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2일 투어

15. 노이어 마르크트 (Neuer Markt)

정준극 2007. 4. 11. 14:57

노이어 마르크트 (Neuer Markt)

 

노이어마르크트 한편 길에 있는 카푸친수도원과 성당. 이 성당의 지하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주들과 그들의 배우자 또는 자녀들의 관을 보관한 영묘가 있다.

                                                                                          

노이어 마르크트에 이르면 우선 눈 앞에 낮으막한 카푸친(Kapuchin)교회와 교회 건물에 연결된 수도원을 만날수 있다. 카푸친교회(Kapuzinerkirche)의 지하는 합스부르크왕가 사람들의 시신을 안치한 지하묘소이다. 이를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 황실 영묘(靈廟)라고 부른다. 이곳에는 '황실 영묘'를 계획하고 처음으로 입주자가 된 마티아스(Matthias)황제와 안나 왕비로부터 합스부르크 최후의 왕비인 치타(Zita)와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태자인 오토(Otto)까지 안치되어있다. 합스부르크왕가의 인물중 가장 걸출했다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女帝)도 이곳에서 안식을 취하고 있으며 근세들어서 가장 역사적인 인물인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애칭으로 씨씨라고 함), 이들의 유일한 아들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 지위를 버리고 젊은 애인 마리아와 함께 자살한 루돌프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비엔나를 이해하려면 합스부르크왕가를 이해해야 한다. 합스부르크왕가를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교육장소의 하나가 바로 이곳 카푸치너키르헤의 지하 영묘인 카이저그루프트이다. 

 

68년동안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통치했던 프란츠 요제프1세 황제, 세기의 미인인 엘리자베트(씨씨) 왕비,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황태자인 루돌프의 관이 나란히 있다.

 

[카이저그루프트] Kaisergruft. 카푸친(Capuchin)교회의 지하에 있는 합스부르크의 황실지하납골소는 일찍이 1618년부터 사용되었다. 그루프트는 지하 영묘(靈廟)를 말한다. 이곳에는 각양각색 스타일의 관이 있다. 마리아 테레제와 그의 부군 로트링겐(로레인)의 슈테판인 프란츠1세의 2중 관은 한마디로 장관이다. 중세로부터의 관습에 따라 이곳에 안치되어있는 시신 54구의 심장은 은항아리에 담아 성아우구스틴교회의 심장영묘(Herzgrueftl)에 보관되고있으며 장기(臟器)는 성슈테판성당의 지하 카타콤에 보관되어 있다. 카이저그루프트는 매일 9시반부터 4까지 열며 겨울철에는 정오까지 연다. 입장료도 있다. 카푸친수도원의 수도사가 앉아서 받는다.

 

 카이저그루프트 앞에서의 필자 (2005. 7)

 

이곳에 안치되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왕족이지만 단 한명의 예외가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정교사겸 시녀였던 푹스(Fuchs)백작부인이다. 왕족이 아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왕가의 가족 영묘에 안치될수 없다는 반대가 있었을 때 마리에 테레지아 여제는 푹스백작부인은 우리와 평생을 함께 했다. 그러므로 죽어서도 우리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반대의견을 일축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정교사로서 평생 친구였던 푹스 백작부인(Marie Karoline von Fuchs: 1681-1754). 합스부르크 왕가의 멤버가 아니면서 사후에 유일하게 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어 있는 사람이다.

 

지하영묘에는 모두 143개의 관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한 것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 프란츠 황제가 합장되어 있는 관이다. 로코코양식의 관위에는 두 사람의 서로 마주보고 앉아있는 실물대형 조각이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마치 아침에 일어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있는 듯한 생생한 모습이다. 이 조각을 만든 사람의 설명은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츠가 최후의 심판 날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심판자인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부군 프란츠의 계속적인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그를 무척 사랑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란츠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카푸친성당에 있는 남편의 묘소를 자주 찾았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말년에 몸이 몹시 비대해졌다. 그래서 성당의 현관에서 지하 영묘로 오르내리는 수고를 덜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였다. 1780년 11월 20, 그날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의 묘소를 찾았다. 이번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갈수는 있었으나 올라갈 때에는 그동안 더 비대해진 체구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세번이나 멈추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내가 이 지하영묘를 떠나는 것을 싫은 모양이야!라고 말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시대의 여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그로부터 며칠후인 11 29일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인 프란츠 스테판 대공의 묘비 장식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로서 어머니에 이어 대제국을 통치한 요제프2세의 관은 바로 아래쪽에 있다. 요제프2세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자기 묘비에 여기 무슨 일을 하던지 실패만 했던 요제프2세가 누워있다라고 써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말할 필요도 없이 그의 후계자인 레오폴드 황제는 그러한 요청을 듣지않고 좋은 말만 써 놓았다. 레오폴드 황제는 요제프 2세의 동생이다. 

