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3일 투어

16. 루게크 (Lugeck)

정준극 2007. 4. 11. 15:04

루게크 (Lugeck)

 

루게크 광장에 있는 레겐스부르거호프. 앞에 있는 기념상이 구텐베르그이다.

19세기의 루게크 일대

                  

백커슈트라쎄가 끝나는 곳에 루게크광장이 있다. 이 광장에는 장엄한 레겐스부르거호프(Regensburgerhof) 건물이 있어서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이 건물은 특히 밤조명과 함께 신비한 환상적인 느낌까지 갖도록 해주고 있어서 일부러 야경을 구경하러 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레겐스부르거호프는 독일 바바리아의 상인들이 비엔나에 오면 묵었던 여관이다. 주로 쾰른의 상인들이 묵었기 때문에 쾰너호프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이 건물은 19세기에 파괴되었으나 재건축을 맡은 책임자가 열심을 다하여 거의 옛날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지붕아래의 벽감처럼 우묵한 곳에 있는 남자와 여자의 조각상까지도 옛 모습대로 복원해 놓았다. 탕자를 기다리는 부모의 모습을 담았다고 하는 조각상이다. 비엔나에서 루게크라는 지명은 이미 1275년의 기록에 등장한다. 그만큼 오래된 지역이다. 루게크라는 이름은 루그-인스-란트(Lug-ins-Land: 망루탑)에서 연유했다. 하지만 이 곳에 망루탑이 있었다는 증거나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아마 쾰너호프가 높은 건물이어서 망루탑과 같다고 생각해서 그런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레겐스부르거호프 앞의 광장에는 금속활자를 발명하여 유명한 구텐베르크의 기념상이 있다. 광장 한쪽 건물에 구텐베르크 인쇄소가 있는 것을 보면 예전에 이 곳에 인쇄소가 여럿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구텐베르크는 쾰른에서 가까운 라인강변의 마인츠 출신이므로 그런 연고로 이곳에 기념상을 세웠다는 얘기도 있다. 광장 한쪽에 있는 구텐베르크 카페는 오랜 연륜의 장소이다.

 

 루게크 광장의 한 쪽에 있는 구텐베르그 카페 식당 

       

현재 구텐베르크기념상이 서 있는 곳에는 옛날에 웅덩이와 같은 큰 구멍이 있었다. 1547년에 만든 히르슈포겔(Hirschvogel)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구멍의 명칭은 마르커스 쿠르티우스 로크(Marcus Curtius Loch)였다. 마르커스 쿠르티우스는 로마의 영웅이었다. 로크(Loch)라는 말은 호수라는 뜻이지만 구덩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때 로마제국의 공회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뜨거운 분쟁이 벌어진 일이 있었다. 마르커스는 제국을 위기에 빠트릴수도 있는 이 같은 분쟁을 막기위해 큰 구멍에 스스로 몸을 던져 죽음으로서 화해를 일구어 냈다고 한다. 일설에는 로마공회당 광장의 땅이 갑자기 갈라지는 바람에 큰 구멍이 생겨서 위험에 빠질뻔 했는데 마르커스가 그 구멍으로 몸을 던져 들어가서 구멍을 막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로부터 마르커스 쿠르티우스라는 이름은 자기를 희생함으로서 큰 위기를 구한 인물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루게크광장에 있었다는 큰 구멍이 로마시대에 마르커스가 몸을 날려 들어가 더 큰 재난을 막았다는 그 구멍과 흡사하다고 생각하여 마르커스 쿠르티우스 로크(로크라는 단어는 호수라는 의미로도 사용함)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루게크 광장에 있었다는 큰 구멍이 무슨 용도로 사용되었는지 모무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우물이었을 것이라는 가정도 있었고 큰 종을 주조하던 구멍, 지하묘지로 통하는 환풍구, 사형수 처형장, 이방신에게 제사지내던 곳이라는 등등의 해석이 있었지만 정확한 증거는 없다. 그런가하면 이 모든 얘기는 학생들이 농담으로 지어낸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루게크 저녁모습


