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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후의 고향비

정준극 2007. 8. 16. 16:18

허황후의 고향비

駕洛國 始祖 首露王妃 許王后 遺墟地


나는 21세기가 문을 연 2000년 2월에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주관하는 회의가 있어서 인도 뭄바이를 방문했었다. 회의 장소는 주후 비치(Juhu Beach)에 있는 시티즌 호텔이었다. 어느날 아침에 신문을 보니 김해시에서 시장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김해 상공인 대표단, 그리고 김해 지역 언론인 등 약 30명이 인도 북부에 있는 아요디야시를 방문했다는 기사가 있었다. 김해시와 아요디야시간의 경제, 문화 협력을 다지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김해 김씨의 외가'인 아요디야시는 이들 김해시의 사절단이 방문하는 날 모든 학교를 휴교하고 상점들이 철시하였으며 일반 시민들과 학생들이 연도에 각종 깃발과 꽃다발을 들고 도열하여 열열히 환영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대대적인 환영이 아닐수 없었다. 아요디야라는 작은 도시가 왜 그렇게도 김해시 사람들을 환영하였을까?  가락국 김수로왕의 왕비 허씨가 인도 여인이었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전설이며 허황후의 고향이 바로 인도 동북부 아요디야시(Ayodhiya市)라고 한다. 그러므로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즉 김해 김씨, 김해 허씨, 그리고 인천 이씨까지 보면 이들의 외가가 바로 인도의 아요디야시인 것이다. 아요디야시 출신의 허황후는 어느날 뜻한바 있어서 배를 타고 가락국까지 왔으며 이어 천생배필을 찾고 있던 김수로왕과 결혼하여 자녀들을 여럿이나 두었다고 한다. 그로인하여 아요디야에는 허황후비가 세워져 있으며 후손들인 김해 김씨, 김해 허씨, 인천 이씨 일행이 해마다 찾아가 참배하고 있다고 한다. 인도와 우리나라의 묘한 인연이다.

 

아요디야시의 중심가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서기 48년 김수로왕이 김해 앞바다에 표착한 아유타국의 여인 허황옥을 맞아 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에 대한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 나중에 사학자들은 김수로왕과 허황후가 아홉 아들을 두었으며 그중 첫 아들은 태자로서 수로왕에 이어 가락국의 왕좌에 올랐고 둘째 아들은 허씨의 가문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허씨로 성을 바꾸어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었고 나머지 일곱 아들들은 가야산을 중심으로 산속에 들어가 절들을 창건하고 부처님의 도를 전파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각각 왕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오래전부터 과연 허황후가 유래하였다는 아유타국은 어디에 있었으며 그 먼 타국에서 어떤 사연과 경로로 김해 앞바다까지 흘러왔는지를 살피는 역사 대탐험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져 왔었다. 그중에서도 앞장서서 헤쳐나간 사람이 고고학자인 김병모(金秉模) 교수이다. 김교수는 30년이란 세월을 허황후 추적에 헌신하여 마침내 인도 동남부의 아요디아에서 허황후의 뿌리를 찾아내고 그곳에 허황후 고향비(故鄕碑)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김수로왕과 허황후 초상화


김교수는 인도의 옛 지도를 살펴 역사속의 아유타국이 현재 인도 남동쪽 아요디아임을 확인했다. 김교수는 아요디아국이 1세기에 북방 월지족(月氏族)의 지배를 받으면서 지배층은 쫓겨나 중국 서남 고원지대를 거쳐 사천지방인 촉(蜀)나라에 정착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이어 허황후의 김해 능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릉’이라 쓰인 것에 착안하여 허황후가 보주란 곳과 연관이 있다고 추적하였고 결과, 보주가 중국 사천성 안악현(安岳縣)임을 알아냈다. 아요디아국 사람들은 그곳에서 심국유사에 기록된 서기 48년의 바로 전해에 반란을 일으켜 다시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으며 그 반란을 주모한 가성(家姓)이 허씨라는 것도 후대 기록에서 확인했다.

