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6일 투어

9. 슈봐이처호프 (Schweizerhof)

정준극 2007. 4. 11. 15:28

슈봐이처호프 (Schweizerhof)


슈봐이처호프(스위스궁)라고 한 것은 스위스 용병들의 막사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한다. 스위스 용병들은 슈봐이처호프로 통하는 아치문과 도개교를 지켰다. 슈봐이처토르(스위스 문)를 들어서서 왼쪽으로 아름다운 철책으로 장식된 분수가 있다. 역시 훼라보스코의 작품이다. 오른쪽으로는 이른바 외교관의 계단이라고 불리는 계단이 있다. 궁정에 용무가 있는 각국의 외교관들이 이 계단을 통하여 왕궁에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 계단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요세프2세에게 황제의 위를 계승할 왕자가 없자 그는 동생 레오폴드의 아들인 조카 프란시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줄 생각으로 프란시스를 비엔나로 데려와 어린 시절부터 합당한 교육을 받도록 했다. 프란시스를 태운 마차가 슈봐이처호프로 들어가는 바로 이 계단 앞에 당도하자 프란시스는 뒤에 있는 마부에게 , 이제부턴 너와 장난치고 놀지 못하게 됐어. 내일부터는 황제 견습공이거든!이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슈봐이처토르(스위스문) 

 

계단이 있는 곳에서 다시 아치문쪽으로 돌아가면 아치문의 안쪽 벽에 이상한 글귀가 적혀있는 것을 볼수 있다. 문의 왼쪽 아래에 있는 검은 돌에 새겨져 있는 글이다. Si dues nobis quis contra nos(만일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는 내용이다. 누가 어째서 이런 글을 이곳에 적어 놓았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가 되어있다. 다만, 두가지 전해 내려오는 얘기가 있다. 하나는 훼르디난트를 압박하여 공격한 개신교도들이 적어 놓았다는 주장이다. 다른 주장은 레오폴드1세가 비엔나를 점거한 터키군대가 퇴각한후 비엔나에 돌아와 이 곳에 와서 모든 궁정사람들과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손수 글귀를 새겨 넣었다는 것이다. 세번째 주장은 30년 전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돌에 1660년이라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세가지 주장이 모두 시기적으로 맞지 않는다. 물론 1660년이라는 글은 나중에 적어 넣은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슈봐이처토르 상단의 글씨와 문장. 가운데 큰 방패의 중심에 있는 작은 방패가 있고 그 안에 또 작은 방패가 있다. 합스부르크 치하의 지역들의 문장들이다.중간 큰 방페에는 헝가리, 보헤미아, 오스트리아, 카스티유의 문장이 있고 그 안의 작은 방패에는 부르군트, 아라곤, 티롤, 플란더스의 문장이 그려져 있다. 

 

이 수수께끼와 같은 글이 적혀있는 맞은편, 슈봐이처문의 오른쪽 벽에는 또 다른 글이 적혀있다. 역시 수수께끼와 같은 내용이다. Restaur. in memoriam Caroli Altmann 1949라는 글이다. 오늘 이날, 카롤리 알트만을 기념하여서라는 내용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헌정한 기념문이다. 히틀러가 비엔나에 입성하자 유태계였던 베른하르트 알트만(Bernhard Altmann)은 아들(같은 이름)에게 모든 것을 버리고 미국으로 이민가도록 강권했다. 옷감상인이었던 아들은 아버지를 남겨 놓은채 어쩔수없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가서 살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아들은 비엔나로 돌아와 옷감장사를 다시 시작했다. 물론 아버지는 전쟁의 와중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은 장사를 잘하여 돈을 많이 벌었다. 전쟁으로 파손된 슈봐이처토르(스위스문)를 복구한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은 기부금을 많이 냈다. 어떤 사람이 아들에게 스위스 문과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내가 여섯살때에 아버지께서 누나와 함께 나를 호프부르크 안에서 펼쳐지는 부활절 퍼레이드에 데려가셨다. 아버지는 스위스문 앞에서 두 아이들을 무등태우고 퍼레이드를 잘 볼수 있도록 두시간이나 서서 계셨다. 매우 힘드셨겠지만 아버지는 자식들을 위해 어떤 내색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런 고마운 아버지를 평생 잊을수 없었다. 내가 1949년에 비엔나에 돌아와서 보니 스위스문이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하여 스위스문의 복구에 동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글을 적어 놓아 달라고 간청하였던 것이다라고 얘기해 주었다.

