장에서의 영화 페스티발. 조용한 도시인데 이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라는 생각을 갖게 해 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다.


비너 노이슈타트와 관련하여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비엔나의 성슈테판대성당에 있는 '비너 노이슈타트 제단'이다. 제단이라기 보다는 실은 제단 뒤에 있는 칸막이를 말한다. 이 칸막이 뒤에는 보통 십자가나 성화 등을 두어서 필요할 때에 꺼내어 사용한다. 슈테판스돔의 비너 노이슈타트 칸막이는 프레데릭 4세(나중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는 프레데릭 3세)가 비너 노이슈타트의 노이클로스터(수도원)에 있는 교회(수도원교회)에 기증한 것인데 그것을 나중에 비엔나로 가져온 것이다.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가운데에는 상하 두개의 커다란 조각 작품과 하단에 받침대가 있으며 양 옆으로 병풍처럼 날개를 달았다. 칸막이는 어떤 면은 조각으로 되어 있고 어떤 면은 그림으로 되어 있다. 가장 중앙에는 성모의 대관식에 대한 내용이다. 이 칸막이는 프레데릭 황제의 지시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프레데릭 제단(또는 칸막이)라고 부른다. 이 칸막이의 하단에는 프레데릭의 슬로간인 AEIOU라는 글씨와 1447이란 연도가 표시되어 있다. 15세기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현재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칸막이(영어로는 Retable)이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슈테판스돔 편을 참고하기 바란다.


슈테판스돔에 있는 비너 노이슈타트 알타르. 실은 제단 칸막이이다. 보통 교회에서는 제단에 이 칸막이를 두고 그 뒤에 십자가나 성화 등을 보관하고 있다가 무슨 행사가 있으면 꺼내 쓰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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