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총정리/10월의 성인과 축일

10월 4일: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성 프란체스코: St Francis of Assisi)

정준극 2007. 8. 9.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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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의 어릴 때 세례명은 조반니(Giovanni: 요한)였다. 그러다가 프란체스코라고 바꾸었다. 프란체스코는 ‘프랑스 사람’이란 뜻이다. 어머니가 프랑스 계통이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으로 바꾸었다는 설명이다. 프란체스코가 태어난지 얼마후 비즈니스를 하는 그의 아버지가 프랑스에서 사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새로 태어난 아기는 어느새 유아 세례를 받아 조반니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얻은 기쁨과 프랑스에서의 사업이 성공한 것을 기념하여 아들의 이름을 프란체스코라고 바꾸는데 동의하였다. 프란체스코(프란시스)는 심성이 곱고 솔직한 아이였다. 가족 모두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아버지가 부유한 상인이었기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청년 프란체스코는 아씨시와 페루지아(Perugia)의 전투에 참가하여 포로로 잡혔다. 잡혀 있는 동안 한차례 중병을 앓았으나 다행히 목숨을 잃지는 않았다. 이로부터 프란체스코는 더욱 겸손한 마음을 갖게 되었다. 어느날 프란체스코는 거리에서 페루지아와의 전투 때에 만났던 군대의 장군이었던 사람이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장군은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자기의 모든 재산을 희사했으며 이제 구걸을 통해 매일의 양식을 얻고 있다고 말했다. 프란체스코는 큰 충격을 받아 이제로부터는 자기도 거지장군과 마찬가지로 병들고 가난한 자, 특히 문둥병에 걸려 사회의 냉대를 받고 있는 자들을 위해 헌신키로 결심했다. 프란체스코는 자기의 결심을 당장이라도 실천하고 싶어서 자기의 화려한 겉옷과 거지 대장의 남루한 옷을 바꾸어 입었다. 거리의 아이들이 프란체스코의 그런 모습을 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여겨 돌을 던졌다.

 

 허물어진 교회를 재건하고 하늘의 축복을 받는 성 프란체스코

                                

어느날, 프란체스코가 어떤 다 쓸어져가는 교회에 들어가 기도에 힘쓰고 있는 때에 하늘로부터 음성이 들려 가로되 ‘내 교회를 재건하라’고 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이 음성을 진실로 받아들여 허물어져 가는 교회를 많은 노력 끝에 재건하였다. 그는 교회 재건을 위해 집에서 재물을 가져다가 썼다. 이를 알고 아버지가 심히 노하였다. 아버지는 아들 프란체스코가 완전히 정신이상이 생긴줄 알고 슬퍼하였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의 진노를 피하여 어떤 동굴에 들어가 은신하였다. 아버지는 아씨시의 주교를 찾아가 자기 아들의 이상한 행동과 재물을 팔아 마음대로 사용한데 대하여 꾸짖고 설득하여 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와 주교는 프란체스코가 기거하고 있는 동굴을 함께 찾아갔다. 아버지를 본 프란체스코는 자기의 겉옷을 찢어 내보이며 ‘이것이 소자가 가진 유일한 재산이오니 이것이라도 받으시고 용서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했다. 놀란 주교는 자기의 겉옷을 벗어 프란체스코에게 입혀주었다. 아버지는 아들 프란체스코의 마음을 돌릴수가 없었다. 프란체스코는 아버지로부터 아무런 상속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프란치스코: 프란시스)기념 교회


그는 이런 것에는 개의치 않고 그때로부터는 작은 골방에 들어가 새로운 신앙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갈색의 조악한 겉옷을 입었으며 밧줄로 만든 허리띠를 둘렀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프란체스코를 따르기 위해 찾아왔다. 이들은 프란체스코의 온화하고 기쁨에 넘쳐 있는 얼굴 모습, 겸손한 태도, 속박 당하지 않은 생활에 마음이 끌렸다. 프란체스코와 이들 젊은이들은 경건한 수도사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다. 프란체스코는 부모의 주선에 의해 아씨시-페루지아 전투가 끝난후 결혼한 일이 있다. 그러나 그 결혼은 오로지 상징적이었다. 프란체스코는 신앙의 수행을 위해 가정을 부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였기 때문에 육체적 욕망에서 자유스러울수 없었다. 프란체스코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겨울에는 벌거벗은채 몸을 눈위에 굴려 욕정을 잊고자 했으며 봄에는 장미꽃 나무에 몸을 던져 가시에 찔리도록했다. 가시에 찔린 몸에서 피방울이 떨어지는 곳마다 장미꽃 나무의 싹이 돋아났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상에서 받으신 상처를 성령의 역사로 그대로 받는 성 프란체스코


프란체스코는 프란체스코 성회를 창설한 인물로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방지거회라고 불렀던 수도회였다. 프란체스코 성회에 가입하자면 우선 자기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 하고 음식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어먹어야 했다. 이들의 신조는 사랑과 인내였다. 프란체스코는 여러 기적을 보여주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새들에게 설교하는 것일 것이다. 설교가 끝나면 새들은 설교말씀을 알아들었다는 의미로 하늘 높이 십자가 형태로 날아다녔다. 프란체스코는 야생의 짐승들을 그리스도의 사랑 안으로 데려오기 위해 노력했다. 구비오(Gubbio)마을에서 못된 행동을 하던 늑대를 교화시켜 순종토록 한 것은 유명한 에피소드였다. 그의 만물에 대한 인식과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불꽃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촛불을 불어 끄지도 않았다. 참 대단하다.


40일간의 금식을 마치자 그의 손발에는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겪으신 그대로 못자국이 뚜렷하게 인침을 받았다. 이같은 성흔은 그가 세상을 떠날때까지 지워지지 않았다. 오랜후에 그의 무덤을 열게 되었다. 프란체스코의 시신은 생전처럼 반듯하게 서 있었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프란체스코와 관련된 그림으로는 그가 성흔을 받는 모습이 가장 많이 있다. 이밖에도 짐승들에게 설교하는 모습, 해골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등이 있다.

 

 엘 그레코가 그린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