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필견의 33편

로엔그린 - 바그너

정준극 2007. 10. 30. 10:53

로엔그린

(Lohengrin)

Richard Wagner


로엔그린은 중세의 독일 전설에 나오는 기사의 이름이다. 로엔그린에 대한 전설은 13세기부터 유럽의 여러 나라에 퍼져 있었다. 실상 로엔그린 전설은 영국의 아서왕에 대한 전설과 연계되어 있다. 아서 왕에게는 원탁의 기사가 있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기사들이 케이(Kay), 보르스(Bors), 가웨인(Gawain: Gawan), 랜스롯(Lancelot), 갈라하드(Galahad), 그리고 퍼시발(Percivalㅣ 파르치발)이다. 아서왕에 대한 전설은 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신비의 칼 엑스칼리버에 대한 이야기, 아서왕을 도운 마법사 멀린(Merlin)에 대한 이야기, 아서왕의 왕비인 귀네베레(Guinevere: 즈느비에브)와 기사 랜스롯의 이루지 못할 사랑의 이야기, 아서왕과 이복동생 모간 르 페이(Morgan le Fay) 사이의 반목 이야기, 아서왕과 모르드레드(Mordred)와의 운명을 건 전투 이야기는 언제나 들어도 흥미 있는 전설이었다. 그리하여 각 나라에서는 나름대로 아서왕의 전설을 편집하여 별도의 스토리를 발전시켰다. 독일에서는 독일판 아서왕 전설이 등장하였다. 특히 성배의 기사 퍼시발(독일에서는 파르치발: Parzival))에 대한 이야기는 누구라도 한번쯤은 꿈을 꾸었을 성배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끌었다.

 

성배의 기사 파르치발이 갈라하드와 보르스와 함께 마침내 성배가 보관되어 있는 곳을 찾아 성배에게 경배하고 있는 장면을 넣은 타페스트리. 버밍행박물관 소장.


성배의 기사 파르치발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큰 아들이 로엔그린이며 둘째는 동생인 카르다이즈(Kardeiz)이다. 로엔그린은 아버지 파르치발의 뒤를 이어 성배의 수호기사가 되었고 동생 카르다이즈는 아버지의 영지를 물려받아 다스렸다. 중세의 전설따라 삼천리에서 로엔그린이 처음 등장할 때에는 로에란그린(Loherangrin)이란 이름으로였다. 로에란그린이란 이름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보다 간편한 로엔그렐(Lohengrel)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중세의 작가들이 로엔그린이라는 부르기 좋은 이름을 만들어 냈고 파르치발(또는 파르지발)의 전설에 살을 붙여 성배의 로맨스와 이미 퍼져 있던 백조의 기사 얘기를 혼합하였다. 당시에는 파르치발의 아들 로에란그린이 성배를 수호하며 겪는 여러 모험담이 널리 알려진 전설이었으나 백조의 기사(Knigts of Swan)에 대한 전설도 별도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백조의 기사는 백조가 끄는 작은 배를 타고 이나라 저나라에 불현듯 나타나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처녀들을 구원해 준다는 내용이다. 처녀들을 구해 준다는 것은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숭배사상의 일환이라고 볼수 있다. 중세의 음유시인들은 이 두가지 얘기를 혼합하여 더욱 흥미진진한 스토리로 엮어 나갔다. 즉 성배의 기사인 로에란그린이 백조가 끄는 작은 배를 타고 문득 나타나 어려움에 처하여 있는 처녀들을 구원해준다는 내용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에 대한 이야기중 공통적인 사항은 누구든지 절대로 백조의 기사의 이름이 무엇인지 물어 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만일 물어 본다면 백조의 기사는 그 즉시 백조가 끄는 보트를 타고 저 멀리 떠난다는 것이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 역의 플라치도 도밍고


또 하나 전설로는 파르치발이 새로운 영지인 문잘배슈(Munsalvaesche)에 정착하여 ‘성배의 기사 종단’을 설립하였으며 종단(宗團) 사람들을 비밀리에 각 왕국에 보내어 영주들과 국왕들의 보호자로 활동케 했다는 것이다. 파르치발의 아들로서 역시 성배의 기사 종단의 멤버인 로엔그린은 브라반트 공국을 보호하는 임무를 받고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브라반트 공국(Duchy of Braband)은 오늘날 벨기에와 네덜란드 지역에 있었던 나라를 말한다. 브라반트 공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는 브뤼셀과 앤드워프였다. 브라반트 지역에서도 오래전부터 백조의 기사에 대한 전설이 있었다. 브란반트에서는 백조의 기사를 헬리아스(Helias)라고 불렀다. 그리스의 태양신을 헬리오스(Helios)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이 있는 명칭이다. 한편 독일에서 로엔그린에 대한 전설이 직접 얽혀 있는 곳은 클레브(Klev)에 있는 백조의 성(Schwanenburg)이다.

