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벤 (Graben)
1781년의 그라벤. 그림
콜마르크트와 그라벤이 만나는 코너에 있는 높직한 건물의 꼭대기에 말을 타고 있는 용감한 경기병 기념상이 있다.도대체 그 꼭대기에서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궁금할 것이다. 그런데 내용을 알면 좀 실망스러울 것이다. 19세기에 이 곳에 여행자를 위한 여행품목과 총기류를 파는 상점이 있었다. 그 상점의 이름이 ‘경기병’(Hussar)이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어색하거나 생소한 사항이 있으면 이를 로맨틱하게, 약간 깔보면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근성이 있다. 그런 근성이 있었기에 지붕위의 ‘경기병’을 폴란드왕 요한 조비에스키(Johann Sobieski: 또는 얀 조비에스키)라고 불렀다. 조비에스키 왕은 터키의 제2차 비엔나 공성 때에 구원병을 데리고 와서 터키군을 몰아낸 인물이었다. 그런 훌륭한 인물을 건물 꼭대기에 있는 경기병이라고 빗대어 말한 것은 폴란드왕을 일개 경기병으로 비하시킨 비엔나 사람들의 바람직하지 않은 근성의 발로 때문이었다. 그래도 일말의 코믹한 면이 있던 비엔나 사람들은 조비에스키왕을 높은 곳에 세워 저 멀리 칼렌버그(Kahlenberg)를 바라볼수 있게 했다는 설명이다. 칼렌버그는 조비에스키왕이 터키군과의 대접전을 위해 폴란드 군대를 집결시킨 곳이다.
비엔나 전투에서 승리한 얀 조비에스키가 교황에게 승전소식을 전하고자 메시지를 주고 있다.
‘경기병’ 옆집인 16번지는 유명한 여관이 있던 곳이다. 1800년에 넬슨제독과 레이디 해밀턴(Lady Hamilton)이 유숙했던 여관이었다. 런던의 비올레타로 알려진 넬슨 제독의 정부 레이디 해밀턴은 가난한 대장장이의 딸로 태어나 두살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렵게 지내다가 17세의 젊은 나이에 무조건 몸 하나만을 가지고 런던으로 올라와 나중에는 고급 창녀로서 런던 사교계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로 귀족들의 마음을 휘어 잡았던 여자이다. 원래 이름은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 1765-1815)으로 당대에 너무나 유명하여 그의 삶과 사랑을 그린 소설, 시, 희곡, 음악, 그리고 영화도 몇편이나 나왔다. 가장 유명한 영화는 1941년 알렉산더 코르다가 제작한 '레이디 해밀턴'이다. 비비안 리가 엠마 역을 맡았고 로렌스 올리비에가 넬슨 제독 역을 맡은 작품이었다. 처칠 수상은 이 영화를 무려 백번도 더 보았다고 한다. 비비안 리와 로렌스 올리비에의 영화는 미국에서 '댓 해밀턴 우먼'(That Hamilton Woman)이란 제목으로 상영되어 인기를 차지했었다
파티에서 춤을 추고 있는 엠마 해밀턴
그라벤의 다른 곳을 둘러보기 전에 우선 그라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그라벤(Graben)이란 단어를 묘지라고 해석하여 오래전에 이곳에 수많은 묘지가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확치 않다. 더구나 그라벤 거리의 한 가운데에 유명한 페스트기념탑이 있으므로 공동묘지와 연계하여 생각할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라벤이란 단어는 구덩이란 뜻이라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라벤 지역에는 로마시대에 로마군대가 주둔하면서 해자(Moat. 外濠)를 구축하였다. 해자는 궁성이나 요새의 둘레에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파놓은 참호를 말한다. 아무튼 그라벤의 해자는 중세에 들어와서도 사용되었다. 레오폴드6세는 비엔나 신도시계획을 세우면서 당시에 이미 성벽주위에 형성되었던 마을들을 비엔나시에 통합하기 위해 이 해자를 메우기로 했다. 레오폴드6세는 해자를 메우는 비용의 일부를 충당키 위해 영국의 사자왕 리챠드(Richard Coeur de Lion)를 석방하는 조건으로 받은 몸값을 사용했다고 한다.
1683년 오토만 터키의 비엔나 공성 그림. 비엔나가 해자로 둘러쌓여 있음을 볼수 있다.
