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필견의 33편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 바그너

정준극 2007. 11. 6. 15:17

방랑하는 네덜란드인 -

(Der fliegende Hollander: The Flying Dutchman) - 방랑하는 화란인

R. Wagner


방랑하는 네덜란드인(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얘기는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 중세초기부터 내려오는 전설이다. 전설에 따르면 방랑하는 화란인은 유령선을 타고 고향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채 영원히 바다에 떠도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타이틀에 표현되어 있는 fliegend(플리겐트)라는 단어는 마스트에 돛을 올리지 않아 배가 바람 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방랑하다’는 의미와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오히려 '표류하다'라는 의미기 짙다. 간혹 항해하는 배들이 방랑하는 화란인의 유령선을 멀리서 볼 경우가 있다고 한다. 유령선은 자기들을 육지로 안내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내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이다. 또한 유령선에서는 선원들이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는 메시지도  보낸다는 것이다. 항해자들에게 있어서 이 유령선을 보는 것은 저주를 받는다는 징조이기 때문에 아무리 구조신호가 오더라도 사정을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친다고 한다. 중세로부터의 민담에는 팔켄부르크(Falkenburg)라는 선장이 영혼을 대가로 악마와 주사위 도박을 하다가 졌기 때문에 북해에서 ‘최후의 심판’ 날까지 정처 없이 항해(표류)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한 첫 기록은 1715년 조지 배링턴(George Barrington)이란 사람이 쓴 Voyage to Botany(보타니로의 항해)라는 문서에 나온다.

 

화란인 역으로 유명했던 프란츠 그룬트헤버

 

또 다른 스토리에 따르면 17세기 화란인 선장 베르나르 포케(Bernard Fokke)라는 사람이 방랑하는 화란인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포케 선장은 네덜란드(화란)로부터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자바(Java)까지 어느 누구보다도 빠른 스피드로 항해를 했다고 한다. 자바는 당시에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다. 아무튼 사람들은 포케 선장이 악마의 도움이 없이는 저렇게 빨리 항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처음으로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얘기가 수록된 책은 1821년에 발간된 블랙우드 잡지(Blackwood's Magazine)이다.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을 항해하던 화란 선박이 항해일지에 적어 놓은 기록을 잡지에 게재한 것이다. 항해일지에 따르면 어느날 방랑하는 화란인의 배를 보았다는 것이며 그 배는 암스테르담 소속 선박으로 배에는 생존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지나가던 선박들이 화란인의 배를 조사하기 위해 다가가려 했지만 파도가 위험하여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 이 스토리는 전설이나 민담이 아니라 항해일지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알아보고자 한다.

 

취리히 오페라 무대. 현대적 연출.

 

1641년 화란 상선 한척이 멀리 동양에서 화물을 싣고 네덜란드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선장은 반 드 데켄(Van de Decken)이었다. 선장은 먼 항해 후에 마침내 남아프리카의 희망봉까지 왔으므로 기분이 한결 홀가분한 입장이었다. 배가 아프리카의 남쪽 끝머리에 왔을 때 선장은 만일 이곳에 자기 소속회사인 화란동인도회사가 정착촌을 세운다면 회사 배들이 동양에 갔다 올 때 이 정착촌에 들려 충분히 휴식을 취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선장은 그 생각에 너무 골몰한 나머지 먹구름이 몰려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어느새 배는 심한 풍랑에 휩싸이게 되었다. 선원들은 겁에 질려 비명을 지르며 어찌할줄 몰라 했다. 선장은 선원들과 힘을 합쳐 몇시간 동안이나 폭풍에서 헤어나려고 죽을힘을 다했다. 어느 순간, 폭풍을 벗어 나는듯 싶었다. 그러나 그 순간, 배는 바다위에 삐죽 솟아 나온 암초에 부딪쳐 침몰하기 시작했다. 반 드 데켄선장은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죽을 준비가 안되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만일 저 희망봉만 돌아갈수 있다면 이 세상 끝날 때까지 계속 배를 타고 다녀도 좋다.’고 저주의 소리를 내 뱉었다. 그 저주의 소리가 악마의 귀에 들여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희망봉 부근에서 폭풍이 일어날 때면 저 먼 폭풍속에서 유령처럼 떠다니고 있는 반 드 데켄 선장의 배를 어렴풋이 볼수 있다고 한다.

