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1

5. 런던 왕립오페라하우스(The Royal Opera House)

정준극 2007. 9. 3. 11:04
5. 런던 왕립오페라하우스(The Royal Opera House) -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Covent Garden)

 

런던 로열오페라하우스(코벤트 가든)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하우스의 원래 이름은 왕립오페라하우스(Royal Opera House)이다. 런던의 코벤트

가든 지역에 있기 때문에 통상 코벤트 가든, 또는 간단히 가든(The Garden)이라고 친밀하게 부른다. 코벤트 가든은 영국왕립오페라단과 영국왕립발레단의 본부이다. 현재의 코벤트 가든은 1858년 에드워드 배리(Edward Barry)경이 설계하여 완성한 건물이다. 에드워드 배리경의 아버지는 테임스 강변의 의사당(빅벤 시계가 있는)을 설계한 유명한 챨스 배리경이다. 원래 코벤트 가든의 로열오페라하우스 자리에는 1732년부터 일반을 위한 작은 시민극장이 있었다. 당시 배우이자 제작자인 존 리치(John Rich)가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를 공연하여 돈을 무척 벌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하여 코벤트 가든에 있었던 작은 시민극장인 왕립극장(Theater Royal)이 탄생하였다. 개관기념 공연은 윌리엄 콘그레브(William Congreve)의 ‘세상의 길’(The Way of the World)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1백년 동안 왕립극장은 연극 중심의 극장이었다. 당시 드러리 레인(Drury Lane)에도 연극 극장이 있었다. 자연히 왕립극장과 드러리 레인극장 간에 치열한 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똑 같은 연극을 경쟁적으로 공연하는 경우도 많았다. 왕립극장은 드러리 레인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판토마임을 도입하였다. 극장주인 존 리치가 직접 판토마임 연기를 했다. 그러나 비록 판토마임이라고 해도 음악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마 영국 오페라의 효시가 아닌지 모르겠다. 왕립극장의 판토마임은 왕립극장의 주인공이 오페라로 인정을 받은 후에도 계속 진행되어 결국 1940년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었다.

 

코벤트 가든의 오디토리엄과 무대. 1800년대 그림

                          

헨델은 존 리치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존 리치가 코벤트 가든 지역에 왕립극장을 건립하기 전부터 존 리치 극장의 음악감독을 맡아했다. 존 리치와의 인연은 왕립극장(코벤트 가든)이 문을 연 이후에도 오래 동안 계속되었다. 헨델이 영국에서 첫 번째로 작곡한 오페라인 Il pastor fido(충실한 목자)와 두 번째인 Ariodante(아리오단테)가 1735년 왕립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듬해에는 Alcina(알치나)와 Atalant(아탈란트)가 초연되었다. 1743년에는 역사적인 오라토리오 메시아(Messiah)의 런던 초연이 있었다. 그 후로 메시아 연주는 왕립극장의 연례행사가 되었다. 헨델의 오페라와 오라토리오는 거의 모두 왕립극장을 위해 작곡한 것이었으며 모두 이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헨델은 그가 사용하던 오르간을 존 리치에게 기증하였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오르간은 1808년 대화재 때에 불길과 함께 사라졌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오디토리엄

                       

1년후에 복구되었다. 셰익스피어의 연극 '맥베스'가 재개관 기념으로 공연되었다. 그 후로 코벤트 가든의 왕립극장은 버라이어티 쇼의 무대였다. 특히 위대한 판토마임 광대인 조셉 그리말디(Joseph Grimaldi: The Garrick of Clowns)의 Harlequin and Mother Goose(어릿광대와 마더 구스)는 대인기를 끈 작품이었다. 당시 판토마임(무언극)에는 음악 반주가 곁들이는 것이 일반이었다. 판토마임이지만 주역 배우가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누구나 잘 아는 대중적인 노래였다. 그러면 관중들도 흥이 나서 따라 불렀다. 이렇게 하여 영국 극장의 무대에서 배우가 힘차게 노래하면 객석에서 관중들이 합창으로 따라 부르는 전통이 생겼고 그 전통은 오늘날에도 지속되어서 예를 들어서 년례의 '프롬스' 연주회가 열릴 때에도 무대 위의 성악가가 부르는 노래를 관중들이 따라 부른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 코벤트 가든

                  

1856년 코벤트 가든의 왕립극장은 화재로 또 다시 파손 되었다. 2년후인 1858년에 새롭게 복구되었다. 코벤트 가든의 현재 모습은 이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내부의 색조는 크림색이 주종을 이루며 여기에 금색과 붉은 색을 사용하여 격조 있는 품위를 표현했다. 한편, 오디토리엄 천정은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도록 하여 고상하고 신선한 느낌을 갖도록 했다. 그러나 그러한 색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코벤트 가든이 그리스 양식의 건물로 재출범하였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이었다. 도리안식의 원주들이 건물의 중후함을 더해 주도록 했다. 건물의 양편에 자리잡고 있는 그리스신상은 이 건물이 예술의 전당임을 대변해 주도록 했다.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Les Huguenots)가 재개관 기념으로 공연되었다. 코벤트 가든은 개관이후 ‘이탈리아 오페라하우스’라고 부를 정도로 이탈리아 오페라가 주축을 이루며 공연되었다. 그러한 이탈리아 전통 때문인지 프랑스어로 된 오페라가 공연될 경우에도 대사를 이탈리아어로 고쳐서 공연토록 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어이없는 일이었다. 마이에르베르의 '위그노'(Les Huguenots)가 코벤트 가든에서 런던 초연을 가질 때에도 대사를 이탈리아어로 번역되었음은 물론이었다. 이러한 관습은 20세기 초까지 계속되다가 마감되었다. 오늘날에는 어느 나라 언어로 공연하든 관계가 없게 되었다. ]

 

로열 오페라 하우스 무대

                 

왕립극장이 현재의 명칭인 로열오페라하우스로 변경된 것은 1892년이었다. 로열오페라하우스는 1차대전중 가구보관소로 사용되었으며 2차대전중에는 댄스홀로 이용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코벤트 가든은 로열오페라하우스로서 1946년 다시 문을 열었다. 발레작품인 차이코브스키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기념으로 공연되었다. 영국의 오페라가 이제로부터 잠에서 깨어남을 의미했다.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오페라 공연이 이루어졌다. '카르멘'의 영국 초연은 코벤트 가든이 본격 오페라극장으로 재출발하는 신호였다. 코벤트 가든은 1996년부터 2000년까지 대대적인 현대화 보수를 거쳤다. 좌석도 2,268석으로 확장하였다. 코벤트 가든은 왕립발레단의 공연장소로도 유명하다. 1946년 퍼셀의 The Fairy-Queen(요정의 여왕)이 발레로 공연된 것은 코벤트 가든의 발레 역사에서 중요한 이정표였다.

 

로열 오페라 하우스의 철구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