 

부르크카펠레로 올라가는 계단

 

안뜰의 한쪽 끝에는 또 다른 계단이 있다. 궁전채플로 올라가는 문이다. 채플에는 9월 중순부터 이듬해 6월까지 주일날이나 종교기념일, 또는 특별한 경우에 무료로  들어가서 볼수 있다. 지난날 왕실 사람들이 사용했던 작은 채플에 불과한 이 교회는 항상 관람객들로 붐빈다. 건축적으로 아름답거나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라기 보다는 주일마다 미사 때에 유명한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찬양을 부르기 때문이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연혁은 막시밀리안1세 황제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물론 그 이전에도 궁정음악가들로 구성된 합창단이나 오케스트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페르디난드2세가 황제가되자 비엔나는 제국의 수도로서 확실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따라서 왕실의 각종 행사에 종사하는 왕궁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상설되었다. 이 합창단의 한 파트가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소년합창단이다. 부르크카펠레에서 1916년 11월 28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국장이 치루어졌던 것은 역사적인 사항이었다.

 

부르크카펠레의 중앙제단

 

왕궁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작곡가 황제라는 별명이 붙은 페르디난드3, 그리고 레오폴드1, 요세프1, 카를(샤를르)4세 시대를 거치면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궁정음악가들은 이들 황제를 위한 왕실음악을 작곡하고 연주하는 한편 당대의 가장 유명한 작곡가들에게 작품을 의뢰하여 연주하기도 했다. 하이든, 모차르트, 슈베르트, 브루크너 등이다. 이른바 호프무직카펠레(Hofmusikkapelle. 궁정음악단)는 국립오페라오케스트라와 비엔나소년합창단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도나우운하 건너편, 아우가르텐(Augarten)궁전에 본부를 둔 비엔나소년합창단은 4개의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다. 24명의 정원으로 구성된 각 그룹은 아우가르텐 도자기와 함께 오스트리아의 수출품으로서 시도 때도 없이 세계각국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갖고 있다.

 

호프부르크의 정문인 미하엘러토르


 

슈봐이처호프의 궁정채플(Burgkapelle)에서 비엔나소년합창단이 노래를 부른다는 광고때문에 수많은 관광객들이 주일마다 이 곳에 몰려들고 있다. 그러나 정작 무엇을 보고 듣게 되는지를 미리 아는 것이 나중에 불필요한 실망을 덮어주는 일이 될것이다. 우선 채플에 들어가려면 돈을 내고 표를 사서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간단히 말하여 주일날 로마 가톨릭의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의식일뿐이며 연주회가 아니다. 비엔나소년합창단과 악기연주자들은 오르간이 있는 뒷편의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되어 볼수 없다. 다만, 아래층 회중석에 친절하게 설치된 한두 군데의 비디오 스크린을 통하여 볼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순절(Lent)기간중에는 예전부터의 관습에 따라 악기의 반주 없이 아카펠라로 찬송을 부른다. 그러므로 비엔나소년합창단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를 부를 것으로 기대했다면 그건 오산이다. 예전에는 비엔나소년합창단원들이 중앙제단에 나와서 노래를 부른 일도 있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이고 주일날 미사 때에는 앞으로 나올수가 없다.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연주

 

교회내부를 안내받아 관람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미리 시간을 잘 알아보고 가야 할것이다. 한번쯤은 볼만하다. 예전에는 채플의 모든 벽과 천정에 아름다운 색갈을 칠하거나 그림을 그려 놓았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대부분 희미해졌고 오로지 2층에 오르간이 있는 부분에만 남아있는 그림을 볼수 있다. 하지만 오르간으로 올라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나마 보기가 힘들다. 제단의 왼쪽에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름다운 성모상이 있다. 1410년대의 조각품이다. 중앙제단 뒷편에는 여러 개의 조각상들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 성자들의 기념상이다. 그 중에는 성모와 천사에 대한 조각품도 있다. 천사가 날개를 잃은 채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또 한가지 이 채플에서 볼만한 것은 아치형 둥근 천정의 서까래 기둥에 달려있는 돌조각 펜던트들이다. 형태도 다양하지만 예술적으로도 가치가 있는 것들이다.

