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6일 투어

1. 국립오페라극장(Staatsoper)

정준극 2007. 4. 11. 15:25

비너 슈타츠오퍼(Wiener Staatsoper) -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슈테판스돔(Stephansdom: 성슈테판대성당)이 비엔나의 영혼이라고 하면 슈타츠오퍼(Staatsoper: 국립오페라극장)는 비엔나의 심장이다. 비엔나는 슈타츠오퍼의 무대가 살아있어야 비로소 비엔나다운 면모를 지킬수 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비엔나 오페라극장은 두명의 건축가가 협동하여 완성했다. 아우구스트 지카르트 폰 지카르드스부르크(August Sicard von Sicardsburg: 1861-1869)와 에두아르드 반 데아 뉠(Eduard van der Nüll: 1812-1868)이다. 두 거장들은 오페라의 건물을 여러 형태의 역사적 건축 양식에서 요소만을 반영하여 건축하였다. 그래서인지 미안하게도 건축가로서 자기들의 독자적인 스타일이 없다는 비평을 받았다. 그런중에 뉠은 프란츠 요제프 황제도 새로운 오페라극장에 대하여 별로 흥미를 갖지 않고 있다는 소문을 듣자 완공을 1년 앞두고 비관한 나머지 자살했다. 그로부터 몇 달후 지카르드스부르크도 상심으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이 모두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아무래도 우연이 아니다. 아무튼 비엔나 슈타츠오퍼는 8년 공사끝에 1869년 엄숙한 개관식을 거행하였다.

 

슈타츠오퍼의 중앙계단

 

사람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수 없듯 비엔나 오페라극장도 건물 양식만 가지고 무어라고 말할수는 없다. 그보다도 수준을 가지고 얘기해야 할것이다. 비엔나 오페라극장은 세계 최고의 성악가와 지휘자가 어느곳보다도 많이 거쳐간 곳이다. 아마 어림잡아 1개 군단( 5-6천명)정도는 될것이다. 아직 세계에서 비엔나오페라극장만한 경력의 오페라극장은 없을 것이다. 비엔나오페라극장은 비엔나의 자랑일뿐만 아니라 비엔나 시민들의 마음의 연인이다. 1945 3, 전쟁이 한창일 때에 연합군의 폭격으로 오페라극장의 지붕과 앞부분이 크게 파괴되고 화재가 난 일이 있다. 비엔나 시민들은 마치 자기의 몸이 파괴된 것처럼 큰 충격을 받았다. 사람들은 아직도 폭격의 와중인데도 불구하고 집을 뛰쳐나와 오페라극장으로 달려갔다. 이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벽돌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주워서 집으로 가져갔다. 언젠가 복구될 때를 대비하여 눈물로서 벽돌 한 장이라도 간직해 두자는 심정에서였다. 전쟁이 끝나자 비엔나 시당국은 제일 먼저 오페라극장부터 복구키로 결정했다. 부족한 예산이지만 오페라극장 복구비부터 우선 배정했다. 시민들이 집에 간직해 두었던 벽돌 등을 들고 나와 복구에 참여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폭격으로 불타고 있는 슈타츠오퍼의 모습

 

재건사업은 10년이나 걸렸다. 1955년 슈타츠오퍼가 다시 문을 여는 날 저녁, 비엔나는 흥분과 기쁨에 넘쳐 있었다. 정말로 잊지 못할 밤이었다. 비엔나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국이 환희의 송가를 부를 정도였다. 베토벤의 휘델리오(Fidelio)가 첫 무대에 올려지는 것으로 선정되었다. 마침내 전쟁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얻은 감격을 오페라를 통하여 표현코자 해서였다. 오페라극장의 재개관은 전쟁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이룬것에 비견할만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휘델리오'가 공연되는 슈타츠오퍼에 들어가지 못한 수많은 시민들을 위해 커다란 스피커가 주변의 길거리에 설치되었다. 감격의 소용돌이였다.

