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월남의 달밤

정준극 2007. 5. 22. 14:52
 

월남의 달밤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는 한문으로 하내(河內)라고 적는다. 도시 이곳저곳에 호수와 강이 많기 때문이다. 하노이에서 가장 큰 호수는 시내중심을 감싸고 있는 서호(西湖)이다. 중국 항주에 있는 서호만큼이나 경치가 아름답다고 해서 이름을 그렇게 붙였다는 것이다. 베트남의 산하와 길게 이어진 해안선은 어디를 가보던지 참으로 아름답고 평화스럽다. 그렇지만 이 나라의 역사는 결코 평화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월남전쟁을 경험해야 했고 또 그 이전에는 프랑스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아야 했다. 프랑스의 식민지로 오래 있었기 때문에 웬만한 도시에는 프랑스 문화의 잔영이 남아 있다. 하노이는 월남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아서인지 프랑스풍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커다란 관청건물, 말쑥한 대사관건물, 화려한 유명호텔은 대부분 프랑스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서 보기에 아주 좋다. 하노이에서 제일 큰 병원인 바크 마이(Bach Mai)병원은 특히 인상적인 건물이다. 5층으로 된 이 건물은 마치 프랑스의 어느 바로크 저택과 같은 우아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1924년 설립된 병원이라고 하니 70년도 더 넘은 오래된 병원이다.

 


 하노이의 인도지나 라디움 연구소 (바크 마이 병원) - 퀴리 부인과 그의 딸 이렌느 퀴리가 많은 지원을 한 병원



하노이에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주관의 세미나가 있어서 처음으로 월남 땅을 밟게 되었고 그때에 베트남원자력연구소(VINATOM)의 주선으로 이 병원을 시찰할 기회가 있었다. 세미나에 참석했던 우리일행은 ‘하노이에도 이런 훌륭한 건물의 병원이 있었나?’하면서 못내 감탄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정작 우리 일행을 감탄케 한 것은 단순히 건물의 외양이 아니었다. 저 유명한 퀴리부인이 이 병원을 처음 설립했다는 사실이었다. 이 병원의 원장은 마리 퀴리의 친필서명이 들어 있는 하노이 암병원 개설증명서를 보여주었다. 퀴리부인의 딸인 이렌느 퀴리도 이 병원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여러모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몇가지 방사선의료장비는 이렌느 퀴리가 프랑스원자력청(CEA)을 통하여 보내 준 것이라고 한다. 이렌느 퀴리의 부군인 졸리오 퀴리는 CEA(프랑스원자력청) 창설자 겸 초대청장을 지낸 분이다. 어쨌든 하노이 암병원은 방사선의학분야에서 인도지나반도는 물론 동남아 전역에서 알아 모시는 훌륭한 병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 허울만 좋은 양상으로 전락해 버렸다. 건물의 외양은 전통에 빛나는 것처럼 위풍이 있었지만 내부의 병실과 의료장비들은 정말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녹슨 의료장비, 지저분한 병실, 너무나 가난하여 애처롭게까지 보이는 환자와 보호자들.... 세상에 이런 형편없는 시설에서 무슨 치료를 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설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 일행을 정말 감명시킨 것은 말할 수 조차 없이 열악한 조건 아래에서도 뜨거운 봉사정신과 한없는 열성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는 의료진들의 모습이었다. 비록 세탁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같은 후줄그레한 까운을 입고 있었고 청진기는 하도 낡아서 고무호스가 삭은 것을 들고 다니는 그들이었지만 진지함으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정말 숭고할 정도였다. 퀴리부인의 인간애를 존중하는 심정을 전통으로 받아들여서 였을까? 이 병원 의료진(중견의사)의 평균 봉급은 월 3백20불 정도라고 한다. 단돈 3백 20불.... 그건 우리 일행이 묵었던 하노이 호텔의 단 이틀 숙박비와 똑같은 액수였다.


그날 오후 하노이 시내구경을 나갔을 때 우리를 계속 따라다니면서 무슨 기념품을 사라고 조르던 어린 소녀가 생각난다. 갈대 잎으로 엮은 장식용 작은 모자 같은 것을 사라고 했다. 모자 네 개에 1불만 내라고 했다. 집에서 할머니와 함께 하루종일 걸려 모자 네 개를 만든다고 했다. 우리는 맨발의 그 어린 소녀가 불쌍해서 기념품은 필요 없으니 돈이나 받으라고 하고는 몇 불을 손에 쥐어 주었다. 열살도 채 되지 않은 듯한 그 소녀는 웃는 얼굴로 ‘돈은 고맙지만 안 받겠다’고 하면서 다른 데로 가 버렸다. 우리와 함께 있던 베트남원자력연구소 직원의 얘기가 귀에 남는다. ‘저 아이는 좀 특별하네요. 어쨌든 당장 가난하지만 자존심마저 가난한 것 같지는 않군요....’ 서호에 비친 월남의 달이 어젯밤보다 좀 더 밝아진 것 같았다.  (1996년 1월)

 

 

 

하노이의 서호에서 (199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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