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이야기/명소와 공원

쇤브룬 궁전 (Schloss Schönbrunn)

정준극 2007. 4. 11. 15:32

 쇤브른 궁전에 걸려 있는 타페스트리의 하나. 가운데 어린 모차르트의 모습이 있다.

 

쇤브룬 궁전의 연혁은 156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막시밀리안2세 황제는 비엔나 성벽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이 곳에 장원(莊園)을 상속받아 주로 사냥숙소로 이용하기 시작했다. 넓은 지역에 숲이 우거지고 초원이 펼쳐진 이곳은 황제를 위한 훌륭한 사냥터였다. 얼마후 마티아스(Matthias)황제가 이곳에서 사냥을 하던중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을 발견했다. 황제는 이를 아름다운 샘’(쇤브룬)이라고 불렀다. 황제는 숲과 샘이 있는 이곳을 너무나 사랑하여 이곳에 궁전을 짓고 살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이곳에 궁전을 지으려는 계획이 진행되었으나 쉽게 완성되지는 못했다. 마침내 막시밀리안2세 황제가 장원으로 사용하던 때부터 거의 1백년이 지난후에야 처음의 계획이 실현되었다. 궁전의 이름은 아름다운 샘이 발견된 것을 기념하여 쇤브룬이라고 정했다. 거장 피셔 폰 에아라흐(Fischer von Erlach)가 설계를 맡았다. 처음에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버금하는 대규모의 궁전을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러 이유로 계획이 축소되었다. 완공까지는 7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그후 마리아 테레제는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궁전을 확장하도록 명했다. 그리하여 1744년부터 5년에 걸쳐 거장 니콜라우스 피카씨(Nikolaus Picassi)에 의하여 지금의 화려한 궁전이 완성되었다.

 

 

건물의 외형 길이는 2백미터가 넘고 각각 특성이 있게 화려하게 장식된 방은 1,441개나 된다. 베르사이유에 버금하는 넓은 정원이 조성되었고 저 멀리 비엔나를 내려다보는 곳에 글로리에타라는 개선문을 세웠다. 글로리에타를 더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그 앞에는 해신(넵튠)의 분수를 만들어 놓았다. 바다가 없는 오스트리아에서 해신(海神)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은 흥미로운 일이다. 쇤브룬은 합스부르크 제국의 영광이었다. 1762, 여섯살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제를 위해 피아노연주를 한곳도 이 곳이었으며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1805년부터 4년동안 거주했던 곳도 이 궁전이었다. 68년간 합스부르크제국을 통치했던 프란츠 요세프1세는 1830년 이 궁전에서 태어나 1916년 역시 이 궁전에서 세상을 떠났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카를1세가 1918년 하야칙령에 서명함으로서 650년에 걸친 합스부르크 통치를 종식한 곳도 이곳이었다. 2차대전중 폭격으로 크게 손상을 입은 쇤브룬궁전은 종전후 영국군 사령부로 사용되었다. 강대국의 신탁통치에서 벗어난 오스트리아공화국은 곧 쇤브룬궁전의 복구에 나서어 마침내 쇤브룬 황색이라는 과거의 영광을 되살려 놓았다. ‘쇤브룬 황색은 궁전의 거의 모든 벽지가 정부에서 제작한 황색벽지로 도배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다.

 

 