 

1930년대 말의 슈타츠오퍼 

 

네모난 오페라극장 건물의 정문앞 길은 오페른링(Opern Ring)이며 정문을 바라보며왼쪽의 길은 오페른가쎄(Operngasse)이고 오른쪽의 길은 케른트너슈트라쎄의 시작이다. 그리고 극장건물 뒷길은 필하모니커슈트라쎄(Philharmonikerstrasse)이다. 이곳에 모차르트 카페가 눈길을 끄는 자허(Sacher)호텔이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캐른트너슈트라쎄 방향에는 '아르카디아'(Arcadia)라는 극장 숍이 있다. 그 아르카디아를 지나서 조금가면 무대출입문이라고 쓴 팻말이 있다. 얼마나 많은 팬들이 이 문앞에 장사진을 치고 기다리면서 유명한 세계적 오페라 싱거를 보려고 했겠는가! 반대편인 오페른가쎄(Operngasse)쪽에도 작은 문이 있다. 매일 두번씩 극장안 투어가 시작되는 곳이다. 비엔나 사람들은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을 간단히 오퍼(Oper)라고 부른다. 공식적인 명칭은 슈타츠오퍼(Staatsoper)이다. 배링거슈트라쎄의 폴크스오퍼(Volksoper)와 함께 비엔나의 오페라/오페레타/발레를 감상할수 있는 전당이다.

 

슈타츠오퍼의 '박쥐' 무대

 

슈타츠오퍼의 바로 길건너에는 하인리히스호프(Heinrichshof)라는 훌륭한 건물이 있었으나 1945년 전쟁의 막바지에 폭격을 받아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 집에서 유명한 작곡가인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76-77년동안 살았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전쟁후 새로 지은 것으로 한때 대한항공 지점이 있었다.

 

 

슈타츠오퍼의 웅장한 모습

 

[슈타츠오퍼] Staatsoper.  보충설명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는 1869년 5월 25 개관되었다. 개관기념 공연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슈타츠오퍼는 완공되기 전부터 설계문제 때문에 대단한 논란이 있었다. 무대가 너무 깊다는 논란에서부터 대합실이 너무 화려하다느니 하는 논란이 끊임이 없었다. 외관에 대하여도 오페라극장으로서 너무 덤덤하다는 논란이 있었다. 설계는 2명의 당대 건축가가 맡았다. 에두아르드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과 아우구스트 지카르트 폰 지카드스부르크(August Sicard von Sicardsburg)였다. 두 사람 모두 슈타츠오퍼의 완공을 보지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지나친 논란 때문에 뉠은 자살했으며 지카르트부르크는 그로부터 2개월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슈타츠오퍼는 구스타프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칼 뵘(Karl Boehm),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이 음악총감독을 맡음으로서 빛나는 전통을 이어 갔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로엔그린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베르디도 아이다의 비엔나 초연을 이 극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초연은 1930년 작곡가 자신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오페라 무도회의 화려한 모습

 

비엔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 1920년까지 비엔나궁정오페라(K. und K. Hofoper)라고 불렸다. 2006년 현재의 음악감독은 일본 출신의 오사와 세이지(Osawa Seiji)이다. 그동안 슈타츠오퍼를 거쳐간 음악감독으로는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펠릭스 봐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클레멘스 클라우스(Klemems Krauss),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ngler),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칼 뵘(Karl B?hm),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에른스트 안데르메(Ernst Ansermet), 프릿츠 라이너(Fritz Reiner),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피엘 몽토(Pierre Monteaux), 라파엘 쿠벨리크(Rafael Kubelik), 안탈 도라티(Antal Dorati),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Dmitri Mitropoulos),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 로린 마아젤(Lorin Maazel), 주빈 메타(Zubin Metha),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레오나드 번슈타인(Leonard Bernstein),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ti),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j Reinsdorf), 게ㄹ오르그 솔티(Georg Solti), 주세페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콜린 데이비스(Colin Davis)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세계 최대의 지휘자, 작곡가 있다. 이것만 보아도 비엔나 슈타츠오퍼가 얼마나 음악의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는지를 알수 있다.     

