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3일 투어

6. 루프레헤츠플라츠 (Ruprechtsplatz)

정준극 2007. 4. 11. 15:00

루프레헤츠플라츠 (Ruprechtsplatz)

           

루프레헤츠키르헤 옆의 광장은 비교적 높은 곳에 있어서 여름에는 시원하다.

 

루프레헤츠플라츠에는 현존하는 비엔나 성당/교회 중에서 가장 오래된 후기 고틱양식의 성루프레헤츠교회가 있다. 그다지 규모가 크지않으며 화려하지도 않지만 어딘가 기품이 있는 성당이다. 더구나 오래된 담장이넝쿨(버지니아 담장이넝쿨)이 성당을 감싸고 있어서 운치를 더해준다. 루프레헤츠플라츠는 중세에 키엔마르크트(Kienmarkt), 즉 목재시장으로 알려졌었다. 로마시대에는 다뉴브강의 상류에서 베어낸 목재를 강을 통해 뗏목처럼 내려보내고 이곳에서 거두어 들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일대는 원래 유태인 게토였다. 그러나 현재는 비엔나의 버뮤다 트라이앵글이란 별명으로 불려질 정도로 특별지구가 되었다. 특별지구라고 한 것은 이곳에 디스코 클럽, 주점, 아담하고 작은 식당들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줄지어 서 있어서 젊은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름철에는 더 번잡하다. 좁은 골목임에도 불구하고 길 가운데까지 탁자들을 내놓아 걸어 다니기 어려울 정도이다.

 

루프레헤트교회에 있는 성루프레헤트 기념상

 

루프레헤트라는 이름은 성자 루프레헤트로부터 연유했다. 현재 성루프레헤트교회가 있는 자리에는 740년부터 성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광장에 대한 기록은 1246년부터 찾아 볼수있다. 당시에는 횃불시장이었다. 주로 횃불용 소나무 광솔을 팔았다. 가난한 사람들은 촛불 대신에 나무광솔을 사서 집안의 불을 밝혔다. 1275 4월 어느 그믐날 밤에 이 광장에서 큰 불이 났다. 광솔을 쌓아둔데서 불이 나서 결국은 광장 주변의 집들을 모두 불태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성루프레헤트교회에는 불이 붙지 않았다.

 

루프레헤츠교회 내부

 

성루프레헤트는 잘츠부르크의 대주교였다. 당시 비엔나에서 필요한 소금은 잘츠부르크에서 가져왔다. 잘츠부르크로부터 도나우강을 거슬러 올라와 도나우운하의 잘츠그리스(Salzgries)라는 곳에 부려놓았다. 지금의 루프레헤츠플라츠 인근이었다. 잘츠부르크에서 온 뱃사공들이 이곳에 있는 성당을 그들의 수호성당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들은 이 성당을 잘츠부르크 대주교의 이름을 따서 루프레헤트성당이라고 불렀다. 이 성당이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는 모른다. 다만 성당의 일부에 붙어 있는 건축부분이 8세기의 것이라는 사실만 밝혀졌다.

 

도나우운하. 잘츠그리스가 있던 곳. 지금의 마리엔브뤼케가 있는 곳이라고 한다.

                                       

성당안에 들어가보면 이 성당이 얼마나 오랜 성상을 견디어 왔는지 알수 있다. 오르간이 있는 높은 곳에 올라가면 고틱 양식의 천정을 더 자세히 볼수있다. 종탑에 있는 두개의 작은 창문은 이 성당이 초기 카롤린기안(Carolingian. 프랑스 카롤링거왕조에 유행했던 양식)양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특히 중세의 스테인드 유리로 되어있는 오른쪽 창문은 초기 카롤린스타일이란 것을 금방 알수 있다. 이 스테인드 창문은 원래 성당의 바깥쪽 벽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문만 보면 원래 성당의 규모를 짐작할수 있다.

 

비엔나에서 제일 오래된 교회인 루프레헤트교회

 

오르간에서 찾아 볼수 있는 또 하나의 흥미 있는 점은 오르간 왼쪽에 AEIOU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것이다. AEIOU는 앞에서 설명한대로 프로데릭3세를 상징하는 구호인 오스트리아는 영원히 존재한다는 글의 약자이다. 1439년이라는 숫자도 적혀 있다. 이다. 오르간층에서 다시 아래층 본당으로 내려와보자. 상당히 어두컴컴하기 때문에 계단을 내려올 때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중앙 제단 위에 있는 두개의 유리창은 13세기의 것이다. 그러므로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 유리창이다.

 

아무래도 13세기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너무 아름답다. 현대적이다.

