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하루는 길지만 일년은 짧다

정준극 2007. 5. 22. 14:52
 

하루는 길지만 일년은 짧다


호젓한 산책길에 수북이 쌓여 있는 노란 은행잎을 한 개쯤은 주워 보고 싶었다. 책갈피에 넣어 두었다가 얇은 종이처럼 바삭해진 은행잎을 우연히 발견하고 싶었다. ‘아, 이거 언제 여기 넣어 두었었지?’....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 산을 올해엔 만사 제쳐놓고 한번 가보고 싶었다. 남들은 해마다 설악산이니 내장산이니 하면서 만악(萬岳)의 추심에 흠뻑 젖고 온다는데.... 지난 여름만 해도 그렇다. 바닷가 근처에는 커녕 가까운 계곡에 가서 발 한번 담궈 보지 못했다. 남들은 여름휴가 때 말레이시아에 갔다 왔다느니 필리핀에 갔다 왔다느니 하는데.... 주말마다 등산을 가거나 낚시를 가거나 골프를 치러 가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들 예사 사람들이 아닌 것 같아서 은근히 존경심마저 갖게 된다. 참 여유도 많은 사람들이네! 산다는 게 무언가?


삶이란 무엇인지 음미해 볼 겨를도 없이 어느덧 한해를 마무리 짓게 되었다. 벌써 12월! 1995년도 저물어 가는 시점에 들어섰다. 1년이란 세월이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후딱 지나갔다. 세월이 여류(如流)하다느니 쏜살같이 세월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모두 저 건너 얘기처럼 들렸었다. 정말 요즘 같아선 한해가 언제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다. 우리 원자력연구소 직원들만 시간개념을 잊고 사는 것 같아 딱한 심정이 든다. 이제 며칠후면 영원한 과거로 사라져버릴 1995년!. 과거가 있기에 현재가 있는 것이고 현재가 있기에 미래가 있는 것이라는데 ‘지나간 일은 생각하기조차 싫다’고 하면서 애써 망각해 버린다든지 또는 ‘앞날이야 어떻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하면서 현재의 상황에만 급급하다면 그런 사람. 그런 기관에게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역사가 귀중하다는 것이고 과거를 통하여 값비싼 교훈은 얻는다고 하지 않던가.....


다사다난(多事多難).... 올 한해는 우리 사회가 글자그대로 다사다난했던 시간들을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문이나 방송의 연말특집을 통해 올해의 10대 뉴스를 보게 되면 우리 모두가 이 다사다난했던 세상 속에서 얼마나 끈질기게 생존해 왔는지를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정신없이 보낸 한 해였다. 우리사회 전체가 그랬을 뿐만 아니라 우리 연구소의 경우에도 그랬다. 좋은 일도 있었고 보람찬 일도 있었지만 괴롭고 힘들었던 일이 오히려 더 많았던 것 같다. 오죽하면 ‘바람 잘 날 없다’라고까지 하면서 자조 섞인 타령을 할 정도였겠는가?


10년 역사(役事) 끝에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하나로를 준공한 것은 보람있는 일이었다. 김영삼 대통령도 와서 보셨고 한스 블릭스 IAEA 사무총장도 와서 보고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홀미움 암 치료제 개발, 자유전자레이져(FEL)개발, 열병합원자로 개발 착수, 새로운 연구용원자로 핵연료 제조기술 개발, 경수로 사용후핵연료의 중수로 이용 연구개발 본격 착수, 터키 아쿠유 원전 타당성조사 용역 체결을 비롯한 활발한 기술수출 활동, PSA(확율론적안전성분석) 1995 국제학술회의 개최 등.... 이런 것들은 우리 연구소가 올해에 이룩한 자랑거리들이다.


반면 일파만파의 고난도 그 어느 때 보다도 많았던 한해였다. 전국을 뒤흔들었던 이른바 이병령 보직해임 파문, 공연히 오해만 샀던 해커 파동, 출범하기도 전에 좌초부터 해야 했던 뉴클리어 밴쳐 역할의 자회사 설립 파동, 그리고 느닷없는 활성단층 발견으로 거센 풍랑에 휩싸인 굴업도 이슈 등등.... 참으로 말도 많았고 탓도 많았던 ‘원자력 한 해’였다. 어렵고 괴로웠던 일들이 밑도 끝도 없이 계속된 한해였다. 매일매일이 이슈와 이벤트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왜 우리만~’이라는 푸념이 굴뚝같기도 했다. 하루하루가 그저 1년처럼 길기만 했던 1995년의 삶! 삶은 달걀도 아니요 감자도 아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하루하루는 길게, 그리고 1년은 짧게 지내는 것이 우리네 삶인 듯 싶다.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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