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워킹 투어/제6일 투어

12. 헬덴플라츠 (Heldenplatz)

정준극 2007. 4. 11. 15:30

 헬덴플라츠(영웅광장)

 

라일락 꽃향기가 싱그러운 헬덴광장의 샤를르 대공 기마상 앞의 건물은 노이에 부르크.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의 구국 영웅으로서 두명을 기린다. 헬덴플라츠(영웅광장)에 있는 샤를르 대공과 오이겐 공자이다. 샤를르 대공은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나폴레옹 군대에게 타격을 주어 한때나마 나라를 지킨 영웅이다. 샤를르 대공의 기마상 주변에는 라일락나무가 무성하다. 5월이면 꽃이 만개하여 주변에 라일락 향기가 넘쳐흐른다. 비엔나의 기념상중에서 이만큼 향기로운 꽃 냄새에 싸여 있는 것도 아마 없을 것이다. 샤를르대공의 기마상 주변에 앉아서 호프부르크의 영광인 레오폴드 트락트를 감상하는 것은 특별한 즐거움이다. 레오폴드 트락트는 레오폴드 1세를 기념하여 붙인 이름이다. 레오폴드 1세는 참으로 특이한 인물이었다. 원래 그는 황제가 될 운명도 아니었으며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형인 페르디난드 황태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어쩔수 없이 황위를 계승하는 황태자가 되고 이윽고 아버지 페르디난트가 세상을 떠나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므로 레오폴드는 바라지도 않았던 황제로서의 짐을 양어깨에 짊어지게 되었다. 레오폴드는 음악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플루트를 잘 불었으며 작곡도 하였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궁정오케스트라와 비엔나소년합창단을 직접 지휘하였다. 그는 여러 작곡가들의 연주회를 적극 후원하여 음악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는 자기의 결혼식을 기념하여 오페라를 공연키로 하고 이를 위한 별도의 극장을 짓도록 했다. 그 때에 공연된 오페라는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체스티가 작곡한 일 포모 도로(Il Pomo dOro: 황금사과)이다. 비엔나에서 역사상 처음 공연된 정식 오페라였다.

 

영웅 광장(헬덴플라츠)와 노이에 호프부르크(신호프부르크 궁전). 왼쪽 끝에 샤를르대공 기마상.

 

레오폴드 1세(1640-1705)황제는 어쩐 일인지 군대의 퍼레이드와 같은 웅장하고 스펙타클한 것을 즐겨하였다.  훗날 말년의 마리아 테레지아(영어로는 마리아 테레사)도 군대의 퍼레이드를 즐겼던 것은 아마도 레오폴드 1세의 그런 취향을 이어 받아서였을 것이다. 레오폴드 1세는 여러 분야에 조예가 깊어서 오페라공연에 직접 출연하였고 스페인승마학교에서의 마술(馬術)공연에도 실제로 참가하였다. 아무튼 레오폴드황제는 원래부터 호기심이 많은 비엔나 시민들의 기호를 충족시켜주는 활동을 많이 했다.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레오폴드였으므로 호프부르크의 한쪽 건물을 자기 취향에 맞게 궁전을 증축하고 이를 레오폴드 트락트()라고 불렀다. 건축에는 7년이란 기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완성된지 몇 달후 뜻하지 아니한 화재가 일어나 레오폴드동이 전소되는 불운이 있었다. 황제의 가족들은 무사히 피난했지만 다른 궁정인들은 심한 화상을 입었다. 유태인이 방화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때 마르가리타 테레자 왕비는 17세에 불과했지만 그 같은 소문을 적극 옹호하고 진실이라고 믿었다. 스페인의 로마가톨릭궁정에서 자란 왕비는 어릴때부터 유태인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레오폴드와 결혼하게되자 비엔나에 가면 비엔나의 유태인들을 모두 추방하겠다는 다짐을 했었다. 왕비는 레오폴드에게 유태인들을 모두 추방하라고 졸랐다.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받아 들이지 않았던 레오폴드였지만 왕비의 끈질긴 베개송사와 그런 배경에 있는 스페인을 생각하여 마침내 비엔나의 유태인 게토에 살고 있는 모든 유태인을 추방했다. 당시에는 현재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유태인 게토가 형성되고 많은 유태인들이 살았다. 이들은 레오폴드 1세의 명령에 의해 집을 버리고 떠나야 했다. 유태인들이 추방당하자 그곳에 살고 있던 비엔나 사람들은 레오폴드 황제가 좋은 일을 했다고 하여 그 지역의 명칭을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불렀다. 