 

독일과 화란과의 국경지대에 있는 도시인 클레브에 있는 슈봐넨부르크(백조의 성). 로엔그린에 대한 전설이 담겨 있는 장소이다. 클레브에서 발행한 '로엔그린' 엽서. 산 위의 성이 슈봐넨부르크이다.

                                  

중세의 가장 유명한 음유시인 겸 작가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Wolfram von Eschenbach)는 성배의 수호기사와 백조의 기사에 대한 전설을 기초로 하여 파르치발(Parzival)이라는 낭만소설을 만들어 냈다. 폰 에센바흐는 11세기 십자군이었던 고트프리트 폰 부이용(Godefroy de Bouillon: Gottfried von Buillon)이 쓴 Chansons de geste(십자군의 노래)를 바탕으로 이 소설을 완성했다고 한다.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발이라는 소설에 로엔그린의 활약이 등장한다. 고드프리 드 부이용이란 기사는 누구인가? 그는 1099년 성지 예루살렘을 처음 탈환한 십자군 사령관으로 Lord de Bouillon(부이용의 영주)이라고 불리는 사람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탈환한후 예루살렘 왕국의 첫 통치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왕(King)이라는 타이틀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Regent(통치자 또는 섭정)라고만 칭했다. 예루살렘에 왕으로 오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뿐인데 어찌 자기가 왕이라는 호칭을 쓸수 있느냐는 생각에서였다. 독일의 신비주의적 전설에 매료하고 있던 리하르트 바그너가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발’에서 스토리를 가져와 오페라 로엔그린을 완성한 것은 1850년이었다. 로엔그린은 그해 8월 28일 바이마르의 대공궁정극장(Grossherzogliches Hoftheater)에서 '로엔그린'의 역사적인 초연을 가졌다. 바그너의 친구이며 초기후원자였던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가 로엔그린 초연을 주선하고 지휘하였다. 초기후원자라고 언급한 것은 나중에 바그너가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와 은밀하게 눈이 맞아 결혼하여 스위스로 가서 살았기 때문에 이를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그 이후로는 바그너를 적극 후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일 중부 안스바흐의 동남쪽 약 20km에 있는 볼프람스-에센바흐(Wolframs-Eschenbach) 마을의 시청 앞 광장에 있는 볼프람 폰 에센바흐 기념상. 하단에는 백조들의 조각이 있다. 광장의 한쪽에는 카페 파르치발이 있다.
                     

바이마르에서의 로엔그린 공연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자기들은 우수민족이라고 하는 독일인들의 우쭐하는 정서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후로 독일에서는 비록 사정상 로엔그린 전막을 무대에 올리지 못하더라도 몇몇 발췌곡을 마련하여 콘서트의 주요 레퍼토리로서 삼게되었다. 예를 들면 1막과 3막의 전주곡, 로엔그린의 아리아인 In fernem Land(먼곳으로부터), 2막과 4막의 오프닝 음악등이다. 특히 엘자(Elsa)가 결혼식을 위해 성당으로 행진할 때의 Hier commt die Braut(신부 입장: Treulich geführt)은 혼례의 합창(Brautchor)으로 알려져 오늘날 세계 어느 곳에서나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되는 곡으로 사랑받고 있는 곡이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Ludwig) 2세는 바이마르에서 로엔그린을 보고 특히 감동하였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2세는 로엔그린의 공연에 일반 관객처럼 몰래 참석했다가 관람한후 몰래 빠져 나갔다고 한다. 당시 바바리아 공국은 바이마르 공국과 정치적으로 복잡한 관계였기 때문에 바바리아의 루드비히2세가 로엔그린의 초연에 드러내 놓고 참석하지는 못하였던 것은 이해할수 있는 일이었다. 한편, 당시에 바이마르 공국의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였던, 즉 왕정을 타파하고 공화국을 수립하자는 운동에 참여했던 바그너는 수배인물이 되어 잠시 다른 나라로 피신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초연에 참가하지 못했다. 로엔그린은 바이마르 초연이후 폴란드의 브로클라브(Wroclaw: 1854), 라트비아의 리가(Riga: 1855), 체코의 프라하(1856), 그리고 나서 합스부르크의 중심지인 비엔나에서 공연되었다.