              

오르간이 있는 곳 아래의 북쪽 벽에는 상당히 화려하고 정교하게 조각한 성골함(聖骨函)이 놓여있는 코너가 있다. 유리로 만든 관이다. 순례자들이 로마 카타콤(지하묘지)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 관에 호사스러운 덮개를 씌어 놓았었다고 한다. 성비탈리스(St Vitalis)의 뼈라고 한다. 그러나 조사 결과 이 뼈는 3백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 성비탈리스가 세상을 떠난 것은 730년 잘츠부르크에서 였으므로 그렇다면 시대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이 코너에는 작은 유리병이 하나 있으며 여기에는 sanguis라고 적혀있다. 피를 의미하는 글자이다. 그렇다면 이 유물은 진짜일 가능성이 있다. 만일 병에 들어 있는 것이 성비탈리스의 피라고 한다면 루프레헤츠성당이야 말로 이 귀중한 유물을 보관할 합당한 장소가 아닐수 없다. 왜냐하면 성비탈리스는 성루프레헤트의 뒤를 이어 잘츠부르크대주교였기 때문이다.

 

루프레헤트교회와 루프레헤츠슈티게(계단)

 

[루프레헤츠키르헤] (Ruprechtskirch: 성루프레헤트 교회) 재탐구

잘츠부르크의 성루프레헤트에게 봉헌된 루프레헤츠키르헤는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알려져 있다. 잘츠부르크의 성루프레헤트는 비엔나 소금 상인들의 수호성인이었다. 루프레헤츠키르헤는 옛 도나우강변의 언덕에 건설되었다. 로마제국 시절 빈도보나라고 부르던 구역 안의 한곳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이 교회는 잘츠부르크에 루프레헤트가 대주교로 있을 때 그의 동료들인 쿠날트(Cunald)와 기잘리히(Gisalrich)가 세웠다고 한다. 이 교회가 세워진 것은 대충 796-829년으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 잘츠부르크가 비엔나의 교회문제에 대하여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루프레헤트교회에 대한 첫 공식기록은 120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벤버그 왕조의 하인리히2세 야소미어고트(Heinrich II Jasomirgott) 대공 시절이다. 루프레헤트교회를 새로 건축한 쇼텐슈티프트의 부속교회로 삼는 다는 기록이었다. 기록에는 루프레헤트교회가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라고 적혀있다.  

 

빈도보나 로마 주둔지가 파괴된 이후, 비엔나 도시의 중심은 루프레헤트교회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바벤버그 왕조가 시작되고 나서 비엔나의 종교 행정 중심지는 바로 루프레헤트교회를 중심으로 한 곳이었으며 그후 1147년에 성슈테판성당으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중세에 루프레헤트교회는 소금사무소(Salzamt)의 역할도 했다. 소금사무소는 잘츠부르크에서 배로 가져온 소금을 개인들에게 배분하고 소금의 품질을 확인해 주던 곳이었다. 루프레헤트교회에서는 도나우 운하의 제방에 있는 소금 상인들의 부두를 내려다 볼수 있었다.

 

담장이 넝쿨로 덮여진 이 교회는 중세이후 여러 번 개축되었다. 1276년에는 화재가 나서 개축되었다. 성가대석은 13세기에 완성되었고 남쪽 회랑은 5세기에 완성되었다. 제단은 17세기 초에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장식되었다. 2차 대전 당시에는 포격을 받아 파손되었으며 옆에 있는 건물이 무너지는 바람에 영향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동쪽 앱스(Apse)에 있는 스테인드 글라스는 기적처럼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았다.

 

루프레헤트교회의 종은 비엔나의 교회 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280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와 성모와 아기 예수를 그린 스테인드 글라스 역시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1370년에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교회의 북쪽 주탑에는 성루프레헤트의 조각상이 있다. 서쪽 갤러리에 있는 아취에는 AEIOU 1439라는 명판이 있다. 말할 필요도 없이 프레데릭3세의 수수께끼 같은 기호이다. 이 명판은 1439년 프레데릭3세의 비엔나 입성을 기념하여 붙인 것이다. 성비탈리스(St Vitalis)의 유해가 들어 있는 아름다운 관에는 로마의 카타콤에 있던 순교자 성비탈리스의 유해로서 1765년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루프레헤츠교회에 봉안토록 한 것이다. 이 관에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의 유골들도 일부가 들어 있다고 하는데 잘 보이지는 않는다. 이 교회에 있는 초기 기독교 순교자들의 유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바로 이 교회 인근의 모르친플라츠(Morzinplatz) 광장에 1938년 독일-오스트리아 합병이후 게슈타포 본부가 있어서 많은 유태인을 고문하고 살해했기 때문에 루프레헤트교회는 순교자들과 인연이 있다는 얘기였다. 마지막으로 최초 교회에 대한 논란이다. 현재까지의 기록으로는 루프레헤트교회가 비엔나 최초의 교회라고 되어 있으나 최근 페터스키르헤와 슈테판성당을 보수할 때에 나온 유적으로 보아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주장이 일고 있다. 역사학자들이 더 연구해 보아야 할 대목이다.

