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덕봉 메아리/보덕봉 메아리

겨우 하루

정준극 2007. 5. 22. 15:35
 겨우 하루


어떤 회사의 능력도 없고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말단 직원이 자기 상사에게 ‘내일 하루 집에 일이 있어서 쉬겠노라’고 말했다. 가뜩이나 떨어진 일이 많아서 쩔쩔매며 속이 상해 있던 상사는 그 직원이 얄밉기도 하고 딱하기도 해서 ‘여보시오! 1년 365일 중에서 당신이 과연 며칠이나 실제로 일에 매달리는지 우리 한번 따져 봅시다!’며 얘기를 꺼냈다. 그 상사의 계산은 다음과 같다.


- 자, 봅시다. 우선 1년에 일요일과 토요일이 토털 104일 있으므로 365일에서 토요일과 일요일들을 빼면 일할 수 있는 날은 261일뿐이오.

- 우린 매일 8시간만 근무합니다.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지요. 그러므로 하루의 3분의 1만 근무하는 셈이지요. 그래서 계산해 보면 87일만 근무한다오. 아니 그렇소?

- 그런에 하루 8시간 근무중에서 점심시간 1시간을 포함해서 커피를 마신다든지 화장실에 간다든지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는 시간을 합해서 하루 2시간으로 봅시다. 그러면 또 다시 7일을 잡아먹는 것이므로 실제로 일할수 있는 날은 80일.

- 여기에 국경일인 삼일절, 제헌절, 광복절, 개천절의 4일과 공휴일인 신정, 민속명절 3일, 어린이날, 석가탄신일, 현충일, 추석명절 3일, 크리스마스, 그리고 1년을 종무하는 12월 31일도 일하지 않으므로 이런 날들을 모두 합하면 18일이오. 이런 공유일 중에서 평균적으로 토요일, 일요일과 중복되는 경우가 4일 있으므로 이를 감안하면 국경일 및 공휴일로 일하지 않는 날은 1년에 14일. 그래서 80일에서 14일을 제하면 66일뿐이오.

- 여기에 또다시 공휴일 성격의 일하지 않는 날들이 있는데, 회사 창립기념일, 노조 창립기념일, 봄과 가을 두차례에 걸친 체육의 날, 근로자의 날(5월 1일)등 최소한의 휴무일을 계산하면 6일. 그래서 나머지 일할수 있는 날은 60일.

- 여기에 공식적인 휴가 5일과 연가 및 각종 집안 경조사 날까지 합하여 도합 20일을 일하지 않고 쉴수 있으므로 이를 제하면 40일.

- 몸이 아프거나 예기치 않은 일로 늦게 나온다든지 하는 날이 1년에 닷새는 되므로 이를 계산에 감안하면 일할수 있는 날은 35일.

- 1년에 적어도 한번 외국출장을 간다면 국내에서 근무하는 것이 아니므로 출발일, 도착일을 포함하여 7일은 일하지 않는 날이므로 이를 제하면 사무실에서 일할수 있는 나머지 날은 28일.

- 보통 1년에 2주일은 학회 또는 무슨 워크샵이라고 해서 제주도에도 가고 경주에도 가기 때문에 근무하지 않으므로 나머지 일할수 있는 날은 14일.

- 예비군이나 민방위 훈련에 참석한다고 하면서 1년에 6일을 빠지니 나머지 일할수 있는 날은 8일.

- 회사에서 주관하는 행사 (예를 들면 코엑스에서의 전시회)

- 또 회의한다고 모이면 대개의 경우 눈 감고 조는 경우가 있는데 하여튼 1주일에 2시간을 회의시간으로 보낸다면 21일에서 충분히 24시간은 회의 때문에 일을 하지 않으므로 정작 일할수 있는 날은 13일뿐이라오.

- 13일중에서 정부 부처와 업무 협의, 예산 설명등을 위해 가는 날이 1년에 최소 12일은 되니 나머지 나머지 일할수 있는 날은 단 1일!

- 그런데 고작 1년에 하루 일하면서 그 하루를 쉬겠다는 거요? 에이그 내 참!

 

계산이 물론 틀리겠지만, 이 얘기는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적지 않다. 한 때는 ‘세계에서 한국인만큼 열심히 일하는 백성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근면 속에서 매일을 지내 왔다. 우리 연구소를 방문한 외국인들도 ‘우리는 매일 출퇴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에 파묻혀 지냅니다. 그리고 토요일도 일하지요!’라고 설명하면 ‘오! 놀랍고도 훌륭한 근면 정신!’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새 격주 토요일 근무로 바뀌더니 이제는 완전히 토요일 근무를 하지 않게 되었다.


‘불 꺼지지 않는 연구실’이란 말은 한 때 우리나라 여러 연구소의 자랑스런 모토가 된 일이 있었다. 최형섭박사가 과기처 장관으로 있을 당시에는 ‘불 꺼지지 않는 연구실’이 유행어처럼 되어 미상불 밤늦게 까지 연구실에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진 것 같다. 밤늦도록 연구실을 지키며 일하기는커녕 제대로 마음잡고 일할 시간이 없는 것 같다. 우선 정부에서 오라가라하는 통에 시간만 빼앗기고 있다. 민방위훈련이니 정신교육이니 하는 행사가 심심치 않게 있다. 무슨 행사에도 동원되어 참석해야 한다. 업무 외적 요인이 너무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원자력 연구개발 중장기 계획의 추진이 문턱을 넘어 선 현하, 굳이 누구의 말을 빌릴 필요도 없이 ‘정부나 연구소가 우리에게 무얼 해 줄지를 바라지 말고, 우리가 연구소나 국가를 위해 무얼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한다.  (199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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