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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이 미덕

정준극 2007. 5. 22. 15:31
침묵이 미덕


유엔 산하 원자력 전문기구인 국제원자력기구(IAEA)에는 2001년 현재 세계 130개 국가가 회원국으로 가입되어 있고 올해까지 4개국이 더 가입할 예정이다. 그 중에는 ‘어, 이런 나라도 있었구나?’라고 생각되는 생소한 이름들도 더러 있다. 게으른 탓에 그 나라들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그런 나라들도 총회 의결사항에 있어서는 중국이나 미국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한 표의 투표권이 있는 엄연한 주권국가들이다. 모리셔스, 몰다비아 공화국, 베닌, 부르키나 파소, 마샬 아일랜드, 헤르체고비나…최근에는 동구권의 지도가 크게 바뀌는 바람에 비슷비슷한 이름의 나라들이 죽순처럼 생겨났다. 예를 들어 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하나였는데 지금은 체크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어 각각 회원국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게다가 슬로베니아란 나라도 따로 있다. 유고슬라비아 쪽의 사정은 더 복잡하다. 마케도니아공화국,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아르메니아, 게오르기아(죠지아) 등등. 구소련의 붕괴이후 발틱 3국(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도 각각 독립하여 IAEA회원국이 되었다. 중앙아시아의 경우에는 도무지 그 나라가 그 나라인 것 같아서 혼란을 초래하기가 십상이다. 이른바 ‘스탄’국가가 특히 그러하다.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즈스탄…게다가 아제르바이잔…모두 IAEA회원국이다. 자칫 잘못하면 누가 어느 나라에서 온 대표인지 분간하지 못할 경우가 있으므로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입장에서 상당히 유의해야할 사항이다.


매년 한번 9월 셋째 주 월요일부터 열리는 IAEA총회에서 가장 중요한 일정은 일반토의(General Debate)라고 하는 의제이다. 회원국 수석대표이면 누구던지 나와서 기조연설을 할수 있는 순서이다. 세계 원자력의 현황과 전망, IAEA의 역할과 사업 등등에 대하여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너무 길지 않게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순서이다. 수년 전 북한이 IAEA 회원국으로 남아 있을 때 북한 대표의 기조연설에는 ‘남조선에서 미 제국주의자를 몰아내고 그들의 주구인 아무개 정권으로 말하자면…’라는 내용이 중심을 이룬 적이 있다. IAEA총회는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증진과 안전 조치 문제를 다루는 장소이다. 그런데 북한 대표는 내정간섭의 정치성 발언을 일삼았던 것이다. 그러니 다른 회원국들로부터 핀잔을 받지 않고 배길 수 있었겠는가? 늘 그렇듯 핀트가 맞지 않는 엉뚱한 주장만 일삼고 있으니 그 누가 귀를 기울이며 동조하겠는가? 그나저나 지금은 북한이 IAEA회원국이 아니므로 그런 소리도 들을 수 없는 입장이다.


IAEA총회에서의 각국 대표 기조연설에서 또 하나 기이한 사항은 이른바 회교 원리 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이란이나 이라크 대표의 연설이다. 통상적으로 회원국 대표가 나와서 연설할 때에는 서두에 금번 총회의장으로 선출된 양반에 대하여 축하를 보내며 그 분의 탁월한 지도력으로 이번 총회가 성공이기를 믿어 마지않는다는 식의 치하를 보내기 마련이다. 외교적 관례상의 표현이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이란이나 이라크의 경우는 다르다. 우선 알라신에 대한 신앙고백부터 시작한다. ‘위대하고 자비하신 알라신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축복을 내려 주시고…’라는 찬양의 말씀을 전체 회원국 대표들이 좌정 하여 있는 본회의 장소에서 큰 목소리로 읊어 대는 것이다. 아무튼 알라신에 대한 복종심 내지 충성심 하나만은 알아 모셔야 할 듯싶다. 아랍어는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중국어, 스페인어와 함께 유엔 기구의 공용어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마음 놓고 자기들의 말인 아랍어를 사용할 수 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더구나 워낙 말하기 좋아하는 백성들이 아니던가? 이슬람 국가에서 국제회의가 열릴 때 대개의 경우, 관례적인 주최측의 개회사 및 환영사에 앞서서 우선 코란부터 한바탕 낭송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알라신의 가르침을 낭송하는 것은 누가 알아듣던 말던 모든 것에 우선하는 기쁨이다.


웬만한 국제회의, 특히 아시아 지역국가 회의에 참석 해보면 이슬람국가 대표들의 발언이 가장 많다. 말들을 참 잘한다. 청산유수이다. 얼굴이 상기된 채 연설조로 나올 것 같으면 우리네 같은 사람들은 감히 논박할 생각도 못한다. 주눅이 들어서 그저 잠잠하기가 일수이다. 일본, 중국 대표들도 말수가 적기는 마찬가지이다. 자고로 말을 아끼는 것을 미덕으로 삼고 있는 관습 때문인 것 같다. 오죽하면 우리네는 말많은 사람은 믿을 수가 없다고 말하며 꼭 필요한 말만 하는 것을 생활신조로 여겨오지 않았던가? 어디 그 뿐인가? ‘말 많으면 공산당이다‘라는 표현도 있지 않는가? 침묵이 미덕이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할 바에는 침묵이 덕이 되는 세상이 아니던가?


아랍 사람들이 말을 잘하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원래 말이란 입과 코만 활용한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배와 폐, 기도, 후두까지 함께 움직여 주어야 한다. 중동처럼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의 말에는 북방민족에 비하여 비음과 후음이 많다. ‘라 일라하 일라이라 알라’... 몸 전체를 움직여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야 몸속에 있는 더운 기운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아랍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말을 신의 언어라고 부른다. 말을 통하여 체력을 유지하고 생존할 수 있으니 얼마나 큰 신의 은총인가? 그나저나 우리네는 이들에 비하여 기본적으로 말이 딸린다. 무엇보다 이들에 비하여 영어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웬만큼 영어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국제회의에서 콩클리쉬 표현을 면하기 힘들고 말하기 전에 먼저 머리속으로 뱅뱅 문장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그러다가는 기차 다 떠난 후에 ‘잘 가세요’ 할 판이다. 국제사회에서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하려면 우선 영어에 익숙해야 한다. 언제까지나 침묵으로 일관할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국제회의에 누구를 내 보낼때에는 말좀 하는 사람을 내보내야 할것이다. 제발! 유람삼아 국제회의에 보내지 말고!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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