 

슈타츠오퍼 벽면의 모차르트 기념상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는 슈타츠오퍼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준 위대한 인물이었다. 말러는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있는 기간에 세계적인 성악가들을 무대에 서도록 하는 노력을 기울여 슈타츠오퍼의 무대를 세계1류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안나-밀덴부르크, 셀마 쿠르츠, 레오 슬레자크등은 말러가 기용한 세계적 성악가였다. 말러는 무대장치에 있어서도 변혁을 기하였다. 과거의 화려하고 복잡한 무대를 탈피하고 유겐트슈틸(Jugendstil) 취향의 단순하고 의미 있는 장식을 시도하였다. 말러는 또한 공연 도중 조명을 조절하는 시도도 하였다. 관중들은 조명을 어둡게 하자 별로 환영하지 않았지만 말러의 후임자들도 필요할 때에 조명을 어둡게 하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음악감독이 되자 그는 객원 성악가들을 활용하여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1945 3 12일 네오-로만틱 스타일의 슈타츠오퍼는 연합군의 집중 포격을 받아 파손되었다. 무대장치와 무대의상들도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120편의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는 무대장치가 소실되었으면 15만벌의 의상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슈타츠오퍼는 재건될 때까지 테아터 안 데어 빈과 폭스오퍼에 본부를 두었다. 1955 11 5일의 재개관 공연은 베토벤의 휘델리오였다. 오스트리아가 자유와 주권을 얻었음을 상기시키는 공연이었다. 칼 뵘이 지휘하였다. 1869 5 25일 처음 오픈되었을 때의 기념공연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슈타츠오퍼는 수십년동안 비엔나 오페라 무도회의 개최장소였다.  

 

 알베르티나 미술관에서 바라본 비엔나 슈타츠오퍼

 

Ash Wednesday(참회의 수요일)부터 Easter Eve(부활주일 전야)까지의 40일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목요일, 슈타츠오퍼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발(무도회)이 열린다. 이 때에는 스테이지와 객석을 터서 하나의 커다란 홀로 만든다. 슈타츠오퍼의 무도회를 계기로 비엔나의 무도회가 시작된다. 비엔나의 카니발(화싱. Fasching)참회의 수요일(Ash Wednesday)의 헤링슈마우스(청어잔치. Herringsschumanus)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예전에는 보통 생선인 청어를 축제의 필수음식으로 삼았었다.

 

[폭스오퍼]  Volksoper

 

스오퍼가 처음부터 오페레타의 전당으로 자리매김을 한 것은 아니었다. 폭스오퍼는 1898 12 14일 프란츠 요셉의 황제즉위 50주년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원래 이름은 Kaiser-Jubil?ums-Stadttheater로서 황제50주년 시립극장이었으며 연극만을 공연하는 극장으로 건설되었다. 오페라와 오페레타가 프로그램으로 포함된 것은 1903년부터였다. 그로부터 폭스오퍼는 오페라, 오페레타, 뮤지컬, 댄스 극장으로서의 위치를 굳혀 나갔다. 슈타츠오퍼, 또는 다른 연주회장, 오페라극장과는 달리 일반 시민들이 즐길수 있는 소규모 극장으로서 마치 황제의 하사품인듯 건설되었다. 서민들을 위한 극장이니만치 평범한 연극, 코미디등을 주로 공연하며 간혹 노래도 부르는 버라이어티 쇼가 진행되는 곳이었다. 그러다가 고전음악도 프로그램에 들어가게 되었다. 1945, 전쟁이 끝나자 폴크스오퍼는 면모를 일신하였다. 비엔나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위한 오페레타 전용극장으로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오페레타뿐만 아니라 일반 비극적 오페라도 간간히 공연되는 오페레타/오페라의 전당이 되었다. 비엔나 출신의 오페레타 작곡가인 알렉산더 폰 체믈린스키(Alexander von Zemlinsky) 1904-1911년 폭스오퍼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 활동했던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비엔나 폭스오퍼. (카이저유빌로임테아터)