쇤브룬의 수많은 방중에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방은 아름다운 천정 프레스코화가 있는 대회랑으로부터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소박한 침실까지 다양하다. 청나라 도자기로 꾸며진 푸른방은 마리아 테레제의 국제적인 취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곳곳에 엘리자베트왕비(씨씨)의 잔영이 남아있는 것도 아름다운 왕비에 대한 추억을 새롭게 해주는 일이다. 대정원에는 30만개 이상의 꽃나무가 심어져 있다. 개선문과 같은 글로리에트(Gloriette)로 올라가는 양쪽 계단 입구에는 해신 넵튠의 웅장한 조각상이 있고 가운데에는 하늘 높이 솟는 분수가 있다. 차량궁전(Wagenburg)에는 로코코양식, 바로크양식, 비더마이어(Biedermeier)양식의 각종 황실차향들이 전시되어있다. 마차박물관에는 대관식마차, 국빈용 마차, 썰매를 비롯하여 각종 마구들이 전시되어있다. 식물원인 팔멘하우스(Palmenhaus)는 건축양식이 대단히 특이하다. 30미터 높이의 철근 구조물인 식물원은 3곳의 각기 다른 온도가 조절되는 구역이 있어서 희귀식물이나 열대식물을 관리하고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인 1752년에 마리아 테레제의 부군인 프란츠 요세프1세 황제가 설립하였다. 동물원에는 8백여종의 동물 45백여 마리가 거주하고있다. 이제 쇤브룬궁전으로 들어가 보자.

 

 

[궁전의 정문]

정문으로 가려면 빈차일레(Wienzeile)거리에서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름다운 철책으로 장식된 정문의 양 옆에는 웅장한 오벨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오벨리스크의 꼭대기에는 날개를 펼치고 당장이라도 비상할 것 같은 독수리가 올라서있다. 나폴레옹이 쇤브룬을 사령부로 사용했을 때 세운 것이다. 당시 나폴레옹은 1805년 오스털리츠(Austerlitz), 그리고 1809년 바그람(Wagram)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후여서 기고만장하던 때였다. 두개의 오벨리스크는 두 전투에서의 승리를 기념한 것이다. 1809년 오스트리아가 나폴레옹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문서에 조인한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정문에서부터 궁전건물까지 펼쳐있는 넓은 광장은 영광의 구내(Ehrenhof)라고 부른다. 이 곳에는 두개의 화려하고 장대한 분수가 왼쪽과 오른쪽에 있다. 오른쪽의 분수는 도나우, (Inn), 그리고 엔스(Enns)강을 상징한 것이며 왼쪽의 분수는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의 각 지방연합을 상징한 것이다. 마리아 테레제의 명에 의해 건설된 분수이다.

 

아름다운 정원과 글로리에타

 

쇤브룬의 본관 건물 양편에는 여러 채의 별도 건물이 마치 양날개처럼 연결되었다. 왼쪽 날개 건물은 기사의 윙(Kavaliestrakt)이라고 부르며 오른쪽 날개 건물은 발레리아 윙(Valeriastrakt)이라고 부른다. 발레리라 윙에는 궁정극장이 자리잡고 있다. 궁정극장(Schlosstheater) 뒷편에 있는 건물은 승마학교 겸 황실 마구간이었나 지금은 마차박물관(Wagenburg)이다.

 

 

쇤브룬의 분수

 

궁전에는 통틀어서 1,441개의 방이 있다. 그중에서 390개 방은 황실사람들이 사용하던 방이었다. 한때는 이 궁전에 1천명 이상이 살았다. 이를 위해 139개의 부엌이 있었다. 쇤브룬의 넓이는 바티칸공국의 4배에 이른다. 수많은 방중에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는 방은 40여개에 불과하다. 대부분 1(우리로는 2)에 있다. 궁전 건물의 가운데 파트는 주로 의전실, 또는 접견실이다. 궁전의 왼쪽 건물(동편 윙)은 마리아 테레제와 프란시스 샤를르(카를)대공이 살던 곳이며 한때 나폴레옹이 체류하던 곳이다. 오른쪽 윙은 마리아 테레제와 프란시스 샤를르의 아들인 프란시스 요세프1세와 왕비인 엘리자베트가 살던 곳이다. 궁전의 그라운드 층, 1층에는 채플이 있다. 궁전 대지의 대부분은 정원이다. 유명한 동물원과 식물원도 정원의 한 파트이다.

