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크가쎄 (Bankgasse)
방크가쎄라는 이름은 이곳에 오스트로-헝가리국립은행(Austro-Hungarian National Bank)이 헤렌가쎄와 만나는 모퉁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의 이름은 별다른 의미가 없이 다만 은행거리란 뜻으로 단조롭지만 실은 이 거리에 얽힌 흥미있는 얘기가 많이 있다. 1번지가 있는 자리에는 옛날에 네채의 작고 낡은 집들이 있었다. 그중 한 채의 집 이름은 불길한 이름을 갖고 있었다. ‘다섯 살인자의 집’이었다. 1500년경, 이 집에는 레온하르트 라이스너(Leonhard Reisner)라는 빵장수가 살았다. 라이스너의 빵공장에는 견습공으로 바로톨로뮤(Bartholomew)라는 청년이 있었다. 바르톨로뮤는 약속된 견습기간을 마치기도 전에 빵공장을 그만 두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해 11월 23일 한밤중, 바르톨로뮤는 몰래 빵공장을 다시 찾아와 2층으로 올라가서 자고있던 자기의 후배견습공을 도끼로 무참히 내리쳐 죽이고 이어 다른 방에 있던 하녀도 같은 방법으로 죽였다. 잠결에 무슨 소리를 들은 주인 라이스너가 침상에서 일어나 2층에서 아래층으로 계단을 내려 오자 기다리고 있던 바로톨로뮤가 역시 참혹한 도끼 세례를 주었다. 2층의 주인방으로 올라간 바로톨로뮤는 자고있는 주인 마나님을 또 다시 도끼로 내리쳐 단번에 죽였다. 그런후 다시 아랫층으로 내려온 살인자 바르톨로뮤는 마침 마루바닥에 엎어져 있는 자기 아버지의 시체옆에서 겁이 나서 울고있는 이 집의 일곱살 된 딸을 발견했다. 딸 아이는 얼마전까지도 자기를 귀여워해 주던 바로톨로뮤 아저씨를 발견하고 놀랬지만 침착하게 억지로 웃음을 띠고 ‘바르텔(Barthel. 바르톨로뮤의 애칭)아저씨! 여기 인형을 드릴테니 제발 해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아버지 열쇠가 어디 있는지 알려 드릴께요. 나를 죽이지 말아 주세요’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바르톨로메는 듣지 않고 어린 여자 아이의 목을 도끼로 내려쳤다.
방크가쎄
살인마 바르톨로뮤는 희대의 살인극을 저지른후 고향인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로 도망갔으나 빵공장 주인으로부터 훔친 돈을 흥청망청 쓰다가 의심을 받아 체포되었다. 경찰에 붙잡힌 살인마 바르톨로뮤는 5명의 무고한 생명을 무참히 빼앗은 것을 마치 영웅적인 활동을 한 것처럼 떠벌여댔다. 경찰은 그를 비엔나로 압송했다. 그에게는 종전에 볼수 없었던 가장 가혹한 형벌이 선고되었다. 손가락을 하나하나씩 자르도록 했고 그런후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몸을 찌르도록 했으며 또 그 다음에는 말에 묶어서 비엔나의 다섯군데 시장거리를 끌려 다니도록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는 처형장으로 끌고가 사형집행인으로 하여금 항문에 큰 막대기를 꽂아 등어리 부분에서 빠져 나오도록 했다
방크가쎄. 오른쪽은 옛 헝가리 대사관
이런 모든 형벌이 끝나고 이제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을 때 바르톨로뮤는 자기의 죄를 자백하고 마음속의 말을 털어 놓았다. 그는 둘러선 군중들에게 자기의 살인행위중에서 어른 4명에 대하여는 그다지 죄책감이 없으나 자기를 바라보고 웃음을 지으면서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어린 아이의 얼굴을 잊을수 없다고 말하고 용서를 구하였다. 그는 그 어린아이를 죽인 죄값으로 무슨 형벌이든지 달게 받겠다고 말하였다. 몸을 뾰죽한 막대기로 꽂는 형벌은 아주 오랜 옛날에나 어쩌다 있었을 뿐 집행이 되지 않았던 것인데 바르톨로뮤를 벌주기 위해 재현하였다. 문제는 사형집행인이 항문에 막대기를 꽂는 형벌을 해본 경험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르콜로뮤의 항문에 막대기를 꽂아 보려고 했으나 경험이 없어서 계속 실패했다. 그때마다 바르톨로뮤는 울부짖듯 ‘거기가 아니야! 제발 좀 바로 꽂아요!’라고 외쳤다. 바르톨로뮤가 왜 도끼살인을 저질렀는지 그 이유에 대하여는 알려진 바가 없다.