 


요제프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

 

관례에 따르면 군주가 세상을 떠나 그의 관을 카푸친성당에 안치하기 위해 오면 장례행렬을 영도했던 전령이 성당의 문을 두드리며 들어가기를 청하는 절차를 밟는다. 안에 있는 신부가 누구냐고 묻는다. 전령은 황제이십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을 열리지 않는다. 전령이 다시 문을 두드린다. 문안에서 똑 같은 질문이 나온다. 다음에는 왕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문은 열릴줄 모른다. 세번째로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가기를 청한다. 다시 누구냐는 질문이 나오고 전령이 불쌍한 죄인이올시다라고 공손하게 대답하면 그제서야 비로소 문이 열리고 관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장면이 마지막으로 재연된 것은 1989년 오스트리아제국 최후의 황비인 치타(Zita)의 유해를 이곳에 안치했을 때였다. 치타황비는 오스트리아황제 겸 헝가리왕으로 대관식을 가진 샤를르(카를)의 부인으로 1차대전의 와중인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대제국의 왕황였다. 샤를르황제는 1918년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으로 되는 것과 함께 황제의 지위를 포기하고 추방생활을 해야 했다. 치타황비도 1918년부터는 형식적으로는 평민으로 돌아갔다. 남편인 샤를르황제는 1922년 세상을 떠났으나 치타는 남편보다 60여년을 더 살다가 1989년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가 황제가 된 것은 그의 삼촌인 프란츠 페르디난드 황위계승자가 1914년 사라예보에서 유고독립주의자가 쏜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프란츠 페르디난드는 황족과 결혼하지 않고 일반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그는 황제가 되더라도 그의 아들은 황제가 될수 없다는 약속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조카인 카를(샤를르)이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황제에 올랐던 것이다.

  

노이어 마르크트와 돈너 브룬넨(분수)

 

한때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은 옥수수와 밀가루 시장이었다. 그 이전인 15세기에는 이 광장에서 기사들의 마상무술경기가 열렸었다. 그 이후에는 연극공연 장소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치하에서는 귀족들의 썰매타기 장소로 인기를 끌었었다. 쇤부른궁전의 마차박물관에는 당시 귀족들이 즐겨 타던 정교하고 아름다운 썰매마차가 전시되어 있다. 썰매를 끌던 말에는 작은 방울들을 달아 딸랑딸랑 소리가 나게 했다. 비엔나의 겨울 저녁, 노이어 마르크트에서 딸랑거리는 말이 끄는 썰매를 타고 즐거워했을 귀족들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재미난 추억이다. 귀부인들은 모두 두툼한 털로 만든 토시를 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 이 광장에서 썰매를 타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볼수 있었던 때는 1814-15년 재상 메테르니히에 의한 비엔나 회의(Vienna Congress)가 열리던 때였을 것이다. '회의는 춤춘다'(콩그레스 탄츠트)는 명언이 나온 회의였다. 유럽 여러 나라의 군주들이 모여 무도회와 파티로 흥청이던 시기였다. 회의 참가자들 중에서 더러는 썰매를 지치러 노이어 마르크트를 찾아 오기도 했다.  

 

노이어 마르크트 

                           

광장의 중앙에는 게오르그 라파엘 돈너가 제작한 유명한 분수가 있다. 분수의 가운데에는 영원한 여신을 상징하는 조각물이 앉아 있고방에는 4개의 오스트리아 강, 즉 엔스(Enns), 마르흐(March), 트라운(Traun), 입스(Ybbs)강을 상징하는 누드 조각물이 만들어져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는 백성들의 도덕을 대단히 강요했다. 특별경찰대가 조직되어 백성들의 도덕성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누드인 이 분수의 여신 조각물들도 수난을 당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분수의 누드조각물들은 1770년 제거되었다. 이 조각물들은 무려 30여년동안 정부의 어떤 창고에 숨겨져 있었다. 그러다가 당국은 이 조각물들을 조각가 요한 마르틴 휘셔(Johann Martin Fischer)에게 주어 하고 싶은 대로 녹여서 쓰도록 했다. 그래서 돈너가 제작한 분수가 있었음이 비로소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휘셔는 이 조각물들의 진가를 인식하고 1801년 원래의 분수에 다시 설치해 놓았으나 문화재를 보존해야 한다는 주장에 따라 원래의 조각 작품은 벨베데레궁전의 바로크박물관에 보관하였고 현재 설치되어 있는 조각물들은 피셔가 만든 복사품이다.

 

노이어 마르크트 한쪽에 있는 로브코비츠 궁전. 현재는 극장박물관이다. 이 곳 3층의 홀에서 베토벤의 교향곡 제3번인 '영웅(에로이카)'이 초연되었다. 그래서 이 홀을 '에로이카 홀'이라고 부른다.


에로이카 홀에서의 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