 

비엔나 폭스오퍼(Volksoper Wien)은 글자그대로 일반대중의 오페라 극장이다. 폭스오퍼는 9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약 25편의 작품으로 3백여회의 공연을 갖는다. 좌석수는 슈타츠오퍼가 26백석인데 비해 폭스오퍼는 15백석 남짓이다 폭스오퍼에서는 1907년 토스카의 비엔나 초연이 있었고 1910년에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살로메(Salome)의 비엔나 초연이 이루어질 만큼 오페라 연혁에 있어서 값진 일정을 제공하였다. 세계적 성악가인 마리아 예리차(Maria Jeritza), 리챠드 타우버(Richard Tauber)등이 폭스오퍼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저명한 작곡가 겸 지휘자인 알렉산더 쳄린스키(Alexander Zemlinsky)가 첫 음악감독으로서 1906년부터 활동했다. 폭스오퍼는 1차 세계대전까지 비엔나 제2의 오페라극장으로서 명성을 쌓았으나 1929년 이후부터는 가벼운 오페라에 치중하는 겸손함을 보였다. 2차대전이 끝난후부터 1955년까지 10년동안은 슈타츠오퍼의 대리역할을 했으며 이후로는 본연의 임무로 복귀하였다.

 

비엔나 폭스오퍼 전경

   

[테아터 안 데어 빈] (Theater an der Wien)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원래 비엔나강변극장이란 뜻이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지금의 야채 및 과일 시장인 나슈마르크트(Naschmarkt) 앞에 있다. 나슈마르크트에는 도나우강의 지류(Wienfluss라고 함)가 하나 조그맣게 흐르고 있었다. An der Wien이란 말은 Wienfluss의 제방이라는 뜻이다. 지류는 운하 스타일로 바뀌었고 지금은 전철 길이다. 비엔나의 유서 깊은 이 극장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스타일로 설계되었다. 극장을 세운 사람은 엠마누엘 쉬카데너(Emmanuel Schikandeder)였다. 쉬카네더는 모차르트의 대본가였으며 1791년 모차르트가 세상 떠나던 해에 초연된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파파게노 역을 맡아 직접 출연도 했던 모차르트의 동업자였다. 어떤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가 '테아터 안 데어 빈'에서 초연된 것으로 말하고 있지만 실은 '테아터 아우프 데어 뷔덴'이란 곳에서 초연되었다. 지금은 호텔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파파게노 문의 상당 조각

 

'테아터 안 데어 빈'1786년에 건설되었지만 정작 제대로의 극장으로서 완공된 것은 1801년이었다. 마술피리’가 초연된지 2년후였다. 이 극장이 완공되자 비엔나 사람들은 비엔나에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었고 장비도 훌륭하며 가장 넓은 무대를 가진 극장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현재의 극장은 오리지널 극장의 일부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밀뢰커가쎄(Mill?ckergasse)와 파파게노가쎄(Papagenogasse) 방향으로 있는 문은 쉬카네더가 마술피리’의 초연에서 맡았던 파파게노 역할을 기념하기 위해 파파게노 문’(Papagenotor)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파파게노 문에는 오페라에 등장하는 새잡이 파파게노의 모습과 세 소년의 모습을 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다. 파파게노는 쉬카네더를 표현한 것이며 세 소년은 쉬카네더의 세 아들로서 역시 마술피리의 초연에 세 소년으로 출연했던 것을 기념하고 있다. '테아터 안 데어 빈'의 개관 기념 공연은 알렉산더 타이버(Alexander Tyber)의 알렉산더(Alexander)라는 오페라였다. 쉬카네더가 이 오페라의 서막의 대본을 썼다.  