방크가쎄 4-6번지 팔레 슈트라트만. 구 헝가리대사관
길건너 2번지는 팔레 바티야니(Palais Battiyani)이다. 사보이의 오이겐공자가 마음속으로 죽도록 사모했다는 백작부인이 살던 저택이다. 백작부인 이름은 ‘아름다운 로리’(Schoene Lori)라고만 알려졌다. 백작부인은 오스트리아제국 바티야니 대원수의 미망인이었다. 오이겐공자는 백작부인이 이미 나이 많이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에게 마음을 쏟았다. 오이겐공자는 거의 매일밤 백작부인을 찾아가 휘스트(whist)라는 카드게임을 하며 함께 시간을 보냈다. 오이겐공자는 밤 10시쯤 백작부인과 작별하고 집으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오르면 곧장 잠에 떨어졌다. 늙은 마부도 졸음이 많았다. 밤마다 잠에 푹 빠진 공자와 마부를 태운 마차가 저절로 집을 찾아 가는 광경은 비엔나 사람들의 좋은 구경거리였다.
방크가쎄 2번지 현관의 조각
팔레 파티야니는 19세기에 들어와서 저택의 일부를 호텔로 개조하였다. 호텔 클롬저(Hotel Klomser)는 ‘아름다운 로리’와 오이겐공자의 이루지 못할 로맨가 펼쳐졌던 장소로서 유명했지만 나중에는 스파이들의 활동장소로서 더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비엔나에 오래 살았던 사람이면 모를 바가 없는 유명한 간첩인 알프레드 레들(Alfred Redl)대령이 자살한 곳도 이 호텔이었다. 헝가리 출신의 레들대령은 오스트리아 육군첩보국장의 보좌관이었다. 그래서 최고의 기밀문서를 만질수가 있었다. 러시아 비밀첩부국은 레들대령이 어떤 젊은 장교와 동성연애를 하는 것을 알고 협박 및 뇌물로서 그를 쉽게 매수하였다. 결과, 러시아는 물론이고 이탈리아, 세르비아, 심지어는 프랑스까지도 전쟁전에 이미 오스트로-헝가리 제국군대의 배치내용을 알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무튼 레들대령의 정보유출로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은 1차대전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연극의 마지막 막은 호텔 클롬저의 무대에서 펼쳐졌다.
알프레드 레들(1864-1913)
호텔 클롬저에서 아래로 좀더 내려가면 중앙우체국이 있다. 우체국에는 니콘 니체타스(Nikon Nizatas)라는 사람 앞으로 배달된 두툼한 편지가 있었지만 몇 달째 아무도 찾아가지 않고 있었다. 찾아가는 사람도 없고 반송요청도 없었기 때문에 우체국은 그 편지를 뜯어 보았다. 놀랍게도 편지안에는 6천 크로네(약 3천만원)나 되는 돈과 군사작전과 관련된 듯한 쪽지가 들어있었다. 우체국장은 곧바로 첩보국에 이 사항을 연락했다. 첩보국은 우체국 옆집에 비밀 감시소를 마련해 놓고 혹시 나타날지도 모르는 니콘 니체타스라는 사람을 잡기위해 요원들을 잠복근무시켰다. 우편물을 내주는 창구의 여직원과도 미리 약속이 되어있었다. 누구든지 니체타스라고 하면서 편지를 찾으러 오면 책상 밑에 은밀히 설치해 놓은 벨을 울려 잠복중인 세명의 요원에게 연락하도록 했다. 그러는 와중에 일반적인 탐정소설에서 볼수 있듯이 약간의 해프닝도 있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어서 잠복업무는 계속되었다.
호텔 클롬저의 옛모습. 한때는 헤렌가쎄 19번지였다.
3일째 되던 날 오후, 마침내 문제의 스파이가 아무런 조심도 기울이지 아니한채 나타나 창구여직원에게 니체타스 앞으로 온 편지가 있을것이므로 찾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놀랍게도 레들대령이었다. 첩보국은 설마하며 다시 몇시간째 레들대령의 동정을 살폈다. 수상한 행동들이 엿보였다. 그날 저녁 첩보국 요원들은 호텔 클롬저에서 레들대령을 반역죄로 무난히 체포하였다. 첩보국 요원들은 레들대령의 지위와 명예를 고려하여 그의 손에 권총 한자루를 쥐어주고 물러나왔다. 잠시후 방안에서 한방의 총소리가 들렸다. 이로서 동성애인에게 버림받은 희대의 간첩 레들대령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여파는 말할수 없이 컸었다.
