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1

2. 밀라노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

정준극 2007. 9. 3. 10:54

2. 밀라노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
   라 스칼라(La Scala)

 

라 스칼라의 밤


라 스칼라(La Scala)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밀라노의 스칼라극장(Teatro alla Scala)은 세계 오페라인들의 영원한 메카이다. 오페라 애호가들로서 라 스칼라를 순례하는 것은 마치 기독교인들이 성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 스칼라는 모든 오페라 예술가들의 등용문이다. 지난 세기에 수많은 오페라 성악가들이 라 스칼라를 통하여 세계적인 디바와 디보로서 발돋음 하였다. 작곡가, 지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작곡가와 지휘자들이 라 스칼라를 통하여 출세하였다. 라 스칼라는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오페라-발레 극장에 불과하지만 오페라극장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국민들의 애국정신이 응축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이 극장에서 초연된 베르디의 Nabucco(나부코)와 Un Ballo in Maschera(가면무도회)는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라 스칼라는 2차대전중인 1943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후 이탈리아 정부와 밀라노시는 파괴된 밀라노를 재건할 때에 모든 것에 우선하여 라 스칼라의 재건부터 전념하였다. 밀라노의 전시민이 힘을 합쳤으며 나아가 이탈리아 전국민들의 성원을 입은 재건이었다. 복구는 신속하여서 라 스칼라는 2차 대전이 끝난 이듬해에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사람들은 라 스칼라의 재건을 참혹한 전쟁과 무솔리니 정권의 공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쁨으로 승화시켰다.

 

라 스칼라에서의 '라 트라비아타'

 

라 스칼라의 전신은 레지오 두칼레 극장(Teatro Regio Ducale)이다. 밀라노공국의 공식극장으로서 사용되었던 곳이다. 레지오 두칼레 극장은 1776년 화재가 일어나 상당 부분이 소실되었다. 카니발이 끝나는 날 뜻하지 아니한 화재가 일어났던 것이다. 역시 자나깨나 불조심!! 밀라노공국의 90명 부호들은 당시 합스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에게 극장 신축을 신청했다. 당시 밀리노공국을 비롯한 북부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에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승인하였다. 당대의 건축가 주세페 피에르마리니(Giuseppe Piermarini)에게 새로운 오페라 극장의 설계가 맡겨졌다. 다만, 불이 났던 종전의 레지오 두칼레 극장은 협소하므로 기왕이면 가까운 곳에 대지를 마련하여 규모가 큰 극장을 새로 짓도록 했다. 밀라노시는 레지오 두칼레 극장의 인근에 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스칼라(Santa Maria della Scala)라는 오래된 성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극장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스칼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탈리아어에서 스칼라라는 단어는 사다리를 말한다. 야곱이 하늘로부터 사다리를 타고 내려온 천사들과 밤새 씨름하였다는 바로 그 사다리이다. 그로부터 2년후인 1778년 새로운 모습의 극장이 문을 열게 되었다. 이탈라이에서 가장 넓은 무대를 가진 극장이었다.  좌석수도 당시 유럽에서는 가장 많은 3,000이었다. 참으로 신통한 것은 1층 객석에는 의자를 두지 않고 모두 서서 관람토록 설계했다는 것이다. 오케스트라 피트도 무대 아래에 마련되지 않고 무대 앞에 자리잡도록 되어 있었다. 그건 당시의 관습이었다. 1층과 박스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차지였다. 돈 없는 사람들은 천정에 가까운 꼭대기에서 관람해야 했다. 이를 로지오네(Loggione: Loge)라고 불렀다. 그러나 돈 없는 서민들은 꼭대기의 로지오네나 갤러리에 올라가 관람하면서도 마음은 풍요로웠다. 돈 많은 부자들이나 권세있는 귀족들보다 천국에 가깝게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의 갤러리라는 단어는 천국을 의미하기도 한다. 또 한가지 웃기는 것은 라 스칼라의 회랑(Foyer)이 상당기간 도박장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이다.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심심하면 나와서 돈내기 도박도 할수 있는 것이 당시 오페라극장에서의 관습이었다. 물론 도박만 전문으로 하기 위해 오페라극장을 찾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라 스칼라의 오디토리엄

 

