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小野道風

정준극 2007. 5. 22. 10:24
 

小野道風 


독일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사색을 하고 둘이 있을 때는 토론을 하며 셋 이상이 모이면 조직을 만든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혼자 있으면 독서를 하고(요즘은 주로 만화나 주간지가 많지만) 둘이 있으면 서로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교환하고 셋 이상이 있으면 이른바 벤쿄가이(勉强會)를 갖는다고 한다. 벤교가이는 세미나, 또는 강습회를 말한다. 사실 일본 사람들 처럼 강습회나 공부모임을 좋아하는 국민들도 없을 듯싶다. 한국 사람들은 어떠한가? 혼자 있으면 낮잠을 자고 둘이 있으면 남을 흉보며 셋이 모이면 고스톱을 친다는 것이다. 상당히 한심하고 창피스러운 조크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에게 ‘도대체 너희 나라의 국민적 오락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모르긴 몰라도 서슴없이 고스톱이라고 답변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나라 웬만한 남자치고 고스톱을 못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고 여자들도 이에 질세라 요즘엔 고스톱을 생활상식으로 생각하는 축이 많다는 얘기이고 보면 과연 우리나라 국민들을 ‘고스톱 국민’으로서 알아 모셔야만 할 것 같다.


화투(花鬪)는 원래 일본으로부터 전래된 것이다. 화투가 우리나라의 독자적인 민속오락 기구라고 주장하는 백성들도 간혹있으나 그건 천만의 말씀이다.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걸쳐 일본을 찾아왔던 포르투갈 상인들이 카르타라는 자기들의 놀이딱지를 일본에 전파했고 일본인들이 이것을 본따서 하나후타(花札)를 만들었으며 이것이 조선말기와 일제시대 초기에 쓰시마(對馬島)상인들을 통해 우리나라에 유입되어 화투로 개명된 후 토착화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쨌든 화투가 들어오면서 옛날식 투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문제는 화투의 유입경로가 어떻고 전래의 투전놀이가 사라져서 어떻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국민들이 오죽 오락이 없으면 화투에 전념할까 하는 안스러움과 함께 화투가 놀이로서의 기능보다는 영리목적으로 변질되어 가고 있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어쩌라? 고스톱을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겠고, 다만 바라건대 비록 열 두 달 화투장을 운용하는 고스톱이지만 혹시 우리가 배울 점이 있다면 그런 내용은 알기나 하고 나서 즐기는 것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된다.


주지하는대로 화투는 일 년 열 두달을 표현하고 있다. 일월 송학은 소나무와 학이고 이월 매조는 매화와 꾀꼬리이며 삼월은 벚꽃이고(삼광은 벚꽃을 바구니에 담아 놓은 그림) 사월은 등나무(우리나라에선 흑싸리)와 두견재(우리나라에선 종달새)이며 오월은 꽃창포(우리나라에선 난초)이고 유월은 모란과 나비 그림이다. 칠월은 홍싸리와 멧돼지이며 팔월은 공산명월에 기러기 세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이고 구월은 국화 또는 국준(菊俊)이라고 부르니 구월 열끗에는 국화주를 담아 마시는 술잔이 그려져 있다. 시월은 단풍에 사슴이고 십일월은 오동에 봉황이다. 그런데 십이월은 다른 달에 비하여 그림이 판이하다.


우선 십이월에 눈이 아니고 웬 비가 오냐고 수상하게 생각하겠지만 처음 포르투갈 상인들이 드나들었던 일본 남쪽지방은 12월에도 날씨가 따뜻하여 눈이 오지 않으므로 그점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그보다도 비 광(光)에 그려져 있는 인물이 과연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이 더 흥미로울 것 같다. 비광에는 어떤 사람이 비오는 날 우산을 들고 있는 모습과 함께 버드나무 가지와 개구리가 그려져 있다. 그 인물은 일본 헤이안(平安)말기 후지와라(藤原)시대의 유명한 서예가 소야도풍(小野道風․오노노도후라고 읽음)이다. 그의 서예작품들은 오늘날 일본의 국보로서 대단한 존경을 받고 있으며 도무지 값으로 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비광에 그려져 있는 내용은 바로 오노노도후의 청년시절 에피소드를 담은 것이다.


그는 일찍부터 서예에 뜻을 두어 불철주야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였으나 뜻만 가상할 뿐 도무지 일취월장하지를 못하여 크게 낙담하고는 포기하려 했다. 십이월의 어느 비오는 날, 그는 자신의 무능과 한심함을 탓하며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웬 개구리 한마리가 버드나무 가지에 있는 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계속 점프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러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노력 끝에 성공, 드디어 목표로 삼은 벌레를 끝내 잡아먹었다. 오노노도후는 ‘항차 저런 미물도 노력 끝에 성공하거늘 인간이란 내가 이게 무슨 꼴이냐?’라고 하고서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서예에 몰두하여 종국에는 오늘 날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서예의 대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노력하면 성공하기 마련이다. 노력도 하지 않고 성공하려는 것은 허황된 꿈에 불과하다. 설령 성공했다 하더라도 모래 위에 지은 집에 불과하여 비가 내리거나 홍수가 나면 무너지기 십상이다. 1994년을 마지막 보내는 십이월에 오노노도후의 교훈을 거울삼아 새해에는 더욱 노력하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다.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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