 

결혼을 앞둔 젠타와 마을 사람들. 현대적 연출

 

하지만 일부러 그 배와 ‘방랑하는 화란인’을 보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누구든지 그 배를 목격하는 사람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한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여러 사람들이 그 화란인의 배를 본 일이 있다고 주장했다. 2차대전중 이 지역을 항해하던 독일 U보트의 선원들도 보았다고 주장했다. 항구에 돌아 왔다가 다시 출동한 그 U보트는 얼마후 원인모를 화재로 침몰하였다. 1881년 7월 어느날, 영국 해군 함정이 희망봉 언저리를 돌아 유럽 쪽으로 들어서려고 할 때 이 배에 타고 있던 몇 사람들도 방랑하는 화란인의 배를 보았다고 한다. 나중에 영국왕이 된 조지왕자(Prince George of Wales: 현 엘리자베스여왕의 아버지)는 에드워드3세가 된 알버트왕자(Prince Albert of Wales)와 함께 대영제국 해군 함정인 HMS 바칸트(Bacchante)의 갑판장교로 복무한 일이 있다. 이들 두 왕자와 함께 3년에 걸친 대항해에 동참한 왕실개인교사 달턴(Dalton)은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목격담을 기록으로 남겼다. “우리는 호주의 멜본에서 시드니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새벽 4시쯤, 방랑하는 화란인의 배로 생각되는 배가 우리 배의 앞쪽을 지나쳐갔다. 유령선에서는 섬뜩한 느낌을 주는 붉은 불길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우리 배와는 200야드도 채 안되는 거리였다. 유령선의 돛과 마스트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였다. 우리 배의 망루에 있던 파수병도 이 모습을 분명히 보았다. 우리는 담당 수병에게 어서 선수(船首)갑판으로 가서 확인해 보라고 지시했다. 그 수병이 뛰어가 보았으나 유령선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침 10시 45분경, 갑판에 있던 수병 13명이 유령선을 다시 보았다. 방랑하는 화란인이 뱃머리의 마스트에서 아래쪽 갑판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바닥으로 떨어진 화란인은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산산조각이 되었다.”라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망루의 파수병이 그 배를 본 것은 불행이었다. 얼마후 그 병사는 같은 지역을 항해하던 중 아무 이유도 없이 급사했다. 하지만 나중에 조지 5세가 된 갑판장교는 방랑하는 화란인의 배를 보았는데도 저주에서 살아났다. 다만, 함께 승선해 있던 알버트 왕자는 에드워드 3세가 되었으나 심프슨부인 때문에 대영제국의 왕관을 버리는 운명을 겪었다.

 

화란인의 베이스 바리톤 토마스 홀

 

조지5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1826년 영국의 에드워드 피츠발(Edward Fitzball)이라는 사람이 ‘방랑하는 화란인’이란 멜로드라마를 만들어 연극으로 공연했다. 연극에서는 저주를 받은 화란인이 그와 운명을 함께할 여인을 찾기 위해 백년마다 한번씩 육지에 오를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는 7년마다 한번씩 육지에 오를수 있다고 되어 있다. 그후 1839년에는 프레데릭 마리아트(Frederick Marryat)라는 사람이 The Phantom Ship(유령선)이라는 소설을 출판하여 화란인에 대한 얘기를 썼고 화란의 A.H.C Roemer(뢰머)라는 목사님도 He Vligend Schip(방랑하는 배)라는 책에서 저주받은 화란인 선장에 대한 스토리를 소개했다. 1951년에는 헐리우드의 MGM이 Pandora and the Flying Dutchman(판도라와 방랑하는 화란인)이라는 영화를 만들어 인기를 끌었다. 에바 가드너와 제임스 메이슨이 주연한 영화였다. 최근인 2006에는 ‘카리브의 해적’ 시리즈에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에피소드가 채택되었다. 이에 따르면 화란인의 배에 탄 선원들은 육지를 잊고 점점 해양인간으로 변형되는 저주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화란인 선장은 데이비 존스(Davy Jones)로서 바다의 여신 칼립소(Calypso)와 사랑에 빠진다. 칼립소 여신은 데이비 존스선장에게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을 내세로 데려다 주는 책임을 맡긴다. 데이비 존스선장은 10년동안 그 일을 충실히 수행한다. 그러다가 칼립소 여신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화가 나서 죽은 사람들을 큰 상자에 넣고 내세로 데려다 주지 않는다. 내친 김에 데이비 존스선장은 죽은 사람들을 내세로 운반하는 일을 집어 치우고 해적중의 해적이 된다. 그는 배를 보는대로 침몰시킨다. 그리고는 침몰하는 배의 죽은 사람들을, 또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백년동안이나 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도록 한다. 이로 인해 칼립소여신은 데이비 존즈선장을 저주하여 ‘최후의 심판’날까지 항구에 돌아가지 못하고 험난한 바다를 방랑토록 한다.