                     

부르크카펠레 중앙제단. 목제 십자가상이 보인다.

 

중앙제단에는 십자가에 매 달리신 그리스도의 목제조각상이 있다. 여기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 열렬한 로마가톨릭의 수호자였던 페르디난드2세는 종교개혁이라는 와중에서 역사속으로 침몰할 입장이었다. 30년전쟁이 일어나자 신하들은 페르디난드에게 비엔나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페르디난드는 이를 거부했다. 드디어 개신교 군대가 비엔나시의 성문에 들이닥치자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듯했다. 훼르디난드는 군대도 없었고 돈도 없었다. 게다가 비엔나 시민들까지도 페르디난드의 편에 서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페르디난드는 궁정채플의 제단앞에 무릎을 꿇고 나무십자가상의 그리스도에게 간절히 기도하였다. 그때에 하늘로부터 분명한 소리가 들렸다. 페르디난드여! 내가 그대를 버리지 않을 것이니라!라는 음성이었다. 그로부터 며칠후 상황은 더 악화되어 마침내 개신교 군대가 페르디난드가 있는 성을 완전히 포위하게 되었다. 개신교 군대는 훼르디난드가 그들의 요구에 순응할 것을 종용하였다. 성안에서는 항복해야 목숨을 부지할수 있다는 주장이 분분했다. 성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는 페르디! 어서 나가서 서명하시오!라는 외침과 함께 난도! 포기하시오!뿐이었다. 하지만 페르디난도는 요동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성밖에서 함성과 함께 나팔소리가 나고 군마들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동생인 레오폴드가 보낸 경기병 연대가 도착한 것이다. 개신교 군대는 물러나고 페르디난드는 마지막 순간에 구원되었다. 페르디난드는 궁정채플에서 들은 음성을 기억하였다.


1618년 프라하의 창문던지기(The fesntration). 30년 전쟁을 촉발한 계기였다.

 

[30년전쟁] 1617년 가톨릭교도인 신성로마제국의 페르디난트가 보헤미나의 왕위에 오르자 그는 보헤미아 국민들에게 가톨릭 절대신앙을 강요하려했다. 그러자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의 개신교(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이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두 집단의 갈등이 종교의 허용에 관련된 것이었지만 점치 국가간의 이해관계가 얽힌 정치적인 다툼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프랑스, 덴마크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전체가 연루되는 전쟁으로 번졌다. 전쟁은 1648년 베스트팔리아 강화조약의 체결로 끝을 맺었다. 조약에 따르면 모든 제후들은 자신들의 영토에서 어떤 종교를 따를 것인지 결정할수 있게 되었다. 이로서 루터교회는 물론, 가톨릭, 그리고 칼뱅파교회들도 모두 합법화되었다. 30년이나 끌었던 전쟁이었기에 30년전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신들과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차없이 박해와 이단공세를 퍼붓는 시대적 상황이 간전접인 원인이었다.  

 

