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총정리/8월의 성인과 축일

8월 20일: 성 베르나르(St Bernard)

정준극 2007. 8. 9. 13:02
 

교회의 스승중 한사람. 시스테리안 수도회의 창시자. 상징: 꿀벌 집, 발에 사슬을 매고 있는 마귀들.


베르나르의 어머니는 베르나르를 출산하기 전날 꿈에서 큰 개 한 마리를 보았다. 등은 검은 색이었고 나머지 몸은 하얀 색의 개였다. 이는 베르나르가 나중에 시토(Citeaux)에 있는 베네딕트파 수도회의 검은색 만토와 흰 수도복을 입을 것이라는 예언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주님을 구주로 영접한 베르나르는 자기의 갈 길이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일찍부터 세상을 부인하고 신실한 생활에 몰두하였다. 가족들은 그런 베르나르를 보고 '너 그러면 되냐?'면서 만류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가족들과 친구들이 설득을 당하여 마침내 삼촌을 비롯한 29명의 가족과 친구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청년시절, 그는 파리대학교에서 공부했고 자기가 태어날 때의 예언을 성취하려는 듯 20대 초반에 어떤 빈곤한 수도원에 몸을 의탁했다.


그가 20세 초반의 젊은 시절, 어느날 그는 어떤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욕정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경우가 있었다. 그는 욕정을 다스리기 위해 근처의 얼어붙은 연못에 뛰어 들었으며 동사하기 직전에야 겨우 나와 목숨을 유지했다. 유혹에 승리한 베르나르의 이 스토리는 간혹 그림에 표현되어 있다. 악마들이 설교하고 있는 베르나르의 발목에 쇠사슬을 매고 끌어당기는 모습이다. 세상 욕정을 물리친 베르나르는 그후로 설교에 전념하여 당대의 가장 유명한 설교자가 되었다. 말씀을 전하는 그의 음성은 마치 꿀과 같이 달콤했다. 그로부터 벌집이 베르나르의 상징 문양이 되었으며 사람들은 베르나르를 ‘꿀처럼 모든 병을 고칠수 있는 의사’라고 불렀다. 어느 때, 베르나르가 성서 필사의 사역을 할때 너무나 힘들어 기진맥진하여 있었다. 당시 성서를 베껴 적는 일은 고행중에서도 고행이었다. 이때 성모 마리아가 친히 임재하시여 성모의 유방에서 직접 우유를 내어 바작바작 타고 있던 베르나르의 입술에 적시어 주어 새롭게 정신을 차리도록 했다는 전설이 있다. 성모의 젖을 직접 마셨던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육신의 동생들, 그리고 베르나르가 유일하다.


베르나르는 로브(L'Aube)지방의 클레어보(Clairevaux)에 그의 뜻에 동조하는 25명의 친구들과 함께 수도회를 개설하였다. 베르나르는 처음 시작한 수도원이었으므로 잘하자는 뜻에서 모든 일에 엄격하였다. 특히 솔선하여 금식함으로서 다른 수도사들도 금식에 참여토록 종용하는 일이 많았다. 배고픈 수도사들은 어느정도 불평하였다. 그건 그렇고 시간의 흐름과 함께 베르나르는 유럽에서도 알아주는 설교가로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말씀을 사모하여 한적한 클레어보 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잇게 되었다. 마을은 번창하였다. 베르나르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7백 가구가 사는 큰 마을이 되었다. 베르나르는 당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수도사였다. 그는 자기주장이 분명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타협을 몰랐다. 그래서 여러번이나 어려운 시험을 당하였다.


베르나르는 너무나 강한 자기주장 때문에 반대파들이 많았다. 베르나르가 가장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은 제2차 십자군 때였다. 그는 2차 십자군들을 모집하기 위해 사람들을 앞장서서 독려하였다. 베르나르는 군대를 모으기 위해 자기의 주장과 열정대로만 말씀을 전하였다. 말씀으로 승리할 것이므로 병기를 가진 군대보다는 말씀으로 무장만 하면 걱정 없다는 요지였다.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지고 행진하였다. 그러나 2차 십자군들이 가는 곳마다 약탈을 일삼자 베르나르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나르는 생전에 강력한 권세를 지녔으며 나아가 20세기 교회 개혁에도 중요한 기틀을 제공해 주었다.  

 

 성 베르나르를 천사들이 마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