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얼링(Mayerling)
마이얼링은 마을 이름이기도 하지만 그 마을에 있는 장원과 같은 건물의 명칭이기도 하다. 현재는 교회와 부속건물이 들어서 있다. 마이얼링 마을은 비엔나에서 서남쪽으로 겨우 24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비엔나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아서 갈수 있다. 마이얼링은 슈베하트 강을 끼고 있으며 비엔나 숲(비너발트)의 끝자락에 있다. 마이얼링은 행정상으로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바덴 구역 알란드(Alland)에 속하여 있다. 마이얼링은 1550년 이래 하일리겐크로이츠(성십자) 수도원의 소유로 되었었다. 마이얼링의 저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1세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 사이에서 태어난 유일한 황태자인 루돌프가 1886년(우리나라에서는 배재학당이 문을 연 해)에 취득하여 황실의 사냥숙사로 만들었다. 루돌프 황태자는 마이얼링 사냥숙사에서 1889년 1월 30일 정부인 마리아 베체라라는 여인과 동반자살을 했다. 그러한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진 장소이므로 오늘날 이 사냥숙사는 오스트리아의 관광명소가 되어 있다. 사냥숙사의 한 부분은 교회로 만들어져 자살한 루돌프 황태자의 영혼이 평안히 쉬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이 건물의 한쪽에는 루돌프 황태자를 기념하는 작은 전시실도 있다.
오늘날의 마이엘링 교회. 이 교회의 한쪽에 루돌프 황태자를 기념하는 작은 전시실이 있다.
루돌프 황태자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과 함께 마이엘링에서 동반자살한 사건은 아직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그 사건이 일어나자 비엔나에는 여러가지 추측이 난무했었다. 질투심 많은 루돌프의 부인이 사주하여 두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극처럼 보이게 했다는 얘기가 있었는가하면 루돌프를 너무나 사랑했던 어머니 엘리자베트(씨씨)왕비가 마리아를 아들 루돌프로부터 떼어놓기 위해 마리아에게 죽음을 강요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아무튼 황태자의 애인이었던 마리아는 비엔나에서 귀족의 신분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인근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에 속한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묻히게 되었다. 루돌프황태자의 아버지인 프란츠 요세프황제가 마리아를 되도록이면 비엔나에서 멀리 매장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하일리겐크로이처의 수도원에서 1km 떨어져 있는 수도원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묻히게 되었다는 얘기도 있었다. 하일리겐크로이처 수도원. 안뜰(호프)의 가운데에 페스트가 물러간 것을 기뻐하여 세운 기념탑(페스트조일레)이 있다.
마이엘링은 루돌프 황태자가 여가를 위해 만든 사냥숙사라고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프란츠 요셉 황제의 사냥 별장이었다. 루돌프황태자가 세상을 떠나기 3년전인 1886년에 시토수도원으로부터 이 건물을 기증받아 사냥숙사로 개조하였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이후 프란츠 요세프황제는 이 사냥숙사의 상당부분을 성당으로 개조하였다. 오늘날 마이엘링성당은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되어있다.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 베체라.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은 당시 18세였다고 한다. [마리아 죽음의 미스터리] 루돌프 황태자와 동반자살을 택해야만 했던 마리아의 죽음에 대하여 아직까지도 석연치 않은 점들이 있어서 세간의 흥미를 끌고 있다. 마리아 베체라(Maria Vetsera)남작부인은 1889년 1월 30일 비엔나 근교 마이엘링(Meyerling)에 있는 루돌프 황태자의 사냥숙사에서 루돌프와 함께 영원히 돌아 올수 없는 길을 택하였다. 당시 마리아는 꽃같은 나이인 18세. 유부남인 루돌프는 30세였다. 루돌프의 부인은 벨기의 공주인 스테파니이며 두 사람 사이에는 엘리자베트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이날 마이엘링에의 골짜기에서는 두발의 총성이 조용한 새벽공기를 갈랐다. 루돌프 황태자가 피스톨로 먼저 마리아를 쏘고 이어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아 죽음을 택하였다고 한다. 황태자는 머리에 총알을 쏘아 뒷머리 부분이 거의 형체를 알아 볼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리아의 경우도 단 한방의 총알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에 머리에 쏘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머리 모습도 큰 손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마이엘링 사건 직후 궁정측의 조치에 석연치 않은 점이 상당이 미스터리오 남아있다는 것이다. 어떤 점이 미스터리라는 것인가? 