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다시 뛰는 한국인

정준극 2007. 5. 18. 18:46
 

다시뛰는 한국인


얼마 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간 일이 있었다. IAEA(국제원자력기구)가 주관하는 원자력관련 세미나에 참석키 위해서였다. 김포에서 자카르타행 KAL을 타고 갔다. 목적지가 쟈카르타인 줄 알았는데 승객들이 거의 모두 내리지 않고 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니 덴파사라는 곳까지 계속 간다는 것이었다. 발리로 놀러 가는 한국 관광객이 부쩍 많아져서 덴파사까지 연장 운행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쟈카르타에도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거리마다 한국식당 간판이 눈에 자주 띤다. 그런데 우리 한국인들은 참으로 신통하게도 현지에서 꼴불견의 행동을 아무 부담 없이 부지런히들 한다는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준법정신은 저리가라이고 기본 예의조차 턱없이 부족하여서 자카르타 곳곳에서 물의가 왕왕 있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자카르타의 어떤 가라오케 집에는 간판에 ‘한국인 출입금지’라고 한글로 써 붙인 곳도 있으며 어떤 골프장에는 No Koreans라고 적어 놓은 곳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꼴불견을 통분하여서 어떤 교포분이 ‘추악한 한국인’이란 타이틀의 책을 펴냈는데 우리의 훌륭한 자카르타 거주 한국인들은 반성은커녕  오히려 저자에 대하여 ‘못된 미친놈’이라면서 난리들이었다는 것이다.


세미나 기간중 내가 묵었던 곳은 자카르타 중심가에 있는 ‘호텔 인도네시아’였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주선해 준 호텔이었다. 호텔 바로 옆에는 소고(Sogo)라는 우리나라 건설업체가 세운 대규모 쇼핑센터가 있고 호텔 바로 뒷편에는 코리아 가든이라는 큰 한국식당이 있다. 높아진 한국의 위상을 느낄수 있는 건물들이었다. 호텔 인도네시아의 건물은 한 층의 복도가 계속 연결되어 있어서 자꾸 걸어가다 보면 제자리에 다시 오게 되는 형태이다. 어느날 새벽, 나는 밖의 복도에서 누군가 쿵쿵 뛰는 소리가 나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도대체 어느 정신없는 사람이 새벽부터 쿵쿵 뛰면서 법석일까 라고 생각하며 문에 달린 조금난 렌즈 창을 통해 밖을 정찰했다. 어떤 남녀 두 사람이 운동복을 입고 복도를 따라 씩씩거리며 조깅을 하고 있었다. 밖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비가 내리더라도 호텔 복도에서 꼭두새벽에 쿵쿵거리며 조깅을 하다니….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일까? 나이는 젊은듯한데 생긴 모습을 살펴보니 한국 사람은 아닌것 같고 일본 사람 같이 보였다. 호텔 인도네시아는 이른 바 1급 호텔이어서 일본 투숙객들이 많았다. 어쨌든 우선 새벽에 안면방해 하지 말라고 말해야 할 의무감이 생겨 이들이 복도를 한 바퀴 돌고 다시 나타날 때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나와 용기를 내서 서투른 일본말로 밑져야 본전, 주의를 주기로 했다. 마침 문을 살짝 열어 보니 옆의 옆방에서 투숙했던 어떤 서양 사람도 웬일인가 싶어 문을 비스듬히 열고 내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좀더 용기를 갖고 이들에게 옐로우 카드를 주겠다고 생각했다. 드디어 ‘스미마셍! 사와가시노데 죠또 쓰쓴신데 구다사이’라고 정중히 말했다. 내용인 즉 ‘실례합니다만 시끄러우니 삼가 해 주십시오’이다. 맞는지 안맞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이들도 분명히 일본말을 모르는 듯 했다. 운동복을 입고 조깅을 하고 있던 두 남녀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내가 일본 사람인줄 알고 대꾸도 없이 자기들끼리 ‘아침부터 재수 없게 웬 쪽발이가 지랄이야!’라고 내뱉고는 그냥 내쳐 쿵쿵 뛰어갔다. 저 무례함!


‘아, 한국 사람이었구나! 그렇다면 다시 얘기해야지!’ 그래서 우정 그들이 복도를 한바퀴 다시 돌고 올 때를 기다렸다가 말을 건넸다. ‘여보세요! 이렇게 쿵쿵거리면 어떻게 합니까? 새벽부터…’ 옆의 옆방에 투숙한 어떤 서양 사람은 아직도 문을 빼꼼이 열고 추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두 남녀는 내가 한국말로 무어라고 그러니까 그제야 멈칫하더니 ‘오라! 당신 일본 사람이 아니었군! 그런데 왜 일본말로 난리야! 별놈 다 보았네…’ 완전히 그런 표정으로 나를 아래위로 노려보더니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대뜸 ‘아, 비가 오는데 어쩌란 말요?’라고 쏘아붙이고는 다시 뛰기 시작했다. 다시 뛰는 한국인!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저러니 우리나라가 이 꼴이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미친 놈!’이라고 조그맣게 소리쳤다. 새해 들어 요즘 모두들 ‘국제화’를 소리치며 다시 뛰자고 아우성 치고 있는 시점이다. 거리의 자동차 뒷 유리창에도 ‘다시 뛰는 한국인’이란 스티커를 붙인 사람도 많다. (1994년 1월)


'보덕봉 메아리 > 보덕봉 메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등화가원 유감  (0) 2007.05.22
실화와 우화  (0) 2007.05.22
에펠탑과 한빛탑  (0) 2007.05.22
반대할 자유 찬성할 자유  (0) 2007.05.22
키안티와 원자력  (0) 2007.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