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속의 세기적 미인들 집중탐구 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이 있다.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 전설 속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역사 속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소설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이다. 그중에서 우선 일부만 짚어 보았다. 트로이의 헬렌,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 세상에서 가장 힘센 삼손을 굴복시킨 델릴라(Dalilah), 전설적인 중국의 투란도트 공주, 죽을수 밖에 없었던 히브리 백성들을 구한 에스더(Esther) 왕비, 에루살렘을 침공한 앗수르 군대의 홀로페르네스를 처치한 유대여인 유딧(Judith), 그리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줄리엣(Juliette) 등 자타가 공인하는 세기의 미인들을 살펴 본다. 이밖에도 '카르멘'의 카르멘, '진주조개 잡이'의 레일라, '마농 레스꼬'의 마농, 중국의 시 쉬(서시), '황금 닭'의 셰마카 여왕, '시바의 여왕'의 시바의 여왕,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 '노르마'의 노르마(Noma)도 오페라에 등장하는 미인의 반열에 포함할수 있다.
'트로이의 헬렌' 그림. 세상에서 가장 이상적인 미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의 헬렌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
- 안토니오 체스티(Antonio Cesti: 1623-1669)의 '황금사과'(Il pomo d'oro)
- 자크 오펜바흐(Jacques Offenbach: 1819-1880)의 오페레타 '아름다운 엘렌'(La belle Hélène)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us: 1864-1949)의 '이집트의 헬레나'(Die ägyptische Helena)
신화의 세계에 빠져 있었던 고대 사회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트로이의 헬렌이었다. 트로이의 헬렌은 스파르타의 헬렌이라고도 부르며 또는 간단히 헬렌이라고 부르는 여인이다. 얼마나 아름다웠느냐 하면 그저 간단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설명으로 충분했다. 헬렌은 처음에 스파르타의 메넬라우스 왕과 결혼했으나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에게 유괴(?) 당하였고 이에 분개한 메넬라우스 왕이 헬렌을 찾기 위해 동맹국들과 함께 트로이를 공략하였으니 그것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헬렌은 제우스와 레다(Leda)의 딸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클리템네스트라와 캬스토, 폴리듀스 등의 누이동생으로 소개되어 있다. 헬렌의 이름이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아리스토파네스, 키케로, 유리피데스, 호머 등의 고전작품에 의해서였다. 특히 호머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에서 헬렌의 이야기를 다루어서 헬렌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작 헬렌을 대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작품은 비르질(Virgil)의 이네이드(Aeneid)였다. 돌이켜보건대 헬렌은 스파르타 왕인 메넬라우스와 결혼하기 전에 테세우스에게 유괴 당한 일이 있었다. 그후 수많은 남자들이 헬렌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청혼하였다. 청혼자들은 한가지를 약속했다. 누가 되든지 헬렌과 결혼한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여 군대의 지원을 요청한다면 주저없이 지원한다는 약속이다. 그 어려움이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헬렌이 다른 사람에게 납치 당하는 일이었다. 그러는 중에 헬렌이 트로이의 파리스 왕자에게 납치 당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나 사실상 납치인지 또는 서로 사랑하여서 도주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그리하여 부인을 빼앗긴 메넬라우스는 헬렌을 되찾기 위해서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여기에는 약속대로 한때 헬렌에게 청혼했던 사람들이 트로이 전쟁에 군대를 파견하여 대규모의 전쟁으로 발전된 것이다.
