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노리텐플라츠 (Minoritenplatz)
미노리텐키르헤 앞의 광장이 미노리텐플라츠이다.
이 광장에는 왕족이나 귀족들의 웅장한 시내궁전(팔레)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우선 4번지는 팔레 리히텐슈타인이다. 높직히 걸려있는 금빛 찬란한 리히텐슈타인 가문의 문장(紋章)이 주위를 압도한다. 그 옆의 5번지는 팔레 슈타렘버그(Palais Starhemberg)이다. 현재는 정부의 부처들이 들어와 있다. 3번지는 팔레 디트리히슈타인(Palais Dietrichstein)이다. 이쯤되면 이 광장이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한지 알수 있다. 그러나 이 광장의 핵심은 미노리텐교회이다. 이 광장의 이름도 이 교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미노리테라는 단어는 프라트레스 미노레스(fratres minores)에서 유래한 것으로 탁발(托鉢)수도회의 한 교단을 말한다. 탁발수도회의 대표적인 수도회는 중부 이탈리아의 아씨씨(Assisi)에서 시작된 성프란치스코(St Francis)수도회이다. 성프란치스코수도회의 수도사들이 비엔나에 온 것은 교황 레오폴드6세의 지시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지금의 교회 자리에 옛날부터 있었던 오래된 교회를 매입하고 그 건물을 대대적으로 확장개축하여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이것이 지금의 미노리텐교회이다. 그런 역사가 있는 이 교회는 현재 비엔나에 있는 이탈리아 콤뮤니티의 중심 교회로 이용되고 있다. 탁발수도회인 미노리텐교회가 성프란치스코수도회에 속하게 된 것은 보헤미아의 오토카르왕에 의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미노리텐교회의 수호자는 오토카르왕인 셈이다. 실로 오토카르왕은 이 교회와 운명적인 인연이 있다.
헤렌가쎄 지하철역에서 나오면 만나는 오스트리아 외무성 건물. 미노리텐플라츠의 명물이다.
합스부르크의 루돌프(Rudolf von Habsburg)왕이 보헤미나와의 전쟁에서 라이벌인 오토카르(Ottokar)왕을 죽이고 그 시신을 처음으로 비엔나에 가져와 안치해두었던 장소가 바로 미노리텐교회이다. 오토카르의 시신이 옷이 벗겨진채 맨몸으로 비엔나에 도착하자 이를 본 루돌프의 왕비 안나가 불쌍히 여겨 걸치고 있던 자색 망토를 벗어 덮어주었다고 한다. 오토카르의 시신은 유향으로 처리된후 30주간 미노리텐교회에 안치되어 있다가 보헤미아로 돌려 보내졌다. 미노리텐교회의 중앙제단의 성모상은 ‘마돈나 델라 네베’(Madonna della Neve. Our Lady of the Snow. Maria Schnee)라고 부르는 것이다. 로마에 있는 마리아 마지오레(Maria Maggiore)교회를 숭배하여서 만든 성모상이다. 중앙제단의 왼편에는 오토카르 기념상과 세례요한 기념상이 있다. 오른편에는 사도 요한과 ‘영광의 레오폴드’ 기념상이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레오폴드는 탁발수도회를 처음으로 비엔나에 초청한 인물이다.
미노리텐플라츠. 크라이스키 수상의 기념분수가 있다.
이탈리아의 계관시인인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를 기념하는 기념부조는 이 교회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산이다. 1855년경에 푸카르디(Lucardi)라는 화가가 제작하였다. 이 부조그림의 중앙에는 교황 비오6세(Pius VI)가 임종을 앞둔 메타스타시오에게 강복(降福)하는 모습이 있으며 그 뒤로 살리에리, 모차르트, 하이든이 서있는 모습이 있다. 이들 음악가들은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으로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는 메타스타시오를 바라보고 있으나 하이든은 교황을 바라보고 는 것이 특이하다.
미노리텐키르헤 내에 있는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 기념상 하단의 부조
오토카르는 아씨씨의 성자 성프란치스코 형제단 수도원을 미노리텐교회의 책임을 맡도록 약속한바 있다. 이 약속은 오토카르의 아들대에서 현실로 이루어졌다. 오토카르의 아들중에는 프란치스코수도회에 직접 서원한 사람이 몇 명 있었다. 성프란치스코수도회에 속하게 된 오토카르의 아들들은 미노리텐교회를 성십자교회로서 봉헌하였다. 다만, 봉헌식은 나중에 교회가 완공된 후에 거행되었다. 그로부터 지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미노리텐교회는 여러 수난을 당하였다.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어 다시 건축하였으나 전쟁중에는 포격을 받아 다시 파손되는 운명을 겪었다. 미노리텐교회는 러시아로 진격하는 나폴레옹군대의 병영으로 사용된 일도 있다.
미노리텐교회 옆에 있는 팔레 디트리히슈타인. 한쪽 면은 메스타시오가쎄와 연결되어 있다. 미노리텐교회 안에 메스타시오의 묘비가 있다.