 

- 대접견실 및 의전실: 국빈들을 위한 대연회가 열리던 장소이다. 이 방에서 1955년 5월 15 연합국의 통치를 종식하는 협정 체결식이 열렸다. 이후 대접견실은 국빈을 영접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961년 케네디대통령과 흐르스쵸프가 다녀간 곳도 이곳이었다. 대접견실은 길이가 43미터에 이른다. 특별한 것은 천정의 프레스코화이다. 1760년 죠르지오 구글리엘미(Georgio Guglielmi)가 완성한 작품이다. 천정의 프레스크화는 마리아 테레제 시대에 제국의 영토와 번영을 상징한 것이다. 소접견실의 천정화는 합스부르크-로레인왕조와 독일국가 신성로마제국과의 연합을 의미한 것이다.

- 로사의 방(Rosa Zimmer): 요세프1세황제의 개인 거실이었다. 벽에는 스위스와 북부이탈리아의 경관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요세프 로사(Joseph Rosa)가 그린 그림이므로 로사의 방이라고 부른다.

- 의전실(Zeremoniensaal): 황실 가족들이 결혼식을 올리거나 세례식을 거행하던 곳이다. 이 방에는 마리아 테레제의 실물대 초상화가 걸려있으며 또한 요세프2세황태자와 파르마의 이사벨라공주의 결혼식 장면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다.

- 푸른중국풍의 방(Blaue chineischer Salon): 푸른 벽지와 중국 인쇄물로 장식되어있다. 원래 이방은 접견실이었다. 이 방에서는 1918년 11월 11 샤를르1세황제가 하야협정에 서명함으로서 합스부르크왕조의 몰락을 가져왔으며 새로운 공화국으로의 길을 연 방이다.

- -라크의 방(Vieux-Laque Zimmer): 왼쪽 윙은 마리아 테레제와 프란시스 샤를르대공이 거주하던 방들이다. -라크의 방은 쇤브룬에서 가장 화려한 방이다. 벽면은 동양화인 화조와 산수 그림을 금박으로 칠했거나 에나멜판으로 도배하였다. 바닥마루는 각양각색의 장미목으로 깔아 화려하다. 이방에 있는 그림중에는 루도비카(Ludovika)대공부인의 초상화이다. 루도비카는 레오폴드2세의 왕비이며 마리아 테레제의 자부이다. 이밖에 프란치스코1세황제의 초상화, 요세프2세와 동생인 투스카니대공 레오폴드의 로마 회동 에 대한 그림도 역사적인 작품이다. -라크-침머는 마리아 테레제가 미망인이 된 이후 줄곧 거주했던 방이다.

- 나폴레옹방(Napoleonzimmer): 나폴레옹이 쇤브룬에 체류하는 동안 머물던 방이다. 원래 이 방은 마리아 테레제의 침실이었다. 이 방에서 가장 특별한 것은 브륏셀에서 만든 18세기의 타페스트리이다. 군대 생활을 사실적으로 그린 대작이다. 나폴레옹의 아들인 라이히슈타트(Reichstadt)공작도 이 방에서 살다가 죽었다.

- 도자기의 방(Pozellenzimmer): 마리아 테레제의 거실이었다. 이 방의 장식품들은 푸른색과 흰색의 나무로 만든 것이다. 이런 장식품들이 마치 도자기처럼 보이기 때문에 도기의 방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벽면은 푸른색 중국화로 도배되어있다.

- 1백만의 방(Millionzimmer): 인도-페르시아 채색의 그림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있다. 그리고 벽면에는 60개의 메달이 박혀있다. 마리아 테레자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메달들이다. 메달에 그려진 그림은 모굴제국의 궁정생활, 사냥, 하렘, 전쟁, 전통공예 및 예술, 종교의식등에 대한 것이다. 이 방에 1백만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이 메달을 구매할때에 한 개에 당시 1백만 플로린스(florins)이상을 지불했기 때문이다. 이 방에는 두개의 커다란 거울이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로서 벽에 장식되어 있는 메달들이 수없이 많아 보인다.

