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3일 투어

9. 플라이슈마르크트 (Fleischmarkt)

정준극 2007. 4. 11. 15:01

플라이슈마르크트 (Fleischmarkt)


이 거리에 대한 기록은 멀리 1220년경의 책자에까지 나와 있다. 이 거리의 명칭은 글자 그대로 육류시장(플라이슈마르크트)이지만 이곳에 육류시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신 도축자연맹회관이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는 부유한 도축자들이 이 거리에서 많이 살았다.  때문에 플라이슈마르크트라는 이름이 붙었다. 독일어의 플라이슈는 돼지고기등 육류를 말한다.

 

그리헨바이슬 식당의 입구 벽면에 설치된 터키의 비엔나 공성시 날아온 포탄들

 

라우벤슈타이크에서 바로 나와 만나는 집은 그리스 식당(그리헨바이즐)이다. 옛날에는 이 식당을 붉은 지붕식당 황금 천사식당 황색 독수리식당’(zum Gelben Adler)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아마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 겸 여인숙 중의 하나일 것이다. 1500년경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이 식당의 역사를 설명하는 목판이 있다. 왼쪽의 계단을 통해 1(우리로는 2)으로 올라가는 곳에는 세개의 커다란 대포알이 박혀 있다. 1529년 당시에는 이곳이 황색 독수리식당이었으며 겸하여 비엔나 성곽에 있는 망루 중 하나였다. 터키군이 쳐들어 왔을 때 이 건물은 바로 이들의 포격을 받을수 있는 중앙에 있었다. 비교적 최근인 1963년 이 건물을 재건축할 때에 벽에 박혀 있는 세개의 대포알을 발견했다. 터키군이 쏜 대포알이 그대로 박혀 있었던 것이었다. 식당주인은 세개의 대포알을 액자에 넣어 설명문과 함께 잘 전시해 놓았다.

 

그리헨가쎄로 올라가는 길. 비엔나 사람들은 이런 좁은 길을 글라스베르크라고 불렀다.

 

이 집이 붉은 지붕이라고 불리던 때에 비엔나는 역병(페스트)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비엔나에는 세번에 걸친 역병 재앙이 있었다. 1349, 1364, 그리고 1679년이다. 역병은 누구의 탓으로 돌릴수 없는 재난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공중위생이었다. 그러나 당시 의사들의 처방을 보면 이게 도대체 위생을 강화하여 역병을 고치자는 것인지 아니면 역병이 더 번지도록 도와주는 것인지 모를 정도였다. 예를 들면 이런 처방도 있었다. 역병 때문에 몸이 부어오르고 통증이 생긴 사람은 두꺼비를 잡아 머리로부터 꽁무니까지 꼬챙이로 꿰어서 몸의 부은 부위에 얹어 놓도록 하되 두꺼비의 배가 부위에 닿도록 하면 안된다. 혹시라도 두꺼비의 독이 역병 부위에 옮겨 번질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두꺼비를 말려서 가루로 만든후 노란 횟가루에 섞어 역병 부위에 바르면 더 효과가 있다. 이렇게 두꺼비를 가루로 만들면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줄수 있는 잇점이 있다. 이는 당시 역병 의사로 유명했던 소르베(Sorbait)박사의 처방이었다. 1679년의 일이었다.

 

플라이슈마르크트의 그리헨바이슬 입구. 오른쪽의 건물은 그리스정교회

 

역병과 관련된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역병이 마지막으로 기승을 부리던 해에(1679년을 말함) 가죽피리(백파이프)를 잘 불며 노래도 잘하는 아우구스틴(Augustin)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이 술집, 저 술집을 다니며 가죽피리를 불고 노래를 불러 수고료를 받으며 살았다. 아무튼 그런 연고로 아우구스틴은 비엔나에서 상당히 유명했다. 사람들은 그를 사랑하는 아우구스틴(Lieber Augustin)이라고 부르며 좋아했다. 아우구스틴은 사람들이 수고했다고 술 한잔씩을 권하면 사양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저 혹독한 1679년에 사람들의 목숨은 역병 때문에 마치 파리목숨과 같았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역병 증세가 있으면 아직 숨이 붙어 있어도 그저 길거리에 내다 버렸다. 병이 전염되는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기 때문에 변변한 장례식을 치룰 염두가 없었다. 묘지를 따로 만드는 것은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밤이되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시체를 거두어 가는 마차 소리가 음침한 거리를 더욱 음침하게 만들었다. 누군지도 모르는 시체들을 가득 실은 마차는 교외로 나가 커다란 구덩이에 시체들을 버리고 그 위에 허연 석회가루를 뿌렸다. 시체들이 빨리 굳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공포가 뒤덮인 이 도시에서 그나마 생존해 있는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두려움을 잠시나마 잊기 위해 여유만 있으면 술집으로 가서 술을 퍼 마시며 떠들어 댔다. 그런 와중에서 아우구스틴은 가장 사랑 받는 인기가수였다.