궁정채플의 왼쪽 코너의 1층에 왕실보물전시실이 있다. 샤츠캄머(Schatzkammer)라고 부르는 전시실이다. 원래 이름은 세속적 및 종교적 보고(Weltliche und Geistliche Schatzkammer. Secular and Ecclesiatical Treasuries)이다. 비엔나에서 반드시 보아야 할 곳의 하나이다. 이곳에 전시되어 있는 몇가지 품목을 살펴보자. 8각형의 신성로마제국왕관, 성슈테판의 장기(臟器), 샬레마뉴대제의 검, 성창(聖槍.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렸을 때 로마 병정이 옆구리를 찔렀던 창), 신성로마제국 및 오스트리아제국의 왕관과 홀과 보주(寶珠), 대관식 의상, 세례식 의상, 황제의 황금양털(Golden Fleece) 만토, 나폴레옹의 아들인 라이히슈타트(Reichstadt)대공의 요람 등 헤아릴수 없다. 벽에는 여러 개의 귀중한 타페스트리(벽양탄자)가 걸려있으며 이밖에도 세상에서 제일 큰 유니콘(), 커다란 공처럼 생긴 세상에서 제일 큰 마노(瑪瑙) 등등 경탄을 금치 못하게하는 보물들이 산적해 있다. 온 기독교인들이 존경하는 성베드로의 치아도 있다. 이쯤되면 누구나 대단한 흥미를 가질 것이다. 이 합스부르크의 보물창고는 국립미술관(미술사박물관)의 소속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전시 내용은 경우에 따라 달라질수 있으므로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성로마제국 왕관] 독일국가의 신성로마제국 왕관은 962년 색슨황제인 오토의 대관식을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이 왕관의 여덟면에는 각종 보석과 진주가 박혀있다. 왕관 안쪽의 모자는 군사령관으로서 로마 황제가 쓰던 투구모양으로 되어있다. 모자위에는 보석으로 장식한 십자가가 있다. 세속적인 왕과 영적인 왕으로서의 양면을 상징한 것이다. 

 

제국보물박물관에 있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왕관, 홀, 보주

                       

슈봐이처토르(스위스 문)에서 헬덴플라츠(Heldenplatz), 영웅의 광장으로 나가는 아케이드 길에는 현재 기념품 상점들이 늘어서 있다. 그러나 다른 쪽의 아케이드 길에 가서보면 벽에 칠한 벽토회가 이곳저곳 긁혀져 있는 것을 볼수있다. 긁혀진 곳의 안쪽에는 돌로 만든 뷔드메르 토르(Widmer Tor)가 있었음을 알수 있다. 뷔드메르 토르는 호프부르크 궁전이 생기기 전의 옛날에 시내에 드나들수 있는 문이었다. 옛날에는 시내를 둘러싼 성벽에 네군데의 요새 겸 성문이 있었다. 그런 요새성문은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있었다.

   

   호프부르크 통로의 상점들

 

조금 더 가서 철책문 뒤의 계단으로 올라가면 오스트리아 수자원보존국이다. 이 계단은 한때 거지들의 계단이라고 불렀다. 이 계단으로 올라가면 호프부르크궁전안에 있는 재무장관의 집무실로 갈수있다. 요세프2세황제의 시절, 이 복도로 따라 들어가면 황제의 침실 가까이로 갈수있었다. 요세프2세황제는 가끔 이계단을 통해 침실로 갔다. 정문을 통과하면 귀찮기 때문이었다. 무슨 원통한 일을 청원하거나 구걸을 해야하는 사람들은 일부러 이 계단아래에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가 , 황제여! 도와주소서!라면서 바라는 바를 청원했다. 백성들을 사랑해야 하는 황제는 되도록이면 이들의 청원을 들어주려고 노력했으며 돈을 구걸하는 사람에게는 종자로 하여금 돈을 건네주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황제는 이들에게 단 세마디의 질문을 했다. 그대는 누구신가? 무엇을 원하는가? 적어서 가져온 것이있는가?이다. 아무튼 거지들이 황제를 기다리던 계단이라고 하여 거지들의 계단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거지들의 계단은 오스트리아판 신문고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수많은 얘기가 있다. 한가지만 얘기하자면, 어떤 몰락한 귀족미망인에게 딸이 하나 있었는데 시집보내기 위한 지참금이 없었다. 부인이 황제에게 그런 사정을 얘기하고 도와줄것을 요청하자 황제는 나에게 봉사토록 하시오! 그러면 월급을 주리다라고 대답했다. 놀란 부인이 아니, 봉사라뇨? 어떻게 저를 하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하셨나요?라면서 자못 분해했다. 그러자 황제는 아니, 뭘 그걸 가지고 그러시나요? 황제인 나도 백성들을 위해 봉사하는데 말이요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계단 뒤편에 작은 문이 있다. 왕궁소방대본부로 들어가는 문이다. 지금은 그런 소방대가 없지만 예전에는 밤마다 호프부르크왕궁을 순찰도는 것이 왕궁소방대의 주요 임무였다. 순찰소방대원은 밤마다 요세프플라츠의 아우구스틴교회로부터 시작하여 카푸친교회와 알베르티나를 거쳐 다시 부르크가르텐으로 나와 헬덴플라츠를 돌아 미하엘러플라츠로 오는 일주를 했다. 그러나 어느때부터인지 이 관습이 없어졌다. 예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소방대원의 순찰이 계속되었다면 1992 11월에 호프부르크의 레도우텐잘(Redoutensaal)을 황폐화시켰던 것과 같은 화재는 방지할수 있었을 것이다.