 


김수로왕의 능(경남 김해시 서상동)

 

그리하여 얼굴이 까무잡잡한 인도 소녀인 허황옥은 실은 인도에서부터 직접 김해로 온것이 아니라 오빠와 더불어 중국 안악현에 왔다가 다시 그곳으로부터 장강을 타고 삼협을 거쳐 황해로 나와 김해 앞바다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허황옥과 오빠 일행은 한족의 핍박을 피하여 황해를 떠돌다 우리나라 남해에 다다른 보트 피플이었던 것이다. 이 허황후의 이동 지역, 즉 인도 아요디아국-중국 보주-한반도의 김해를 꿰는 문화의 공통분모로 김 교수는 물고기 두 마리가 마주 보고 있는 쌍어 신앙을 들었다. 인도 아요디아의 사원이나 풍물에 쌍어가 흔하였음이 파악되었고 중국 보주에서도 그같은 문화가 확인되었으며 김해 수로왕릉의 정문에도 이 천축문화인 쌍어가 새겨져 있음은 바로 그러한 연유라는 것이다. 허황후의 오라버니는 불심이 돈독한 장유화상(長遊和尙)이었다고 한다. 그가 세웠다는 은하사(銀河寺)에서도 두 쌍의 쌍어를 찾아볼수 있음은 우연만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실상이다. 한편, 언어학자로부터 가락이라는 말이 고대 인도에서 물고기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이 허황후의 궤적을 문화적으로도 입증한 셈이다.

 

김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쌍어문


이같은 역사궤적을 확인하는 연구결과가 한국유전체학회에 보고됐다. 곧 허황후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왕족 유골에서 북방계가 아닌 남방계 DNA를 추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역사 속으로의 궤적이나 유전질 탐험이 필요한 사항이 비일비재한데도 방치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통감케 하는 장거가 아닐수 없다.

 

김수로왕릉 입구. 허왕후는 189년 3월 1일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사단법인 경남문화연구원에 의하면 가락국 건국 7년째인 서기 48년(단기 2381년) 음력 7월 27일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당시 16세)이 하늘의 명을 받아 2만 5천리의 바닷길을 건너 수로왕에게 시집오면서 오늘날의 김해에 도착하여 명월산의 만전(장막)에서 가락국에서의 첫날을 지낸후 장유치고개(지금의 태정고개)를 넘어 가서 마침 마중나온 수로왕과 만났는데 두사람은 유궁(휘장을 친 임시궁궐)에서 이틀밤을 지낸후 8월 초하루에 가락국 궁성으로 돌아갔으며 그후 왕후로서 처신을 잘하며 지냈다고 한다. 수로왕의 7대손인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은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난 곳에 왕후사(王后寺)라는 절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아 볼수 없다고 한다.

 

가락국 수로왕비 보주태후 허씨릉 비석

 

다음은 김해시청 홈페이지에 수록된 수로왕비능에 대한 내용을 퍼와서 전재한 것이다.

 

수로왕비능은 김해시 구산동(龜山洞)에 있는 가야시대의 능묘로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왕비 허왕후의 왕비릉(王妃陵-국가사적 제 74호)이 바로 그것이다. 대형의 원형 토분이며 특별한 시설은 없다. 능의 전면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고 주위에는 범위를 넓게 잡아 얕은 돌담을 둘렀다. 능 앞에는 1647년(인조 25) 수축 때 세운 '가락국수로왕비 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 普州太后許氏陵 )'이라고 2행으로 각자(刻字)한 능비가 있다. 허왕후가 배를 타고 시집 올때 바람과 풍랑을 잠재웠다는 유래가 얽힌 파사석탑(婆娑石塔)이 흥미롭다. 허왕후는 세상을 떠나기 직전 열 아들 중 두 아들에게 자신의 성인 허씨를 따르게 하여 김해 허씨 성이 유래되었고, 그로 인해 김해 김씨와 허씨는 혼인이 금지되어 왔다고 한다.


허왕후의 등장은 앞선 철기문화로 세계와 교류했다는 가야의 모습을 더욱 신비롭게 만든다. 『삼국유사』에는 이 일에 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48년 7월 27일에 신하들이 수로왕에게 왕비를 얻을 것을 청한다. 그러자 왕은 "내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하늘의 명이었다. 나의 배필도 역시 하늘이 명할 것이니 염려 말라." 라고 답하며 해안 쪽으로 사람들 보낸다. 그때 갑자기 붉은 돛과 붉은 기를 휘날리며 한척의 배가 다가온다. 왕은 신하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려 하지만 배 안의 왕비는 모르는 이를 따라 갈 수 없다 한다. 그러자 왕은 대궐 밖에 장막을 치고 기다린다. 왕비도 배를 대고 육지로 올라 자기가 입고 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에게 바친다.