 

밀뢰커가쎄(비엔나의 오페레타 작곡가 카를 밀뢰커를 기념하는 거리)와 파파게노가쎄(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적의 주인공을 기념하는 거리)가 만나는 곳에 위치한 테아터 안 데어 빈의 파파게노 문

 

테아터 안 데어 빈은 비엔나의 대표적인 극장중 하나로서 다음과 같은 작품을 역사적으로 초연했다는 영예를 지니고 있다.

-        1803년 베토벤의 교향곡 제2

-        1805년 베토벤의 교향곡 제3(영웅)

-        1805 11 20일 베토벤의 유일한 오페라 휘델리오(Fidelio). 베토벤은 실제로 휘델리오를 작곡할 때에 쉬카네더의 간절한 요청으로 이 극장의 안쪽에 있는 방에 살았었다. 베토벤은 이 극장의 방에서 살면서 여러 작품을 썼다.

-        1806년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        1808년 베토벤의 교향곡 제5(운명), 6(전원), 합창환상곡, 피아노협주곡제4

-        1817년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의 오페라 Die Ahnfrau

-        1823년 프란츠 슈베르트가 막간음악을 작곡한 빌헬르미네 폰 헤지(Wilhelmine von Chezy)의 연극 사이프러스의 공주 로자문데(Rosaunde, F?rstin von Zypern)

-        1874년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박쥐

-        1898년 리하르트 호이버거(Richard Heuberger)의 오페레타 오페라 무도회(Der Opernball)

-        1905년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메리 위도우(Die lustige Witwe)

-        1908년 오스카 슈트라우스의 오페레타 초콜릿 솔져(Die tapfere Soldat: The Chocolate Soldier)

-        1909년 프란츠 레하르의 오페레타 룩셈부르크의 백작(Der Graf von Luxemburg)

 

테아터 안 데어 빈은 비엔나의 오페레타 황금시기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극장)2차대전의 전화로 파괴되자 1945년부터는 10년동안 슈타츠오퍼의 임시극장으로 활용되었다. 1955년 테아터 안 데어 빈은 안전상의 문제로 임시 폐쇄되었다. 그후 몇 년동안 폐가와 같았었다. 1960년대에는 건물을 허물고 주차장으로 변경하자는 주장이 있어서 한때 존폐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당시에는 비엔나 중심지역 재개발 붐이 일어나던 때였다. 더구나 미국의 카네기 홀도 안전상의 이유와 재개발의 여파로 철거되었기 때문에 테아어터 안 데어 빈을 철거하자는 의견이 타당성있게 고려되었었다. 다행하게도 1962년 테아터 인 데어 빈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현대적 뮤지컬 극장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이후 영어로 된 뮤지컬의 독일어 초연이 이루어졌다. 1992년에는 뮤지컬 엘리자베트(Elisabeth: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 일명 씨씨)가 초연되어 비엔나 시민들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뮤지컬 캐츠(Cats) 7년 연속 공연되는 기록을 세웠다. 요즘에는 뮤지컬 뿐만 아니라 오페레타와 연극도 자주 공연되는 비엔나 음악의 명소가 되었다   

 

나슈마르크트 쪽에서 바라본 테아터 안 데어 빈의 정문

 

[부르크테아터] (Burgtheater)

 

부르크테아터는 (제국의)궁정극장이다. 원래는 K.K. Theater an der Burg(제국극장: K. und K. Kaiser und K?nig의 약자로서 합스부르크제국을 의미한다.)였다. 부르크테아터는 1741년 합스부르크제국의 마리아 테레제 여제가 설립하여 문을 열었다. 원래는 호프부르크의 미하엘러토르(정문) 오른 쪽에 있었다. 호프부르크에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비엔나 시민들은 부르크테아터를 그냥 디 부르크(Die Burg)라고 불렀다. 부르크테아터의 연극배우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연기와 대사 스타일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당시의 연극 애호가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부르크테아터 배우들의 연기 스타일과 대사를 단번에 구별할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마리아 테레제의 아들로서 황제가 된 요셉2세는 부르크테아터를 독일어국립극장이라고 불렀다.

