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6일 투어

8. 왕궁 구내 (In der Burg)

정준극 2007. 4. 11. 15:27

황실아파트(Kaiserappartement)

 

호프부르크와 미하엘러플라츠 공중사진

 

미하엘러토르(미하엘문)를 거쳐 오늘날 인 데아 부르크(In der Burg. 왕궁 구내)라고 불리는 곳으로 들어가보자. 우선 넓직한 광장이 나온다. 광장 초입에는 커피 하우스가 있다. 커피하우스 안쪽에는 호프부르크 기념품상점이 있고 그 안에는 호프부르크 황실아파트(Kaiserappartements), 씨씨기념관, 질버카머(Silberkammer)를 관람할수 있는 안내소겸 매표소가 있다. 질버캄머에는 황제와 왕비가 사용하던 은제 식기류등 화려한 물건들이 아름답게 전시되어있다. 황실아파트에 대하여는 나중에 설명키로 하고 광장으로 들어가보자. 광장의 한가운데에 있는 기념상은 프란시스(Francis)황제이다. 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는 프란시스2세이고 오스트리아제국의 황제로서는 프란시스1세로 불리므로 혼돈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기념상의 하단에는 라틴어로 Amorem meum populis meis라고 적혀있다. 나의 백성에 대한 나의 사랑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황제로서 프란시스는 상당히 인색한 인물이었다. 자기 욕심만 부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백성들을 사랑한다구요?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서는 노랑동전 한푼도 쓰지 않았는데!라고 말하며 핀잔을 주었다.

 

인너 호프부르크의 프란츠 1세 기념상 

 

[호프부르크 궁전] (알테 호프부르크)의 황실아파트(Kaiserappartements)

합스부르크제국의 말기에 프란츠 요세프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왕비가 거주했던 알테 호프부르크의 아파트를 관람하는 것은 과거 찬란했던 제국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주는 것이다. 15개의 방에는 화려했던 합스부르크의 역사가 수놓아져 있고 엘리자베트왕비의 애잔했던 모습이 남아있다. 황실아파트는 알테 호프부르크에서 챈설러리 윙과 아멜리엔부르크(Amelienburg) 2(비엔나식으로는 1) 걸쳐 배열되어있다. 1998, 씨씨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 황실아파트의 하나에 씨씨기념관을 만들어 공개하고 있다.

 

- 접견실(Antechamber): 프란츠 요세프황제를 알현코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선 이 방에서 대기했다. 프란츠1세황제(신성로만제국의 황제로서는 프란츠2)의 초상화가 눈을 끈다.

- 2접견실: 프란츠 요세르1세황제(1830-1916)는 이 방에서 매일 약2백명의 사람들을 만났다. 붉은색 비단으로 된 벽에는 합스부르크가문의 인물들이 걸려있다.

- 회의실: 내각회의가 열리던 방이다. 벽에는 두개의 거대한 그림이 걸려있다. 하나는 1849년 헝가리독립운동을 격파한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젊은 시절 모습이다.

-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거실: 긴 머리의 아름다운 엘리자베트왕비가 야회복을 입은 유명한 초상화가 걸려있다. 프란츠 사베르 빈터할터(Franz Xaver Winterhalter. 1805-1873)가 그린 것이다. 또 다른 두개의 그림은 전쟁장면을 그린 것이며 방의 한쪽에는 라데츠키(Redetzky)원수의 흉상이 있다. 프란츠 요세프황제는 라데츠키장군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 황제의 침실: 간단한 철제 침대가 하나와 세면대가 있는 간소한 방이다. 벽에는 젊은 시절 엘리자베트왕비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의 그림과 결혼하기 전의 모습의 그림이 걸려 있다.

- 대 응접실: 황제가 특별한 사람들을 별도로 만나던 방이다. 벽에는 군복을 입은 황제의 모습과 긴머리에 다이아몬드 스타를 장식한 왕비의 그림이 걸려 있다.

- 흡연실: 작은 응접실이다.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대기하던 방이었다. 벽에는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동생으로 나중에 멕시코황제가 된 막시밀리안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방한쪽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해군제독 빌헬름 테게트호프(Wilhelm Tegethoff) 흉상이 있다.

- 엘리자베트왕비의 접견실: 엘리자베트왕비가 낮에 사람들을 접견하는 방이었다. 왕비는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에 면한 아멜리엔궁에서 주로 생활했지만 밤에는 이 넓은 방에 와서 잠을 잤다. 그러므로 매일저녁 간소한 철제 침대를 아멜리엔궁에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 왕비의 의상실: 엘리자베트왕비는 치장에 무척 많은 시간을 보냈다. 특히 매일 아침 긴머리를 매만지는데 오전 내내 시간이 걸렸다. 왕비는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서 일부러 오전시간을 모두 사용했다.

- 왕비의 대응접실: 여러 장의 풍경화가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헝가리의 목가적인 풍경화는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이다.

