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주유천하

정준극 2007. 5. 22. 14:47
 

주유천하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석유를 무던히도 쓰고 있다. 우리나라가 1994년에 외국으로부터 수입한 에너지는 약 1백70억 불이나 된다. 우리 돈으로 따지면 약 13조 원이다. 1년에 13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돈을 다른 나라에 주고 석유 등등을 사서 쓰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에너지자원 빈국(貧國)이다. 고작 있다고 해야 품질도 썩 좋지 않은 소량의 석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천문학적 액수의 에너지를 해마다 사정사정하여 사오고 있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의 에너지 해외 의존도는 95퍼센트에 이르는 놀라운 것이었다. 에너지는 국력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국력의 95퍼센트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고 있으니 한심하고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자동차는 왜 그렇게 많으며 또 주유소는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1994년말 현재 우리나라 국민들의 자동차 보유 현황은 대략 인구 6명 당 1대 꼴이라고 한다. 그것이 1995년에는 인구 4.5인 당 1대 꼴이 될 것이라고 하니 좁은 국토와 좁은 도로에 자동차 홍수는 어떻게 감당할 것인지 걱정이 앞선다.


최근 대전광역시의 통계에 따르면 대전에서는 하루에 4백 대의 차량이 새로 등록되고 있다고 한다. 말이 4백 대이지 그건 대전시의 도로용량이나 주차능력을 따져 볼 때 심각함을 넘어서는 일이다. 어쨌든 이런 현상에 발맞추어 주유소도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다른 데는 자세히 몰라도 대덕연구단지 주변은 우후죽순이란 말이 실감날 정도로 주유소가 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신성동 삼거리 주유소와 복지회관 옆 연구단지 주유소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열댓 군데도 넘는다. 우리 원자력연구소로 오는 길목만 해도 네 군데나 새로 생겼다. 화암주유소도 생겼고 풍암주유소도 생겼다. 한빛주유소가 생겼는가 하면 바로 옆에 은빛주유소도 생겼다. 주유소 두 개가 서로 붙어 있는 곳도 있다. 가히 ‘주유천하’(注油天下)의 형국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심리가 참 묘하다. 대형 화재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휘발유 주유소가 바로 자기 집 뒷마당에 있는데 대하여는 무관하면서도 ‘안전 1백퍼센트’의 원자력 폐기물 관리시설을 자기네 마을 한적한 곳에 설치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에 대하여는 마치 당장 죽기나 하는 것처럼 난리를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원자력폐기물 시설을 반대하는 겉으로의 이유는 방사선이 위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각국에서 입증된 바로는 원자력폐기물처분장 때문에 추가로 나올 수 있는 방사선의 양은 자연 방사선량의 2백40분의 1에 불과한 1밀리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 예컨대 주유소에서는 얼마나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석유에 포함되어 있는 방사선물질(탄소-14등) 때문에 1년에 몇십 밀리렘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부담가는 것인가?


원자력폐기물 관리시설 부지가 서해 고도 굴업도로 결정된 지도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간 공청회도 가졌고 지역주민의 외국 원자력폐기물 관리시설 견학도 가졌으며, 언론인과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국제원자력기구 전문가의 현지시찰도 있었다. 그리고 2월 15일에는 부총리가 위원장으로 있는 원자력위원회의 의결도 거쳤으며 2월 27일에는 굴업도에 대한 지정고시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갈 길은 멀다. 핵심 연구시설의 설치 지역이 여긴지 저긴지 불분명하고 연구원 주거 시설 지역이 어디가 될지도 불투명하다. 어서 속히 모든 것이 확정되었으면 한다. 돌이켜보면 지나간 6-7년 동안 우리 연구소는 부지 확보를 위해 글자 그대로 힘든 주유천하(周遊天下)했었다. 영덕으로부터 비롯하여 안면도, 영일, 양산, 고성, 장흥, 울진 등등 전국을 발이 닿도록 다녔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 연구소원들이 겪는 고초는 필설로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다. 이제 가까스로 정부에 의해 후보부지가 결정됨으로써 그동안의 주유천하가 종착역에 도달한 듯 싶어 씁쓸한 감회가 깊지만 그래도 갈 길은 먼 것 같아 정말 안타깝다. 다만 바라건대 이젠 현지에 가서 살아야 하는 우리 연구소원들의 입장도 한줄기 고려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막무가내는 반대 지역주민이나 반핵환경단체의 주장만 ‘옹야옹야’ 수용하지 말고-.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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