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과 원자력
오늘날 우리가 한글이라고 부르는 명칭은 5백 수십년 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글이란 명칭은 약 70년 전 한글학자 주시경(周時經)선생이 처음으로 주창하여 쓰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것은 온 백성들이 그 어려운 한문의 속박에서 벗어나 누구든지 쉽게 배우고 쉽게 쓸 수 있는 우리민족 고유의 독창적인 글자가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역사상 세종대왕만큼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오로지 백성들을 위하여 헌신 봉사했던 공직자도 아마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물론 훈민정음이 세종대왕 단독의 힘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성삼문,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등등 수많은 공무원들이 세종대왕을 보좌하여 훈민정음을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라는 오늘날의 헌법정신이 그 당시에도 이미 확고했었다고 짐작된다. 부연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지만 한글의 위대함은 가히 세계적이 아닐 수 없다.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것은 물론이려니와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다.
이 세상에는 약 2천 5백 내지 3천 5백 종류의 언어가 있다. 그중 체계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불과 50여 종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들 문자 중에서 어떤 한 사람의 위대한 인물이 백성을 긍휼히 여겨 친히 나라글자를 발명하여 쓰도록 한 예는 과문이로되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세계만방에서 유독 우리나라만이 한글날이라는 자랑스러운 기념일을 정하여 매년 행사를 하고 있다. 모두 세종대왕의 업적 덕분이다. 이렇듯 위대한 훈민정음이었건만 과거 5백념 동안 이런저런 형편으로 푸대접을 많이 받아왔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백성을 위한 정음(正音)인데도 불구하고 세종실록을 보면 「상친제언문이십팔자」(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 하여 훈민정음이란 명칭은 어디로인지 사라졌고 대신 한문에 비하여 한 단계 서열을 낮춘 ‘언문’이란 표현을 했다. 짐작컨대 당시 양반나리의 안중에는 뿌리 깊은 모화사상과 함께 샘물처럼 마르지 않는 한문숭배 사상이 만연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정음이 뭐냐, 언문이지’라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 이 같은 푸대접은 이조 중엽에 이르러 더욱 두드러졌다.
훈민정은을 상민들이나 쓰는 글자라고 해서 ‘아랫글’이라고 무시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한때는 여자들이나 쓰는 글자라고 해서 ‘암클’이라고 했다. 훈민정음의 수난도 이쯤되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그후 이조말엽에 이르러 ‘국서’ 또는 ‘국문’이란 식으로 약간 격상된 호칭을 유지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잠시뿐, 일제시대에는 ‘조선글’이라고 해서 무진 천대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일제(日帝)는 내선일체라고 하여 일본말과 일본글을 국어라고 강요하지 않았던가. 이에 우리글과 우리말을 사랑하는 학자들이 모여 조선어학회(한글학회)를 만들고 훈민정음 반포 8주갑(4백 80년)이 되는 해인 1926년부터 우리글 기념일을 자축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제의 눈초리 때문에 ‘조선글 기념일’이라고 하기도 어려워서 ‘가갸날’이라고 했다. 우리글을 배울 때 ‘가갸거겨...’한다고 해서 그렇게 부르기로 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습기도 하거니와 한편 딱하기도 한 기념일 명칭이었다. 그 지경에 주시경선생이 한글이란 명칭을 처음 주창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므로서 ‘가갸날’도 ‘한글날’로 개칭되었던 것이다.
비약이 될지 모르겠지만 이렇듯 한글이 겪은 고난의 역정은 마치 우리나라의 원자력사업, 구체적으로는 바로 우리 원자력연구소가 지나간 40년 남짓 걸어온 고난의 역정과 비슷한 것 같아 한글날을 맞는 10월 오늘, 일말의 감회가 없다고 아니할 수 없다. 간략히 더듬어 보더라도 1950년대 말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원자력원이 설립되어 이 나라 근대 과학기술 연구기관의 효시로서 빛나는 출발을 하였으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원자력이란 단어도 쓰지 못하고 대신 에너지연구소라는 엉뚱한 문패로 10여 년을 견뎌야 했다. 그리고 요즘은 어떤가. 원전핵심기술 이관요청 문제, 방사성폐기물관리사업 추진 문제, 핵융합연구문제, 원전공급자 역할의 자회사 설립문제 등등.... 말도 많고 탓도 많은 세상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 연구소의 모습이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애처롭기도 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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