교회의 정문은 1350년에 만든 것으로 대단히 아름답다. 그러나 교회안으로 들어가면 더 아름답고 더 의미있는 것들이 있어서 보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불행하게도 세월의 흐름과 함께 교회 내부의 많은 부분이 소멸되어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지만 그래도 탁발수도회로서의 면모와 위엄은 화려한 유리창을 비롯하여 몇몇 곳에 남아있다. 그중에서 특히 눈을 끄는 것이 있다. 왼쪽 벽면에 있는 레오나드로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모자익으로 재현한 작품이다. 흥미있는 일은 이 ‘최후의 만찬’ 모자익을 만들라고 지시한 사람이 나폴레옹이란 것이다. 밀라노를 한때 점거했던 나폴레옹은 ‘최후의 만찬’ 오리지널이 붙어있는 수도원의 벽 전체를 뜯어서 파리로 가져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뜯어 낼 경우, 그림이 훼손되어 가져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나폴레옹은 보씨(Bossi)라는 화가에게 복사 그림을 그리도록 했다. 1806년 나폴레옹은 거장 쟈코모 라파엘리(Giacomo Raffaelli)에게 지시하여 벽화와 가장 흡사한 모자익으로 ‘최후의 만찬’을 만들도록했다. 모자익 작품을 완성하는데 무려 8년이나 걸렸다. 그러나 그 때에는 나폴레옹이 이미 실각한 후였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시스1세 황제가 이 모자익 그림을 사서 비엔나로 가져왔다. 그로부터 한참후인 1847년에 가서야 모자익 ‘최후의 만찬’은 미노리텐교회에 부착되었다. 모자익 그림과 밀라노의 원화는 정말로 흡사하여 진위를 가리기 어려울 정도이다. 다만, 밀라노의 것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약간 탈색되어 가고 있는데 비하여 미노리텐교회의 작품은 색갈의 변함이 거의 없다. 미세하게 갈아만든 색채대리석 가루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제작한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 왼편에는 성요한 네포무크(St John Nepomuck)를 기리는 성화가 걸려있다. 알토몬테(Altomonte)의 작품이다. 세번째 기둥 뒤에는 아씨씨의 성자 프란치스코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돌가루로 그린 것이다. 교회에서 밖으로 나와 왼쪽으로 아케이드를 따라 걸어가 보자. 아주 오래된 묘비들이 정리되어 놓여 있는 것을 볼수있다. 아케이드 위로는 원래 고틱양식인 아름다운 장미유리창들이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교회 뒤로 가서 종탑을 바라보자. 여늬 교회의 탑과는 스타일이 사뭇 다르다. 첫번째 탑의 상단부는 1529년 제1차 터키의 비엔나 침공때 포탄을 맞아 날라가버려 임시로 지붕을 만들어 얹어 놓은 것이 지금까지 계속 남아있다. 지붕아래에서부터는 탑의 모양이 8각형으로 변형되어 있다. 탑을 설계하고 건축한 도목수는 자기의 초상화를 이 8각형 탑에 남겨 놓았다. 초상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서는 아무리해도 잘 식별이 되지 않는다.
미노리텐키르헤 아케이드의 묘비들
1990년대 중반, 교회 부근에서 지히철 공사를 하는 중 놀랍게도 고틱 양식의 성루이(St Louis)채플이 발견되어 빛을 보게되었다. 발로아의 블랑셰(Blanche of Balois)와 아라곤의 이사벨라(Isabella of Aragon)가 헌정한 것으로 수많은 귀족 가족의 안식처로 이용된 채플이었다. 지하에서는 지하납골당이 있었고 이곳에서도 다른 무덤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무덤에서는 귀중한 부장품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발로아의 블랑셰는 이 채플에 장엄한 무덤을 만들어 안장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아무튼 이 지하묘소는 당시 대단히 유명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행히 이 지하묘소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나중에 발견되어 이 곳이 당시에 얼마나 유명했었는지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지하묘소에 대한 1784년 이후의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그 때는 요세프2세가 탁발수도회 수도승들을 미노리텐교회에서 추방한 해였다.이제 다시 교회 정문으로 돌아와서 페트라르카가쎄(Petrarcagasse)를 거쳐 방크가쎄(Bankgasse)로 가보자.
미노리텐키르헤는 비엔나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본부교회이다. 그레서 공식이름도 '눈의 성모 이탈리아 국립교회'이다.
[미노리텐키르헤] (Minoritenkirche: 미노리테 종파 교회) 집중탐구
현재 미노리텐키르헤의 공식 명칭은 상당히 길다. Italienische Nationalkirche Maria Schnee이다. 번역하면 ‘눈의 성모 이탈리아 국립교회’이다. ‘눈의 성모 교회’라고 한 것은 근처에 있었던 낡은 교회의 이름이 ‘눈의 성모채플’이었기 때문이다. 미노리테 수도승들은 새로운 교회를 짓게 되자 근처에 있는 작고 낡은 ‘눈의 성모채플’를 허물고 이름만 가져왔다. 미노리텐 교회는 회색수도승 교회(Greyfriars Church)라고도 부른다. 회색수도승이란 단어는 이 종단에 속한 수도승들이 잿빛의 회색 옷을 입었기 때문이다. 원래 이들은 이탈리아 성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일파이다. 미노리텐키르헤는 1구의 옛시가지에 있는 교회로서 프랑스 고틱 양식으로 된 유일한 건물이다.