공중에서 바라본 호프부르크


[레도우텐잘] Redoutensaal. 호프부르크궁전에 있는 3개의 그랜드 홀중의 하나로서 원래는 황실만찬등 궁식행사를 위한 장소였으나 나중에는 연주회장과 무도회장으로 더 많이 활용되었다. 베토벤도 이 홀에서 자주 연주를 했으며 이밖에도 여러 작곡가/연주가들이 로데우텐잘의 스테이지를 빛나게 했다. 메테르니히수상 시절, 비엔나회의와 연계한 무도회가 밤마다 열렸던 곳도 이곳이다. 1992 1126-27일밤에 뜻하지 아니한 화재가 일어나 레도우텐잘의 외벽까지 전소되었다가 5년후인 1997년 재건되어 예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다만, 요세프2세황제와 파르마의 이자벨라의 결혼식 공식만찬을 그린 대형 그림은 화재로 인하여 사라졌다.



[팜하우스]  Palmenhaus. 부어가르텐에 있는 팜하우스(식물원을 말함) 1822년 옛날 성벽을 따라 건설되었다. 원래는 프리드리히 오만(Friedrich Ohmann)의 설계에 따라 건설했으나 세기말에 아르 누보(art nouveau) 스타일로 개축되었다. 아르 누보는 유겐트슈틸(Jugendstill)이라고 부른다이제 헬덴플라츠(영웅의 광장)에 들어서보자.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으로 경탄을 금치 못할 정도이다. 미술사박물관, 자연사박물관, 국회의사당은 물론 저멀리 시청과 보티프교회(Votivkirche)의 웅장한 모습까지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르크가르텐의 팔멘하우스






[보티프키르헤] (Vitifkirche: 봉헌교회)


보티프키르헤는 9구 알저그룬트(Alsergrund)에 있지만 링(Ring)과 가까이 있어서 시내에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교회이다. 보티프키르헤는 비엔나의 다른 대형 교회에 비하여 비교적 최근에 건축된 교회이다. 헝가리의 국수주의자인 야노스 리베니이(Janos Libenyi)라는 열혈청년이 프란츠 요셉황제를 살해코자 단검을 들고 공격했으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황제는 가벼운 상처만 입었다. 1853년 2월 18일의 사건이었다. 이날 황제는 제국 군대의 오도넬(ODonnel) 백작과 함께 그 지역에 있던 병영을 시찰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야노스라는 청년이 벼락같이 덤벼들어 황제를 뒤로부터 공격하였다. 야노스는 단검으로 황제의 목을 곧바로 겨냥하였다. 황제는 이날도 제국군복을 입고 있었다. 잘 아는대로 제국군복은 높은 컬러로 되어있어서 목을 거의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노황제의 군복의 컬러는 다른 군복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야노스의 단검 공격을 받은 황제는 목에 부상을 입고 피를 흘렸지만 단단한 컬러 때문에 생명에는 아무런 지장도 받지 않았다. 황제를 수행하고 있던 오도넬 백작이 번개같이 달려 들어 야노스를 덮쳤다. 이로써 해프닝 끝!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도넬 백작은 원래 이름에서 알수 있듯 아일랜드에서 이민온 사람이었다. 황제의 목숨을 구했다는 공로로 오도넬 백작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백작이 되는 영예를 안게 되었다. 이와함께 레오폴드 황실대십자훈장(현재로 보면 국가최고훈장)을 받았다. 그의 문장은 합스부르크의 쌍두 독수리를 사용할수 있도록 했다. 이 같은 오도넬문장은 잘츠부르크의 미라벨플라츠(Mirabelplatz) 회랑의 기둥에 명판으로 장식되었다. 오도넬은 이곳 미라벨플라츠에 저택을 짓고 살았다.

