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1

1. 비엔나 슈타츠오퍼 (Wiener Staatsoper: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정준극 2007. 9. 3. 10:52

1. 비엔나 슈타츠오퍼 (Wiener Staatsoper: 비엔나 국립오페라극장)
   Vienna State Opera

 

 

밤의 슈타츠오퍼

 

오늘날 비엔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는 세계 최고 수준, 최고 품격의 오페라를 공연하는 극장으로 정평이 나 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는 세계 모든 오페라 예술가들의 열망이 담겨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세계 유명 오페라하우스의 첫 번째를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찾아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비엔나 국립오페라 극장은 1869년 5월 25일 처음 문을 열었다. 다른 나라의 유명 오페라극장보다 늦게 개장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 로나허(Ronacher)극장 등이 비엔나의 오페라 무대를 이끌어 나갔었다. 제국의 영화를 과시하고 싶었던 1850년대의 합스부르크 왕가는 비엔나 구시가지를 둘러싼 성벽을 허물고 이곳에 넓은 길과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는 링슈트라쎄(Ring Strasse)를 창조하였다. 링슈트라쎄라고 이름을 붙인 것은 새로 만든 대로가 비엔나의 중심지를 둥근 반지처럼 둘러싸고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기 때문이다. 유럽의 대부분 도시가 그렇듯 비엔나의 센터에도 성당과 오페라 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링슈트라쎄를 건설한 합스부르크 왕가가 거리의 가장 중심되는 장소에 국립오페라를 건설키로 한 것은 당연한 결정이었다. 국립오페라는 성슈테판 성당과 함께 비엔나 시내의 가장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슈타츠오퍼

 

1860년 설계공모가 있었다. 2명의 당대 건축가가 공동으로 건설사업을 맡았다. 에두아르트 반 데어 뉠(Eduard van der Nüll)과 아우구스트 폰 지카르트부르크(August von Siccardsburg)였다. 불행하게도 두 사람 모두 슈타츠오퍼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슈타츠오퍼는 완공되기 전부터 설계를 가지고 대단한 논란이 있었다. 무대가 너무 깊다는 논란에서부터 휴게실이 너무 넓고 화려하다느니 등의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외관에 대하여도 말이 많았다. 오페라극장으로서 너무 덤덤하다는 얘기였다. 설계자 중의 한 사람인 뉠은 이같은 지나친 논란에 견디지 못하고 결국 자살했다. 또 한사람의 설계자인 지카르트부르크는 그로부터 2개월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설사업은 진행되어 1869년 5월 25일, 드디어 역사적인 개관이 있었다. 당시에는 비엔나 슈타츠오퍼(국립오페라)라고 부르지 않고 비엔나궁정오페라(K. und K. Hofoper)라고 불렀다. 1920년까지 그렇게 불렀다. 개관 기념을 무대에 올린 작품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였다. ‘돈 조반니’는 일찍이 1787년 10월, 프라하에서 초연되었고 이듬해에는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궁정극장)에서 선보였던 일이 있다. 그로부터 80여년후 비엔나에 세계적 규모의 슈타츠오퍼가 오픈하게 되자 비엔나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다시한번 무대에 올림으로서 모차르트와 비엔나에 대한 자부심을 드높였다. 

 

슈타츠오퍼의 계단

                           

슈타츠오퍼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1백년 이상의 연혁을 거치면서 빛나는 전통으로 자존심을 키워왔다. 구스타브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칼 뵘(Karl Böhm),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같은 거장들이 슈타츠오퍼의 음악총감독을 맡음으로서 빛나는 전통을 이어 갔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오페라 로엔그린을 직접 지휘하였으며 베르디도 그의 아이다 비엔나 초연을 이 극장에서 직접 지휘했다. 알반 베르크의 보체크 초연은 1930년 작곡가 자신이 참석한 가운데 있었다.