- 고블랭의 방(Gobelinzimmer): 원래 소접견실이었다. 18세기 브뤼셀에서 가져온 대형 타페스트리가 장관이다. 홀란드의 일상생활을 그린 작품이다. 이 방에는 6개의 양수의자가 놓여있다. 의자의 그림은 1년의 두달씩을 의미한다. 고블랭은 16세기초 프랑스의 염색사이다. 그는 양탄자에 그림을 짜넣은 특별한 방법을 고안해 냈다. 고블랭방은 고블랭이 만든 그림을 짜넣은 훌륭한 양탄자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 기념의 방(Gendekzimmer): 원래 도서실이었다. 나폴레옹의 아들 라이히슈타트대공을 기념하는 방이다. 1809년 스스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와의 평화협정을 강화하기 위해 마리아 테레제의 딸인 마리 루이제(Marie Louise)와 결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이 태어났다. 기쁨에 넘친 나폴레옹은 아들 라이히슈타트를 로마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원래 나폴레옹과 루이제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의 이름은 프란시스 요세프였다. 그러다가 비엔나의회가 프란시스 요세프를 라이히슈타트의 보헤미아대공이라는 호칭을 수여키로 결정하여 라이히슈타트라고 더 잘 알려지게 되었다. 정략결혼한 루이제는 아들 라이히슈타트를 싫어하였다. 그래서 어린 라이히슈타트는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살았다. 할아버지인 마리아 테레제의 남편 프란시스의 보호속에 살았다. 라이히슈타트는 21세라는 젊은 나이로 폐병에 걸려 쇤브룬의 이곳 기념의 방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 방에는 다섯살 되던 때의 라이히슈타트에 대한 초상화와 그의 데드마스크가 있다. 한쪽 탁자 위에는 헌겊으로 만든 종달새 인형이 유리상자 안에 놓여있다. 라이히슈타트의 유일한 동무였다고 한다.

- 붉은 방(Roter Salon): 독서실이었다. 옆방은 도서실이다. 이 방에는 여러 개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특히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젊은 시절 초상화와 68세의 나이에 금양털기사단(Order of the Knights of the Golden Fleece)의 제복을 입고 있는 근엄한 초상화가 대조적으로 걸려있다.

- 동쪽 테라스 방(Terrassenkabinet Ost): 장미를 소재로한 각종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이 방에서는 쇤브룬의 정원을 훤히 내다볼수 있기 때문에 테라스방이라고 불렀다. 이 방에 연결된 세개의 방은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부모인 프란시스 샤를르대공과 바바리아의 조피(Sophie)가 살던 방들이다. 프란츠 요세프황제는 이들중 첫번째 방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이 첫번째 방을 탄생의 방(Geburtszimmer)라고 부른다. 두번째와 세번째 방에는 마리아 테레자와 남편 프란시스의 초상화,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16명의 자녀들에 대한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상으로 왼쪽 윙을 대강 살펴보았다. 다음은 쇤브룬의 오른쪽 윙에 있는 방들이다.

 

쇤브룬의 마지막 영광은 1848, 18세의 젊은 나이로 황제에 오른 프란츠 요세프로부터 시작된다. 나폴레옹의 군화에 짓밟혀 쇤브룬의 영광이 추락된 때도 있었지만 프란츠 요세프로부터 합스부르크의 영화는 재기되었다. 프란츠 요세프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씨씨)와 결혼하자 시어머니인 조피는 이들 젊은 부부에게 쇤브룬의 방중에서 열개의 방을 신혼방으로 내주었다. 당시의 관례로 황실 가족은 최소한 다섯개의 방을 소유하도록 되어있었다. 큰방으로 통하는 작은 방 두개, 응접실 하나, 침실 하나, 거실 하나였다. 그러나 프란츠 요세프와 엘리자베트는 각각 다섯개의 방을 배정받았다. 그러나 이들의 방은 상당히 검소한 편이었다. 쇤브룬의 다른 방들이 모두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던 반면에 프란츠 요세프와 엘리자베트의 방은 소박하였다. 침대를 보면 알수있다. 프란츠 요세프의 침대는 군대의 야전침대처럼 간단했다. 엘리자베트의 침대도 수수했다.