 

보티프키르헤와  여름철에 휴식을 취하는 시민들

 

또 한 명의 표창을 받은 사람이 있다. 사건이 일어나던 때에 근처에 있던 요셉 에텐라이히(Joseph Ettenreich)라는 이름의 푸줏간 장사를 하는 사람으로 오도넬 백작이 범인을 덮치자 백작을 도와 범인을 꼼짝 못하게 누른 사람이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는 그를 귀족으로 높이고 이름도 자기 이름을 사용토록하여 요셉 폰 에텐라이히(Joseph von Ettenreich)라고 해주었다. 범인 리베니이는 재판을 받고 황제살해음모라는 대역죄로서 사형선고를 받아 짐머링거 하이데(Simmeringer Haide)에서 처형되었다.

 

사건이 일어난 후 프란츠 요셉 황제의 동생인 페르디난트 막시밀리안 요셉(Ferdinand Maximilian Joseph)은 왕실과 귀족사회를 대상으로 일대 모금운동을 벌여 사건 현장에 감사의 교회를 세워 봉헌키로 했다. 막시밀리안은 얼마후 멕시코 황제가 되어 3년을 지내다가 멕시코에서 공화국을 열망하는 혁명이 일어나 체포되어 멕시코에서 총살당한 인물이다. 막시밀리안은 형님전하인 프란츠 요셉 황제를 위한 교회 이름을 보티프(Votif: 하나님께 감사의 봉헌)라고 정했다. 막시밀리안은 이 교회가 애국의 기념비적인 건물이며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한 국민들의 헌신의 표상이라고 말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에 대한 암살기도. 1853년 2월 18일. 오늘날의 보티프키르에 앞길에서였다.


보티프교회의 설계는 국제공모로 이루어졌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는 물론, 프랑스, 독일, 영국의 건축가들 75명이 응모했다. 원래 계획은 인근의 종합병원을 교회 구내로 병합하는 것이었다. 한편 기왕에 인근에 있는 비엔나대학교 캠퍼스를 영국의 옥스퍼드, 또는 캠브릿지 대학교와 같은 수준으로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건축비가 하늘 높은줄 모르게 뛰어 올라가는 바람에, 또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이 같은 원래 계획은 없었던 것으로 되었다. 기라성과 같은 설계 응모자중 26세의 젊은 설계자 하인리히 폰 페르스텔(Heinrich von Ferstel)이 최종 선정되었다. 그의 설계는 프랑스 고틱 양식을 본딴 네오-고틱 양식의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었다.

 

건축은 1856년부터 시작되었다. 황제 암살 사건이 있은지 3년후였다. 26년 후인 1879년 완공되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의 결혼 25주년에 즈음해서였다. 26년만에 완성된 것은 비엔나의 다른 교회들이 대단히 오랜 기간에 걸쳐 완공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완성된 것이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었다. 대개 다른 교회나 건물들은 건축하는 기간동안 설계자가 이런 저런 사유로 바뀌는 경우가 많았지만 보티프교회는 단 한 사람이 완공까지 모든 책임을 졌다는 것이다.

 