 

매드 루드비히라고 불리는 루드비히 2세가 세운 노이슈봔슈타인 성. 뒷편에는 호수가 있다.

 

바바리아의 루드비히 국왕은 로엔그린에서 백조의 기사에 대한 스토리가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중에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환상적인 아름다운 성을 짓고 Neuschwanstein(새로운 백조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중세에는 Stein(슈타인)이란 단어가 신비한 물건, 만물의 기본 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철학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것도 역시 돌에 대한 신비함을 설명한 작품이다. 노이슈봔슈타인이라는 명칭도 그런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루드비히가 로엔그린에 대하여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오페라 장면중에 독일 통일을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자기를 극진히 후원하는 루드비히 왕을 생각하여 오페라의 도입부에 그에게 간접적이나마 독일 통일을 간곡히 권유하는 내용을 넣었던 것이다. 루드비히는 나중에 바그너에게 링 사이클을 공연할 별도의 무대가 필요하다고 조언하였고 이에 힘입은 바그너는 마침내 바이로이트축제극장을 완성하였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건설에 루드비히 왕이 많은 후원을 아끼지 않았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바이로이트극장의 오프닝에는 독일의 여러 군주들과 유명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주인공인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운동에 참여했기 때문에 도피생활을 해야 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루드비히 2세가 세운 노이슈봔슈타인 성내의 '가수들의 방'. 벽에는 파르치발이 성배를 찾아 경배하는 그림이 있다. '가수들의 방'이라고 한 것은 이 곳에서 노래경연대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시 성배에 대한 이야기를 부연해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최후의 만찬때 사용했던 포도주잔 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상에 달려 있을 때 로마 병사가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흘러나온 물과 피를 담은 그릇을 그라일(Grail: 聖杯: 독일어로는 Gral)이라고 부른다. 즉, 아리마데 요셉이라는 사람이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스도가 흘린 물과 피를 담았다는 그릇이다. 물은 영생을 말하며 피는 언약을 말한다. 그건 그렇고, 그후 이렇게 귀중한 성배가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었다. 세상의 수많은 성자와 기사들이 성배를 찾아 헤맸으나 모두 헛수고였다. 다만, 전설에 따르면 파르치발이란 사람이 성배의 수호기사로서 세상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하는 신성한 곳에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다. 로엔그린은 파르치발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성배를 수호하는 거룩한 책임을 맡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러므로 로엔그린은 신성함과 공의로움과 선함을 대변한다고 보면 된다.

 

성배에게 경배하는 파르치발과 다른 원탁의 기사들. 백합은 성모를 상징하며 비둘기는 성령을 상징한다.


독일 제3제국의 히틀러는 로엔그린을 아리안 민족의 우수함을 대표하는 인물로 부각시켰다. 이와 함께 독일 국민이야 말로 지상에서 성배를 차지해야 하는 유일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독일 민족의 우수성 주장은 히틀러의 유태인 및 집시 박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히틀러의 나치는 유태인이 신성(神性)의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장본인들이기 때문에 인류를 위해 제거되어야 한다는 억지 주장을 폈다. 따라서 성배를 지키는 아리안민족이 유태인을 증오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명이라는 괴상한 주장을 내세웠던 것이다. 이렇듯 히틀러의 유태인 증오는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유태인 혐오에 있어서 히틀러 못지않게 유별나게 굴었던 사람이 바로 바그너였다. 예를 들어 바그너는 멘델스존이 유태계라는 이유를 들어 그의 작품까지도 연주하기를 싫어했다.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작품을 지휘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에서는 언제나 하얀 장갑을 끼고 지휘봉을 들었다. 혐오스러운 유태인의 음악을 지휘하려면 장갑을 끼고 바톤을 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바그너는 멘델스존의 작품을 지휘하고 나서 곧바로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 바그너를 인생 후배인 히틀러가 존경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였다. 바그너를 존경한다는 것은 바그너의 음악을 존경한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인지 히틀러에 의한 나치 집회가 열릴 때에는 바그너의 음악이 자주 연주되었다. 로엔그린의 전주곡, 발퀴레의 행진곡, 탄호이저의 전주곡 등은 나치가 특히 사랑하는 곡이었다. 캄캄한 밤중에 횃불을 높이 들고 '지그 하일'(Sieg Heil)을 외치는 나치의 대규모 집회에서 바그너의 음악이 우렁차게 흘러나오면 마음이 설레이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의 나치 집회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단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나치의 군중 집회, 특이 야간집회에서는 바그너의 음악이 자주 연주되었다. 조명을 마치 웅대한 건물처럼 설치했다. 그래서 Cathedral of Light라고 불렀다.


