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명과 수표
‘얼음 보숭이’라는 말을 듣고 서는 무슨 뜻인지 몰랐었다.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직승기’라고 하길래 엘리베이터를 말하는 줄 알았었다. 헬리콥터를 직승기라고 한다는 것이다. ‘초대소’가 호텔이란 것도 겨우 설명을 듣고 나서였다. ‘딴은 그렇게도 말할 수 있겠거니’라는 생각을 했다. 트랜지스터는 ‘반도체라지오’이고 ‘스타치’는 녹말을 말하며, 우리는 꽁보리밥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강보리밥’이라고 한단다. 또 우리는 ‘기필코 무엇 무엇을 완수하자’고 하는데 그쪽에서도 ‘불필코 조직하자’고 한다니 아무리 해도 ‘불필코’라는 말과 ‘조직하자’는 말이 어색하기만하다. 왜 그런지 북한에서는 ‘조직’이나 ‘공작’이라는 말을 즐겨하는 것 같다. 남녀가 데이트하는 것도 ‘조직 잘 해 보라우’라고 한다니 말이다.
같은 말을 써왔던 같은 민족인데도 분단 반세기를 거치면서 우리말 자체가 무던히도 많은 변화를 했던 것 같다. 어디 일상용어에서 뿐이랴? 전문과학기술 용어에서도 서로 다른 단어를 쓰고 있는 경우를 사뭇 볼 수 있다. 원자력분야만 해도 그렇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뜻이 크게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다만 표현상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우리는 NPT를 통상 핵비확산조약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핵무기전파방지조약’이라고 한다. IAEA 안전조치(Safeguards)는 북한에서 ‘IAEA 담보’라고 하는데 이건 좀 음미해 보아야 ‘아하! 안전조치를 말하는구나’라고 할 수 있다. 서명(Signature)은 ‘수표’라고 하고 회원국(Member states)은 ‘성원국’이라고 한다. 또 IAEA사찰관(Inspector)은 ‘검열원’이라고 하는데 마찬가지로 일반사찰(Routine Inspection)은 ‘정기검열’, 수시사찰(Ad hoc inspection)은 ‘비정기검열’, 특별사찰(Special inspection)은 ‘특별검열’이라고 한다니 ‘사찰’이 좋은지 ‘검열’이 좋은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의미를 파악하기에는 별로 염려가 없을 것 같다. 오퍼레이터(Operator)를 우리는 운전원이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는 ‘운전공’이라고 하며 선원물질(線源物質: Source material)을 ‘출발물질’이라고 하는 것도 흥미롭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몇 가지 원자력 용어에 있어서 표기에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뜻을 이해하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다고 하겠다. 때문에 이른바 북․미 회담결과 한국형 표준경수로를 북한에 지원하게 되면 남․북 원자력기술자간의 커뮤니케이션 문제는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프랑스가 중국대륙의 남단, 홍콩 건너편에 있는 따야(大亞)만에 광뚱 1, 2호기 원전을 공급할 때에는 언어문제 때문에 적지 않은 혼란이 있었다고 한다. 광뚱지방에서는 뻬이징(北京)말인 만다린이 통용되지 않는다. 광뚱어가 통용된다. 예를 들어 香港을 광뚱어로는 홍콩이라고 하고 만다린으로는 샹강이라고 하니 우리와는 달리 글자 자체의 발음이 판이한 실정이다. 그러니 프랑스로서는 중앙정부가 있는 뻬이징과 건설현장인 광뚱을 오르내리며 서류를 만들고 대화하느라고 고생이 막심했을 것이다. 중국측의 고생도 말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 기술자들이 프랑스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말로 된 각종 서류와 도면을 일단 영어로 고치거나 그렇지 않으면 직접 중국어로 고쳐 이해하느라고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맨날 프랑스어를 중국어로 번역하느라고 시간 다 뺏기고 또 제대로 번역이 안되어 뜻이 생판 달라지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었다고 한다.
프랑스로서는 과거 아편전쟁 후 광뚱지방의 광쪼우만을 조차하여 약 50년 동안 재미 보았던 일이 있다. 그런 연고 때문에 광뚱에 원전을 공급하면서 고향에라도 온 듯한 기분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월이 수없이 지나서 ‘꼬망 딸레부’ 정도의 프랑스말을 할 줄 아는 광뚱인은 찾아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가 광뚱을 식민지로 조차했었다는 적대감정을 잊지 않고 있어서 오히려 낭패를 겪는 경우가 허다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북한에 경수로를 건설해 줄 때에는 대화상의 그런 어려움은 없을 터이니 그것도 이익이라면 큰 이익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있다면 그건 ‘서명’과 ‘수표’와의 차이일 뿐이다. (1994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