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2일 투어

6. 프란치스카너플라츠 (Franziskanerplatz)

정준극 2007. 4. 11. 14:52

 프란치스카너플라츠 (Franziskanerplatz)

 

프란치스카너플라츠. 프란치스카너키르헤와 모세 기념상. 한쪽에는 클라이네스 카페.

 

프란치스카너플라츠는 비엔나시내에 있는 광장중 그나마 최근에 조성된 것이다. 최근이라는 것은 1624년을 말하는 것이므로 어느덧 4백년이 훨씬 넘는 연륜을 지닌 광장이다. 예전에는 이 광장 자리에 초라하게 보이는 집한채가 서 있었다. 성제롬수녀원이었다. 이것을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인수하여 수녀원을 허물고 새로운 성당을 건축했다. 이 새로운 프란치스코성당은 어찌된 일인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어서 귀족들이 많이 찾아왔다. 아마 프란치스코수도회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회였으며 또한 아씨씨의 성자 프란치스코에 대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인듯 싶었다. 아무튼 주일미사이건 또는 다른 행사가 있으면 마차를 타고 온 귀족들 때문에 광장일대의 교통이 여간 혼잡했던 것이 아니었다. 1621년 프란치스코수도원의 원장은 황제에게 특별 요청을 했다. 귀족들이 타고온 마차가 미사가 끝나서 다시 주인들을 태우고 돌아 갈수 있도록 주변의 집들을 정리하여 주차장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었다. 황제는 주변 집들을 몇채 정리하여 마차 주차장을 마련해 주었다. 오늘날에는 이 광장에는 어떠한 차도 주차할수 없다. 그래서 요즘도 프란치스코성당에 가려면 멀리 주차하고 걸어와야 한다. 광장의 가운데에 있는 분수에는 꼭대기에 모세의 조각상이 세워져있다. 모세가 광야에서 검소하게 지낸 것을 기억토록 하는 조각상이다. 이 광장 주변의 집들은 17세기의 고풍스러운 것들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지 곳의 분위기를 고풍스럽게 만들어 주고 있다.

 

프란치스카너플라츠의 프란치스카너키르헤(교회)와 모세 기념상

 

성당 안의 중앙제단에는 인상적인 성모상이 있다. 린덴나무로 만든 목상으로 특이한 것은 성모의 왼쪽 어깨에 커다란 도끼가 박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성모상에는 도끼를 지닌 성모상이란 별명이 붙어 있다. 유래는 다음과 같다. 원래 이 성모상은 체코 서부지방인 보헤미아의 어떤 수도원에 있었던 것이었다. 슈테른베르크(Sternberg)라는 백작이 이 수도원을 사서 자기의 저택으로 만들었다. 수도원은 사라졌지만 성모의 목상은 그대로 저택안 채플에 남이 있게 되었다. 가톨릭이었던 백작은 성모상을 간수하였지만 자손들은 그렇지 못했다. 백작의 아들들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고 그 중의 한명이 집안의 채플에 있는 성모상을 우상이라고 하여 태워버리도록 했다. 하인들이 성모상을 불속에 집어 넣었으나 놀랍게도 성모상은 불길속으로부터 마치 스프링처럼 퉁겨져 나왔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성모상은 채플의 원래 자리에 서 있었다. 그 후손 백작은 다시 마을의 사형집행관을 불러 성모상을 도끼로 찍어 버리도록 했다. 그러나 이것마저 불가능했다. 도끼로 성모상의 어깨를 찍었으나 도끼가 어깨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후 이번에는 원조 백작의 손자가 되는 사람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다시 개종하고 종교개혁 반대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그는 성모상을 존경하여 비엔나의 프란치스코성당에 기증하였다. 1607년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이 성모상은 기적의 성모상으로 존경을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프란치스카너키르헤 내부

 

수도원에는 두개의 채플이 있다. 채플에는 유리로 만든 관들이 있다. 성힐라리아(St Hilaria)와 성펠릭스(St Felix)라는 두 순교자의 유골을 안치한 관이다. 이 유리관은 1720년에 비엔나로 옮겨왔다. 성힐라리아의 시신은 왁스로 처리하여서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지만 로마 백부장의 복장을 하고있는 성펠릭스는 아무런 처리를 하지 않아 오랜 세월과 함께 유골만 남아 있다.