- 왕비의 소응접실: 비엔나 화가인 게오르그 라브(Georg Raab)가 그린 헝가리의상을 입은 씨씨의 초상화가 있다. 1867년 부다페스트의 성마태성당에서 헝거리여왕으로 대관식을 가진후 그린 것이다. 탁자위에는 왕비가 평소 쓰던 일용물건들도 전시되어있다.

- 대접견실: 엘리자베트왕비의 실물대형 대리석 조각상이 있다. 헤르만 클로츠(Hermann Klotz)의 작품이다. 로코코양식의 벽장식이 아름답다. 벽에 걸린 그림중에는 마리아 테레제여제의 자녀들이 뮤즈들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있다.

- 엔트런스 홀: 러시아의 차르(황제)인 알렉산더가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초청을 받아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이 방에서 며칠 머물렀었다. 이 방은 나중에 알렉산더방이라고 불렀다. 마지막 황제인 카를황제가 1918년까지 살았던 방이기도 하다.

- 리셉션 룸: 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란츠2세황제에게 보낸 선물이다. 이 방에 있는 가구들도 모두 프랑스 스타일이다.

- 만찬홀: 황제의 공식만찬은 주로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에서 열렸고 이 만찬장은 가까운 식구들이나 친지들을 위한 곳이었다. 황제가 사용하던 각종 은식기와 꽃장식이 아름답다.

 

호프부르크의 식당(Speisesaal)

 

프란시스 기념상의 뒤에 있는 건물은 16세기에 막시밀리안2세가 지은 아말리엔부르크(Amalienburg)이다. 발하우스플라츠(Ballhausplatz)에 면하여있다. 막시밀리안2세는 아들 루돌프를 위해 이 건물을 지었다. 때문에 당초에는 루돌프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루돌프가 황제에 오르자 비엔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 궁정사람들을 모두 거느리고 프라하의 궁전으로 이사갔다. 아멜리엔부르크라는 현재의 이름은 요세프1세의 미망인인 뷜헬미나 아말리아(Wilhelmina Amalia)에서 연유되었다. 아말리아는 남편 요세프1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 건물에서 살다가 1742년 세상을 떠났다. 아말리아의 아들로서 나중에 황제가 된 루돌프2세도 이곳에서 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를 추모하여서 수많은 훌륭한 건축가들과 예술가들을 동원하여 이 건물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호프부르크의 황제 회의실

 

루돌프2세는 천문학, 연금술, 심지어 마술에까지 깊은 관심이 있었다. 그는 당시 유명한 천문학자인 티호 브라에(Tycho Brahe)와 각별하게 지냈다. 그렇게하여 루돌프와 브라에는 지금까지 볼수없었던 정확한 해시계와 달시계를 만들었다. 유럽에서 달의 현상에 따라 시계를 만든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아말리엔부르크의 지붕위에는 아주 예쁜 종탑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종탑위에 말 모양의 풍향기가 있다. 왕궁의 말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일기예보용으로 이용되었다. 엘리자베트왕비(씨씨)도 이 말 풍향기를 보고 승마하러 나갈지를 결정했다고 한다. 비운의 씨씨가 살았던 호프부르크의 아파트는 남편인 프란츠 요세프의 아파트와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대제국을 통치하는 한 남자의 부인이었던 씨씨는 비록 넓은 궁전에 살면서도 매우 좁은 영역의 생활을 했다. 다시말하여 한정된 공간뿐만 아니라 활동의 영역에서도 많은 제한을 받으며 살았다. 씨씨의 생활을 더구나 비참하게 만든 직접적인 원인은 시어머니(실은 이모)인 조피(Sophie) 때문이었. 시어머니는 씨씨가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떼어놓아 별도로 유모와 보모를 통해 궁정법도대로 양육하였다. 씨씨에게 있어서 이것처럼 괴롭고 힘든 일은 없었다. 남편 프란츠 요세프황제는 지나치게 절도있는 생활과 공무에 집착하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상황도 씨씨를 호프부르크에서 이방인처럼 살게 해준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프란츠 요세프가 씨씨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역대의 어느 황제보다도 왕비를 사랑했다. 하지만 씨씨는 결혼생활의 대부분을 남편과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지냈고 결국 병을 얻어 이곳저곳 요양하러 다니다가 스위스 제네바에 머물고 있던중 루이지 루케니라는 이름없는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의 흉기(송곳)에 쓰러지는 비운을 맞이했다.