'트로이의 헬렌'
트로이의 헬렌에 대한 전설은 몇가지가 있다. 호머는 헬렌을 '무엇을 동경하는 듯한, 그러면서도 슬픔에 넘쳐 있는 여인'으로 그렸다. 그래서 헬렌은 파리스를 따라 나선 것을 후회하고 메넬라우스와 다시 결합하기를 원했다는 설명이다. 다른 이야기는 헬렌이 대단히 믿을수 없는 여인으로서 배반에 대한 기질이 있었다는 것이며 메넬라우스로부터 떠나기 위해서 일부러 큰 연회를 베풀어서 혼란하게 만들고 그 틈을 타서 파리스와 도망갔다는 것이다. 더구나 헬렌은 사람들이 전쟁에서 많이 죽는 것을 즐기는 성격이어서 트로이 전쟁을 엔조이 했다는 것이다. 결과는 어떠했는가? 호머의 스토리에 따르면 파리스 왕자는 전투에서 죽임을 당하고 헬렌은 메넬라우스의 손에 끌려 스파르타로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한편, 다른 버전에 의하면, 헬렌은 스파르타로 돌아가지 않고 신들이 거주하고 있는 올림퍼스 산으로 올라간다고 되어 있다. 헬렌의 아름다움은 세월을 초월하여서 수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리하여 예술작품이나 소설에서는 헬렌을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미인으로 표현되었다.
영화 '트로이의 헬렌'에서 헬렌 역의 다이안 크루거
17세기 이탈리아 출신의 바로크 작곡가인 안토니오 체스티의 오페라 '황금사과'는 파리스 왕자가 헬렌을 얻게 되는 얘기를 합스부르크 왕실의 결혼식에 비유하여 그린 작품이다. 세 여신, 즉 주노(헤라), 비너스(아프로디테), 아테나는 황금사과가 누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다툰다. 이들은 제우스에게 심판해 달라고 부탁하지만 제우스로서는 누구의 편을 들어줄 입장이 아니어서 인간인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판결을 내리도록 한다. 주노는 파리스에게 자기가 황금사과를 갖도록 해주면 유럽과 아시아의 왕으로 삼아 주겠다고 제안한다. 아테나는 지혜와 전쟁에서 승리하는 기술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비너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렌을 선물로 주겠다고 제안한다. 파리스 왕자는 비너스가 황금사과를 차지하도록 결정한다. 오페라 '황금사과'는 1668년 비엔나의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 오페라는 원래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와 스페인의 마르게리타 공주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체스티에게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 이들의 결혼식은 1666년에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도 음악이 완성되지 못하여 2년 후인 1668년에나 공연될수 있었다. 완성이 늦어진 이유는 신랑이 되는 레오폴드 1세 황제가 오페라에 이것도 넣어 달라, 저것도 넣어 달라고 심심하면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황금사과'는 당시로서 엄천난 규모의 스펙터클한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총공연시간이 무려 8시간이 되어서 중간에 식사도 해야 했고 잠도 자야해서 이틀에 걸쳐 공연되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다시 공연되지 않았다. 하지만 오페라의 연혁에 있어서 중요한 이정표를 제공해 준 작품이었다. 초기 오페라의 스펙터클한 면을 상상할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스의 심판'. 루벤스. 1636년
프롤르그는 원래 스토리와는 관계없이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광과 레오폴드 1세와 마르게리타 공주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지막 막에서는 모든 신들이 신부 마르게리타에게 축복의 메시지를 전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1막은 지하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플루토의 궁전이다. 먼저 세상을 떠나 지하세계에 온 선조들이 파티를 열고 있다. 물론 결혼축하 파티이다. 다음 장면은 올림퍼스 산에 있는 주피터(제우스)의 궁전이다. 황금사과를 둘러싸고 주노,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다투고 있다. 가장 미인이 황금사화를 차지한다는 다툼이다. 이다 산에서 님프인 외노네와 사랑에 빠져 있는 파리스 왕자가 분쟁을 해결해 주는 사람으로 초빙된다. 파리스 왕자는 황금사과의 주인으로서 비너스의 손을 들어준다. 왜냐하면 비너스가 파리스에게 헬렌과 만나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때 쯤에서 파리스 왕자와 님프 외노네의 관계도 상당히 복잡해져서 헤어져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비너스가 치사한 방법으로 황금사과를 차지한 사실을 알게 된 주노와 아테나는 파리스와 헬렌의 관계가 악화되도록 복수하겠다고 다짐한다. 그러나 파리스 왕자는 헬렌과 함께 트로이로 무사히 도망간다. 그리고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다. 마지막 막에서는 엉뚱하게도 모든 신들과 인간과 산천초목이 레오폴드 1세와 마르게리타 공주의 결혼을 다시한번 축하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마르게리타 공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므로 황금사과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내용으로 막이 내린다.
