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마스코미

정준극 2007. 5. 22. 15:06
 

마스코미


일본사람들은 외래어를 많이 쓴다. 현재 일본의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단어의 10%정도가 외래어이다. 일찍이 아놀드 토인비는 ‘서로 다른 문명이 접촉할 때에는 의례 한쪽이 피해를 입기 마련이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에는 외래문명, 구체적으로는 미국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피해를 보기는커녕 그것을 적절히 소화융합하여 아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기막힌 재질을 보여주고 있다. 언어의 세계에서 특히 그러하다. 웨브스터사전에도 올라와 있는 카라오케라는 신조어는 대표적인 예이다. 카라(空)는 ‘비어있다’ 또는 ‘가짜’라는 뜻이며 오케는 영어단어 오케스트라(Orchestra)의 앞머리에서 따온 것이다. 이 요상한 신조어가 오늘날 세계 방방곡곡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으니 문화의 역수출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참으로 대단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역시 일본인들은 조어(造語)의 천재들이다.


카라오케와 같은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일본사회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고갸류라는 단어도 그런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다. 어린이라는 뜻의 고도모에서 ‘고’를 따오고 여기에 영어의 Gril(일본 발음으로는 갸루)을 붙여서 고갸루라고 하는 신조어를 만든 것이다. 성인여성들 뺨치게 신세대 활동을 하고 있는 어린소녀들을 말한다. 세상에 일본사람들처럼 외래어(특히 영어)를 일본식으로 만들어 당연하게 쓰고 있는 사람들도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 중에도 외국어 단어를 단축 내지 축소하여 쓰는 재질은 정말 특출하다. 퍼스날 컴퓨터는 화스콘이며 닌텐도(任天堂)로부터 퍼진 훼밀리 컴퓨터는 그냥 화미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워드프로세서는 간단하게 와프로이다. 그러므로 외국인에게 화스콘이나 화미콘 또는 와프로라고 하면 무슨 말인지 몰라 얼떨떨 하다가도 나중에 오리진을 알고나면 ‘그게 그 뜻이구나’라는 가벼운 감탄을 하기가 십상이다.


마스코미라는 신조어가 있다. 매스 콤뮤니케이션을 팍 줄여서 자기들 발음대로 그렇게 부르고 있다. 마스코미의 동생쯤 되는 구치코미라는 말도 생겼다. 역시 일본어와 영어의 기막힌 합작이다. 구치(口)는 입을 말하며 코미는 콤뮤니케이션을 의미하므로 결국 구치코미라는 합성어는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소문’을 뜻한다. 역시 최근 유행하는 단어에 바카푸루라는 것이 있다. 세상물정을 제대로 모르고 좀 모자란 듯 촌스럽게 행동하는 한쌍의 젊은 남녀를 바카푸루라고 부른다. 바보스럽다는 의미의 바카와 한쌍이란 뜻의 카플(Couple)을 적당히 혼합한 신조어이다. 마스코미라는 신조어를 바카푸루처럼 일본어와 영어의 합작으로 간주하여 또 다른 뉘앙스를 풍기도록 쓰는 경우도 있다. 즉 마스코미의 코미를 쓰레기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요즘 잘 쓰는 용어로 소다이코미라는 것이 있다. 못쓰는 가구나 이부자리 같은 것은 일반 생활쓰레기처럼 수거해 가지 않으므로 미리 연락해서 돈을 내고 치우도록 하는데 이를 소다이코미(유료쓰레기)라고 한다. 코미라는 말은 원래 콤뮤니케이션을 뜻하는 것이지만 요즘에는 쓰레기를 뜻하는 용어로 변형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거품경제의 후유증으로 대량생산되는 명예퇴직자 등을 의미할 때에 마스코미(집단 쓰레기), 나아가 소다이코미라고 까지 빗대어 얘기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넘쳐나는 쓰레기처럼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는 각종 신문과 잡지도 마스코미라고 한다니 그것 역시 은근히 실감나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건 그렇고 일본의 원자력계가 요즘 공전의 골치를 앓고 있다. 고속증식로 몬쥬사고와 PNC(동력로핵연료개발사업단)의 토카이무라(東海村) 재처리공장 사고로 이어지는 시끄러움이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지혜의 상징인 몬쥬의 앞날이 불투명해졌고 PNC는 민영화가 된다는 구치코미에 휩싸이게 되었다. 일본 과학기술청(STA)해산논의도 만만치 않으며 정부의 원자력위원회와 안전심사위원회 같은 조직도 아예 재편하자는 주장이 심심찮게 마스코미를 통해 흘러나오고 있다. 일본의 원자력계가 마스코미 또는 소다이코미가 된다면 그 여파는 우리나라에서도 만만치 않게 닥쳐 올 것이니 은근히 걱정이다. 아무튼 우리나라의 8월은 특히 일본을 생각하는 달이다. (1997년 8월)

'보덕봉 메아리 > 보덕봉 메아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도로 가는 길  (0) 2007.05.22
나이아가라의 밤  (0) 2007.05.22
정 때문에  (0) 2007.05.22
새우도 반핵  (0) 2007.05.22
용의 눈물  (0) 2007.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