교회가 완공될 당시 교회의 인근은 병영이었다. 1848년의 혁명이후 비엔나 방위를 위한 군인들이 지방으로부터 많이 올라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보티프교회에는 군인들이 많이 참가하였다. 그러므로 합스부르크 제국의 군인교회나 마찬가지였다. 교회는 링 슈트라쎄에 연계하여 건설되지는 않았지만 교회 앞에는 광장이 마련되었다.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광장이다. 보티프키르헤는 성슈테판성당과 마찬가지로 사암(沙岩)으로 건축되었다. 그러므로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공해, 특히 산성비의 영향을 받아 검게 변색되었다. 공해로 찌든 건물을 희게 만드는 작업과 공해로 침식되어 손상되는 사암을 보수하는 작업은 많은 예산이 드는 대사업이다. 보티프교회는 2차대전 당시 심하게 손상되었다. 그래서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단행해야 했다. 보수 작업은 2006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지만 외양은 전에 비하여 엄청나게 깨끗해졌다. 관광객들은 슈테판성당과 보티프교회가 서로 비슷하게 생겼다고 하여 구분하지 못하고 찾아 온다고 한다. 두 성당 사이에는 7백년이란 세월이 가로 놓아져 있다. 보티프교회의 건축 스타일은 나중에 독일 스피아어(Speyer)에 있는 게대흐트니스키르헤(Gedächtniskirche: 기념교회), 벨기에의 오스텐데(Oostende)에 있는 성베드로-성바울교회(Sint-Petrus-en-Pauluskerk)가 모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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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멀리 보티프키르헤의 장관을 감상하기 전에 다시 오던 길로 되돌아가 보도길로 가보자. 복도쪽에 아주 흥미로운 물건이 있다. 마차길(지금은 차도)과 인도를 구분하는 긴 나무막대이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홈이 파진곳도 있고 긁힌 것 같은 자국도 있다. 이 나무 막대는 수세기 동안 말고삐를 잡아 매두는 용도로 사용된 것이었다. 호프부르크 왕궁에 오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이곳에서 말에서 내려 말을 매두고 갔다. 별로 신통치도 않은 물건이지만 아무튼 옛날에 사람들이 말타고 다니던 모습을 생각케해주는 유물이다. 다시 인 데아 부르크라고 칭하는 궁전안뜰로 가보자. 이곳에서 헬덴플라츠로 나가는 아케이드길 입구에 돌로 만든 위병소가 있는 것을 볼수있다. 사실 이 광장은 얼마전까지도 위병교대식으로 유명했다. 매일 정오에 거행되었으나 지금은 사라졌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스펙터클한 퍼레이드를 좋아했다. 제국군대의 행진은 제일 좋아하는 행사였다. 생일기념일, 결혼기념일, 장례기념일, 종교축제, 가톨릭의 성년(聖年)행사 등 기회만 있으면 퍼레이드를 벌여 백성들도 좋아하게 했다. 왕실의 아파트로 둘러싸인 인 데아 부르크에서 그런 퍼레이드가 많이 열렸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다. 검소했던 마리아 테레제도 퍼레이드는 필수불가결이라고 주장할 정도였다. 요세프2세황제만이 예외였다.

 

호프부르크에서의 행진(Kondukt)는 오늘날에도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 다시 헬덴광장의 샤를르대공의 기마상을 만나보자. 샤를르대공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오스트리아의 영웅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공적을 살펴보는 것은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기념상 자체에 대하여 찬사를 보내는 일부터 해보자. 샤를르대공을 태운 말은 꼬리나 앞발의 도움없이 다만 두 뒷발의 발목으로서만 그 육중한 조형물을 지탱하고 있다. 이런 형태는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이다. 다른 곳에 있는 기마상들은 대부분 네발로 딛고 있어서 몸체를 안정되게 받치고 있다. 아무튼 뒷발목만 이용하여 균형을 잡게 한 기마상을 공학적으로 대단히 제작하기 어렵다. 샤를르대공 기마상을 직접 제작한 조각가 훼른코른(Fernkorn)이 똑 같은 기마상을 제작하려 했지만(건너편 오이겐공자의 기마상) 실패한 것만 보아도 잘 알수있다. 광장의 건너편에 있는 오이겐공자의 기마상은 기마상으로서는 완벽하지만 공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샤를르대공의 기마상에 필적하기가 어렵다. 오이겐공자의 기마상은 말의 두 뒷발과 꼬리로서 전체를 지탱토록 되어있다. 훼른코른은 먼저 만든 샤를르대공의 기마상을 그대로 본따서 만들지 못한 죄책감에 나중에 정신이상에 걸렸다. 과연 그만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샤를르대공 기마상

 