1668년 비엔나에서 공연된 '황금사과'의 무대
자크 오펜바흐의 '아름다운 엘렌'은 헬렌과 파리스의 사랑 이야기를 현대판으로 코믹하게 만든 작품이다. 대본은 오페라 대본가로서 명성이 자자한 앙리 메일락과 루도비크 알레비가 공동으로 작성했다. 1864년 파리 바리에테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스파르타의 왕비 엘렌(헬렌)은 남편 메넬라우스 왕을 죽여야 할 운명이라는 신의 계시를 받는다. 엘렌은 어떻게 해서든지 저주를 피하기 위해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도피할 생각을 한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마치 오래전부터 사랑해온 사이인 것처럼 된다. 다음날 스파르타 왕궁에서 무술시합이 열린다. 파리스 왕자가 자신이 없어서 못 나가겠다고 하지만 억지로 무술시합에 참가한다. 상대방은 크레테 왕국에서 가장 용맹스런 영웅이다. 코미디를 방불케하는 결투 끝에 파리스 왕자가 승리한다. 신관들은 파리스 왕자가 승리한 것도 일종의 신의 계시라고 믿어서 다시 신전에 가서 신의 뜻을 물어본다. 메넬라우스가 죽지 않으려면 멀리 무작정 떠나야 한다는 계시이다. 한편, 엘렌은 파리스와 도피까지 해야 하나라는 의문이 든다. 그래서 파리스와의 관계를 없던 일로 하기로 결심하지만 파리스 왕자가 밤중에 침실로 찾아오자 거절하지 못한다. 그때 메넬라우스 왕이 엘렌을 의심하여서 찾아온다. 두 사람의 말다툼이 상당히 재미있다. 그때 바다에 황금빛이 찬란한 갤리선이 미끄러지듯 나타난다. 파리스 왕자가 신관으로 변장하여 뱃머리에 서 있다. 신관은 엘렌에게 비너스 신의 계시를 전한다. 속히 비너스 신전에 혼자 가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엘렌은 파리스 왕자와 함께 배를 타고 신전으로 가는 대신에 멀리 떠난다. 메넬라우스 왕이 복수를 외치는 것으로 막이 내린다. 스토리는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무대는 현대적이다.
'아름다운 엘렌' 무대. 함부르크 슈타츠오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이집트의 헬레나'는 오리지널 트로이의 헬렌 이야기에 비해서 대단히 파격적이다. 대본은 휴고 폰 호프만슈탈이 맡았으며 1928년 드레스덴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고 5년 후인 1933년에는 수정본이 잘츠부르크 페스티발에서 초연되었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메넬라우스가 헬레나(헬렌)를 되찾아 오지만 실은 환상을 데려온다는 얘기로 시작된다. 그러면 진짜 헬레나는 어디에 있는가? 이집트에서 메넬라우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아프로디테(비너스)에게 황금사과를 빼앗긴 헤라(주노)는 파리스와 헬렌을 골려주기 위해서 헬렌의 환상을 만들어서 파리스가 그 환상을 데리고 트로이로 도망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메넬라우스가 트로이와의 전쟁을 끝내고 데려온 헬렌은 헤라가 만든 환상이었다는 것이다.