씨씨박물관의 일부

  

씨씨에 대하여는 많은 기록이 있고 여러 얘기가 전해내려오고 있다. 하지만 씨씨는 아직도 무언가 신비한 수수께끼에 싸여있는 여인이다. 씨씨는 말타기를 좋아했고 특히 몸관리에 무척 신경을 썼다. 씨씨의 허리가 지나치게 가늘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래서 당시 비엔나의 귀족사회 부인들 사이에서는 씨씨처럼 날씬한 허리를 만드는 것이 최대 관심사였다. 씨씨는 침실에 기계체조를 위한 여러가지 운동기구를 두고 거의 매일같이 운동했다. 체력을 관리하기 위해서였으며 특히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당시에 다른 여자가 그런 숙녀답지 않은 활동을 했다면 아마 대단한 눈총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의 왕비였기에 씨씨에게는 가능했던 일이었다. 씨씨는 개인위생에 있어서도 개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호프부르크의 자기 침실에 궁전에서는 최초로 수세식변기를 설치하여 사용했다.

 

엘리자베트 왕비의 의상실(Ankleidezimmer)

 

광장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은 라이히스칸츨라이트락트(Reichskanzleitrakt)라고 부른다. 제국수상집무실이란 의미이다. 트락트(Trakt)라는 말은 본건물에 연결된 건물이란 뜻으로 영어의 윙(Wing)에 해당한다. 이 건물은 황실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이었으며 특히 프란츠 요세프 황제의 황실아파트였다. 황제의 집무실 겸 침실 등을 보면 순간 놀람을 금치 못하게 된다. 제국의 찬란한 영화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프란츠 요세프 황제는 자신을 가장 성실하고 모범이 되는 공직자로 자처했다. 때문에 지나친 화려함을 멀리하고 검소하게 살았다. 아마 그런 직무 때문에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희생했는지도 모른다. 황제의 침실을 보면 당장 그런 느낌을 갖게 해준다. 야전용 스타일의 간소한 침대가 고작이다. 황제는 선천적으로 전쟁을 증오하는 성격이지만 그와는 상반되게 벽에는 전쟁화들이 걸려있다. 반면, 씨씨의 침실에는 그가 사랑하는 말들의 초상화가 여러 개 걸려있다.

 

황제의 조찬실

 

황제의 아파트에는 화려한 황실의 만찬홀이 있으며 당장이라도 사용할수 있을 것 같은 식탁이 예전처럼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다. 황제와 함께 하는 황실의 만찬은 영광이지만 실제로 초청받은 사람들은 황제와의 만찬을 꺼려했다. 프란츠 요세프 황제는 소식가이기도 했지만 음식을 상당히 빨리 먹는 편이었다. 공직에 매인 사람은 식사를 늦게 할수 없다는 습관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어떤 식사든지 황제는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음식을 서브 받는다. 때문에 빨리, 조금 먹는 입장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식사를 끝낼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사람이 음식을 서브 받을 때쯤이면 황제는 이미 식사를 끝낸 입장이 된다. 엄격하기가 그지없는 황실의 법도에 따르면 황제가 포크와 나이프를 식탁에 내려 놓는 것과 동시에 함께 식사하던 다른 모든 사람들도 즉시 식사를 끝내야 했다. 따라서 황제의 만찬에 초대받았던 사람들은 배가 몹시 고픈채로 만찬장을 떠나야 했다. 호프부르크에서 나온 이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허호텔에 가서 근사한 음식으로 주린 배를 채우고 집으로 돌아갔다.

 

엘리자베트 왕비의 침실 한쪽, 욕조 등이 있다.

 

 이번에는 광장의 왼쪽에 있는 건물()을 둘러보자. 붉은색, 금색, 흑색으로 단장된 훌륭한 아치 문이 우선 눈에 띈다. 아치문의 상단에는 황금왕관과 함께 합스부르크를 상징하는 문장(紋章)이 조각되어있다. 쌍두독수리 주위를 둘러싼 문장들은 훼르디난트1세 치하에서 제국에 속하여 있던 지역들의 문장들이다. 문장에 기록된 글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이며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 스페인의 공자, 오스트리아 대공, 부르군디(Burgundy)대공인 페르디난트. 1552이다. 이 아치문은 슈봐이처호프(Schweizerhof)로 들어가는 문이다. 화려한 르네상스식의 이 문은 유명한 화가이며 석공인 피에트로 페라바스코(Pietro Ferrabasco)의 작품이다. 문의 상단에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 소벽(小壁)에는 각종 동물의 두개골과 꽃묶음 문장이 부착되어있다. 아치 문을 들어서기 전에 잠시 양 옆을 바라보면 아직도 옛 성벽의 해자(Moat)자리를 볼수 있다. 슈봐이처토르(스위스 문)에 들어서면 바로 도개교(跳開橋: 성 따위의 해자에 걸친 다리)가 있다. 다리에는 윈치가 붙어 있어서 지금이라도 들어 올릴수 있다. 옛날에는 이 해자를 따라 비엔나가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었으며 동서사방으로 4개의 큰 요새망루가 있었다. 이제 슈봐이처호프로 들어가 보자.

 

호프부르크 대연회장에서의 프란츠 요셉 황제 즉위 60주년 기념 황실 모임. 19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