 

왼쪽으로는 성요한 네포무크(St Johann Nepomuk)가 몰다바강 물결에 휩쓸려 죽음을 앞둔 장면을 그린 특이한 부조가 있다. 성네포무크는 앵글로색슨 국가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이외의 나라에서는 교량의 수호신으로 잘 알려져있다. 왜냐하면 체코의 벤첼라스(Wencelas)왕이 성네포무크를 프라하의 다리에서 몰다바 강으로 던져버렸기 때문이다. 전설에 의하면 네포무크는 왕비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였다고 한다. 벤첼라스왕은 왕비가 불륜을 저질렀다고 의심하여 네포무크에게 왕비의 비밀을 모두 털어 놓으라고 윽박질렀다. 그러나 네포무크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결사반대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벤첼라스왕은 네포무크에게 끔찍한 고문을 가하다가 나중에는 다리에서 강물로 던져 버렸다. 그러나 벤첼라스(체코어로는 벤체스라우스)왕과 요한 네포무크의 일에 대하여는 이와는 다른 스토리가 있다. 보헤미아국가를 위해 요한 네포무크를 죽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 요한 네포무크 

 

이제 성당을 나와 옆 건물의 수도원으로 들어가보자. 14세기에 이 건물은 참회를 목적으로 하는 신심수도회(信心修道會. Penitent)의 수녀원이었다. 신심수도회는 13세기에 유행했었다. 이 수녀원에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여긴 여인들이 참회하기 위해 오는 곳이었다. 처음에 이곳에 온 여인들은 외부와 단절한채 은둔의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수녀들처럼 주님을 위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겠다는 서약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생활의 한 방편으로서 열심히 일하여 돈을 벌수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군주의 보호를 받아 결혼할수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들 신심수녀원의 여인들은 배우자로서 인기가 높았다. 일 잘하고 신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속적인 삶을 경멸했던 이들중 수녀원장을 비롯하여 많은 여인들이 정절과 빈곤의 서약을 하며 여생을 보내는 경우도 많았다. 이들은 자신들을 성막달라 마리아수녀회라고 불렀다. 2백년동안 이 수녀원은 비엔나 시민들의 기부금을 받으며 융성하였다. 그러나 종교개혁, 그리고 1525년에 있었던 대화재로 인하여 이 수녀원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1543년에 이르러서는 수녀원장을 비롯하여 단 여덟명의 여인들만 남게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생활은 예전과 달리 정절과 빈곤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율리안 클리버거라고 하는 수녀원장은 수녀원의 남자 신부인 라우빙거와 불륜관계에 있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주위 사람들이 두 사람에 대하여 수군거리게 되자 결국 라우빙거는 자기가 직접 주례하여 클리버거와 결혼식을 올리고 함께 살기 시작했다.

 

프란치스카너플라츠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남편 라우빙거는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가 수녀원장인 율리안의 꼬임에 빠져 이 지경이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그 배경에는 수녀원에 남아 있는 여인들이 율리안을 충동했다고 믿었다. 그래서 신부라는 신분을 이용하여 수녀원의 여인들을 모두 파문했다. 게다가 라우빙거와 율리안은 수녀원의 공금을 거의 모두 착복했다. 결국 두 사람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비엔나 시민들은 두 사람을 불쌍히 여겨 석방해 달라고 청원했다. 그후 라우빙거는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었으며 클리버거는 수녀원으로 돌아와 1553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비교적 조용하게 살았다. 클리버거의 관은 아직도 성당안 지성소 앞에 있는 휴양실(Tummerplatz)이라고 불리는 방에 안치되어있다. 묘비에는 그의 부정절한 삶에 대한 표현은 한마디도 없고 수녀원장으로서 존경받는 수녀였다고 적혀있다. 그후 이 신심수도회는 이런저런 사건 때문에 회생되지 못했다. 1589년 이 수녀원은 프란치스코수도회로 넘어갔다. 프란치스코수도회는 채플을 포함한 건물의 대부분을 개축하였다.

 

프란치스카너플라츠와 징거슈트라쎄가 만나는 곳에 있는 예술적인 건물 

 

이 프란치스코수도원에는 대단히 정교하게 조각한 바로크 양식의 아름다운 오르간이 있다. 수도사 찬양대를 위한 오르간이었다. 1642년 제작되었다는 오르간이다. 수도원의 문을 열고 들어간 사람들을 처음 마지하는 것은 해골이다. 자세히 보면 대리석으로 만든 성수반이다. 왜 해골모양의 성수반을 만들어 놓았는지 미지수이다. 다만, 성수반의 아래쪽에 적혀 있는 글귀가 우리의 주의를 끈다.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당신에게(Heute an mir ? morgen an dir)라는 구절이다. 이 구절이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죽음을 피할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설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카너플라츠와 오래된 클라이네스 카페. 앞의 동상은 모세.

 

수도원에는 평화로운 정적이 감돌고 있다. 더구나 벽에는 정숙해 달라는 안내문까지 붙어있다. 길거리의 소음이 전혀 들리지 않는다. 간혹 새가 지저기는 소리를 들을수 있는 정도이다. 오르간은 제단의 뒤쪽으로 가야 볼수 있다. 오르간의 본체는 생각밖으로 적다. 키보드도 일반 오르간보다 사이즈가 작다. 그러나 오르간위의 파이프 장식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화려하다. 천사들이 나팔을 부는 조각이 무척 아름답다. 오르간의 상단에는 다윗왕이 두명의 천사와 함께 하프를 연주하는 조각이 있다. 수도원의 채플에서 나와 아취 길인 봐이버그가쎄(Weihburggasse)를 가로 질러 건너가면 발가쎄(Ballgasse)를 만난다.

 

프란치스카너키르헤의 오르간. 세천사가 나팔을 부는 조각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