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뢴트겐과 명성황후

정준극 2007. 5. 22. 10:25
 

뢴트겐과 명성황후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은 누가 뭐라고 해도 단연 노벨상일 것이다. 노벨상은 기본적으로 물리학, 화학, 생리․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분야(최근엔 경제상 추가)에서 인류를 위해 탁월한 업적을 쌓은 인물에게 주는 것이다. 노벨상은 일찍이 1901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1995년으로서 어언 94회를 기록한다. 94회이므로 1회에 최소한 다섯 명의 수상자가 있다고 친다면, 지금까지 도합 5백 명 남짓의 인물들이 영예의 노벨상을 받은 셈이다. 우리나라는 아직 노벨상 후보자 명단에 조차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는 딱한 형편이다. 이웃 일본만 해도 물리학상, 문학상 등등 벌써 수차례 수상자를 내서 희희낙락한 입장이며 중국도 그렇고 인도도 그런데 유독 ‘우수한 배달민족’이라는 우리만이 그 반열에서 탈락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의 소원은 노벨상, 꿈에도 그리는 노벨상’이란 노래가 나올 법도 한 실정이다.


주지하는대로 노벨상은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스웨덴의 알프레드 노벨이 남긴 유산으로 기금을 삼은 것이다. 노벨상 수상자에 대한 상금은 1인당 약 25만불(약 2억원)이다. 1901년 제1회 노벨 물리학상은 독일의 물리학자 빌헤름 뢴트겐이 받았다. X-선을 발견한 공적 때문이었다. 뢴트겐은 지금부터 1백 50년 전인 1845년 프러시아의 레네프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1845년이라고 하면 김대건 안드레아가 상하이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신부가 되어 밀입국한 바로 그 해이다. 뢴트겐은 독일의 뷔르츠부르크대학교수 시절에 X-선을 발견했다. 이 새로운 발견이 오늘날 우리 인류의 문화와 생활에 얼마나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는지는 말로 다 표현 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X-선은 특히 의학적으로 크게 이용되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뢴트겐의 X-선 발견을 기리기 위하여 지금도 X-선의 단위를 뢴트겐으로 부르고 있고 또 X-선을 일명 뢴트겐선이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뢴트겐은 X-선 발견으로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누구든지 X-선을 이용하는 사람으로부터 로열티를 받기로 했다면 정말로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뢴트켄은 X-선에 대한 특허를 내서 사용료를 받거나 또는 어떤 재정적 보상을 받는 일을 모두 거절했다. X-선은 원래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고 다만 그것을 발견한 것 뿐인데 그게 무슨 대단한 일이겠느냐는 주장이었다. X-선이 인류를 위해 폭넓게 이용된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얘기였다. 세계만민은 뢴트겐의 이같은 처신을 노블 제스처(Noble gesture)라고 하며 한없는 존경을 보냈다. X-선 발견으로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던 뢴트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가난하기 이를데없는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차대전 후의 극심한 경제공항에서 헤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발견한 X-선으로 수많은 전상자들이 치료를 받아 생명을 건졌지만 정작 자신의 가난한 삶은 치료하지 못했던 것이다.


뢴트겐의 X-선 발견은 간혹 제2의 과학혁명이라고까지 불리고 있다. 제1의 과학혁명인 갈릴레오의 업적 이래 최대의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대단한 업적이었다. 그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한 것이 1895년이므로 올해로서 꼭 1백년을 맞이하게 된다. X-선 발견 1백주년을 맞이하여서 우리의 원자력계가 처신해야 할 바는 바로 뢴트겐의 노블 제스처와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원자력계는 국민을 위한, 국가를 위한 원자력이 무엇인지를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원자력 기술자립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도 국가이익을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고, 원전기술의 해외진출에 있어서도 국가이익을 우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뢴트겐이 X-선을 발견하여 우리 인류에게 방사선의 무한한 혜택을 안겨다준 1895년은 명성황후(민비)가 일본 낭인들의 칼에 비참하게 살해된 해이기도 하다. 지구의 한쪽에서는 새로운 과학문명을 개발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그런 비참한 일이나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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