왕비가 여러 사람들과 보화를 가지고 행궁으로 다가가니 왕은 그녀를 맞이한다. 그리고 가야에 오게 된 연유를 이야기 한다. 자신은 아유타국의 공주인 허황옥인데 부모님들께서 꿈에 상제님을 보았는데 '가락국왕 수로는 하늘에서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했으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공주를 보내라'라고 하여 가락국으로 오게 된 사연과 배를 타고 오다 수신의 노함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다시 돌아가 파사석탑을 배에 싣고 무사히 여기에 도착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후 허황후는 189년 1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왕의 곁에서 내조를 다했다. 백성들은 왕비를 잊지 못해 왕비가 처음 배에서 내린 나룻가의 마을을 주포촌(主浦村), 비단 바지를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 붉은 깃발이 들어왔던 해변을 기출변(旗出邊)이라고 했다. 또 가락국의 질지왕은 452년 왕과 왕비가 혼례를 치른 곳에 왕후사(王后寺)를 세워 명복을 빌었다.』


 허황후와 기념상. 인도에서는 허황후를 수리라트나(Suriratna)라고 칭한다. 아유타 왕국의 공주이다. 현재의 아요디야의 옛 이름이 아유타였다. 아요디야는 2천년 전에는 사케타라는 이름의 도시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아유타를 아요다(Ayodha)라고 기술해 놓았다고 한다. 허황후의 기념상, 즉 수리가트나 왕비의 기념상은 아요드야의 사케트 티르스 여트리 켄드라라는 곳에 있다.


허황후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쌍어문(雙漁文)이다. 가락국의 국장(國章)이자 신앙의 상징으로 사용된 쌍어문은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이 물고기가 인간을 보호하는 영특한 존재로 여겨 사용하던 문장이다. 이후 인도에 전파되고, 힌두교의 여러 신상(神像)중에 하나가 되어 널리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쌍어문이 가락국의 국장이 된 것은 허왕후가 이 땅에 시집오며 소개한 신앙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장유화상이 허왕후의 오라버니라면 아유타국의 왕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때문에 장유화상의 가락국 도착은 인도 신앙 내지는 인도종교가 한국에 도착한 중요한 증거가 된다. 지금도 가야의 옛땅이었던 경남의 여러 불교사원에는 쌍어문이 남아있다. 김해의 은하사, 계원암, 합천의 영암사에 쌍어문이 그림이나 조각으로 남아 있다. 쌍어신앙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선비들이 사용하던 묵(墨)에도 그려지고, 여인네들의 노리개에도 달리게 되었다. 이천년 전 한 여인의 국제결혼이 이렇게 지금까지도 우리문화속에 살아 숨쉬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다음은 허왕후 유허지에 대한 설명을 가락중앙종친회 등에서 기록으로 남겨 놓은 것이다.

 

 

駕洛國 始祖 首露王妃 許王后 遺墟地  

 

이곳은 韓國의 古代國家의 하나인 駕洛國의 始祖 首露王의 王妃 許王后께서 태어나신 곳이다. 韓國의 古代 歷史書인 『三國遺事』에 의하면 許王后는 印度의 阿踰陁國의 公主로 天神의 啓示를 받은 父王의 命을 받들어 수만리 바다를 헤치고 韓半島 南部의 駕洛國으로 건너가 首露王과 婚姻하였다고 한다. 7世紀경에 韓半島를 最初로 統一한 名將 金庾信 將軍은 바로 그분의 後裔이며, 오늘날 大韓民國 金大中 大統領과 金鍾泌 國務總理를 비롯하여 무려 6백여만명의 인구를 가진 韓國의 大姓 金海金氏와 許氏 仁川李氏는 모두 許王后의 피를 이어받은 後孫들이다.

우리는 印度와 韓國의 歷史的 親近關係를 널리 알리는 한편 앞으로 兩國間의 友好關係가 더욱 發展하기를 祈願하며 由緖깊은 이곳에 6백만 後孫들이 精誠을 모아 이 記念碑를 세운다.

 

                                                                                             2000. 1. 1

 

駕洛中央宗親會 事務總長 金時佑 謹撰

大韓民國 駕洛中央宗親會 會長

國會副議長 金琫鎬 外 宗員 一同 謹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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神魚사상, 메소포타미아서 인도·중국 거쳐 한국 유입

쌍어는 신을 보호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있는 신어(神魚)라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이런 사상이 인도와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런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동한 흔적이 세계 곳곳에 쌍어문이나 쌍어에 얽힌 이야기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그렇고, 간다라로 알려진 파키스탄의 페샤와르 지역에서 흔하다는 쌍어문으로 장식한 버스며 트럭이 그렇다고 한다. 떡시루에 북어 두 마리를 걸쳐 놓는 우리의 고사 풍습도 신어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김씨 문중의 어르신들은 얼마전까지 쌍어문을 신어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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