그후 오랫동안 이 지역은 각종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터였다. 밀가루, 빵, 고기, 야채를 거래했고 1600년경부터는 크리스마스 시장까지 열렸다. 그러다가 마리아 테레지아와 요셉2세의 치하에서는 이미 비엔나 패션1번지로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여름에는 길거리에 탁자와 의자를 내어놓고 레모네이드와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게 되었다. 그래서 여름날 밤에 거리의 노천카페에 앉아 레모네이드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옷을 잘 차려입은 사람들이 이 거리를 산책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하나의 습관처럼 되었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거리가 되자 세상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직업인 남자사냥도 당연히 고개를 들게 되었다. 비엔나 사람들은 이 거리에서 남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은근한 사업을 벌이고 있는 아가씨들을 ‘그라벤 님프’라고 불렀다.
비엔나의 쇼핑거리에서 자주 볼수 있는 모스틀리 모차르트(Mostly Mozart) 기념품 상점
그라벤 거리의 거의 중간쯤에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한 조각품이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페스트 탑’(Pestsäule: 페스트조일레)이라는 것이다. 탑의 꼭대기에는 삼위일체를 상징하는 장식이 붙어있다. 삼위일체(Trinity)는 성부, 성자, 성신이 일체라는 신앙이다. 성부, 즉 하나님은 보통 빛나는 태양으로 교현되며 성령은 보통 비둘기로 표현된다. 레오폴드1세는 비엔나에서 역병(페스트)이 물러나면 이를 기념하여 탑을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처음에는 목제탑이었다. 그러다가 1693년에 현재의 화강암 기념탑으로 대체되었다. 곧이어 오스트리아 여러 도시에는 그라벤의 페스트 탑을 모델로 삼아 여러 개의 페스트 기념탑이 세워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비엔나 인근의 바덴 바이 빈에 세워진 페스트조일레이다. 페스트조일레의 양 옆에 있는 분수들은 남부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인 성요셉과 성레오폴드에게 봉헌된 것이다. [페스트조일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비엔나의 기념탑 편 참조 요망]
여가기 그라벤
슈테판스플라츠에서 그라벤 거리로 들어가는 첫머리에 짧은 골목길이 있다. 트라트너호프(Trattnerhof)이다. 이름은 호프라고 되어 있지만 거리 이름이다. 그라벤과 평행으로 가고 있는 골드슈미트가쎄를 연결하는 거리이다. 수중에 돈 한푼 없이 비엔나에 올라온 젊은 인쇄공 트라트너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이 골목길의 어떤 인쇄소에 취직한 그는 마침 앞 집에 살고 있는 젊고 예쁜 백작부인을 깊이 사모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작부인은 트라트너를 거들떠 보지도 않았으며 심지어는 우연히 마주치더라도 무시하기가 일수였다. 트라트너는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세월이 흘러 트라트너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었고 사회적으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 사이에 트라트너는 결혼을 하였으나 부인이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혼자 몸이 되었다. 이 사실을 안 백작부인은 유명인사가 된 트라트너에게 만일 지금이라도 자기에게 청혼을 한다면 유별나게 거절은 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편, 부자가 된 트라트너는 오매불망했던 백작부인의 집 바로 건너편에 보란듯이 대단히 훌륭한 저택을 짓고 살았다. 사실상 트라트너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백작부인에 대한 미련을 모두 털어버린 입장이었다. 그런데 백작부인이 트라트너에게 간접 청혼을 했던 것이다. 트라트너는 답변의 한 방법으로 일부러 그랬는지 또는 모르고 그랬는지 하여튼 자기 집 현관앞에 자기를 닮은 석상을 하나 만들어 세웠으나 등을 백작부인의 집을 향하도록 했다. 그것이 한때 비엔나에서 화제꺼리였다. 크니체(Knize)라는이름의 13번지 상점은 아돌프 로스(Adolf Loos)의작품으로 아직까지 처음 설계했던 그대로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집안의 계단이나 가구들 모두 원래 그대로의 것이다. 다만 2층의 샨델리아만은 새로 복원한 것이다.
트라트너호프. 그라벤에서 골드슈미트가쎄로 가는 길이다.