호텔 클롬저가 있던 건물 현재의 모습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첩보국은 사태의 심각성을 고려하여 이 사건을 철저하게 은폐키로 했다. 혹시 적국에게 역이용할수 있는 계기가 될수도 있다고 계산에서였다. 레들대령이 자살한 다음날, 첩보국은 레들대령이 묵었던 방을 다시 샅샅이 조사하였다. 그러던 중 책상설합이 닫혀 있어서 열지 못하자 자물쇠공을 불러 열도록 했다. 그 자물쇠공은 우연히 컵받침에 러시아 육군첩보국 연락처가 적혀 있는것을 보고 궁금증이 동하여 책상설합을 열자 그 속에 있는 서류들을 몰래 숨겨가지고 나왔다. 그는 레들대령이 간첩활동을 했다고 확신하고 곧바로 신문사에 연락했다. 그리하여 레들대령 사건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가장 센세이셔널한 스캔들이 되었다. 이제 헤렌가쎄를 건너 프라이융 아케이드로 들어가보자.
한여름의 프라이융 거리
[프라이융] Freyung. 프라이융이라는 명칭은 118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엔나에 온 아일랜드 수도회의 수도승들은 귀족들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벌였고 마침내 군주의 후원에 힘입어서 자유를 얻은데 대한 기념으로 붙여진것이다. 즉, 프라이융은 '자유'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투쟁으로 아일랜드 수도승들은 예배를 드릴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다. 이 광장에는 1846년 루드비히 슈반탈러(Ludwig Schwanthaler)가 제작한 도나우요정분수(또는 오스트리아분수)가 있다. 이 광장의 한쪽에 있는 아일랜드 관련의 세건물, 즉 훌륭한 화랑이 있는 쇼텐슈티프트(Schottenstift), 귀중한 제단이 있는 쇼텐키르헤(Schottenkirche), 그리고 이른바 Chest of Drawers House라고 불리는 건물이다. 건축가 훼르스텔(Ferstel)의 이름을 딴 훼르스텔궁전은 원래 은행 및 증권가래소 건물로 지었으나 나중에 군인카지노가 되었고 현재는 쇼핑 아케이드가 들어서 있다.
프라이융 광장과 쇼텐키르헤(아일랜드수도회교회)
[오스트로-헝가리제국] 19세기 중반에 들어와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실제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서로 민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하나의 나라로 있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당시 유럽에서는 대제국에서 속하여있는 나라들이 너도나도 독립하려는 운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었다. 헝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무진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합스부르크 제국은 헝가리의 독립을 허용하지 않았다. 두 나라는 독립문제를 두고 많은 논란을 했다. 합스부르크의 제국정부와 헝가리의 귀족대표들간에 여러 차례 협상한 결과, 1867년 봄에 ‘타협’(Ausgleich)이라고 일컫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로서 1804년부터 존속해 왔던 오스트리아제국은 오스트로-헝가리제국(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로-헝가리 연합제국의 군주는 한명이지만 정부조직에 있어서는 각각 다른 수상을 두었고 장관들도 별도로 임명토록 했다. 다만, 외교장관, 전쟁장관, 재무장관만은 제국정부 측에서 공통으로 맡도록 했다.
헝가리 귀족들을 접견하는 프란츠 요셉 황제(오른쪽 끝 하얀 상의)
이어 두 나라 연합의 역사적인 대축제가 시작되었다. 축제의 절정은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씨씨)의 대관식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왕비로서 대관식을 가졌지만 헝가리의 귀족들은 씨씨를 마치 새로운 여왕(Koenigin)으로 간주하며 충성을 서약했다. 역사적으로 헝가리왕의 대관식은 프레쓰부르크(Pressburg)에서 열렸다. 지금의 포초니(Pozsony)마을이다. 그러나 새로 탄생한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프란츠 요셉 국왕과 엘리자베트 여왕의 대관식은 부다페스트의 부다(Buda)지역에 있는 성마태성당에서 거행되었다. 헝가리사람들은 엘리자베트를 대단히 존경하고 경배했다. 엘리자베트도 헝가리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엘리자베트(씨씨)는 오스트리아제국과 헝가리의 분열을 막은 기여를 했던 것이다. 헝가리는 프란츠 요셉과 엘리자베트에게 괴될뢰(Goedoelloe)에 있는 성을 선사했다. 언젠가 엘리자베트가 휴양장소로 관심을 두었던 곳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씨씨는 헝가리가 괴델뢰성을 기증해준 것을 감사해서 10만 플로린(Florin)을 희사하였다. 헝가리 정부는 이 돈을 오스트리아와 싸우다가 사망한 군인들의 미망인과 전쟁고아를 위해 사용토록했다. 이듬해에는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연합을 축하라도 하듯 발레리(Valerie)공주가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이로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존시대가 시작되었다.
부다의 성마태성당에서 거행된 프란츠 요셉과 엘라자베트(씨씨)의 헝가리 국왕 및 왕비 대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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