 

원래 이들 부부의 방에는 제국의 위용에 걸맞는 스타일의 가구들이 있었다. 제국 스타일과 비더마이어(Biedermeier) 스타일의 가구는 화려하고 장엄한 것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프란츠 요세프가 모두 치웠다. 당구의 방(Biliard-zimmer)에 있는 아담한 당구대만이 제국스타일의 가구로 남아있을 뿐이다. 당구의 방은 개인적으로 황제를 알현할 사람들이 대기하던 방이었다. 이 방에는 마리아 테레제가 로레인의 샤를르대공에게 최고훈장을 수여받는 장면의 그림을 비롯하여 세개의 대형 그림이 장식되어있다.

- 호두나무 방(Nussbaumzimmer): 황제가 개인적으로 방문자들을 접견하던 방이다. 벽면과 천정을 잇는 라이닝 부분을 호두나무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구들도 대부분 암갈색의 고상한 호두나무 목재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샨델리아가 유난히 아름다운 이 방에는 프란시스 샤를르대공과 프란시스 요세프황제의 대리석 흉상이 놓여있다. 두사람 모두 황금양털기사단의 체인을 목에 걸고있다.

- 집무실(Schreiberzimmer): 프란시스 요세프1세황제의 집무실이다. 1863년의 엘리자베트왕비를 그린 그림은 놀랄만큼 아름답다. 왕비가 26세때의 모습이다. 중앙 벽면에는 프란츠 요세프황제가 호프부르크에서 집무하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 걸려있다. 검소하면서도 아름다운 기품이 있는 방이다. 한쪽에 있는 작은 탁자위에는 크지 않은 대리석상 두개가 있다. 프란츠 요세프황제와 엘리자베트왕비이다. 프란츠 요세프황제는 쇤브룬의 이 방에서 하루 18시간의 고된 집무를 하여 쇠퇴하여 가는 제국을 붙들어 보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 침실(Schalfzimmer): 프란츠 요세프황제의 침실이다. 이방에서 합스부르크제국의 마지막 위대한 황제인 프란츠 요세프가 68년간의 통치를 마감하고 1916년 11월 21 세상을 떠났다. 이 방에는 자살한 황태자 루돌프의 초상화가 유일하게 걸려있다. 중앙 벽면에는 프란츠 요세프황제가 독일 국가들로부터 온 대공들을 접견하는 엄숙한 그림이 걸려있다.

- 부부침실(Gemeinsames Schlafzimmer): 프란츠 요세프황제와 엘리자베트왕비의 공동침실이다. 벽면은 푸른색 비단으로 도배되어있으며 가구들도 모두 같은 색의 비단으로 아름답게 장식되어있다. 이 방에는 도저히 대제국의 황제와 왕비의 것으로 볼수 없는 두개의 소박한 침대가 나란히 놓여있다. 벽에는 마리아 테레제의 여동생인 안나 마리아의 초상화와 두개의 성모와 아기 예수 그림이 걸려있다.  

- 엘리자베트왕비의 방(Kaiserin Elizabeth-Zimmer): 핵커르트(Hackert)가 그린 포도수확가을 수확이 걸려있다. 스위스 화가인 쟝-에티안느 리오타르(Jean-Etienne Liotard)가 그린 사냥복을 입은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아 안나공주 젊은 요세프2세황제 마리아 크리스티나공주 젊은 엘리자베트공주등의 초상화도 걸려있다. -에티안느 리오르타는 마리아 테레제가 합스부르크궁정화가로 정식 초빙했던 사람이다. 또 한사람의 유명한 궁정화가는 프리드리히 폰 아멜링(Friedrich von Amerling)이었다. 그는 비엔나에 비더마이어(Biedermeier)스타일의 그림을 유행시킨 사람이었다. 그의 대표작은 다음방인 마리 앙뚜아네트방에 걸려있는 프란시스1세황제의 대형 초상화이다.

