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호르게 마르틴의 '밤이 오기전에' - 291

정준극 2019. 9. 6. 17:52

밤이 오기 전에(Before Night Falls)

호르게 마르틴의 2막 오페라

쿠바의 시인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자서전적 비망록 바탕


호르게 마르틴


공산독재의 쿠바에서 핍박을 받다가 천신만고 미국에 정착할수 있었던 호르게 마르틴(Jorge Martin: Joseph Martin: 1959-)가 쿠바가 낳은 위대한 시인인 레이날도 아레나스(Reinaldo Arenas)의 고통스러웠던 쿠바생활을 자서전적 비망록으로 쓴 '밤이 오기 전에'에 음악을 붙여 오페라로 만들었다. 공산독재 치하에서 온갖 고통을 다 겪은 시인의 비망록은 이미 연극과 영화로 만들어져 뜨거운 관심을 불러 일으킨바 있다. 그것을 이번에는 오페라로 만든 것이다. 대본은 작곡자 자신과 돌로레스 코흐(Dolores Koch)가 썼다. 오페라 '밤이 오기 전에'(스페인어로는 Antes que anochezca)가 2010년 5월에 미국 포트 워스 오페라(Ft. Worth Opera)에서 처음 선보였다. 그후 미국의 여러 극장에서 리바이벌 되었지만 정작 쿠바에서는 공연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과 쿠바가 2014년에 수교를 재개했기 때문에 아마도 쿠바에서의 공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밤이 오기 전에'는 초연 이후 잠시 정적을 가지다가 2017년 3월에 플로리다 그랜드 오페라가 리바이발함으로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쿠바의 시인 레이날도 아레나스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밤이 오기 전에'는 어린 시절에 쿠바 농촌에서 가난에 찌든 생활을 했던 것으로부터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것, 그리고 말년에 뉴욕에서 지내면서 에이즈에 걸려 고통을 당한 것까지 파란만장한 시인의 생애를 조명한 내용이다. 시인은 쿠바에 있을 때에 쿠바혁명에 대한 환멸, 카스트로 정부로부터 반체제 작가로서, 그리고 동성애자로서 박해를 받았다. 오페라는 그에 대한 재판을 추적하였으며 정치범으로서 시련을 겪은 일, 그의 원고를 자유세계에서 출판하기 위해 원고를 밀수출한 일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막의 이 오페라는 실내오페라의 범주를 벗어나서 풀 스케일의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작품이다. 음악은 풍부한 멜로디로 짜여져 있다. 간혹 쿠바의 민속적인 선율도 들을수 있다. 하지만 합창은 베르디 스타일이다. 출연진은 레이날도 아레나스, 오비디오(Ovidio), 빅토르(Victor), 페페(pepe), 어머니 겸 바다, 달, 항구 겸 비자 담당관 등이다. '밤이 오기 전에'는 공산 쿠바에서 자유를 위한 저항운동과 성해방을 다룬 내용이다.


영화에서 게이로 분장한 조니 뎁


레이날도 라에나스는 쿠바 동부의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그런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 소설가, 시인이 되었다. 그는 1959년에 피델 카스트로에 의한 쿠바혁명을 지지하였다. 그래서 1963년에 농촌을 떠나 아바나로 떠났다. 아바나에서 그는 작품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첫번째 호평을 받은 작품은 1966년에 펴낸 '환각세계'(El mundo alucinante)였다. 쿠바작가 및 예술가연맹이 특별한 호평을 했다. 그러나 그는 공공연하게 게이 생활을 하였고 그로 인하여 당국의 지탄을 받았다. 그는 1973년에 쿠바공산당으로부터 사상일탈이라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다가 탈옥하였으나 다시 체포되었고 이번에는 악명높은 엘 모로() 감옥수에 수감되었다. 그는 1976년에 석방되었고 1980년에는 저 유명한 마리엘 보트구조(Mariel Boarlife)를 통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갈수 있었다. 마리엘 보트구조는 1980년에 수많은 쿠바인들이 페루대사관의 협조로 미국비자를 받아 쿠바의 마리엘 항구에서 연락선과 같은 작은 배들을 타고 미국으로 망명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미국 대통령은 지미 카터였다. 쿠바의 카스트로 정권은 누구든지 쿠바를 떠나고자 하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마리엘 보트구조에 의해 약 1만명의 쿠바인이 미국으로 이주할수 있었다. 아레나스도 그 틈에 미국에 정착할수 있었다. 그는 뉴욕에서 1982년에 '샘물에서의 노래'(Cantando en el pozo: Singning from the Well)를 출판하여 미국은 물론 세계에 이름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는 이어 그해에 '백색 스컹크의 궁전'(El palacio de la blanquisimas mofetas: Palace of White Skunks)를, 1987년에는 '도어맨'(El portero: The Doorman)을 발표하여 작가 및 시인으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성연애에 따른 에이즈 감염과 기타 여러가지 사회적 불안으로 1990년 12월 7일, 약물 자살하였다. 자서전적 비망록인 '밤이 오기 전에'(Antes que anoochezca)는 그의 사후 3년만에 출판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2000년에는 영화가 만들어져 상당한 관심을 받았다. 영화에서는 스페인의 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이 아레나스의 역할을 맡았는데 그의 쿠바 악센트는 쿠바 사람보다도 더 완벽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영화에서 아레나스의 상대역은 조니 뎁(Johnny Depp)이었다.