그라벤이 끝나는 곳에서 투후라우벤(Tuchlauben)이 만나는 곳에 율리우스 마이늘 카페가 있다. 율리우스 마이늘에 대하여는 [비엔나와 멜란즈]편에서 잠시 소개했으므로 생략코자 한다. 다만 현재의 그 건물과 그 옆의 건물은 시골에서 비엔나에 올라와 집을 구하기 전까지 잠시 지내는 하숙방들이 많았다. 왜 그 얘기를 하는가 하면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에 와서 두번째로 하숙을 했던 집이 바로 이 건물이었기 때문이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건물 위에 모차르트 펜션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1781년 비엔나에 올라온 모차르트는 처음에 독일기사단하우스(Deutschesordenhaus)에서 지냈다. 원래 독일기사단건물은 잘츠부르크의 콜로레도(Colloredo)대주교의 공관이었다. 그래서 콜로레도 대주교가 비엔나를 방문하게 되면 함께 온 시종들과 하인들이 머물렀다. 모차르트가 비록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사표를 내던지고 비엔나로 왔지만 아직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마무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모차르트는 대주교의 하인들과 함께 독일기사단하우스에서 당분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하인들이 잠자는 숙소여서 냄새도 나고 불편한 점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리의 위대한 모차르트가 그런 방에서 지낸다는 것은 지금 생각하면 심히 민망스러운 일이었다. 그후 대주교와의 관계가 마무리되자 하숙집을 구하게 되어 당시 암 페터 11번지의 춤 아우겐 고테스(Zum Augen Gottes)라는 하숙집에 머물었다. 그런데 그 집은 실은 만하임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베버 부인이 하숙을 치는 집이었다. 모라츠르트는 그 집 셋째 딸인 콘스탄체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콘스탄체의 어머니가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입장에 같은 집에서 사는 것은 곤란하다고 하여 결국 결혼하기 전까지 현재 그라벤의 율리우스 마이늘 상점 집으로 오게 된 것이다. 콜마르크트 1번지이며 현재는 율리우스 마이늘(Julius Meinl) 커피하우스와 자노니 아이스크림 집이 있는 건물이다.
그라벤의 율리우스 마이늘 커피숍. 지금은 자노니 아이스크림 집도 들어와 있다.
그라벤에서 페터스키르헤(베드로교회)로 들어가서 교회의 뒷편에 있는 길이 밀르흐가쎄이다. 밀르흐가쎄의 1번지에는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부터 잘 알고 지내던 프리돌린 베버(Fridolin Weber) 식구들이 살고 있었다. 프리돌린 베버는 오페라 '마탄의 사수'를 작곡한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친척이다. 즉 프리돌린 여사의 시동생의 아들 격이 칼 마리아 폰 베버이다. 프리돌린 여사의 남편은 얼마 전에 세상을 떠났고 유가족인 프리돌린 여사와 3명의 딸이 비엔나에 와서 함께 살면서 하숙을 치고 있었다. 원래 프리돌린 베버에게는 딸이 넷이 있었다. 그중 큰 딸은 독일의 연극 배우 요셉 랑게(Joseph Lange)와 결혼하여 함께 살고 있지 않았다. 모차르트는 당초에 이 집의 둘째 딸인 알로이지아(Aloysia)를 좋아하여 결혼까지 할 생각을 했으나 알로이지아가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더구나 고향 잘츠부르크에 있는 아버지 레오폴드가 강력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은 없는 것이 되었다.
19세기의 그라벤. 알리아스 페터 반 봄멜작
그런 입장에서 모차르트는 우연히 비엔나에서 알로이지아의 어머니가 다른 딸들을 거느리고 하숙을 치고 있는 집에 들어가사 하숙생활을 하다가 결국 셋째 딸인 콘스탄체가 위로해 주고 마음을 써 주어서 사랑하는 감정이 생겼고 결국 결혼까지 하게 되었다. 유명한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이다. 콘스탄체는 모차르트보다 8살 연하였다. 결혼식은 1782년 더운 8월에 슈테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그 때 모차르트는 26세였고 콘스탄체는 방년 18세 였다. 아무튼 그라벤의 이 집은 모차르트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집이었다. 이 곳을 지나갈 때에 하숙집 아줌마 겸 장래의 신부 콘스탄체의 어머니인 프리돌린 부인(원래 이름은 마리아 체칠리아: Maria Cecilia)의 잔소리를 생각하면 저절로 모차르트에 대한 동정심을 갖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잘 살펴볼 필요가 있는 건물은 11번지이다. 1720년에 세운 그라벤 유일의 바로크양식 건물이다. 당시에는 팔레 바르톨로티 파르텐펠트(Palais Bartolotti-Partenfeld)라는 이름이었다. 그라벤이 18세기였을때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물이다. 이제 다시 슈테판성당의 광장으로 가보자.
팔레 바르톨로티 파르텐펠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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