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선원과 조사

정준극 2007. 5. 22. 15:24
 

선원과 조사


70년대 말쯤이던가? 어느 일간 신문에 ‘원자력연구소, 武器硏究 착수’ 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려 대단히 황당해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핵무기 의혹국 중의 하나로 분류되어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고 더군다나 박대통령이 간혹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묘한 코멘트를 하는 바람에 국제적 분위기가 썰렁하던 차였다. 그러던 터에 원자력연구소가 무기연구를 한다는 제목의 기사가 신문에 났으니 여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제목만 그렇지 내용은 전혀 다른 것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과기부 및 청와대에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는 바람에 해당 신문사만 항의를 받았을 뿐이었다. 실은 세계적으로 무기화학분야에서 무기(無機)결정체가 효과적으로 많이 쓰고 있는 실정이어서 우리 우리연구소에서도 무기결정체 개발을 시도해보겠다는 생각을 누가 했는데 그만 신문에 나게 되었던 것이다. 6.25 전쟁을 겪었고 반공을 국시로 삼고 있는 입장에서는 무기라는 말이 나올 때 얼핏 무기(武器)를 연상하는 것은 별로 핀잔 받을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신문에서조차 심심하면 무기화학을 武器化學으로, 무기재료 개발연구를 武器材料 開發硏究로 쓰는 경우가 있었다. 어쨌든 원자력과 관련하여 무기화학 연구라든지 무기재료 개발이라든지 하는 기사가 나오면 설명하느라고 꽤나 골치 아팠던 것이 당시였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대단위방사선조사시설을 준공해서 가동한다고 하니까 ‘아니, 방사선으로 범인까지 조사하나 보네’라고 말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았다. 쪼인다는 뜻의 조사(助射)는 생각하지 않고 범인을 조사한다는 조사(調査)를 무조건 연상했기 때문이었다. 연수원에서 방사선 선원(線原)에 대한 교육을 한다고 하니까 ‘아니, 원자력연구소에서 선원(船員)도 교육하나 보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관인 것은 산란이라는 용어 때문에 빚어지는 에피소드였다. 중성자산란(中性子散亂)에 대한 연구과제가 있어서 정부에 예산요구를 올렸더니 예산 담당자나리께서 ‘중성자도 생선처럼 산란(産卵)을 하는 모양이지요? 신통하기도 하네. 거 참. 이건 생물연구인가 물리연구인가?’ 며 아는체 하더라는 것이었다. 우리 연구소 예산담당자가 그 분에게 산란(散亂)에 대하여 설명하느라고 땀 깨나 흘렸다는 후문이었다.


원자로 용어에 포이즌(poison)이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독물질이다. 원자로 안에서 쓸데없이 중성자를 잡아먹음으로서 원자로의 반응도를 떨어트리는 물질을 말한다. 핵연료가 연소될때 자연히 생기는 미량의 제논(Xe)같은 핵종이 주범이다. 또 제어봉에 사용되는 보론(B)도 원자로의 반응도를 떨어뜨릴 수 있기 때문에 독물질이라는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그런 핵종들이 가스형태로 있으면 말할 나위도 없이 독가스(poison gas)이다. 일반적으로 독물질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부터할까? 끔찍한 비소라든지 염산같은 것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원자로에 독물질 또는 독가스가 있다고 하면 겁부터 집어먹고 막연하나마 불안하게 생각하기가 십상이다. 그것도 참 문제이다. 그리고 이런 예는 비일비재하다.


우리나라 현대 과학기술연구소의 효시로서 우리 원자력연구소가 문을 연지도 2000년으로서 어언 41개 성상이 지났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현대 과학기술의 연륜이 40년을 지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별로 일천하지 않은 연혁이다. 그런데도 일반국민의 과학 마인드는 요원하기만 하다. 물론 그 동안 정부를 비롯하여 국가 과학기술 연구기관들은 생활의 과학화와 과학기술의 국민이해 증진을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써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반국민들과 과학기술의 간격은 좁혀지지 않고 있다. 생각건대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용어에 큰 문제가 있는 듯 싶다. 4월은 과학의 달이고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차제에 일반국민이 쉽고 친숙하게 인식할 수 있는 문제성 과학용어의 재정비 및 다듬질 작업도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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