 

플라이슈마르크트에 있는 그리스정교회

 

어느날 밤, 이날 따라 아우구스틴은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다. 그리헨바이젤식당에서 사람들이 권하는 술을 생각없이 무조건 받아 마셨기 때문이었다. 아우구스틴은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술집에서 나와 겨우 몇걸음 가다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어떤 집 처마에 쓰러져 깊은 잠에 빠졌다. 잠시후 시체를 걷으러 다니는 마차가 와서 긴 막대기로 아우구스틴을 집어 올려 마차 위로 던져올렸다. 그런데도 아우구스틴은 정신 없이 잠에 빠져 있었다. 교외의 공동묘지에 오자 일꾼들은 마차에 실려 있던 시체들을 구덩이에 부어 넣었다. 그러나 일꾼들은 너무 지쳐서 시체더미에서 악취가 나지 않도록 하고 시체들을 빨리 굳게 하기 위해 뿌리는 하얀 횟가루를 뿌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다.

 

오후쯤해서 잠에서 깨어난 아우구스틴은 주위를 살피다가 그만 질겁을 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무엇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러다가 자기 옆에 역병으로 죽은 시체들이 널려있는 것을 보고 누가 자기를 이런데 버렸느냐고 욕 바가지를 퍼부으면서 살려 달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도 와서 들여다 보는 사람이 없었다. 겁에 질린 아우구스틴의 소리가 너무 실낱 같아서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아우구스틴은 손에서 놓지 않고 가지고있던 가죽피리를 죽을 힘을 다해 불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아우구스틴의 가죽피리소리인줄 알고 달려와 구해 주었다. 그때 아우구스틴이 피리로 분 노래는,

 

             O du lieber Augustin, Augustin, Augustin,

              O du lieber Augustin, alles ist hin 이었다.  

 

아무튼 아우구스틴은 기적적으로 구조되었다. 사람들의 그의 노래를 알아 듣지 못했다면 아마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그보다도 더 기적은 그가 역병에 걸려 죽은 시체들 사이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있었지만 하나도 전염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틴은 그런 사건이 있은 후에도 몇 년에 걸쳐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가 겪은 얘기를 해 주며 지냈다. 그리헨바이젤식당의 한구석에는 탁자 앞에 앉아 있는 아우구스틴의 실물대 인형이 있으며 탁자위에는 손님들이 던져준 동전들이 널려있다 

 


그리헨바이즐과 아우구스틴 기념 조각물. Hier sang sein Lied zum Der Liebe Augustin 이라고 적혀 있다. 이곳에서 자기의 노래인 사랑하는 아우구스틴을 불렀다는 뜻이다. 

 

그리헨바이젤 바로 건너편 집은 플라이슈마르크트 18번지이다. 3층 벽면에는 요세프2세황제의 부조가 장식되어있다. 그 아래에는 자못 허풍이 깃든 글귀가 적혀있다. 이 집은 언젠가 부서질 덧없는 것이지만 요세프황제의 명성은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에게 영원불멸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는 인내를 가르쳐 주었다. 요세프황제에 게 충성을 다짐했을것 같은 집주인의 대단한 찬사가 아닐수 없다. 그런데 요세프 황제가 요세프 1세를 말하는 것인지 요세프 2세를 말하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플라이슈마르크트 141번지

 

그리헨가쎄와 플라이슈마르크트가 만나는 코너에 유명한 마르홀트(Marhold)식당이 있다.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식당중의 하나이다. 1566년부터 영업을 해 왔다. 그리헨바이젤에서 돌아나와 그리스정교회를 지나면 볼펜가쎄(Wolfengasse)를 만난다. 전에 이곳에 있었던 하얀 늑대라는 주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볼펜가쎄를 지나면 거리이름도 무시무시한 드라헨가쎄(Drachengasse)를 곧바로 만난다. 중세로부터 용은 악마를 상징했기 때문에 거리 이름을 용의 거리라고 한 것은 심상치 않다. 그러나 드라헨가쎄의 용에 대하여는 겁낼 필요가 없다. 1660년에 비엔나 시의원을 지낸 요한 마르틴 드라흐(Johann Martin Drach)이름에서 따온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드라흐는 용을 뜻하는 단어이므로 요한 마르틴 드라흐의 집 문에는 용을 그린 간판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이제 오른쪽으로 확 꺾어서 포스트가쎄로 들어갔다가 쇤란테른가쎄까지 가보자.

 

그리헨바이슬 옆 건물인 플라이슈마르크트 9번지는 '톰소이어의 모험'으로 유명한 미국의 마크 트웨인이 1897-98년에 비엔나에 체류했을 때에 잠시 거주하면서 집필한 장소라고 한다.

                     

플라이슈마르크트 28번지는 모차르트가 6세 때인 1762년 처음으로 아버지 레오폴드, 누나 난네를과 함께 비엔나 와서 묵었던 여관이 있던 집이다. 당시에는 '흰 황소'여관이라고 불렀다. 오늘날에는 트라 라 카페 레스토랑(Tra- Ra Cafe Restaurant)이 자리잡고 있다. 캐른트너 음식과 비엔나 음식을 서브한다.

 

플라이슈마르크트 28번지. 18세기에 '흰 황소'여관이 있던 건물이다. 모차르트와 인연이 있는 장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