새로 지은 극장은 처음에 신레지오두칼레극장(Nuovo Teatro Regio Ducale)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얼마후부터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라고 부르게 되었다. 라 스칼라의 외관은 유럽의 내노라하는 다른 오페라 하우스에 비해 상당히 단순한 모습을 하고 있다. 건물 내부의 바닥도 대리석이 아닌 평범한 화감암을 사용했다. 멋을 부린 곳은 현관쪽의 단단한 석재 기둥, 그리고 밖으로 튀어나오도록 설계한 창문 정도이다. 불이 나더라도 다시는 전소되지 않도록 한다는 생각으로 돌을 써서 단단히 지은 것이다.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상당히 화려하다. 붉은 색과 황금색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고급스러워 보이는 내부였다. 그랜드 오프닝 기념 공연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L'Europa Riconsciuta(모습을 드러낸 에우로파)이라는 작품이었다. 아제노레(Agenore)왕국의 에우로페(Europe) 공주에 대한 사랑 이야기이지만 합스부르크가 유럽의 중심이 되어 유럽을 계몽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오페라였다. 그로부터 라 스칼라는 1943년 전쟁 중에 폭격으로 파손되기까지 무려 167년동안 유럽 오페라의 중심 역할을 하며 당당하게 버텨왔다. 2차대전으로 파손된 라 스칼라는 그 옛날 화재로 손상되자 시당국과 시유지들이 발벗고 나서서 재건하였던 것 처럼 모두 손을 걷어 부치고 복구에 전념하였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다. 1946년 초의 재개관 기념음악회는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이었다. 거장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한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의 독창회였다. 테발디가 세계 최고의 프리마 돈나로 인정받은 음악회였다. 

 

19세기 라 스칼라의 공연. 그림

 

라 스칼라에서 역사적인 초연을 가진 작품은 헤아릴수 없이 많다. 베르디의 나부코, 돈 카를로, 오텔로, 활슈타프 등등! 실로 베르디는 라 스칼라와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러나 베르디는 한때 그의 오페라를 라 스칼라에서 공연하는 것을 거부한 일이 있다. 오케스트라가 제멋대로 음악을 고쳐서 연주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때에 베르디는 자기의 음악이 라 스칼라의 오케스트라 때문에 ‘부패해졌다’고 표현했다. 그러나 베르디는 1874년 그의 '진혼곡'(레퀴엠)의 초연을 직접 지휘하여 라 스칼라와의 불편한 관계를 마감했다. 베르디로서도 라 스칼라를 떠나서는 살수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베르디는 나아가 1886년 오텔로를 라 스칼라에서 초연토록 양해했다. 베르디의 마지막 작품인 활슈타프도 라 스칼라에서 초연되었다. 푸치니의 투란도트도 라 스칼라에서 세계 초연되었다. 라 스칼라는 2002년 9월부터 2004년 11월까지 새단장을 위해 휴관하였다. 무대가 완전히 새롭게 보수되었다. 새단장한 라 스칼라의 기념공연은 그 옛날을 기억하여서 살리에리의 '모습을 드러낸 에우로파'(L'Europa riconosciuta)였다. 라 스칼라는 오늘도 세계 오페라인들이 메카로서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라 스칼라 오페라박물관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라 스칼라)에서 세계 초연된 오페라들[1778-2007 현재]

 

○ 1778: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의 '에우로파 리코노스키우타'(Europa riconosciuta: 모습을 드러낸 에우로파) - Europe Revealed

○ 1779: 요세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ček: 1737-1781 체코)의 '아르미다'(Armida)

○ 1794: 마르코스 포르투갈(Marcos Portugal)의 '데모폰테'(Demofoonte)

○ 1800: 마르코스 포르투갈(Marcos Portugal)의 '이단테'(Idante) 또는 '에카테의 희생'(I sacrifici d'Ecate)

○ 1812: 조아키노 로시니의 '시금석'(La pietra del paraone)

○ 1813: 조아키노 로시니의 '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Aureliano in Palmira)

○ 1814: 조아키노 로시니의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 


'이탈리아의 터키인'


○ 1817: 조아키노 로시니의 '도둑까치'(La gazza ladra)

○ 1819: 조아키노 로시니의 '비안카와 활리에로'(Bianca e Falliero) 또는 '세 자문원'(Il consiglio dei tre)

○ 1820: 자코모 마이에르베르의 '앙주의 마르게리타'(Margherita d'Anjou)

○ 1821: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1795-1870)의 '엘리사와 클라우디오'(Elisa e Claudio) 또는 '우정으로 완성된 애정'(L'amore protetto dall'amicizia)

○ 1822: 자코모 마이에르베르의 '그라나다 추방'(L'esule di Granada)

○ 1827: 빈첸조 벨리니의 '해적'(Il pirata)

○ 1829: 빈첸조 벨리니의 '이방인'(La straniera) - 낯선 여인

○ 1831: 빈첸조 벨리니의 '노르마'(Norma)

○ 1832: 게타노 도니체티의 '파리지의 백작 우고'(Ugo, conte di Parigi)

○ 1833: 게타노 도니체티의 '루크레지아 보르지아'(Lucrezia Borgia)

○ 1835: 게타노 도니체티의 '마리아 스투아르다'(Maria Stuarda)