다시 '로엔그린'의 작곡 배경을 살펴보자. ‘방랑하는 화란인’과 ‘탄호이저’의 성공으로 자신감에 넘쳐 있던 바그너는 다음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온천장에 휴가를 가기로 했으며 휴가중에 읽을 책으로 폰 에센바흐의 ‘파르치발’과 게오르그 고트프리트 게르비누스(Georg Gottfired Gervinus: 1805-1871)의 ‘독일 시문학의 역사’(Geschichte der deutschen Dichtung: The History of German Literature: 독일문학사)라는 책을 들고 갔다. 독일문학사는 명가수(Meistersinger)와 한스 작스(Hans Sachs)에 대한 얘기가 자세히 수록되어 있는 책이었다. 바그너는 이 두 책자에 담겨진 독일적 시문학과 신화적 전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두 작품을 모두 오페라로 만들기고 하고 동시에 작업을 착수했다. 폰 에센바흐의 작품에는 ‘로엔그린’이란 타이틀을 붙였고 ‘독일 시문학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작품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라는 제목을 붙였다. 두 오페라의 대본은 모두 바그너 자신이 썼다. 그 중에서 로엔그린이 먼저 완성되었다. 오페라 로엔그린은 1850년 바이마르 공국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바그너는 반정부운동으로 수배를 받아 도피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로엔그린'의 초연을 보지 못했다. 바그너가 '로엔그린'을 처음 본것은 바이마르에서의 초연으로부터 11년 후인 1861년 비엔나 공연에서였다.

 

2012년 베를린 도이체오퍼 무대. 국제라이프치히무대조명 대상을 받은 무대이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


로엔그린은 전3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공연시간은 1시간 15분 정도.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의 공연시간이 거의 4시간에 가까운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짧은 편이다. 무대는 10세기경의 앤트워프. 브라반트 공국의 중심도시이다. 브라반트 공국은 작은 국가에 불과했지만 전략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열강들의 관심을 받았다. 당시 작소니 대공국의 하인리히(Heinrich: Henry: Bass) 왕은 독일 통일의 대업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소공국이지만 중요한 위치에 있는 브라반트를 우선 동맹국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하인리히 왕은  독일 통일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인근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갖는다. 브라반트에서는 텔라문트(Terlamund: Bar) 백작이 참석한다. 브라반트 공국은 당시 왕위 문제로 상당히 곤란한 사정에 처해 있었다. 얼마전에 브라반트의 왕이 세상을 떠났으며 고트프리트 왕자가 곧 왕위에 오를 예정이었다. 그런데 고트프리트(Gottfried)왕자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수상이나 마찬가지인 텔라문트 백작이 하인리히 왕의 회의에 참석했던 것이다.

 

2006년 독일 바덴 바덴 무대. 로엔그린에 테너 클라우스 플로리안 보그트(Klaus Florian Vogt). 현대적 연출. 로엔그린이 엘자를 안심시키고 있다.


