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5일 투어

12. 프라이융 (Freyung)

정준극 2007. 4. 11. 15:20

프라이융(Freyung)

 

프라이융으로 가는 길

 

처음에 이 광장은 스코틀랜드사람들의 이웃(Bei den Schotten: Next to the Scots)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틀린 설명이다. 왜냐하면 이곳에는 스코틀랜드수도사들이 아니라 아일랜드수도사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신앙심이 깊었던 하인리히 야소미어고트(Heinrich Jasomirgott: 하인리히2세)는 비엔나에서의 기독교 신앙 부흥을 위해 아일랜드 수도사들을 초청하였고 그들을 위해 1158년 현재의 프라이융 자리에 쇼텐슈티프트(Schottenstift: 슈티프르는 큰 수도원을 뜻함)를 건설해 주었다. 아일랜드 수도사들은 실제로 독일 레겐스부르크(Regensburg)의 성 야곱 수도원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당국은 쇼텐슈티프트 건물을 성역으로 간주하여 이곳에 은신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는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했다.

 

프라이융

 

프라이융(Freyung)이라는 말은 고대 독일어의 Frey 즉 Free라는 의미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곳에 있는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와 쇼텐키르헤(아일랜드 교회)는 오스트리아의 공작 통치로부터 자유스러워서 아무리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해도 이 곳 수도원과 교회에 피난처를 구하여 들어가면 당국으로서도 어찌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유스러운 곳이라는 의미에서 프라이융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쇼텐'이라는 말은 아일랜드어로서 젊은 수도사들의 모임이란 뜻이 있다고 한다. 쇼텐이란 단어는 스코틀랜드를 의미하지만 쇼텐슈티프트, 쇼텐토르, 쇼텐 링 등은 스코틀랜드와 아무런 연관이 없다. 아일랜드는 라틴어로 Scotia 라고 했다. 아일랜드는 한때 현재의 스코틀랜드를 점령하여 식민지로 삼은 일이 있다. 그 당시, 아일랜드와 아일랜드가 점령한 스코틀랜드를 구별하기 위해 아일랜드는 스코티아 마요르(Scotia Major: 대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는 스코티아 미노르(Scotia Minor: 소 스코틀랜드)라고 불렀다. 로마인들은 아일랜드를 히베르니아(Hibernia)라고 불렀고 현재의 스코틀랜드는 칼레도니아(Caledonia)라고 불렀다. 그런 의미에서 남태평양의 뉴 칼레도니아는 스코틀랜드와 무관하지 않다. 스코티아의 독일어 형태가 쇼텐이다. 그래서 쇼텐이란 단어가 들어가니까 스코틀랜드와 관련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아니다. 아일랜드와 관련이 있다.

 

프라이융 파사지 

                   

광장에서 왼쪽으로 걸어가면 3번지가 나온다. 한때는 여러 집들이 그룹을 이루었던 팔레 하라흐(Palais Harrach)이다. 하라흐가문이 1623년부터 살았던 건물이다. 그러다가 17세기에 들어와서 몇 개의 개별적인 집들을 통합하여 지금의 큰 저택으로 만들었다. 건물은 2차대전중 심하게 손상되었으나 지금은 말끔히 보수하여 아름답게 단장되어 있다. 건물의 한 쪽에는 한때 사진갤러리가 있었다. 지금은 예술역사박물관의 전시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므로이 박물관을 통하여 비록 한 부분이지만 팔레 하라흐의 면모를 볼수있다. 옆 건물인 팔레 페르스틀과 마찬가지로 팔레 하라흐에도 구내안뜰에 상점들과 화랑이 있고 작은 식당까지 있다.

 

팔레 하라흐(Palais Harrach)

 

프라이융광장에서 단연 눈에 들어오는 것은 광장 중앙에 있는 아름다운 분수이다. 오스트리아 분수라고 불리는 것이다. 분수의 상단에 서있는 왕관을 쓰고 창과 방패를 든 여인은 오스트리아를 상징한다. 그 아래에 있는 네명의 기사들은 오스트리아제국의 영토에 있는 네개의 강을 상징한다. 도나우(Donau), 비스툴라(Vistula), (Po), 엘베(Elbe)강이다. 도나우 강은 오스트리아를 흐르지만 다른 강들은 지리적으로 오스트리아와 관련이 없다. 하지만 한때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던 강들이다. 독일어 지역에서는 강을 모든 발전과 융성의 근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강을 사람이나 신으로 의인화하기도 한다. 프라이융의 기념상은 한때 유럽을 제패했던 합스부르크왕가의 관할지역을 표현하며 대제국의 위상을 높이자는 목적으로 건립된 탑이다. 이 기념상과 관련하여 재미난 얘기가 있다.

 

프라이융 1758년 그림 

                

분수의 제작을 책임맡은 루드비히 슈반탈러(Ludwig Schwanthaler)는 분수에 장식할 조각작품들을 뮌헨에서 주조했다. 맥주를 밥보다도 더 좋아한 슈반탈러는 오스트리아로부터 선급금으로 받은 돈을 모조리 맥주집에 탕진하여 궁한 처지가 되었다. 그는 친구들의 의견에 따라 조각작품들을 뮌헨에서 오스트리아로 보낼 때 담배를 밀수키로 했다. 그는 기념조각을 넣어 운반하는 상자안에 추가로 담배를 가득채워 넣었다. 황제의 지시로 만들어 보내는 기념조각이므로 국경의 세관에서 걸릴 염려가 없었다. 물건은 비엔나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슈반탈러는 병에 걸려 꼼짝 못하게 되었다. 조각품들과 함께 보낸 담배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 죽겠을 지경이지만 도무지 움직일 힘도 없었다. 슈반텔러는 며칠후 병에서 회복되자마자 급히 분수건축현장으로 달려갔다. 놀랍게도 기념조각들은 모두 제자리에 세워져 있었다. 귀중한 담배는 어떻게 되었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아마 그대로 조각작품 안에 묻혀 있을 것이라는 얘기다. 길을 건너면 4번지인 팔레 킨스키(Palais Kinsky)이다. 1713-1716년에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Lucas von Hilderbrandt)가 설계한 궁전이었다. 폰 힐데브란(1668-1745)는 18세기 오스트리아의 중심적 건축가로서 상벨베데레는 그의 작품이다.