 

 

비엔나 궁정극장 (부르크테아터)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오페라의 작곡을 요청했을 정도로 독일어에 대한 애착을 보였던 요셉2세는 이 극장에서 3편의 모차르트 오페라를 초연토록 지원하였다. 후궁에서의 도주(1782), 휘가로의 결혼(1786), 그리고 여자는 다 그래(1790)이었다. 호프부르크의 미하엘러 윙에 연결되어 있던 부르크테아터는 협소하였다. 그래서 프란츠 요셉황제는 1888년 링슈트라쎄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궁정극장을 이전하였다. 설계는 유명한 고트프리트 젬페르(Gottfried Semper)와 카를 프라이헤르 폰 하제나우어(Karl Freiherr von Hasenauer)가 맡았다.

 

부르크테아터

 

2차대전이 막바지에 올랐던 19453 12, 비엔나의 중심가는 연합군의 집중포화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부르크테아터도 슈타츠오퍼와 마찬가지로 심하게 파손되었다. 그로부터 꼭 한달후인 4 12, 부르크테아터는 원인 모르는 화재로 거의 완전히 손상되었다. 비엔나시는 1953-55년에 걸쳐 부르크테아터를 복구하였다. 비엔나시는 슈타츠오퍼와 함께 부르크테아터의 재건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부르크테아터에서 사용하는 독일어는 독일어 연극을 공연하는 모든 극장의 모델이라는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비엔나 폭스테아터] (Volktheater, Wien) 

7구의 노이바우(Neubau)에 위치한 비엔나 폭스테아터(시민극장) 1889년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 대응하는 시민극장의 필요성을 느낀 비엔나 시민들의 요청으로 건설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 때의 일이었다. 시민중에서도 앞장 선 사람은 연극인 루드비히 안첸그루버(Ludwig Anzengruber)와 가구제조업자인 토네트(Thonet)였다. 극장을 만든 사람들은 더 많은 관객들을 유치하기 위해 고전과 현대 연극을 고루 공연토록 했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극장에서는 주로 오스트리아 극작가들의 작품이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Johann Nepomuk Nestroy)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의 연극은 가장 인기 있는 것이다. 폭스테아터는 2005년 자매극장을 만들었다. 마르가레텐에 지은 폭스테아터 훈트슈투름(Volktheater Hundstrum)이다.

 

 

 노이바우 거리에 있는 비엔나 폭스테아터

                           

[요제프슈타트] (Theater in der Josefstadt: 요셉슈타트 극장)

요제프슈타트는 비엔나 8구로서 라트하우스(시청) 뒷편이다. 1788년 문을 열었으므로 비엔나에서 가장 고참 극장이다. 이 극장은 보통 요제프슈타트라고 간단히 부른다. 비록 시내 한복판에서 좀 떨어져 있으나 역사적으로 기록될만한 사실들로 가득차 있다. 베토벤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곳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유명한 시인 겸 극작가인 요한 네스트로이(Johann Nestroy)와 페르디난트 라이문트(Ferdinand Raimund)가 이곳에서 배우로 활약했다. 요한 슈트라우스(아버지)가 이 극장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1814년에는 페르디난트 라이문트가 프리드리히 쉴러의 연극 강도(Die R?uber)의 비엔나 초연에서 주역을 맡은 일이 있다. 1822년 보수 후 재개관하였을 때 베토벤의 Die Weihe des Hauses (봉헌식)이 베토벤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1834년 콘라딘 크로이처(Conradin Kreutzer)의 오페라 그라나다의 야영소(Das Nachtlager in Granada)가 초연되었다. 1840-60년에는 유명한 댄서인 홰니 아이슬러(Fanny Eissler)가 이 극장에서 공연하였다. 이밖에 수많은 독일어 연극이 이 극장에서 초연되어 비엔나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요제프슈타트극장 

 

 


테아터 안 데어 빈.do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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