브라반트 공국의 귀족들을 대표하는 텔라문트 백작은 선왕이 세상을 떠난후 새로운 왕이 등극할 때까지 섭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트프리트 왕자가 새로운 국왕으로 등극한다면 섭정을 계속하지는 못하게 될 입장이었다. 그러한 때에 고트프리트 왕자가 종적을 감춘 것이다. 고트프리트 왕자에게는 엘자(Elsa: Sop)라는 누이가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왕자가 끝내 나타나지 않으면 엘자가 왕위에 오를수도 있다.  텔라문트 백작으로서는 도저히 수용할수 없는 일이었다. 텔라문트 백작과 부인 오르트루트(Ortrud: MS)는 엘자기 마법으로 왕자를 처치했다고 몰아세우고 엘자를 제거하기 위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르트루트 백작부인은 실은 악마로서 마법을 부릴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오르트문트는 선한 사람들을 유혹하여 악을 저지르도록 부추켰다. 텔라문트의 욕심도 오르트루트의 꼬임에 빠져서였다. 텔라문트와 오르트문트가 엘자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브라반트 공국을 차지하기 위한 욕심 때문이다. 한편, 왕위에 오를 왕자가 사라져서 종적을 찾을수 없다는 보고를 접한 작소니(Saxony)의 하인리히 왕은 직접 브라반트 공국을 방문하여 사태를 파악하기로 한다. 이러한 배경 아래 막이 오른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무대. '로엔그린'의 무대를 1956년 헝가리로 옮겼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과 브라반트 공국의 왕위 계승자인 엘자 공주의 결혼식을 하인리히 왕이 이끌고 있다.

                                                  

로엔그린의 전주곡은 바그너의 다른 초기 오페라의 전주곡과 판이한 성격을 띠는 것이다. ‘방랑하는 화란인’이나 ‘탄호이저’의 전주곡(Prelude)은 모두 앞으로 전개될 극적인 내용을 암시하는 것이다. 마치 베버(Carl Maria von Weber)의 ‘마탄의 사수’의 서곡처럼 앞으로의 스토리를 간접적으로 집약하여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로엔그린의 전주곡은 성배에만 초점을 둔 예언적인 것이다. 성배의 수호기사가 세상에 나왔다가 다시 성배를 수호하러 떠난다는 신비한 내용을 집약한 것이다. 로엔그린이 그의 이름을 비밀에 붙여야 했던 것도 이러한 신비성을 더해주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결론적으로 로엔그린의 전주곡은 신비스런 환희를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평론가들도 로엔그린의 전주곡을 들으면 ‘투명하게 파란 하늘을 쳐다보는 것과 같은 마음의 평정과 우주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고 말하였으며 또 어떤 평론가는 이 전주곡이 성배 그 자체를 표현한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보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보이는 신비함을 느낄수 있다는 것이다. 신비함은 이 오페라의 곳곳에서 느낄수 있다. 제1막 하인리히 왕의 기도장면, 제2막의 장엄한 대행진, 제3막에서의 전주곡, 긜고 혼례의 신성함을 표현한 내용들이 그러하다. 성서에서 혼례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께서 처음 기적을 베푸신 것이 가나의 혼례잔치였다. 성서에는 혼인에 대한 비유가 여러번 나온다. 천국을 맞이하는 것은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는 것과 같다는 말씀도 있다. 혼인은 완성을 의미한다. 

 

로엔그린과 엘자의 결혼식. 생페터스부르크 마리인스키 무대. 러시아식의 결혼식.

                   

제1막. 작소니 대공국의 하인리히 왕이 브라반트 공국을 찾아오자 텔라문트 백작이 나서서 엘자 공주가 고트프리트 왕자를 살해한 것이 분명하므로 재판하여 달라고 소원한다. 귀족들을 대표하는 텔라문트 백작이 고소한 사항이므로 하인리히 왕으로서도 모른채 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 왕은 엘자에게 만일 무죄로 판정받고 싶으면 수호기사가 나타나 백작과의 결투에서 승리하여 결백을 입증해야 한다고 선언한다. 중세에서는 특히 종교적인 문제로 죄과를 명백하게 가리지 못할 경우, 피고인을 수호하는 기사가 선임되어 고소인과 결투를 함으로서 결백을 가리는 관례가 있었다. 이같은 내용은 월터 스콧의 소설 '아이반호'(흑기사)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아이반호가 종교재판에서 마녀로 판정을 받은 유태처녀 레베카의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수호기사로 나서서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브라반트 공국에서는 아무도 엘자 공주의 결백을 위해 수호기사가 되어 텔라문트 백작과 결투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아름다운 엘자 공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처형당할 운명에 처하여 있었다. 그날 밤 엘자 공주는 꿈을 꾼다. 빛나는 갑옷을 입은 늠름한 기사가 홀연히 나타나 자기의 결백을 위해 수호기사가 되겠다고 선언하는 꿈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엘자가 부르는 아리아 Einsam in trueben Tagen(고독한 이 밤에)는 엘자의 슬픈 심경과 한가닥 희망을 잘 표현해 주는 곡이다.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무대. 로엔그린에 브랜던 조바노비치, 엘자에 카밀라 니룬두. 로에그린이 엘자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의 이름이나 어디서온 것인지를 묻지 말아 달라고 말한다.
                                        