우선 18세의 아름다운 아가씨로 세상을 하직한 마리아가 누구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마리아 베체라는 1871년 3월 19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알빈 베체라(Albin Vetsera) 남작으로 오스트리아 궁정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영국 대사관의 공사까지 지냈던 경력이 있다. 아버지가 남작이기 때문에 마리아도 남작부인이라는 호칭을 사용할수 있었다. 루돌프 황태자와 스테파니 황태자비 마리아의 아버지는 마리아가 루돌프와 관계를 맺고 있던 당시에는 아무런 직책도 없이 지내고 있었다. 마리아의 집은 비록 귀족이라고 하지만 생활을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어서 알빈 남작의 복직은 가정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마리아의 어머니 헬레네(Helene) 남작부인은 딸 마리아가 루돌프 황태자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마리아를 통하여 루돌프에게 남편이(일설에는 마리아의 오빠) 영국 대사로 임명되도록 부탁하려고까지 했다. 마리아와 루돌프는 어떻게 만났을까? 프라터(Prater)에서 우연히 처음 만났다고 한다. 프라터는 비엔나 북부역 근처에 있는 비엔나 최대의 유원지 공원이다. 이날 루돌프 황태자는 프라터에서 헝가리 독립주의자들과 은밀히 만날 약속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마리아는 프라터에서 인형극을 보고 있는데 어떤 중년 남자가 치근대는 바람에 곤란한 입장에 있었으나 마침 지나가던 루돌프 황태가자 그 남자에게 무안을 주고 쫓아 버렸다고 한다. 그것이 첫 번 대면이었고 두 번째는 비엔나를 공식 방문한 영국 황태자 에드워드(Edward)와 루돌프가 테니스를 치는 곳에서였다고 한다. 베체라 남작이 영국 대사관에 근무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에드워드 황태자와도 약간의 친분이 있던 터여서 인사차 황태자와의 테니스 경기를 참관하였던 것이다. 두 사람이 급속도로 가까워지게 된데에는 마리아 라리슈(Maria Larisch)백작부인의 주선이 큰 역할을 했다. 라리슈 백작부인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일원으로서 루돌프 황태자와는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다. 그리고 루돌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왕비(씨씨)도 사랑하는 아들 루돌프의 외도를 은근히 묵인하고 있었다. 뮤지컬 '루돌프'의 한 장면. 루돌프 황태자와 마리아 당시 루돌프 황태자는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와 결혼하여 딸까지 하나 두었으나(딸의 이름은 엘리자베트) 정책결혼이었기 때문에 냉랭한 사이였다. 루돌프는 아버지인 프란츠 요셉 황제가 너무 오래 황제로 있기 때문에 언제 다음 황제로 즉위할지 몰라 불만에 차있는 상황이었고 황태자비인 크리스티네는 그런 루돌프를 무능하다고 무시하고 있었다.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는 황태자인 루돌프가 한량처럼 지내고만 있기 때문에 도무지 미덥지 못했고 황태자비 역시 남편 루돌프의 방탕한 생활을 크게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때에 루돌프가 마리아와 심각한 관계에 있게 되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두 사람을 떼어 놓아야 했다. 이렇듯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가 아들 루돌프와 마리아의 열애를 노골적으로 방해하자 루돌프는 아버지를 점점 미워하게 되어 부자관계는 악화일로에 있게 되었다. 그러나 탈출구가 없었다. 결국 루돌프는 마리아와 함께 이루지 못할 사랑을 완성키 위해 죽음을 택하였던 것이다. 마이엘링 사건! 사람들은 이 사건을 그렇게 불렀다. 루돌프 황태자의 시신.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기 때문에 머리 부분이 부서져서 붕대로 감아 놓았다.
루돌프 황태자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프란츠 요제프 황재, 엘리자베트 황비, 그리고 스테파니 황태자비
1월 30일의 아침. 루돌프와 마리아의 시신은 황태자의 수행비서가 발견하여 호프부르크 궁전에 거하고 있던 황제와 씨씨에게 알려졌다. 두 사람은 즉시 마차를 타고 마이엘링으로 향하였다.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식은 황실 규범에 따라 엄중하게 치루어졌고 그 시신은 합스부르크 황실의 가족 묘역인 카이저그루프트(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한편, 마리아의 시신은 황제의 지시에 의해 비엔나 시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마이엘링 근처의 하일리겐크로이츠 수도원 묘역(�트프리드호프: 숲속의 공동묘지라는 뜻)에 초라하게 묻도록 했다. 황실은 마이엘링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고 단순한 사고라고 발표했다. 하지만 사건 현장이 어떠했는지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이후 마이엘링 사건은 수년동안 짙은 안개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당연히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루돌프가 마리아를 살해하고 죄책감에 자살했다는 얘기가 돌았고 서로 총을 들고 같은 시간에 방아쇠를 당겨 같은 시각에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으며 심지어는 두 사람 모두 누군가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당시 마리아가 임신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소문도 나돌았다.