 

헬덴플라츠와 샤를르대공 기마상. 그 무거운 중량을 말의 두 뒷다리로 버티도록 설계되어 있다. 대단한 역학의 기미상이다. 이런 종류의 기마상은 세계적으로도 드믄 것이다. 건너편의 오이겐 공자 기마상은 중량 계산이 잘못 되어서 인지 말의 두 뒷다리로 전체를 버티지 못하고 말의 네 다리가 모두 지탱하도록 되어 있다.  

 

얼마후 화재로 파손된 레오폴드 트락트는 다시 건설되었다. 하지만 원래의 예술적인 화려함은 찾아 볼수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그의 큰 아들 요제프2세는 주로 레오폴드 트락트에서 살았다. 레오폴드 트락트는 오스트리아가 공화국이 된 후에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그라나 대통령집무실이 된 이후에는 일반인이 들어갈수 없게 되었다 

 

헬덴플라츠로 들어가는 문인 부르크토르(궁성문). 이 건물의 한쪽에 무명용사들의 현충원이 있다.

 

헬덴플라츠가 역사적으로 기억되어야 할 또 하나의 사건은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 나서 처음으로 이 곳에서 비엔나 시민들에게 합병의 타당성을 역설한 것이다. 1938년 3월의 화창한 날이었다. 이날 헬덴플라츠에 모인 군중은 2만5천명이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20만명이 참가했다고 하지만 헬덴플라츠에는 그만한 인원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설명이다. 히틀러는 헬덴플라츠가 내려다 보이는 노이에 호프부르크(Neue Hofburg) 궁전의 계단에 등장하여 '이제 오스트리아는 독일 제국이라는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선포했다. 히틀러는 이를 하임케르(Heimkehr: 홈컴잉)라고 불렀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한 나라가 되었으니 말 잘 들으라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신성로마제국의 주인이었던 오스트리아는 하루 아침에 독일 제3제국에 속한 하나의 지방이 되었다. 히틀러가 이런 연설을 하는 시간에도 나치 게슈타포는 비엔나에 있는 반나치 운동가들과 유태인들을 사냥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나중에 히틀러는 오스트리아의 유태인을 색출하여 강제수용소로 보내고 종국에는 집단 처형하는 책임자로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1906-1962)을 임명했다. 아이히만은 원래 독일의 졸링겐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린츠로 와서 계속 살았었다. 그의 아버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인이었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아이히만의 아버지는 린츠에 남아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므로 아이히만은 오스트리아의 린츠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이히만은 전쟁후 남미로 도피하여 은둔생활을 하다가 어떤 유태인이 그를 알아보고 고발하여 체포되었으며 이스라엘로 가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유태인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요행으로 살아 남은 사람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 생긴 것은 순하게 생긴 것 같은데 나치의 유태인 학살의 총책임자였다.

 

히틀러가 헬덴플라츠를 군중대회 장소로 선택한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비엔나에 이만큼 넓은 광장이 없다는 이유이다. 건너편 마리아 테레지아 플라츠까지 합치면 5만명이 들어 설수 있는 넓이이다. 또 다른 이유는 오스트리아 백성들의 국수주의적 감정을 움직일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헬덴플라츠는 오스트리아의 영웅들, 즉 17세기에 터키가 침공했을 때 용감하게 목숨을 바쳐 싸운 병사들, 19세기에 나폴레옹과의 전쟁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용사들, 그리고 수많은 무명용사들을 추모하는 곳이다. 헬덴토르(또는 부르크토르)에 이같은 역사적 기록이 적혀있고 헬덴토르의 지하에 무명용사들을 위한 추모의 장소가 있다. 히틀러는 헬덴플라츠에서 군중집회를 가져 오스트리아 백성들의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명분을 삼았다. 헬덴플라츠의 상징인 샤를르대공과 오이겐대공의 기마상들은 오스트리아를 위해 외세의 침입을 물리친 위대한 애국주의를 기리는 것이다.

 

1938년 헬덴플라츠에서 비엔나 시민들에게 연설하는 아돌프 히틀러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해 비엔나에 왔을 때 그는 링슈트라쎄의 임페리알 호텔에 묵었다. 오래전에 히틀러는 고향을 떠나 미술공부를 하러 비엔나에 온 일이 있다. 그 때 히틀러는 임페리알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 그러나 1938년에는 아무도 무시못하는 지도자(휘러)로서 임페리알 호텔에 묵었다.

 

캐른트너 링에 있는 임페리알 호텔. 히틀러는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방할 때에 비엔나와서 이 호텔에서 묵었다. 히틀러는 청년시절 비엔나의 미술대학에 입학하려고 왔을 때 이 호텔에서 알바를 했었다. 미술대학에는 두번이나 낙방하였다. 그래서 독일로 가서 나치의 앞장을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