날이 밝았다. 다시 재판이 시작되었다. 정오까지 엘자를 위한 수호기사가 나타나지 않으면 엘자는 화형에 처해질 운명이다. 그런데 정말이지 엘자가 꿈에 보았던 바로 그 기사가 빛나는 갑옷을 입고 백조가 끄는 작은 배를 타고 미끄러지듯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신비의 기사는 만인 앞에 늠름하게 등장하여 엘자의 수호기사가 될 것임을 선언한다. 모두들 백조의 기사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백조의 기사는 엘자에게 자기의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서부터 왔는지 아무것도 묻지 말아줄 것을 약속해 달라고 말한다. 이때에 부르는 백조의 기사의 아리아가 Nie sollst du mich fragen(결코 묻지 말기를)이다. 엘자는 그같은 제안을 기꺼이 수락한다. 드디어 미지의 기사와 텔라문트 백작과의 결투가 벌어진다. 텔라문트 백작은 브라반트 공국에서 제일가는 막강한 기사이다. 하지만 단 한차례의 대결로서 텔라문트 백작은 힘없이 쓰러진다. 그러나 백조의 기사는 텔라문트의 목숨만은 살려 준다. 엘자의 결백은 입증되었다.  텔라문트 백작과 그의 부인 오르트루트는 악의 상징이다. 부인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어서 악행을 저지르는 텔라문트 백작을 보면 마치 에덴동산에서 이브의 꾐에 빠져 죄를 짓는 아담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선의 상징인 백조의 기사가 악의 상징인 텔라문트 백작을 초인적은 능력으로 타파함으로서 악의 희생물이 될뻔한 엘자를 구한다. 백조의 기사는 마치 창세기 나오는 세라프(Seraph)와 같은 인상을 심어준다. 백조의 기사가 텔라문트 백작과 결투를 하는 장면이야말로 이 오페라에서 음악적으로 가장 강렬한 부분이라고 할수 있다.

 

오르트루트가 추종자들에게 자기 남편의 승리를 확신하는 장면. 바르샤바 오페라.


제2막. 텔라문트 백작과 악독한 부인 오르트루트는 백조의 기사에 대한 복수의 음모를 꾸민다. 엘자가 발코니에 나와서 이름 모르는 용감한 기사에 대한 연모의 심정을 노래할 때 어둠 속에서 나타난 오르트루트가 엘자의 마음속에 의심의 씨앗을 심는다. 오르트루트는 그 기사가 마법을 쓰는 사악한 사람이며 결국은 엘자를 사랑하지 않고 떠날 것이라고 속삭인다. 한편 하인리히 왕은 텔라문트에게 추방령을 내린후 곧 이어 엘자와 백조의 기사와의 결혼식을 거행토록 한다. 당시에는 결투에서 이기거나 시합에서 이기면 부상으로 주인공 처녀와 결혼하는 것이 관례였다. 결혼식을 위해 앤트워프의 대성당에 입장하는 귀족들과 기사들의 대행진이 참으로 장엄하다. 이 오페라의 전편을 통해 가장 웅장하고 드라마틱한 파트이다.

 

장엄한 결혼식. 메트로폴리탄 무대

 

제3막. 유명한 축혼가 Treulich gefuehrt(진심으로 인도하소서)가 신비스럽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엘자와 백조의 기사와의 결혼식이 진행된다.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은 사랑의 듀엣을 부르며 서로의 사랑을 다짐한다. Das susse Lied verhalt(감미로운 노래)라는 아름다운 멜로디의 듀엣이다. 신방으로 들어온 엘자는 백조의 기사가 자기에 대한 사랑이 식어 아무 말도 없이 떠날 것이라는 어떤 여인(실은 오르트루트)의 말을 기억하고 제발 누구인지 이름을 얘기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백조의 기사는 대답을 회피하며 만일 이름을 밝힐 것 같으면 그 때는 엘자를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엘자는 아무래도 백조의 기사를 잃을 것 같아 이름이라도 알아 두려고 생각한다. 이때 두 사람에 대한 증오와 복수의 일념에 넘쳐 있는 텔라문트가 칼을 들고 뛰쳐 들어온다. 하지만 오히려 백조의 기사의 칼에 그만 목숨을 잃고 만다. 이러한 사건이 있은후 백조의 기사는 하인리히 왕에게 더 이상 사악한 외적으로부터 독일을 지킬수 없다고 하며 먼 곳으로 떠나겠다고 말한다. 이때 부르는 아리아가 Ach! Nun ist all' unser Glueck dahin(아, 이제 우리의 기쁨은 날아갔도다)이다.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결혼식 장면

