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3일 투어

15. 백커슈트라쎄 (Bäckerstrasse)

정준극 2007. 4. 11. 15:03

백커슈트라쎄 (Bäckerstrasse)


학술원의 다른 편으로 가면 백커슈트라쎄(Bäckerstrasse)에 들어설수 있다. 이 거리는 글자 그대로 제빵공들의 거리라는 뜻이지만 제빵공들이 많이 살았다든지 또는 빵집이 많이 있었다든지 하는 기록은 없다. 다만, 식당과는 약간 관련이 있다. 주로 학생식당이었다. 독토르-이그나즈-자이펠-광장에서 슈테판성당 방향으로 들어가면서 있는 첫번째 집(16번지)은 학생식당이었다. 바르바라 로만(Barbara Roman)이라는 여자가 차린 학생식당이었다. 그는 왕궁(호프부르크를 말함)의 주방에서 나오는 불용음식(이른바 짬밥)을 받아다가 학생들에게 싼 값으로 팔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하여 이 여자는 슈마우스봐르벨(Schmauswarbel)이라는 학생식당을 차렸다. 값도 저렴했다. 대인기였다. 슈마우스는 진수성찬이란 뜻이며 봐르벨은 식당주인인 바르바라의 애칭이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왕궁이나 귀족의 저택에서 나오는 음식나머지를 받아다가 식당을 차려 학생들에게 팔기 시작했다. 상당한 인기였다. 그러나 구대학이 링(Ring)으로 옮겨가자 슈마우스봐르벨을 비롯한 학생식당들은 슬며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베커슈트라쎄 12 '황금사슴집'(Zu goldenen Hirsch). 유명한 극작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의 생가이다.

 

최근 12번지 집을 수리할 때에 놀라운 집간판 하나가 발견되었다. 암소가 장기를 두는 집이라는 내용의 간판이었다. 안경을 쓴 암소가 박가몬놀이(Backgammon Spiel)라고 하는 서양장기(주사위놀이와 비슷한 놀이)를 두고 있는 그림이다. 암소의 상대방은 늑대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늑대를 그린 부분은 나중에 현관문을 확장할 때 거의 없어졌지만 그래도 다행하게 늑대의 얼굴 일부만 남아 있게 되었다. 중세에는 건물에 대한 번지수가 없었으므로 자기 집 현관에 독특한 그림간판을 내걸어서 누구누구네의 집이라고 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가하면 글씨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으므로 그림으로 무슨 상점인지를 표시하여 찾아오도록 한 경우도 많았다.

 

 박가몬(Backgammon) 놀이를 하고 있는 암소와 늑대 

                        

암소가 박가몬 놀이를 하는 그림에서 상대방은 늑대가 아니라 여우라는 해석도 있다. 아무튼 다음과 같은 만화같은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늑대(또는 여우)가 암소에게 내가 주사위 놀음에서 이기면 네 가죽은 내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암소는 점잖게 자만하지마! 쪽박을 차는 쪽은 내가 아니라 너야!라고 대꾸해 주었다. 암소와 여우 사이에는 가죽 무두장이가 커다란 파리채를 들고 있다. 암소의 머리 위에는 파리 한마리가 앉아있다. 무두장이는 바쁘지만 누가 이기는지 보아야지!라고 말했다. 전해 내려오는 얘기에는 사냥꾼과 개들도 등장하지만 그림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싱거운 우화는 실은 상당한 비유를 내포하고 있다. 17세기 당시 개신교와 가톨릭간의 투쟁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암소는 가톨릭을, 늑대 (또는 여우)는 개신교를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두장이, 사냥꾼, 개는 탐욕스러운 시의원들과 법률가들을 말하고 파리는 아무 도움도 안되는 성직자들을 말한다는 것이다.

 

카페 '알트 빈'의 내부

 