포세이돈의 연인인 아이트라는 무엇이든지 알고 있는 커다란 조개를 통하여 트로이 전쟁을 마친 스파르타 병사들이 배를 타고 고국으로 가는 도중 아이트라의 섬을 지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메넬라우스의 배에는 헬렌도 타고 있다. 아이트라는 메넬라우스가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한 트로이 전쟁이 헬렌 때문이기 때문에 헬렌을 죽여서 전사한 병사들의 넋을 위로코자 한다는 사실도 알아낸다. 아이트라는 폭풍을 보내어 메넬라우스의 배를 전복시킨다. 메넬라우스와 헬렌은 어쩔수 없이 아이트라의 섬으로 밀려온다. 아이트라는 정령들의 도움을 받아 메넬라우스가 이미 자기 아내인 헬렌을 죽인 것으로 믿도록 한다. 한편, 아이트라는 헬렌에게도 묘약을 주어 젊음을 되찾도록 한다. 아이트라는 정신이 혼란해진 메넬라우스에게 그가 죽인 것은 헬렌의 환영이며 진짜 헬렌은 신들의 도움으로 이곳 이집트에 와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이집트의 헬레나' 무대
○ 절세의 미인 클레오파트라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들
-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의 '줄리어스 시저'(Giulio Cesare)
- 쥘르 마스네(Jules Massenet: 1842-1912)의 '클레오파트르'(Cléopare)
- 헨리 킴벌 해들리(Henry Kimball Handley: 1871-1937)의 '클레오파트라의 밤'(Cleopatra's Night)
- 사뮈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
우리는 보통 대표적인 세기의 미인으로서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를 손 꼽는다. 그래서 '만일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높았다면 세계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클레오파트라의 공식 이름은 클레오파트르 필로파토르 7세(Cleopatra VII Philopator)이다. 기원전 69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30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39년을 살았다는 계산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톨레미 왕국의 마지막 실질적인 통치자, 즉 파라오였다. 그와 줄리어스 시저 사이에서 태어난 케사리온(Caesarion)이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이어 톨레미 왕국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건 명목상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톨레미 왕국의 통치자였을 뿐만 아니라 외교관, 해군 사령관, 언어학자, 의학서적 저술가였다. 톨레미 왕국을 창설한 톨레미 소터 1세는 실상 마케도니아계 그리스의 장군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동료였다. 그러므로 클레오파트라도 실은 마케도니아 혈통의 그리스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후에 이집트는 로마제국이 통치하는 지역이 되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아버지는 톨레미 12세였다. 그런데 톨레미 12세의 큰 딸인 베레니스가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톨레미 12세를 로마로 추방하고 파라오의 자리를 차지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로 가서 아버지를 만나 이집트로 돌아가서 왕권을 회복하라고 권유했다. 그리하여 아버지 톨레미 12세는 로마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아 이집트로 돌아가서 베레니스를 제거하고 다시 파라오가 되었다. 그것이 기원전 58년의 일이었다.
클레오파트라라고 생각는 대리석 조각상
톨레미 12세가 기원전 51년에 세상을 떠나자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남동생인 톨레미 13세가 공동으로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지만 클레오파트라와 남동생 사이에서 세력 다툼의 내전이 벌어졌다. 로마제국의 집정관인 시저는 톨레미 13세와 클레오파트라를 화해시키고자 했고 두 사람 모두 공동 파라오로 인정하였다. 그러는 중에 시저는 천하미인인 클레오파트라와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고 얼마후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은 '작은 시저'라는 의미에서 Caesarion 이라고 붙였다. 그가 나중에는 톨레미 15세로 알려진 인물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로마제국의 속령의 군주로서 기원전 46년에 로마를 방문하였고 2년 동안 로마에서 시저의 빌라에 체류하였다. 기원전 44년에 시저가 로마에서 브루투스에 의해 암살되자 클레오파트라는 아들 케사리온을 시저의 후계자로서 삼고자 했으나 실패하였고 대신에 시저의 손자뻘이 되는 옥티비안이 초대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옥타비안은 나중에 아우구스투스라는 호칭을 가지게 되었으니 그가 역시 로마제국의 속령인 유대의 백성들에게 각기 자기 본적지에 가서 호적을 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목수 요셉이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갔으며 그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건 그렇고,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로 돌아가서 자기 아들인 케사리온과 함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시저에게 자기를 선물로 보낸 클레오파트라