'밤이 오기 전에'에는 이런 장면도 연출된다. 아레나스와 오비디오.


'밤이 오기 전에'의 시놉시스를 소개하기 보다는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생애를 소개하는 것이 작품의 이해를 위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1943년에 태어난 아레나스는 오늘날에는 사라져서 없는 시골 마을인 오리엔테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아레나스를 임신중일 때에 집을 나갔다. 그래서 아레나스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손에서 컸다. 아레나스에게는 결혼하지 않은 이모들이 여러명이나 있었다. 그래서 아레나스가 어린시절을 보낸 외가집에는 어머니를 비롯해서 결혼하지 못한 여자들로 항상 북적대었다. 아레나스가 나중에 적은 글을 보면 이모들은 절박한 심정으로 결혼해 줄 남자들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다 했다고 되어 있다. 시골생활은 아무런 속박이 없어서 자유스러웠다. 아레나스는 동무들과 함께 그나마 시골생활을 즐겁게 보냈다. 아레나스의 비망록은 소년시절에 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시골아이들의 모습을 그려놓기도 했다. 성에 대한 욕망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던 시기였다. 그래서 아레나스와 동무들은 심지어 양이나 염소와 같은 가축들과 섹스를 하기도 했다. 아레나스는 열살 때에 동성에 대한 섹스의 욕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아레나스보다 나이가 많은 사촌형과 동성애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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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에 들어와서 쿠바의 시골생활은 굴곡이 심한 것이 되었다. 피델 카스트로가 지지자들을 동원해서 독재자 바우티스타의 정권을 무너트리려는 행동에 착수한 영향 때문이었다. 농촌의 젊은이들은 무슨 생각들을 했는지 대부분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가입하여 총을 들고 트럭을 타고 돌아다녔다. 아레나스는 농촌이 붕괴되다시피 되자 인근의 홀쿠인 도시로 나가서 살았고 이어 카스트로의 혁명군에 동참하였다. 그러나 얼마후 그는 혁명세력의 말이 과거 정권과 마찬가지로 거짓으로 일관되어 있고 허세를 부리거나 협박한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혁명이 성공하여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았지만 그가 영광스럽게 약속한 자유와 우수교육, 건강보호, 기타 복리후생은 모두 거품이라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신에 혁명은 억압의 수단과 힘이 되었다. 바우티스타 정부에 관여했던 인사들은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하는 것이 비일비재였다. 새로운 혁명정부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화폐가치는 급격히 떨어졌다. 아무도 나라를 떠나려는 사람이 없었다. 공연히 붙잡히면 재산을 몰수 당하는 등 곤혹을 당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동성연애는 법으로 금지되었고 만일 발각이 되면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종신노역을 해야 했다.