 

오페라 로엔그린의 가장 중심 되는 메시지는 제3막의 ‘사랑의 2중창’이다. 바그너의 서정적인 천재성을 찾아 볼수 있는 곡이다. 이 듀엣에서도 선과 악의 미묘한 대립관계를 엿볼수 있다. 로엔그린은 엘자의 이름을 부드럽게 부름으로서 숭고한 사랑을 표현코자 했다. 그러나 엘자는 비밀에 쌓여 있는 그의 이름을 첫 번째로 부를수 있는 특권을 달라고 하면서 로엔그린의 사랑에 조건을 붙인다. 로엔그린은 그가 엘자의 결백을 무조건 믿듯이 자기를 믿어 달라고 말한다. 선함과 악함의 미묘한 대립을 엿볼수 있는 대목이다. 선과 악의 대립, 신과 인간의 관계는 은연중 독일 통일의 염원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부각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해설할수 있다. 바그너는 로엔그린을 통하여 신성한 성배의 기사가 독일을 수호한다는 점을 은근히 내세웠다. 다만 오르트루트와 텔레문트를 비롯한 몇몇 무리가 독일 통일을 위협하고 있지만 결국 정의로운 신의 능력에 의한 응징될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폰 에센바흐가 쓴 파르지발에 의하면 엘자도 북구의 신인 오딘(Odin)과 프레야(Freya)를 믿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결국 엘자도 반기독교인 이었으나 나중에 그리스도와 성배를 영접한다는 것이다.

 

마리인스키 극장 무대


백조의 기사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얘기를 시작한다. 자기는 성배의 수호기사인 파르지발의 아들로서 이름은 로엔그린이라고 밝힌다. 성배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어 경외감을 표시한다. 백조의 기사는 이제 브라반트 공국을 해치고자 하는 사람은 사라졌으므로 자기는 원래의 소임인 성배를 수호하러 떠나겠다고 말한다. 로엔그린은 함께 온 백조에게 Mein lieber Schwann(사랑하는 백조여)라는 아리아를 부르며 작별을 고한후 마지막으로 엘자 공주에게도 작별을 고한다. 한쪽 구석에 있는 오르트루트는 이제야 승리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때에 로엔그린이 하늘에 기도하여 백조를 마법에서 깨어나도록 한다. 고트프리트 왕자가 마법에 걸려 백조로 변해 있었던 것이다. 악마 오르트루트는 파멸한다. 고트프리트 왕자를 본 엘자는 너무나 감격스러운 끝에 왕자의 팔에 쓰러질듯 안긴다.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은 이들을 두고 멀리 떠난다. 막이 내린다.

 

엘자(아네트 다슈)와 로인그린(요나스 카우프만)의 작별. 무대 한쪽에는 프리드리히 폰 텔라문트가 쓰러져 있고 오르트루트가 비통해하고 있다.

 

[한마디] 결혼식에서 당연히 연주되는 곡으로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신부가 입장할 때에 연주하는 곡으로 바그너의 로엔그린에 나오는 ‘혼례의 합창’이다. 결혼 서약을 마친 신랑신부가 새로운 삶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갈 때 연주되는 곡은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축혼가’이다. 이렇듯 바그너와 멘덴스존은 대단한 인연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바그너는 멘델스존이 유태계라고 하여 대단히 혐오하였다.

 

[로엔그린에 나오는 아리아-앙상블] - 괄호안은 영어로 번역된 제목

- Einsame in treuben Tagen(Elsa's Dream)

- Nun sei bedankt(Your task is done)

- Mein Herr und Gott(The King's Prayer)

- Euch Lueften, die mein Klagen(Oh wind that heard my weeping)

- Du Aermste(Noo words of mine)

- Fuelhl' ich zu dir(How can I call you)

- Athmest du nicht(Ah, how the flowers)

- In fernem Land(Lohengrin's narrative)

 

폴란드 바르샤바 무대. 들러리들이 폴란드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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