시저가 죽은 후에 로마에서는 누가 권력자가 되느냐를 두고 내전이 일어났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안과 마르크 안토니(마르쿠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마르쿠스 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삼두정치를 지지하였다. 그리고 어찌하다보니 안토니와 애정행각을 벌여서 결과적으로 세 아이까지 두게 되었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들어주는 입장이 되었으며 클레오파트라도 안토니를 위해서 자금과 병력을 지원하였다. 특히 안토니가 파르티안 제국과 아르메니아 왕국을 공략할 때에 크게 지원하였다. 그리고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자기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지역의 통치자들로 임명하였다. 안토니가 이렇게 클레오파트라에 빠져 있고 또한 부인인 옥타비안의 누이동생 옥타비아와 이혼하자 옥타비안은 안토니와 운명을 건 전투를 벌이지 않을수 없었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이끄는 해군함대는 기원전 31년에 아그리파 장군이 이끄는 옥타비안의 군대에 의해 저 유명한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이어 옥타비안의 군대는 이집트를 공략하여 결국 전투에서 패배한 안토니는 자살하였다. 클레오파트라는 옥타비안이 자기를 생포하여 로마로 데려가서 승전을 과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독을 사용하여 자살하였다. 알려진바로는 독사가 물도록 죽었다고 하지만 분명치는 않다. 이러한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전설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분야의 주제가 되었다.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희곡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1608), 조지 프리데릭 헨델의 오페라 '이집트의 줄리오 체사레'(1724)가 있다. 그리고 영화로는 1963년의 헐리우드 스펙터클 영화로서 '클레오파트라'가 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타이틀 롤을 맡았으며 렉스 해리슨이 시저를, 리챠드 버튼이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맡은 작품이다.
1963년도 헐리우스 영화 '클레오파트라'. 엘리자베스 테일러, 렉스 해리슨, 리챠드 버튼 주연
헨델의 오페라 '줄리오 체자레'(이집트의 줄리어스 시저)는 헨델의 세번째 오페라로서 1724년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초연 이후 헨델은 오 오페라를 세번에 걸쳐 수정하였고 오늘날 주로 공연되는 것은 1732년의 수정버전이다. 이 오페라는 시저(체자레)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게 된 배경으로부터 그후 두 사람의 밀월생활을 주로 그린 작품이다. 기원전 48년에시저가 클레오파트라를 만난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화려한 로맨스 중의 하나라고 할수 있다. 그러한 로맨스이기 때문에 헨델은 가능하면 화려하고 풍성한 음악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이 오페라에는 여덟 곡의 웅장한 다 카포 아리아가 나온다. 인간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스펙트럼이 표현되어 있는 아리아들이다. 이 오페라의 하일라이트는 아마도 2막이 시작할 때에 나오는 유혹의 장면일 것이다. 클레오파트라 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신인 덕성(Virtue)처럼 보이는 옷을 입고 등장한다. 가장 요염하고 유혹적인 여인이 덕성의 상징처럼 등장하는 것은 아이러니컬한 것이 아닐수 없다. 결국 육감적인 클레오파트라는 위대한 정복자인 시저를 감동시키고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줄리오 체자레'에서 클레오파트라가 체자레(시저)를 유혹하는 장면의 그림
마스네는 프랑스 벨르 에포크 시대를 반영한 탐미적이고도 관능적인 '클레오파트르'를 만들었다. 1914년 파리에서 초연되었다. 세기적 비극의 주인공인 클레오파트르(클레오파트라)의 사랑 이야기를 한 폭의 아름다운 수채화처럼 그려 놓았다. 안토니우스는 진영으로 찾아온 클레오파트르를 보고 자기도 모르게 클레오파트르의 매력에 빠진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사이이지만 마치 오랜 연인들처럼 사랑의 감정을 표현한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안의 여동생인 옥타비아와 결혼키로 약속되어 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르와 헤어질수 없어서 함께 로마로 떠난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의 결혼은 클레오파트르의 등장으로 파탄된다. 이에 분개한 옥타비안이 안토니우스를 타파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다.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치다시피 온다. 클레오파트르는 자기가 전쟁의 불씨였던 것을 생각하고 만일 자기가 죽으면 두 사람 사이의 전쟁이 없던 것이 될 것으로 믿고 죽었다고 소문을 내도록 한다. 클레오파트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은 안토니우스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여서 칼을 들어 스스로를 찌른다. 결국 안토니우스는 숨을 거둔다. 클레오파트르는 자기로 인하여 사랑하는 안토니우스가 죽은 것을 후회하여 독사를 품고 죽는다. 이 오페라에서 특별한 것은 클레오파트르의 노예인 스파코스가 클레오파트르를 깊이 사랑하지만 이룰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는 것이다.