 

1860-90년간의 프라이융. 피아커가 늘어서 있으며 분수에서 물을 뜨는 아낙네들이 보인다. 

                    

이번에는 광장을 압도하고 있는 교회(쇼텐키르헤)로 시선을 돌려보자.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에 속한 교회이다. 현재모습의 교회건물은 17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보면 더 오래된 교회라는 느낌을 준다. 교회안에 있는 성모상은 비엔나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어떤 무명의 수도사가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성모상에는 다음과 같은 얘기가 깃들여 있다. 1645년 비엔나는 스웨덴군대에 포위되어 함락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다. 막강한 스웨덴군대는 당장이라도 성벽을 허물고 침공할수 있는 위치였다. 이 같은 위기사태에 대하여 왕을 위시한 신하들은 성모에게 도와달라고 기구하기 위해 프라이융교회를 찾아갔다. 왜 하필이면 프라이융교회를 찾아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그렇게하여 프라이융교회에 있는 바로 그 성모에게 간절히 기구를 드렸더니 다음날 아침에 스웨덴 군대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갑자기 연기처럼 철수했다는 것이다.

 

프라이융의 오스트리아분수 

 

[쇼텐키르헤] (Schottenkirche) 요약

 

쇼텐키르헤는 프라이융의 한쪽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쇼텐슈티프트(아일랜드 수도원)와 연결되어 있어서 규모가 상당히 큰 건물처럼 보인다. 쇼텐키르헤(아일랜드 교회)는 12세기에 독일에서 온 아일랜드의 베네딕트파 수사들이 건축하였다. 쇼텐이란 단어는 라틴어로 아일랜드를 뜻한다. 쇼텐키르헤 근처의 부속 건물들은 스코티아 미노르(Scotia Minor)라고 불렀다. 이 건물들에는 아직도 아일랜드 계통의 베네딕트 수사들이 살고 있다. 1443년에 비엔나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 이 교회도 크게 손상되었다. 6년후 재건되었지만 재정이 넉넉하지 못해 재건은 부실했다. 그런 상태에서 거의 2백년을 지냈다. 1634년 지붕이 무너지는 사고가 생겼다. 페르디난트2세가 신성로마제국황제이던 시기였다. 아무튼 지붕사고가 생긴지 얼마후에 이번에는 벼락이 떨어져 타워가 불길에 싸이는 사건이 일어났다. 다시 타워를 복구하였다. 그러나 2년후에는 느닷없이 재건한 타워가 무너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사람들은 아예 교회를 새로 짓기로 결정했다. 바로크 스타일의 설계가 채택되어 건축에 들어갔다. 몇 년후 교회 본당은 완공되었으나 정작 성가대석(콰이어)까지 완성되어 봉헌된 것은 그로부터 2백년이 지나서였다. 하이든과 쇼텐키르헤가 무슨 인연이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튼 1809년 5월 31일 하이든이 세상을 떠나자 며칠후 그를 추모하여 쇼텐키르헤에서 대규모 추모예배가 거행되었다. 모차르트의 진혼곡이 연주되었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프릿츠 랑(Fritz Lang)은 이 교구에서 태어났고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쇼텐키르헤와 쇼텐슈티프트. 그 앞의 삼각형 광장이 프라이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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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나와 이번에는 광장의 다른쪽으로 가보자. 교회 부근에 있는 7번지는 1774년에 지었으며 한때 작은 수도원이었다. 사람들은 이 건물의 외관이 너무 무미건조하기 때문에 서랍장 또는 정리장농이라고 불렀다. 어떤 사람들은 이 건물의 외양이 보기 흉하다고까지 생각했다. 특히 현관은 너무 실용적인 것만 생각하며 멋이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후부터는 이런 단순양식을 복사하는 형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프라이융 크리스마스 시장

 

렌네가쎄(Rennegasse) 모통이에 있는 집은 현재 은행 겸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는 황금 타조라는 여관이었다. 이 곳은 1721년 구두장인들의 반란이 불붙었던 곳이기도 하다. 어느날 밤, 구두장인들에 속하여있는 견습공(도제)들이 구두상점들을 공격하고 주인들에게 폭행을 했으며 물건들을 약탈한 사건이었다. 야경들이 나서서 총을 쏘며 난동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방위군은 보고만 있었다. 왜냐하면 방위군은 구두견습공들의 사정을 이해하고 동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동의 주동자 두명이 체포되어 결국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하지만 구두만드는 소년들의 일부 요구는 관철되었다. 중세판 전문 노조운동이었다.

 

이 건물의 다른쪽 끝에도 한때 유명했던 작은 빨간 사람(Die Kleine Rot Man)이라는 여관이 있었다. 16세기 중반만 하더라도 이 여관에는 예술가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이와 함께 다른 나라에서 비엔나를 방문하는 학자들도 자주 묵었다. 전설에 의하면 파우스트박사도 비엔나에 오면 이 여관에 묵었다고 한다. 어느날 어떤 화가가 술이 취해 여관 담벼락에 악마의 그림을 그렸다. 파우스트박사는 마법으로 이 그림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모두들 살아있는 악마의 모습을 보고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프라이융의 부활절계란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