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고도를 기다리며

정준극 2007. 5. 22. 10:26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다. 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한 사무엘 베켓의 작품이다. 이 연극이 초연된 것은 지금부터 70여 년 전인 1923년 파리의 어느 소극장에서였다. 1923년은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나 14만 명의 인명이 피해를 본 해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 당시 파리에서 이 연극을 관람했던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것도 연극이란 말인가?’라면서 무척 황당해 했었다. 도무지 기존 관념으로서의 연극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빅토르 위고에 감격하고 몰리에르에 재미있어 했던 사람들로서는 아무리 새로운 연극 형태라고 해도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것같다.


해질 무렵, 어딘지 모르는 시골길에서 두 사람의 떠돌이가 누군가를 무작정 기다리고 있다. 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고도(Godot)라는 인물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렇게 기다리면서 주고받는 대사나 동작은 정말이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뿐이다. 이것이 제 1막의 내용이다. 제 2막은 다음 날이다. 이날도 거의 같은 내용이 반복된다. 관객은 고도가 누구인지, 과연 나타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두사람은 여전히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무작정 기다리기만 한다. 그러다가 막이 내린다. 물론 고도는 그림자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것이 ‘고도를 기다리며’의 대충 내용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 이 연극이 약간의 관심을 모아 히트를 기록한 바 있다. 어떤 사람들은 노벨상수상 작품이라고 하니까 은근한 경외심을 가지고 이 연극을 미화하는 논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존재를 막연히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멋있는 일인가? 이거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네 일상생활의 그늘에 숨어 있는 존재적 불안을 파헤친 작품’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논평을 하기도 했다.


사회가 혼란하게 급변하다 보니 기존의 가치관도 무심하리만치 이상한 형태로 변하기 일쑤이다. 이것이 시대적 조류인 듯 싶어 어쩔 수 없지만 부질없는 얘기를 나누면서 실존하지도 않는 존재를 논한다는 것은 정말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다. 또 연극이면 연극이지 반연극(反演劇)은 무엇인지 모를 일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이러한 조류에 한 몫 하는 반연극으로 평가되어 각광을 받았고, 급기야는 1969년 사무엘 베켓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영예를 안게 되었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든지 ‘반’(反)이란 접두사가 들어가면 왠지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이 통상이다. 기존체제를 반대하는 반체제가 그렇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까지도 반대하는 반핵이 그러하다. 문제는 기존 가치관을 부정하는 그런 비도덕적 및 비합리적 주장이 일부 동조자들에게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원자력폐기물 관리시설 후보부지로 굴업도라는 고도(孤島)가 선정되었다. 근자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반핵운동하는 사람들은 원자력폐기물을 무인도로 보내라고 아우성 쳤었다. 육지에는 절대로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다가 정작 무인도와 다름없는 외딴 섬으로 후보부지가 결정되자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굴업도는 안된다. 육지에 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고 있다. 수송에 위험이 있다느니, 지질학적으로 조건이 맞지 않는다는니 하면서 굴업도에는 안된다는 주장이다.


주지하는대로 지하동굴 방식의 폐기물처분장은 어떤 지질학적 조건이라 해도 공학적 안전개념을 도입하면 아무 걱정이 없다. 이점은 1월 26일 IAEA 전문가들이 기자회견을 통해 충분히 강조한 내용이다. 설령 굴업도 지역에 고베지진과 같은 대규모 지진이 일어난다고 해도 지하동굴이 피해 볼 일은 없다. 만의 하나 지하동굴에 보관되어 있는 폐기물 드럼이 손상된다고 해도 방사능이 외부로 노출될 염려는 없다. 도대체 말이 원자력폐기물이지 실상 알고 보면 방사능이 포함되어 있는 정도는 극히 낮다. 설령 방사능이 들어 있다고 해도 방사능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정도가 약해지기 때문에 더더구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 이른바 반감기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방사능이 무서워서 폐기물처분장을 결사반대한다느니 하는 것은 한낱 부질없는 대화일 뿐이다. 어쨌든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리고 우리 연구소 사람들은 더 이상 부질없는 대화를 나누면서 고도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있고 싶지는 않다. 누군들 고도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이겠는가? 정부에서 정한대로 따르는 것이 도리이기 때문에 가려고 하는 것임을 사회 각층에서는 알아주었으면 한다. (1995년 2월)

'보덕봉 메아리 > 보덕봉 메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라도 잘 지키자  (0) 2007.05.22
주유천하  (0) 2007.05.22
뢴트겐과 명성황후  (0) 2007.05.22
小野道風  (0) 2007.05.22
서명과 수표  (0) 2007.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