클레오파트르와 마르크 안투안(마르쿠스 안토니우스)
미국 매사추세츠 출신의 작곡가인 헨리 킴벌 해들리가 작곡한 '클레오파트라의 밤'은 미국 작곡가에 의한 베리스모 스타일의 오페라라서 관심을 끈 작품이다. 1920년 메트로폴리탄에서 초연되었으며 초연의 지휘는 작곡자 자신이었다. 미국 작곡가의 작품을 메트로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공연한 것도 처음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이 오페라의 주제는 일반적인 클레오파트라와 시저, 또는 안토니와의 사랑이야기를 다룬 것이 아니라 클레오파트라를 깊이 사모하는 호위병사의 사랑을 다룬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를 짝사랑하는 병사의 이름은 메이아문이라고 했다. 감히 여왕을 사랑하기 때문에 처형당해야 하지만 클레오파트라는 한가지 조건을 내건다. 하룻밤 함께 지내되 다음 날 아침에 처형한다는 조건이다. 메이아문은 그 조건을 기쁘게 받아 들인다. 클레오파트라는 단조로운 생활이 싫증이 나서 신들에게 새롭고 빛나는 생활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신들이 그 요구를 받아 들여서 메이아문을 보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 아침, 클레오파트라는 메이아문을 처형하지 않고 살려 보내기로 한다. 그때 안토니가 도착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메이아문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관계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안토니에게 죽임을 당할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독을 마시고 죽는다. 클레오파트라는 메이아문의 죽음을 애석하게 생각하면서도 안토니를 마중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한다.
'클레오파트라의 밤'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메이아문. 메트로폴리탄
사뮈엘 바버의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비교적 충실하게 오페라로 표현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은 5막에 40 장면이 넘는 방대한 것이지만 그것을 3막의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래도 공연시간은 세 시간이 넘는 대작이다. 초연은 1966년 뉴욕의 링컨센터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신축 개관기념으로 이루어졌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신축 개관기념이어서 예산에 제한을 받지 않고 제작을 할수 있었다. 그래서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한 무대를 만들수 있었다. 출연진만 해도 정상급 성악가 22명이 주연으로 출연하였으며 합창단, 무용단 등을 포함하면 4백 명이 넘은 인원이 무대를 가득 채운 것이었다. 초연에서 타이틀 롤인 클레오파트라는 레온타인 프라이스가 맡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연은 실패였으며 겨우 8회 공연을 마치고 메트로폴리탄의 레퍼토리에서 사라져야 했다. 바버는 대본가이기도 한 지안 카를로 메노티의 도움으로 다시 만든 대본에 음악도 상당 부분을 수정하여 1975년에 줄리어드의 어메리칸 오페라 센터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는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떠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지만 안토니는 로마에서 옥타비아와 결혼해야 하기 때문에 이집트롤 떠나야 했다. 그 결혼은 옥타비우스와 안토니의 관계를 굳게 해주는 목적이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의 배신으로 기분이 상한다. 한편, 안토니는 옥타비우스가 평화 약속을 깨트린 것을 알고 이집트로 돌아간다. 안토니는 클레오파트라와 공동으로 이집트를 통치할 생각이다. 하지만 옥타비우스는 로마의 앞날을 위해서 안토니와 결판을 내고자 한다. 옥타비우스는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에 대하여 배신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기 편에 서 달라고 부탁한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서로가 배신했다고 믿는다. 결국 불신은 죽음을 초래한다. 멀리서 옥타비우스의 승리 소리가 전해진다.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레온타인 프라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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