귀족기사의 대명사인 오이겐공자는 3대에 걸친 오스트리아 황제를 섬겼다. 젊은 시절, 무명의 장교였을 때는 레오폴드1세를 위해 봉사하였다. 오이겐공자는 터키군대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쌓아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5년도 되지않아 그는 장군이 되어 터키군을 유럽에서 몰아내는 주역을 담당했다. 요세프1세 때에는 스페인왕위계승전쟁에서 말보로공작의 편에 서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마지막으로는 샤를르6세 치하에서 정치가 겸 외교관으로서 국가에 봉사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오이겐공자의 기마상 뒤에 있는 건물은 국립도서관 열람실이다. 이 웅장한 건물은 그후 링(Ring)쪽으로 증축되어 현재는 고대악기박물관, 무기갑옷박물관, 민속박물관(Museum für Volkerkunde), 파피루스박물관, 에베소유적박물관 등이 들어서 있다. 프란츠 요세프황제 시대에 들어서서 호프부르크의 대대적인 확장 작업이 펼쳐졌다. 호프부르크의 정문쪽에 미하엘윙을 추가하였고 도서관에 연이어 웅장하고 화려한 새로운 건물을 증축하였다. 노이에 호프부르크이다. 원래는 이 새로운 건물에 대칭하는 건물을 건너편에도 지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1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계획은 무산될수 밖에 없었다. 만일 도서관 건물에 대칭하여 건물을 지었다면 폴크스가르텐과 헬덴플라츠는 연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헬덴플라츠는 ㄷ자형의 호프부르크 건물에 갇히는 형국이 되었을 것이다. 도서관 입구의 계단에 올라서면 링을 따라 늘어서있는 제국의 위용을 더 자세히 볼수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저 멀리 비엔나 숲까지 볼수 있다 

 

노이에 부르크 앞의 오이겐 공자 기마상

                                 

[민족박물관 Museum für Volkerkunde. 1928년에 문을 열었다. 민족박물관에서 가장 흥미있는 전시품은 16세기 멕시코 아즈테크왕 몬테추마(Montesuma)의 깃털로 만든 모자이다. 멕시코가 한때 오스트리아제국의 식민지였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전시이다. 비발디는 몬테추마를 주인공으로 한 오페라 '모테추마'를 작곡한바 있다. 노이에 호프부르크에 있는 에베소박물관은 1978년에 문을 열었으며 터키의 에베소에서 발굴된 귀중한 유적들이 전시되어 있다. 자연사박물관과 미술사박물관의 뒷편에 있는 메쎄 팔라스트(Messe-Palast)의 담배박물관(Tabakmuseum) 역시 한번 볼만한 곳이다 


노이에 부르크의 에베소 박물관

 

헬덴플라츠의 정문은 궁성문(Burgtor)이라고 부른다. 이 문이 헬덴플라츠가 있기에 링과 호프부르크궁전을 구분되고 있다. 궁성문의 위에는 프란시스 황제의 모토인 Justitia regnorum fundamentum(정의는 제국을 세운 기반이다)가 적혀있다. 현재 이 문의 한쪽 날개의 지하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우다 산화한 병사들의 납골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에 있는 채플에서 이들을 위한 미사를 드린다. 왕궁문의 다른 쪽 날개는 취임식등의 행사를 치루는 홀이다.

              

헬덴토르(영웅문)

 

도서관건물과 ㄱ자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에는 화려한 축제홀(Festsaal)이 있다. 예전에는 황실의 주요 행사와 무도회가 열리던 홀이다. 비엔나의 무도회 시즌은 12 31일 황제가 주관하는 무도회를 싯점으로 시작되었다. 이 축제홀에서는 주요 국제회의가 사시사철 열린다. 그래서 건물밖에는 만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IAEA1980년대 후반, 오스트리아센터가 문을 열기 전까지 이곳에서 총회를 가졌었다. 축제홀에서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저녁마다 모차르트-요한 슈트라우스연주회가 열린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대부분 비엔나 필 단원들이다. 아름답고 장엄한 호프부르크의 훼스트잘에서 열리는 모차르트-요한 슈트라우스 음악회는 쇤브룬(Schönbrunn) 궁전, 쿠어살롱(Kursalon), 그리고 음악가연맹(Musikverein)연주회장에서 열리는 음악회와 함께 비엔나에서 가장 잘 알려진 관광상품이다.


호프부르크 페스트잘에서의 연주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