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3일 투어

3. 호에르 마르크트 (Hoher Markt)

정준극 2007. 4. 11. 14:58

호에르 마르크트 (Hoher Markt)

 

호에르 마르크트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이다. 이 곳은 원래 빈도보나(Vindobona)에 주둔하는 로마군대의 병영이었다. 그 유적은 3번지 지하실에서 볼수 있다. 3번지 지하에 있는 작은 전시실은 한번 볼만하다. 주후 2세기에 로마인들이 사용한 것으로 밝혀진 중안난방 시스템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전시되어 있는 벽돌들에는 이 곳에 주둔했던 연대들의 문장이 찍혀있어서 흥미를 돋구어준다. 호에르 마르크트광장은 13세기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비엔나 역사지에 옛 시장(Die Alte Markt)이라고 소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이 광장은 모든 상거래의 중심이었다. 구두장이 연맹, 린넨 직조공 연맹, 양초장이 연맹, 그리고 도축자 연맹 등 중요한 상인연맹(길드)들이 이 광장을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에르 마르크트 3번지의 로마박물관. 이 자리에서 발굴된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크라머가쎄에서 나와 호에르 마르크트로 들어가는 왼쪽에 아치로 되어 있는 로트가쎄(Rotgasse)가 있고 이곳에 유명한 안커우르(Ankeruhr)라는 커다란 시계가 있다. 안커(영어로는 Anker)는 술의 양을 재는 통을 말한다. 요즘으로는 10갤런들이 통이다. 이 시계는 1911-1917년 사이에 프란츠 마츄(Franz Matsch)라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안커보험회사를 위해 제작했다. 시계의 장관을 보려면 12시 바로 직전에 그 앞에 있어야 한다. 12시 정각에 시계에 있는 인물 세트가 음악에 맞춰 행진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 음악이 나오는 것도 놀랄만한 일이다. 시계에 등장하는 역사적인 인물은 1시: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Kaiser Marcus Aurelius: 2세기의 로마 황제 겸 철학자로 비엔나의 전신인 빈도보나에서 지냈음), 2시: 살레만뉴 대제(Kaiser Karl der Gorsse), 3시: 영광왕 레오폴드와 그의 후궁 테오도라(Herzof Leopold VI und Gemahlin), 4시: 중세의 음유시인인 포겔봐이데의 발터(Herr Walter von der Vogelweide), 5시: 합스부르크의 루돌프황제와 안나왕비(Konig Rudolf von Habsburg und Gemahlin), 6시: 대건축가 한스 푹스바움(Meister Hans Puchsbaum), 7시: 최후의 기사인 막시밀리안 1세(Kaiser Maximilian der Erste), 8시: 터키의 비엔나 공성 때에 비엔나 시장을 지낸 안드레아스 폰 리벤베르크(Burgermeister Andreas von Liebenberg: 17세기 초), 9시: 슈타렘버그의 뤼디거 백작(Grauf Rudiger von Starhemberg), 10시: 사보이의 오이겐 공자(Prinz Eugen von Savoyen), 11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와 부군 프란시스1세(Kaiserin Maria Theresia und Gemahl), 12시: 교향곡의 아버지 요제프 하이든(Meister Joseph Haydn)이다.


앙커우르

 

광장 중앙에 있는 결혼 분수(Vermaehlungsbrunnen)는 그 섬세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호에르 마르크트 광장을 압도하고 있다. 분수가 있는 자리는 원래 칼(죄인의 목과 양손을 끼워 사람 앞에 보이게 한 판자의 옛 형구)과 교수대가 있던 곳이었다. 당시 황제였던 레오폴드1세는 만일 황태자인 요세프(나중에 요세프1세 황제가 된 사람)가 란다우(Landau) 전투로부터 무사히 귀환하면 이곳에 있는 형틀과 교수대를 없애고 대신 아름다운 분수를 만들어 놓겠다고 약속했다. 요세프는 무사히 돌아왔다. 분수에는 요세프 황태자와 마리아공주의 결혼식 장면이 새겨져 있다.

 

호에르 마르크트의 '결혼분수'(Vermählungsbrunnen). 마리아와 요셉의 결혼.