 

 19세기 초반 비엔나 슈타츠오퍼 앞길의 모습

 

2006년 현재의 음악감독은 일본 출신의 오사와 세이지(Osawa Seiji)이다. 그동안 슈타츠오퍼를 거쳐간 음악감독으로는 한스 리히터(Hans Richter), 펠릭스 봐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클레멘스 클라우스(Klemems Krauss),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브루노 발터(Bruno Walter),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칼 뵘(Karl Böhm), 에리히 클라이버(Erich Kleiber), 에른스트 안데르메(Ernst Ansermet), 프릿츠 라이너(Fritz Reiner),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 피엘 몽토(Pierre Monteaux), 라파엘 쿠벨리크(Rafael Kubelik), 안탈 도라티(Antal Dorati),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툴리오 세라핀(Tullio Serafin),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Dmitri Mitropoulos), 로베르트 슈톨츠(Robert Stolz), 로린 마아젤(Lorin Maazel), 주빈 메타(Zubin Metha), 카를로스 클라이버(Carlos Kleiber), 레오나드 번슈타인(Leonard Bernstein), 리카르도 무티(Riccardo Mutti), 에리히 라인스도르프(Erichj Reinsdorf), 게ㄹ오르그 솔티(Georg Solti), 주세페 시노폴리(Giuseppe Sinopoli),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콜린 데이비스(Colin Davis) 등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세계 최대의 지휘자, 작곡가 있다. 이것만 보아도 비엔나 슈타츠오퍼가 얼마나 음악의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하였는지를 알수 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입장권을 사기 위해 극장안에서 밤샘하는 사람들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는 슈타츠오퍼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 넣어준 위대한 인물이었다. 말러는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으로 있는 기간에 세계적인 성악가들을 무대에 서도록 하는 노력을 기울여 슈타츠오퍼의 무대를 세계 일류로 만드는데 공헌했다. 안나-밀덴부르크, 셀마 쿠르츠, 레오 슬레자크등은 말러가 기용한 세계적 성악가였다. 말러는 무대장치에 있어서도 변혁을 기하였다. 과거의 화려하고 복잡한 무대를 탈피하고 유겐트슈틸(Jugendstil) 취향의 단순하고 의미 있는 장식을 시도하였다. 말러는 또한 공연 도중 조명을 조절하는 시도도 하였다. 그때까지의 무대 조명은 무조건 밝게 하는 것이었다. 말러는 어두운 조명개념을 도입하였다. 관중들은 조명을 어둡게 하자 별로 환영하지 않았지만 말러의 후임자들도 필요할 때에 조명을 어둡게 하는 시도를 계속하였다.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 음악감독이 되자 그는 객원 성악가들을 활용하여 세계에 문호를 개방하였다. 슈타츠오퍼의 회랑(Feyer)에는 모차르트의 ‘마적’을 기념하는 여러 개의 대형 타페스트리가 걸려 있다. 2층 복도 한편에 있는 구스타브 말러의 두상은 로댕의 작품이다. 

 

슈타츠오퍼의 오디토리엄

                    

1945년 3월 12일 네오-로만틱 스타일의 슈타츠오퍼는 연합군의 집중 포격을 받아 파손되었다. 무대장치와 무대의상들도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120편의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는 무대장치가 소실되었으며 15만벌이나 되는 무대의상이 잿더미가 되었다. 이후 슈타츠오퍼는 재건될 때까지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과 폭스오퍼(Volksoper)에 임시본부를 두고 재건에 몰두하였다. 전후의 비엔나는 산적해 있는 복구사업중에서 슈타츠오퍼의 재건을 가장 우선으로 정하여 추진하였다. 그로부터 10년후인 1955년 11월 5일 슈타츠오퍼는 과거의 모습대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베토벤의 ‘휘델리오’가 재개관 기념으로 공연되었다. 오스트리아가 자유와 주권을 얻었음을 상기시키는 공연이었다.  칼 뵘이 지휘하였다.

 

베토벤의 오페라 휘델리오의 한 장면

               

Ash Wednesday(참회의 수요일: 봉재수일)부터 Easter Eve(부활절 전야)까지의 40일 사순절(四旬節)이 시작되기 전의 마지막 목요일, 슈타츠오퍼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른발(Opernball: 오페라 극장에서의 무도회)이 열린다. 이때에는 스테이지와 객석을 터서 하나의 커다란 홀로 만든다. 슈타츠오퍼의 무도회를 계기로 비엔나의 무도회가 시작된다. 비엔나의 카니발(화싱. Fasching)은 ‘참회의 수요일’의 헤링슈마우스(Herringsschumanus: 청어잔치)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예전에는 청어를 비엔나축제의 필수음식으로 삼았었다.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의 연례 오페라무도회(Opernb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