 

로마의 카타콤에서 가져온 성비탈리스의 유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이곳에 봉안토록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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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레헤트 1번지는 통상 프라하 하우스라고 불리는 탑처럼 생긴 건물이다. 어째서 그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이 건물에 보헤미아의 벤첼라스(Wencelas)6세왕이 한때 감금되어 있었기 때문에 프라하 하우스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주장도 있다. 보헤미아의 벤첼라스왕은 형인 헝가리왕 지기스문트(Sigismund)와 크게 다툰 일이 있다. 지기스문트왕은 벤첼레스왕을 체포하여 오스트리아의 알브레헤트(Albrecht)4세 대공에게 벤첼레스왕을 감금하여 줄것을 요청했다. 알브레헤트대공은 벤첼라스왕을 프라하 하우스에 감금했다. 그러다가 15개월 후인 어느날 벤첼레스왕은 어떤 어부의 도움을 받아 도나우강을 건너 탈출했다.

 

프라하 하우스와 관련해서는 이런 얘기도 전해 내려온다. 윌리엄대공이 1397년에 이 건물을 매입하여 자기 소유로 만들었다. 윌리엄대공은 사자 한마리를 키웠다. 사자는 대공이 어디를 가든지 충실하게 따라 다녔다. 어느날 말을 타고 외출했던 대공이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이 대공을 프라하 하우스로 급히 옮겨 치료를 했으나 상처가 너무 심해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자는 대공을 모신 침대에 올라앉아 대공의 시신을 지켰다. 때문에 아무도 대공의 시신을 옮길 수 없었다. 사자는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않고 오로지 주인의 시신을 지키며 지냈다. 며칠후 이 충실한 사자는 주인의 윌리엄대공의 뒤를 따라 숨을 거두었다.


모르친플라츠와 기념조형물. 뒤편으로 루프레헤츠교회가 보인다.

 

[레오폴드 휘글 호프]

루프레헤츠플라츠를 떠나기 전에 운하(Kai)쪽으로 눈을 돌려보면 작은 공원이 보인다. 레오폴드 휘글 호프(Leopold Figl Hof)라고 부른다. 전에는 모르친플라츠(Morzinplatz)라고 불렀던 곳이다.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슈베덴플라츠의 아이스크림 집에 몰려들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데에는 정신이 없지만 이곳 레오폴드 휘글 호프에 있는 작은 기념물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것 같다. 이 곳에는 원래 4층 짜리 메트로폴(Metropol)호텔이 있었다. 1938년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나치독일은 이 호텔을 게슈타포본부로 사용했다. 공산주의자, 반파치스트주의자, 유태인 들을 소환하여 고문하고 일부는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한 곳이다. 공원 한 구석에는 화감암 몇 개 세워져 있다. 게슈타포본부인 메트로폴에 끌려와 고문을 당한 끝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당시에 메트로폴호텔로 오라는 소환장을 받는 것은 곧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을 당하거나 또는 강제집단수용소로 끌려가는 것을 의미했다. 전쟁이 끝나자 사람들은 게슈타포본부로 몰려가 웬수의 게슈타포!라고 소리치며 건물을 산산이 파괴했다. 이후로 그 자리에는 새로운 건물을 세우지 않았다.

 

호텔 메트로폴 그림엽서. 비엔나의 명물이었으나 전쟁 중에는 나치의 게슈타포의 본부였다.

 

조형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Hier stand das Haus der Gestapo. Es was fuer die Bekenner Oesterreichs Hoelle. Es war fuer viele von ihnen der Vorlauf des Todes. Es ist in Truemmer gesunken wie das tausendjaehrige Reich. Oesterreich ist aber widerauderstanden und mit ihn unsere Toten und unsterblichen Opfer.' 

이 글을 억지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곳에 게슈타포 본부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에게는 지옥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으로 불려온다는 것은 죽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마치 천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막을 내리듯 오스트리아를 깊은 물속에 빠트린 곳이다. 오스트리아는 이곳에 기념탑을 세워 무참하게 목숨을 잃은 사람들 그리고 영원한 희생자들을 위해 건립했다.'

 

이제 다시 뒤로 돌아서 자이텐슈테텐가쎄로 발길을 돌려보자.

 

게슈타포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기념하는 조형물. 메트로폴이라는 호텔이 있던 자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