 

광장의 아랫쪽 (도나우운하 방향), 유덴가쎄와 마르크 아우렐 슈트라쎄 사이는 전체 블록이 원래 베르그호프라는 한채의 건물이었다. 이 건물은 상당히 유명하여 13세기 말에는 옛 비엔나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건물로 알려지게 되었다. 훗날 비엔나를 확장할 때 이 건물로부터 이정표를 삼아 도시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처럼 유서 깊은 이 건물은 17세기에 들어서서 철거되었다. 그후 여러 건물이 호에르 마르크트를 중심으로 들어섰다가 철거되곤 하였지만 그 중에서 아직까지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물은 슈란네(Schranne)라고 불리는 옛 궁전으로 중세에는 법원청사였던 건물이다. 투후라우벤(Tuchlauben)과 호에르 마르크트의 코너에 있는 이 건물은 일찍이 1440년에 세워진 것이다. 처음에는 대단한 건물로서 각광을 받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별로 찬사를 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현관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지나치게 넓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판사가 이 넓은 계단을 천천히 걸어 내려오면서 아래에 모여있는 사람들에게 죄인은 사형이요!라고 소리치며 판결을 내리는 장면을 더 이상 기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뒤에 보이는 건물이 19세기 중반까지 법원건물이었다.

 

법원 건물안에는 작은 부속채플이 있었다. 그리스도 죽음의 고난 채플이었다. 채플에는 가난한 죄인의 종(Armensaendergloecklein)이라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었다. 죄인을 사형장으로 끌고 갈때에 이 종을 울렸다. 건물 지붕에는 오래된 시계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1855년 건물이 철거될 때 떼어냈다. 법원청사를 장식하기 위해 면류관처럼 얹어 놓았던 시계는 아니었던 같았다. 왜냐하면 떼어낸 시계의 뒷면을 보니 이 시계는 행복한 자를 위해서는 울리지 않는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서만 울렸던 시계가 영광스런 법원청사를 장식하는 왕관일수는 없었다.

 

1900년대 초반의 호에르 마르크트

 

법원청사였던 건물의 건너편에는 옛날에 커다란 새장과 같이 생긴 철책 유치장이 길거리에 있었다. 바보들의 오두막집(Narrenkotterl)이라는 이름의 철책 유치장이었다. 미친사람, 매춘부, 마녀, 점장이, 술주정꾼들을 붙잡아 넣고 오가는 사람들의 조롱을 받도록 한 유치한 유치장이었다. 1710년 이 철책 유치장은 철거되었고 대신 비교적 현대식 형틀이 들어섰다. 호에르 마르크트 광장는 비엔나의 명물인 수산시장이었다. 지중해에서 가져온 생선과 바다가재는 유명했다. 1516년에 공포된 수산법에 따르면 비엔나시민이 아니거나 또는 부인이 없는 총각은 이 곳에서 생선을 팔수 없다.고 되어 있다. 총각은 왜 생선을 팔지 못하도록 했는지는 아직도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다른 광장과 마찬가지로 호에르 마르크트 광장의 한가운데에도 분수가 있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선분수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다. 분수의 네 귀퉁이에서 물이 흘러 나오도록 되어있는 물은 오늘날 비엔나 외곽인 헤르날스(Hernals)로부터 흘러 내려오는 물을 받아 사용했다. 생선시장에서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멀리서부터 물을 끌어왔던 것이기 때문에 생선분수라는 명칭이 붙었다.

 

호에르 마르크트의 로마 박물관에 있는 빈도보나 정초석. 오늘날의 비엔나는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에르 마르크트광장은 간혹 축제 장소로 사용되곤 했다. 특히 이교도의 하지축제와 흡사한 요한네스포이에르(Johannesfeuer), 그리고 기독교 축제인 세례요한 축제가 열렸었다. 아주 오래 전인 1481년 이 광장에서 그런 축제가 열렸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축제는 대체로 이렇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우선 시의원들이 말을 타고 입장한다. 북치고 피리 부는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른다. 다음엔 야한 옷차림을 한 이른바 예쁜이들(Huebschlerinnen)이 웃고 떠들면서 등장한다. 이 아가씨들은 완곡하게 표현하여 자유분망한 딸들(Freitochters)이라고도 불렀다. 실은 매춘부들이다. 마지막으로 각종 장인들이 뒤따랐다. 빵장이, 옷감장이, 구두장이, 모자장이, 장갑장이 등등이런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메우면 이어 가운데 화톳불을 중심으로 둘러서서 춤을 추기 시작한다. 포도주가 넘쳐 흐르고 어릿광대들이 이리 저리 뛰면서 재주를 넘는다. 이렇듯 광란의 장면이 밤이 지새도록 계속된다. 매춘부들이 기회를 놓지지 않고 중요한 역할을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이 축제는 1524년 경찰에 의해 금지 되었다.

 

지방에서의 요한니스포이어 축제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