- 마리 앙뚜아네트의 방(Marie-Antoinette-Zimmer): 벽면의 중앙에 황금양털기사단 복장의 프란시스1세황제 초상화가 걸려있다. 백색과 금색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방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방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마리 앙뚜아네트와 그의 아이들의 모습을 짜넣은 타페스트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타페스트리는 1920년까지 이곳에 장식되어있었다가 철거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제의 열다섯번째 자녀로서 1770년에 프랑스의 도팽 루이(Dauphin Louis. 1774년 루이16세로 등극)와 결혼하였으며 1793년 프랑스혁명의 와중에서 길로틴에 처형당했다. 이 방에는 프란시스1세황제의 대형 초상화 이외에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죠세핀공주(요세프2세의 두번째 부인), 마리아 안나와 마리아 죠세핀(마리아 테레제의 딸들), 그리고 레오폴드2세황제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 어린이 방(Kinderzimmer): 이 방의 색조 역시 백색과 금색이다. 이 방에 마리아 테레제의 딸들인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카롤린(나폴리왕비), 마리 아말리아, 마리 안나, 마리 엘리자베트의 초상화들이 걸려있기 때문에 어린이 방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서랍이 달리고 뚜껑이 있는 책상인 에스크리뚜아(escritoire)는 원래 마리 앙뚜아네트가 사용하던 것이었으나 나중에 씨씨(엘리자베트왕비)가 사용했다.

- 조찬실(Frühstückszimmer): 이 방은 황색비단으로 장식되어있다. 벽면의 돋움새김(medallion)에는 마리아 테레제와 그의 딸들이 나오는 자수작품이 걸려있다.

- 황색의 살롱(Gelber Salon): 의자들을 황색의 비단으로 장식했기 때문에 황색의 살롱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벽에 걸려있는 파스텔 그림들은 모두 스위스 화가 장 에티안느 리오타르의 작품이다. 제국스타일의 대형 시계가 특별히 눈길을 끈다. 흰대리것에 도금장식으로 되어있다. 시계위에는 나폴레옹 스타일의 독수리가 앉아있다.

- 발코니 방(Balkon-zimmer): 흰색과 황금색으로 장식되어있으며 의자들은 초록색 비로도로 씌웠다. 역시 마리아 테레제의 자녀들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있다. 가운데 그림은 요세프, 레오폴드, 카를 요세프를 그린 것이며 다른 벽에는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마리아 크리스티나, 미라아 엘리자베트, 마리아 안나의 초상화가 있고 또 다른 벽에는 후아나 가브리엘라, 페르디난드-카를, 레오폴드2, 마리아 카롤리나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 궁정채플(Schlosskapelle): 18세기초에 건설되었으며 나중에 마리아 테레제가 약간 개축했다. 제단에는 파울 트로거(Paul Troger)가 그린 성모의 결혼이 있다. 프레스코 천정화는 막달라 마리아를 미화한 것이다. 제단의 맨윗쪽 천정돔에 이르는 곳에는 성령이 비둘기처럼 내려오는 삼위일체 조각품이 걸쳐있다.

 

- 궁정극장(Schlosstheater): 예술을 지극히 사랑했던 마리아 테레제의 여망에 따라 1747년에 준공되었다. 마리아 테레제는 자기가 직접 공연에 출연하는 것을 좋아했다. 특히 젊은 시절에는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었으며 연극에도 출연했다. 어떤 때에는 자기의 아이들과 함께 출연한 일도 있었다. 때문에 글룩, 하이든,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들이 마리아 테레제의 후원아래 오페라를 공연하고 연주회를 가질수 있었다. 모차르트는 궁정극장에서 임프레싸리오(Impressario. 오페라감독)라는 오페라를 직접 감독하여 공연하였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도 궁정극장에서 공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