백커슈트라쎄 반대편, 오른쪽으로 작은 골목길인 빈트하아그가쎄(Windhaaggasse)가 있다. 반개혁주의자로서 이름났던 빈트하아그 남작인 엔츠뮐러(Enzmüller)의 이름을 따서 붙인 길이다. 그는 개인적으로 4만명 이상의 개신교도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켰다. 그러나 그와 함께 반개혁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엔츠뮐러를 좋아하지 않았다. 이들은 엔츠뮐러가 인간적인 감정이 극히 부족한 사람이라고 소문을 퍼트렸다. 엔츠뮐러의 출생에 대하여는 이런 얘기도 나돌았다. 그의 어머니 카타리나가 어느날 한밤중에 아무도 없는 공동묘지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해골이 나타나 카타리나에게 자기를 등에 업고 집으로 가자고 강요하는 바람에 식은죽을 흘리면서 해골을 목말처럼 업고 집(백커슈트라쎄 9번지)으로 왔다는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골은 사라졌지만 그로부터 9개월후에 엔츠뮐러를 출산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9번지 집은 목등 집(영어로 Piggy-back House)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이 집은 빈트하아그 재단사무실로 사용되다가 1937년 카페 알트 빈(Cafe Alt Wien)이 들어섰다. 카페 알트 빈은 전쟁중인 1944년 폭격으로 거의 부서지고 다만 현관쪽만 남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복구하였다. 카페 알트 빈은 1936년 레오폴드 하벨카(Leopold Hawelka)와 부인 요세피네(Josefine)가 결혼식 이튿날 오픈한 카페이다. 나중에 하벨카 부부는 도로테어가쎄(Dorotheergasse)에 유명한 카페 하벨카(Cafe Hawelka)를 오픈하였다. 커피에 운명을 건 부부였다.

 

벡커슈트라쎄 9번지의 카페 알트 빈

 

카페 알트 빈은 괴상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이름나 있다. 특히 전위인지 무언지를 한다는 예술가들이 자주 모였다. 그중에서 유명한 인물은 행위예술가인 고트프리트 헬른봐인(Gottfried Helnwien: 1948- )이다. 그는 이 카페에서 1976년에 유명한 행위예술을 선보여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헬른봐인은 '동방박사의 경배'라는 사진 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마리아는 순수 아리안 혈통인 금발의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동방박사들은 나치의 친위대원들이었으며 아기 예수는 어린 히틀러였다. 헬른봐인은 나치의 제3제국과 독일, 오스트리아의 연결을 다시 모색코자 그같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고트프리트 헬른봐인이 카페 알트 빈에서 연출한 행위예술 (아름다운 희생자: Beautiful Victim)


고트프리트 헬른봐인의 '공현'(Epiphany: 동방박사들의 경배).


7번지는 아마 비엔나에서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르네상스 안뜰(호프)을 가지고 있는 집일 것이다. 안뜰의 벽면은 담장이넝쿨로 덮어져 있어서 운치를 더해주며 더구나 한쪽에 세워진 성모상은 바라보기만해도 마음을 경건케 해준다. 이 집 안뜰이야말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앉아서 명상하고 싶은 곳이다. 안뜰의 오른쪽에는 마구간이 있다. 마구간과 그 위의 회랑들을 보면 16세기 당시에 이 안뜰이 얼마나 부산했었을지를 짐작케 해준다. 1층의 발코니 벽에는 아름다운 단철(鍛鐵) 철책장식이 전시되어 있다. 비더마이어(Biedermeier) 화가인 프리드리히 아멜링(Friedrich Amerling)의 수장품이다. 비더마이어 양식은 19세기의 간소한 가구 양식을 말한다. 이 말은 경멸적으로는 인습적이고 판에 박힌듯하며 범속하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도하다.

 

전형적인 비더마이어 건축

 

뮌헨출신의 고틀리브 비더마이어(Gottlieb Biedermeier)에 의해 이끌어진 이 추세는 유럽 전역에 영향을 끼쳤다. 지나치게 화려한 바로크 양식, 또는 로코코 양식에 대한 일종의 저항이었다. 음악에 있어서는 극장무대가 아니라 실내적 분위기의 음악이 발돋움했다. 음악 애호가들이 모여 음악을 토론하고 연주하는 실질적인 스타일이었다. 로베르트 슈만의 음악은 그런 분위기였지만 슈만을 비더마이어 작곡가라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프란츠 슈베르트야 말로 비더마이어 음악의 전형적인 작곡가이다. 비더마이어 스타일은 왈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당연히 비엔나가 왈츠의 지붕에 올라서게 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대규모의 악단에 의한 무곡이 지배적이었으나 메테르니히 수상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전통의 랜들러와 같은 가볍고 조용하며 �있는 음악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다.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와 요셉 란너(Joseph Lanner)는 비엔나의 비더마이어 왈츠를 주도한 인물들이다. 이를 바탕으로하여 요한 슈트라우스가 등장하게 되었고 연극에서는 헨리에타 존타크(Henrietta Sontag), 발레에는 패니 엘쓸러(Fanny Elssler)가 주름잡게 되었으며 이후 음악에서는 스웨덴의 제니 린드(Jenny Lind)가 비더마이어의 전통을 이어 받았다.


전설적인 발레리나 패니 아이슬러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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