미노리텐교회 뒤편의 광장
일찍이 13세기초, 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성회의 수도승들이 전도를 위해 이탈리아에서 비엔나로 왔다. 이들은 스스로를 미노리테(Minorite) 수도사들이라고 불렀다 (라틴어로는 fraters minores). 스스로를 낮추는 겸손한 이름이었다. 당시의 오스트리아는 바벤버거 왕조의 마지막 시기인 프레데릭 시절이었다. 신앙심이 깊었던 프레데릭 왕은 이들이 교회를 지을수 있도록 지금의 교회 부자를 하사했다. 미노리텐교회는 1224년의 일이었다. 교회 건축은 오토카르(Ottokar)2세가 정초(定礎)를 놓은 이듬해인 1276년부터 본격 착수되었다. 그러한 오토카르가 마르흐펠트(Marchfeld)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하자 그의 시신은 이 교회에 7개월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건 그렇고 교회 건축이 본격화 되자 경비도 만만치 않게 필요했다. 미노리테 수도승들이 밤낮으로 땀을 흘려 노동하고 돈을 벌어 충당했지만 넉넉할리가 없었다.
미노리텐키르헤 북쪽 포탈의 성모와 천사들 부조
이 소식을 들은 알브레헤트2세 대공은 건축비의 일부를 헌금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은 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일이었다. 미노리텐교회는 프랑스 성당의 건축 패턴을 따른 것이다. 그런데 누가 건설총감독이었는지는 모른다. 알브레헤트2세에 봉사하던 건축가인 야코부스 파리지안시스(Jacobus Parisiensis)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교회의 현관장식도 오스트리아에서는 거의 찾아 볼수 없는 프랑스 성당 양식이다. 정문의 현관 장식은 세 파트로 나뉘어져 있다. 가운데는 십자가상의 예수 그리스도이다. 왼편에는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그리고 또 다른 여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오른편에는 세례 요한과 캡틴 롱기누스(Captain Longinus), 그리고 한 명의 신사가 조각되어 있다. 오른쪽 조각의 끝에 서 있는 남자는 알브레헤트2세 대공이라고 하며 왼쪽 조각의 끝에 있는 여인은 알브레헤트 대공의 부인 요한나(Johanna)라는 설명이다. 오른쪽 조각의 끝에 서 있는 남자가 알브레헤트2세 대공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남자만이 대공을 상징하는 모자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미노리텐교회 뒤편에 있는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기념상
먼저 완성된 것은 고틱 양식의 루드비히(Ludwig) 채플이었으며 전체 건물이 완성된 것은 1350년이었다. 바벤버거가 지나가고 합스부르크가 등장한 이래 미노리텐교회는 여러가지 변화를 겪었다. 합스부르크의 루돌프3세의 왕비인 블랑셰 드 발루아(Blanche de Valois)가 자기 친정 할아버지인 프랑스의 루드비히(Heiligen Ludwig von Frankreich)를 위해 이 교회에 아름다운 채플을 남긴 것은 중요한 변화중의 하나였다. 교회의 북쪽 옆구리에 있는 루드비히 채플은 본당의 회랑을 통하지 않고 밖에서 별도로 들어갈수도 있게 설계되어 있다. 루드비히 채플은 나중에 교회의 구조개편 때에 폐쇄되었다. 미노리텐키르헤의 완성에는 꼭 74년이 걸렸다. 원래에는 교회에 높은 종탑이 있었다. 그러나 오토만 터키의 1차 비엔나 공성 때에 포탄을 맞아 파괴되었다. 다시 수리한 종탑도 오토만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때에 포탄을 맞아 파괴되었다. 할수 없이 종탑을 없애고 편편한 지붕으로 대체했다. 교회에서 찬양대석(Choir)의 위치는 중앙제단 다음으로 대단히 중요하다. 대체로 찬양대석 뒷편에는 기억되어야 하는 인물들의 석관을 안치하는 경우가 많다. 성슈테판성당의 찬양대석 뒷편 공간에도 프레데릭3세의 석관이 안치되어 있는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 아무튼 찬양대석의 주변은 14세기-15세기에 영묘(靈廟)로 사용되었다.
미노리텐키르헤 중앙제단
19세기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복사한 모자익 그림이 교회에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은 이미 설명한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나폴레옹은 이 교회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실각후 ‘최후의 만찬’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나폴레옹의 장인이 되는 프란츠1세가 ‘최후의 만찬’을 다시 사들였다. 프란츠1세는 이 작품을 벨베데레에 전시코자 했으나 벽면이 여의치 않아 제자리인 미노리텐키르헤에 정착하게 되었다. 1980년대에 지하철 공사를 하는중 (헤렌가쎄 역) 놀랍게도 예정에 폐쇄하였던 루드비히 채플의 기초 벽을 발견하였다. 그 유적들은 다시 복원되어 중앙제단 옆 성가대석에 루드비히 채플은 보전하는데 사용했다.
미노리텐키르헤의 창문 문양들을 특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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