아레나스는 아바나에 있는 군사정권의 학교에 들어갔다. 새로운 농촌지도자들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그러나 아레나스는 농촌경제 전문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레나스는 국립도서관이 주관하는 문학경연대회에서 시부분에 입상하였고 그로 인하여 국립도서관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는 국립도서관에서 일하면서 계속 글을 썼고 결과, 몇 권의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아레나스는 다니던 학교를 중도에서 포기하고 보헤미안과 같은 예술가 스타일의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문학모임을 자주 가졌으며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거나 발레를 관람하는데 치중했다. 그리고 이성보다는 동성과의 섹스를 더 즐겨하였다. 아레나스는 동성과의 섹스를 통해서 즐거움을 찾았고 육체적으로 완성되는 느낌을 가졌다. 그의 저서에도 동성과의 섹스를 자세하게 소개하는 내용이 많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도 카스트로 정권 아래에서는 사치에 불과했다. 카스트로 정권은 예술분야에 있어서도 반혁명적이라고 판단하면 가차없이 억압하고 핍박하였다. 아레나스의 저서들은 정부의 검열 대상에서 예외가 될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그가 가깝게 지내던 친구 몇명은 정부의 국가안보와 관련된 부서에 직장을 구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반혁명주의자들을 걸러내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 것이다. 아레나스의 마음은 깊은 상처를 입었다. 친구들의 정부기관 취업은 배신감을 안겨준 것이었다.



쿠바에서 게이 생활을 한다는 것은 점차 위험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아레나스는 욕망을 접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특정한 해변에 가면 남자들이 서로의 파트너를 은밀히 구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레나스도 그 해변에 가서 은밀한 중에 섹스 파트너를 구하였다. 그런데 그렇게 만난 파트너는 섹스가 끝나고 나서 물건들을 훔쳐서 도망가는 일이 많았다. 아레나스도 모처럼 만난 섹스 파트너가 돈과 물건들을 훔쳐서 달아난 일을 겪었다. 아레나스는 너무나 황당하여서 경찰에 도난신고를 하였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경찰을 도둑을 잡으려고 노력하는 대신 아레나스를 동성연애자로서 체포하였다. 경찰은 유명한 작가인 아레나스를 동성애자로 체포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신문에도 발표하였다. 쿠바에서 게이가 된다는 것은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위험요소가 많았다. 동성애자 또는 성전환자가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오면 끊임없는 강간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감옥 당국도 죄수들 간의 그런 행위는 눈감아 주는 형편이었다. 감옥에 들어온 아레나스는 탈옥하려고 몇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다. 한번은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금방 다시 체포되어 모진 구타와 함께 아바나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인 엘 모로(El Morro) 감옥소로 이관되었다. 스페인어의 모로는 바다에 삐죽 나온 곶이라는 뜻이다. 엘 모로에서 탈주할 곳은 헙난한 바다 밖에 없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아레나스는 동성애라는 죄목 대신에 탈옥이라는 죄목으로 엘 모로에 이감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감옥에서의 강간과 같은 일은 당하지 않게 되었다. 아레나스는 감옥에서 살아 남기 위해 동성애자라는 사실은 철저하게 숨겼다. 그래서 아무도 그가 동성애자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이에 따라 섹스와 관련한 가혹행위는 없었다. 아레나스는 엘 모로에서 10년을 보냈다. 말할수 없이 열악한 환경이었다. 차가운 감방에서는 입을 것이나 덮을 것도 거의 없이 지내야 했다. 화장실이란 곳은 불결하기가 짝이 없었다. 구더기가 기어나오는 것이 가장 참기 힘들었다. 먹는 것도 형편없었다. 그나마 하루에 한끼만 주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더 참기 어려웠던 것은 시도 때도 없이 끌려나가 심문과 고문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당국은 아레나스로부터 동성애자였다는 사실과 반혁명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자백받고 싶었다.



아레나스는 1980년 마리엘 해상구조(Mariel Boatlife) 사건 바로 직전에 석방되어서 1만명 피난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갈수 있었다. 미국에 간 아레나스는 뉴욕에 정착할수 있었다. 뉴욕은 아레나스와 같은 반체제 작가들을 포용할수 있는 곳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아레나스는 뉴욕에서 일부 미국인들이 카스트로를 영웅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놀람을 금할수 없었다. 아레나스는 미국이야 말로 피난처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미몽에서 깨어나야 했다. 아레나스는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을 경험해야 했다. 노밸문학상 심사위원회가 호르게 루이스 보르게스(Jorge Luis Borges)와 같은 작가에게는 결코 상을 주지 않을 것이며 대신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마르케스는 카스트로 지지자이며 친구로서 정치적 영향력이 적은 작가나 시인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는 것을 보지 못하여 뒤에서 등을 찌르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 결정은 순전히 정치적인 배려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불편한 심기를 감출수 없었다. 아레나스는 결국 에이즈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고 1990년 12월, 47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약물을 과다 복용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