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Prague State Opera House)
Statni Opera Praha
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
프라하 국립오페라하우스는 영광과 시련의 역사를 함께 겪으면서 오늘날까지 굳건하게 자리를 지켜온 프라하의 자부심이다. 프라하 국립오페라하우스는 1945년 종전까지 신독일극장(Neues deutsches Theater)이라는 이름으로 체코 오페라의 중심적인 활동을 해 왔다. 신독일극장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오페라극장 중의 하나였다. 20세기 초반, 세계적으로 오페라의 르네상스가 일어난 때에 프라하 국립오페라하우스도 세계 오페라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이 극장의 명성은 이 극장의 무대를 거쳐간 인물들만 살펴 보아도 잘 알수 있다. 구스타프 말러, 알렉산더 쳄린스키, 조지 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엔리코 카루소, 베냐미노 질리, 릴리 레만, 마리아 예리차, 레오 슬레자크 등이 프라하 오페라하우스의 무대를 빛냈다.
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 오디토리엄과 무대
19세기말에 체코는 합스부르크에 의한 오스트로-헝가리제국의 일부였다. 그리고 프라하에는 오래전부터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했다. 프라하의 독일인들은 독일어 오페라를 공연할수 있는 극장을 염원했다. 드디어 1883년 프라하에 웅장한 신독일극장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프라하 독일 콤뮤니티의 오랜 염원이 달성된 셈이었다. 비엔나의 궁정극장을 건설했던 비엔나의 펠너-헬머 회사가 건축을 맡았다. 네오 로코코 양식의 단아하면서도 화려한 극장이었다. 1888년의 오프닝에서는 바그너의 '뉘른베르크의 명가수'가 공연되었다. 초대 음악감독인 안젤로 노이만(Angelo Neumann)은 국제적으로 저명한 음악인들을 적극 초청하였다. 신독일극장은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 천정 프레스코와 샹들리에
1930년대에 독일에서 나치가 기승을 부리자 프라하의 신독일극장은 반나치 운동의 거점이었다. 그러므로 신독일극장은 나치 동조자들의 눈에 가시와 같았었다. 1938년 이른바 뮌헨협정이란 것이 체결되었다. 체코의 주데텐란트(Sudetenland)를 나치 독일, 폴란드, 헝가리가 나누어 가진다는 협정이었다. 체코의 모든 사회는 실망과 분노에 넘치게 되었다. 독일의 체코에 대한 정치적 압력이 점점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신독일극장을 지원하던 협회는 해산되었다. 재정적인 어려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서 출범 이래 위대한 예술가들에 의한 위대한 무대는 전성시대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1939년 3월 나치가 체코를 점령했다. 신독일극장은 독일오페라하우스(Deutsches Operahaus)로 이름이 바뀌었다. 로시니, 베르디, 푸치니와 같은 표준적인 오페라의 공연은 나치의 정치 집회 등으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 입구
1945년 5월 2차대전이 마무리 될 무렵, 프라하의 예술인들은 오페라의 발전적인 개혁을 외치며 새로운 오페라단체를 결성했다. '5월 4일 오페라단'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단체는 창단 기념으로 독일오페라하우스에서 스메타나의 '보헤미아의 브란덴부르크 사람들'(Brandenburgers in Bohemia)이라는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다. 나치가 통치하던 기간중에는 체코의 민족주의 오페라는 공연이 거의 금지되었었다. 이들은 새로운 체코 민족주의 오페라의 부흥을 기치로 내걸었다.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독일오페라하우스의 이름을 '5월 4일 그랜드 오페라'라고 고치고 보수적인 국립극장(Praha State Theater)에 반하여 아방 갸르드적 오페라를 도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들은 스메타나의 '팔려간 신부'를 전혀 다른 현대적인 연출로 무대에 올렸다. 체코 작곡가인 알로이스 하바(Alois Haba)의 4분음 오페라인 어머니(Mother)도 무대에 올렸다. 프로코피에프의 '수도원에서의 결혼'도 전위적인 연출로 공연했다. 대중들의 관심은 상당히 높았다. '5월 4일 그랜드 오페라'는 국립극장과 경쟁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1949년 공산당은 이들의 활동을 극단적이라고 보고 '5월 4일 그랜드 오페라'를 해산시켰다. 그리고 극장 이름을 시민들의 정서를 생각하여 스메타나극장이라고 바꾸고 내친김에 국립극장의 소속기관으로 만들었다.
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
1989년 스메타나극장은 국립극장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운동을 벌였다. 그리하여 공산주의의 붕괴와 함께 스메타나극장은 현재의 이름은 프라하 국립오페라로 다시 태어났다. 프라하 국립오페라는 현대적인 작품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스코트 조플린의 트리모니샤가 유럽 초연된 것은 특기할만한 사항이었다.
푸치니의 라 보엠 대신에 레온카발로의 라 보엠을 공연하였으며 유진 달레브르의 티프란트(Tiefland), 번슈타인의 캔다이드와 같은 작품에도 눈을 돌렸다. 프라하 국립오페라극장은 현대화를 위해 가속하고 있다.
프라하 국립 오페라 하우스의 '루살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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