호프부르크의 정문앞 미하엘러플라츠를 떠나는 루돌프 황태자 운구행렬
루돌프 황태자 운구행렬
마리아의 시신은 마이엘링에서 몰래 가져 나와 인근의 하일리겐크로이츠(Heiligenkreuz)의 시토(Cistercian) 수도원 묘역에 매장되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마리아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1945년 늦은 봄, 러시아군이 하일리겐크로이츠의 시토 수도원에 집중 포화를 퍼부었다. 그런 중에 러시아군의 장거리 총탄이 마리아 베체라가 매장되어 있는 묘지를 때렸다. 관을 덮고 있던 화강암 석판이 산산조각으로 파손되었다. 러시아군이 철수한후 당시 하일리겐크로이츠 당국은 마침 그곳에 머물고 있던 게르트 홀러(Gerd Holler)가 의사인 것을 알고 그에게 마리아 베체라의 유골이 혹시 파손을 입었는지를 조사하고 다시 매장하는 일에 목격토록 요청을 받았다. 홀러는 마리아의 두개골 등이 러시아군의 포탄으로 파손되었는지를 자세히 조사했지만 총탄이 뚫고 들어간 어떠한 흔적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렇다면 루돌프가 마리아의 머리에 총을 쏘았다는 흔적도 없는 셈이다. 마리아의 무덤은 러시아군의 포격으로 파손되었기 때문에 그 부근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리고 또다시 세월이 흘렀다. 홀러의 관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홀러는 전쟁이 끝난후 의문점을 풀어보기 위해 교황에게 루돌프에 대한 사망당시 서류를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신성로마제국의 주역인 합스부르크는 자살한 루돌프 황태자의 장례를 가톨릭식으로 치루기 위해 교황청의 승인이 필요했다. 가톨릭으로서 자살은 죄악이었고 면죄를 받기 위해서는 바티칸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하일리겐크로이처 수도원에 속하여 있는 공동묘지에 있는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의 묘지
사건 당시 합스부르크의 요청을 받은 바티칸은 비엔나 주재 로마교황청 대사를 마이엘링의 현장에 보냈다. 교황청 대사는 마이엘링 사건에 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 보고서가 바티칸의 문서창고 어딘가에는 있을 것이고 그것을 살펴보면 루돌프와 마리아의 죽음에 대한 어떤 단서를 찾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교황대사의 보고서에는 단 한방의 총알만이 발사되었다고 적혀있다. 그렇다면 누구의 머리에 그 한방의 총알이 발사되었다는 것인가? 의문은 계속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던중 1993년, 헬무트 플라첼슈타이너(Helmut Flatzelsteiner)라는 사람이 당국으로부터 아무런 허가도 받지 않고 마리아의 유해를 파내어 원래 묻혀 있었던 곳에 이장하였다. 미스터리는 풀려지지 않았다.
1889년에 찍은 마이얼린의 루돌프 황태자 사냥숙소
루돌프와 마리아의 로맨스와 비극에 대한 스토리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첫째는 1936년 프랑스에서 만든 영화로 마리아역은 유명한 다니엘르 다류(Danielle Darrieux)가 맡았고 루돌프역은 샤를르 보이에(Charles Boyer)가 맡은 것이다. 다른 하나는 1968년 미국영화사가 제작한 것으로 마리아에 캬트리느 드뇌브(Catherine Deneuve), 루돌프에 오마 샤리프(Omar Sharif), 씨씨에 에바 가드너(Ava Gardner), 프란츠 요셉에 제임스 메이슨(James Mason)이 각각 맡은 것이다. 1954년 TV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오드리 헵번과 멜 훼라(Mel Ferrer)가 주역을 맡은 것이었다. 2007년 오스트리아 TV는 마이엘링에 대한 스토리를 제작하였다. 비운의 루돌프 역은 막스 폰 투른(Max von Thurn)이 맡은 것이었다. 케네스 맥밀란(Kenneth MacMillan)은 1978년 ‘마이엘링’이라는 발레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마리아보다는 루돌프에 중점을 둔 작품이었다. 헝가리의 세제드(Szeged)에서는 거의 해마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왕비등을 주제로 한 공연행사를 갖는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에 속해있던 세제드는 수해를 입어 도시가 거의 폐허가 되었으나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여왕이 직접 방문하여 복구를 약속하여 몇 년후에는 완전히 복구되었던 곳이다. 2005년, 헝가리는 ‘루돌프’라는 뮤지컬을 만들어서 세제드의 야외극장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으나 사정상 지연되자 이듬해 5월 부다페스트에서 공연하였다.
영화 '마이엘링'(비수)의 한 장면. 루돌프 황태자 역의 오마 샤리프와 마리아 베체라 남작부인 역의 캬트리느 드뇌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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