○ 1836: 니콜라 바카이(Nicola Vaccai: 1790-1848)의 '조반나 그레이'(Giovanna Gray)

○ 1837: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1795-1870)의 '약속'(Il giuramento)

○ 1839: 게타노 도니체티의 '파리지의 자니'(Gianni di Parigi)

○ 1839: 주세페 베르디의 '오베르토, 산 보니파치오 백작'(Oberto, conte di San Banifacio)

○ 1840: 주세페 베르디의 '왕궁의 하루'(Un giorno di regno)

○ 1841: 게타노 도니체티의 '마리아 파디야'(Maria Padilla)

○ 1842: 주세페 베르디의 '나부코'(Nabucco)


라 스칼라에서의 '나부코'


○ 1843: 주세페 베르디의 '첫 십자군의 롬바르디인'(I Lobardi alla prima corciata)

○ 1845: 주세페 베르디의 '조반나 다르코'(Giovanna d'Arco)

○ 1868: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의 '메피스토펠레'(Mefistofele)

○ 1870: 안토니오 카를로스 고메스(Antonio Carlos Gomes)의 '일 과라니'(Il Guarani)

○ 1873: 안토니오 카를로스 고메스(Antonio Carlos Gomes)의 '포스카'(Fosca)

○ 1874: 아밀카레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의 '리투아니아인'(I Lituani)

○ 1876: 아밀카레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의 '라 조콘다'(La Gioconda)

○ 1879: 안토니오 카를로스 고메스(Antonio Carlos Gomes)의 '마리아 투도르'(Maria Tudor)

○ 1881: 주세페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Simon Boccanegra) - 수정본

○ 1885: 아밀카레 폰키엘리(Amilcare Ponchielli)의 '마리온 델로르메'(Marion Delorme)

○ 1887: 주세페 베르디의 '오텔로'(Otello)

○ 1889: 자코모 푸치니의 '에드가'(Edgar)

○ 1892: 알프레도 카탈라니(Alfredo Catalani)의 '라 왈리'(La Wally)

○ 1893: 주세페 베르디의 '활슈타프'(Falstaff)

○ 1895: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실바노'(Silvano)

○ 1896: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의 '안드레아 셰니에'(Andrea Chenier)

○ 1902: 알베르토 프란케티(Alberto Franchetti: 1860-1942)의 '게르마니아'(Germania)

○ 1903: 안토니오 사마렐리아(Antonio Samareglia: 1854-1929)의 '오세아나'(Oceana)

○ 1903: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nado: 1867-1948)의 '시베리아'(Siberia)

○ 1904: 자코모 푸치니의 '나비부인'(Madama Butterfly)


'나비부인'의 라 스칼라 무대


○ 1906: 알베르토 프란케티(Alberto Franchetti: 1860-1942)의 '이오리오의 딸'(la figlia di Iorio)

○ 1907: 프란체스코 칠레아(Francesco Cilea: 1866-1950)의 '글로리아'(Gloria)

○ 1913: 피에트로 마스카니의 '파리시나'(Parisina). 1833년에 플로렌스에서 초연된 게타노 도니체티의 '파리시나'도 있음.

○ 1918: 이탈로 몬테메찌(Italo Montemezzi: 1875-1952)의 '배'(La nave)

○ 1924: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의 '네로네'(Nerono)

○ 1924: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의 '어릿광대의 만찬'(La cena delle beffe)

○ 1925: 리카드로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 1883-1944)의 '에케부의 기사'(I cavalieri di Ekebu)

○ 1926: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Turandot)

○ 1929: 움베르토 조르다노(Umberto Giordano: 1867-1948)의 '임금님'(Il re)

○ 1935: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1863-1945)의 '네로네'(Nerone)

○ 1936: 에르마노 볼프 페라리(Ermanno Wolf-Ferrari: 1876-1948)의 '작은 광장'(Il campiello)

○ 1957: 프란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의 '갈멜파 수녀의 대화'(Dialogues of the Carmelites)

○ 1958: 일데브란도 피쩨티(Ildebrando Pizzetti: 1880-1968)의 '대성당에서의 살인'(Assassinio nella cattedrale)

○ 1962: 마누엘 데 활라(Manuel de Falla: 1876-1946)의 '아틀란티다(Atlantida)

○ 1981: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의 '빛으로부터의 목요일'(Donnerstag aus Licht)

○ 1984: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빛으로부터의 토요일'(Samstag aus Licht)

○ 1988: 칼하인츠 슈토크하우젠의 '빛으로부터의 월요일'(Montag aus Licht)

○ 2007: 화비오 바키(Fabio Vacchi)의 '테네케'(Teneke)


라 스칼라에서의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