로텐투름슈트라쎄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훼데를호프(Federlhof)를 만난다. 6번지이다. 이 건물은 비엔나에서 가장 공들여서 지은 저택이다. 1591년에 게오르그 훼데를(Georg Federl)이란 상인이 사서 자기 소유로 만든 집이었다. 그로부터 훼데를호프라고 불렀다. 내려오는 얘기에 따르면 필립피네 벨저(Philippine Welser)가 한때 이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이 여인은 유명한 독일 은행가의 딸로서 1557년 페르디난드 대공과 결혼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왕족이 평민과 결혼하면 후손은 상속을 받지 못하도록 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사랑으로 결혼하였다. 어쨌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은 대공의 작위와 재산을 승계받지 못했고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 집은 대공의 저택이니만치 당대의 유명인사들이 자주 들나 들거나 묵었다. 예를 들면 파라첼서스(Paracelsus), 발렌슈타인(Wallenstein), 라이브니츠(Leibnitz) 등이 묵었다. 저택 안에 들어서면 앞면의 벽에 르네상스 현관의 자취가 남아 있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성모 부조상은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다.

 

볼차일레 5번지. 베커슈트라쎄 두르흐강(통로)

 

백커슈트라쎄로 돌아가 루게크 5번지에는 안뜰이 있고 이곳을 통과하면 볼짜일레(Wollzeile) 5번지와 연결되어 있다. 이 안뜰에는 이상한 이름이 붙어 있다. 슈메켄더 부름호프(Schmeckender Wurmhof)이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냄새나는 벌레 안뜰이다. 슈메켄이란 단어에는 비엔나 방언으로 맛있다는 뜻도 있다. 이런 이상한 이름에 대하여는 두가지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있다. 첫번째 얘기는 용이(비엔나 방언으로 Wurm은 벌레라는 뜻 이외에 용이라는 뜻도 있다) 이 집의 안뜰에 면해 있는 어떤 지하실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용이 지독하게 고약한 냄새를 내뿜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건물에 붙어 있는 안뜰을 냄새나는 용(벌레)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 얘기는 첫번째 얘기보다는 상당히 매력적이다. 17세기 말에 이 안뜰에 면해 있는 어떤 집에 슈미트후버(Schmiedhuber)라는 이름의 지갑 만드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그에게는 예쁜 딸이 하나 있었다. 딸의 이름은 엉뚱하게도 살로메였다. 슈미트후버는 자기 상점이 지갑이나 가방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악어 한마리를 간판으로 걸어 놓았다. 당시 악어가죽으로 만든 지갑이나 가방은 최고급품이었다. 그건 그렇고, 예쁜 살로메 때문에 여러 청년들이 속을 태우던 중 어떤 젊은 학생 하나가 특히 살로메를 사모하였다. 이 학생은 혹시라도 살로메의 얼굴을 볼수 있을까 하는 일념에서 날마다 밤이 되면 상점 앞에 와서 위층의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이 일과였다. 어느날, 그날도 밤중에 한참이나 기다리던중 마침내 살로메가 창문을 열고 몸을 기대어 밖을 내다보게 되었다. 학생은 가지고 온 꽃 몇송이를 살로메에게 던졌다. 가난했던 학생은 많은 돈을 들여서 꽃다발을 살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들에서 향기나는 몇송이의 꽃을 꺾어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살로메는 청년 학생이 던져준 몇송이의 꽃에는 관심도 없는 듯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꽃송이들은 그대로 떨어지면서 상점간판으로 걸어 놓은 악어의 두 발 사이에 끼게 되었다. 다음날 아침,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 이상하게 생긴 벌레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악어에 붙어 있는 꽃송이가 마치 벌레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향기나는 벌레라는 이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휘글뮐러의 비너슈니첼은 접시보다 큰 것으로 유명하다. 살라드까지 나오므로 혼자서 먹기는 무리이다.

 

이 안뜰에 면해 있는 어떤 집에는 유명한 휘글뮐러(Figlmüller)가 살았었다. 휘글뮐러는 비엔나에서 가장 큰 뷔너슈니첼(Wiener Schnitzel)을 만들어 팔던 사람이었다.  항상 슈니첼이 접시보다 커야 했다. 그 집은 지금 비엔나의 명물인 휘글뮐러 식당이다. 이제 안뜰을 거쳐 나오면 볼짜일레을 만나며 이를 건너면 슈테판성당의 뒤쪽으로 가는 좁은 골목길로 들어설수 있다.

 

1905년부터 영업을 해온 휘글뮐러 식당. 비너 슈니첼이 유명하다. 

휘글뮐러는 루게크 5번지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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