 

젠타로서 유명했던 안냐 실라


바그너가 ‘방랑하는 화란인’을 쓴 배경에 대한 에피소드가 무척 흥미롭다. 바그너는 26세 때인 1839년 발트 3국중의 한곳인 라트비아의 리가(Riga)에서 궁정극장 지휘자의 자리를 얻어 일했었다. 바그너는 독일에 있을 때 분수에 넘치는 사치스런 생활을 했기 때문에 곧이어 빚더미에 올라앉게 되었고 빚쟁이들로부터 쫓겨서 리가까지 왔던 것이다. 더구나 그 때에는 배우였던 부인 민나(Minna: Christine Wilhelmine Planer)가 무대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수입도 없었다. 빚쟁이들은 리가까지 찾아왔다. 궁색해진 바그너는 빚쟁이들을 피하기 위해 몰래 파리로 도망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바그너는 오페라 리엔치(Rienzi)를 작곡하고 있었다. 그는 런던을 거쳐 파리에 가서 리엔치를 공연하여 돈을 벌 생각이었다. 이러한 계획은 당장 수포로 돌아갔다. 바그너가 파리로 도망갈 생각인 것을 눈치 챈 채권자들이 당국에 얘기하여 바그너와 부인 민나의 여권을 압수토록했기 때문이다. 바그너에게 돈을 빌려준 사람들은 주로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바그너는 유태인을 증오하고 멸시하기 시작했다는 얘기도 있다. 라트비아의 리가에서 배를 타고 런던을 거쳐 파리로 가려던 계획이 무산되자 바그너는 그해에 프러시아 국경을 불법으로 넘은후 배를 타고 런던으로 갔다가 파리로 가는 위험한 계획을 세웠다. 당시 부인 민나는 유산했기 때문에 몸이 온전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그너는 육로로 프러시아 국경을 넘는 모험을 감행했다. 겨우 프러시아에 도착한 바그너는 테티스(Thetis)라는 여객선을 타고 런던으로 갈수 있었다. 여권이 없었지만 선장이 가까스로 승선을 허락해서 탈수 있었다. 배가 북대서양에 들어섰을 때 이번에는 심한 풍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죽음의 풍랑이었다. 배는 방향을 바꾸어 노르웨이 산드비크(Sandvik)의 표르드에 겨우 피난할수 있었다. 프러시아에서 런던까지는 배로 8일이면 충분했지만 바그너는 풍랑 때문에 3주나 걸려서 런던에 도착할수 있었다.

 

항구에 정박하는 노르웨이 선원들

 

바그너는 얼마후 런던을 거쳐 파리로 갔지만 파리에서의 생활도 재앙이었다. 지휘자 자리를 구했으나 No!였다. 리엔치를 완성하겠으니 공연해 달라고 파리 오페라극장에 요청하였으나 그것도 No!였다. 바그너 가족의 생활은 궁핍 그 자체였다. 그나마 아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어 겨우 연명할수 있었다. 바그너는 음악평론을 쓰기도 했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편곡해 주기도 했고 심지어 다른 사람의 악보를 필사해주는 일까지 하면서 겨우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때 반짝하는 아이디어! 프러시아에서 런던까지 갈때의 풍랑경험을 되살려 ‘방랑하는 화란인’을 오페라로 만들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바그너는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발레 공연 전에 무대에 올릴수 있는 단막짜리 ‘방랑하는 화란인’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전3막의 ‘방랑하는 화란인’의 오리지널이다. 이듬해 바그너는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스토리가 나오는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 1797-1856)의 1834년도 풍자소설(또는 소설을 위한 스케치) Aus den Memorien des Herren von Schnabelewopski(슈나벨레보브스키 사람들의 회고록에서)을 바탕으로 단막의 오페라를 수정 보완하였다.

 

사라소타 오페라 무대. 노르웨이 선장의 배가 추운 북해를 헤치고 겨우 항구로 돌아가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하이네와 바그너의 운명도 ‘방랑하는 화란인’의 전설과 크게 다를바가 없다. 바다에 나가기가 무섭게 항구로 되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것이 뱃사람들이다. 그러나 항구로 돌아오기가 무섭게 다시 바다로 나가야 하는 것 역시 이들의 운명이다. 그러나 방랑하는 화란인은 항구로 들어가지 못하고 영원히 바다를 떠 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이다. 하이네와 바그너의 운명도 이와 같은 것이었다. 하이네는 독일의 지식층이 자기의 이상의 동조하지 않기 때문에 고향을 떠나 오랫동안 방랑생활을 해야 했다. 바그너 역시 고향 라이프치히와 어린 시절을 보낸 드레스덴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또는 애정행각으로 스위스,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지를 전전하면서 살았다. 바그너는 하이네와 마찬가지로 여러 여인들과 스캔들을 만들었다. 하이네가 부적절한 생활 때문에 매독에 걸려 한창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잠시 위대한 작곡가 바그너의 여성 편력에 대하여 일고해 보고자 한다. 그 이전에 바그너의 성장배경을 간추려 보는 것도 필요할 것 같다. 바그너는 1813년 경찰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와 약간 정숙하지 못한 어머니 요한나(Johanna Rosine Wagner) 사이에서 태어났다. 불행하게도 아버지는 바그너가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곧이어 어머니 요한나는 오래동안 친밀하게 지냈던 배우 겸 극작가인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라는 사람과 동거를 시작했고 몇 달후에는 아예 결혼하였다. 가이어는 바그너의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했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라이프치히를 떠나 가이어의 저택이 있는 드레스덴으로 이사를 갔다. 그러므로 바그너는 라이프치히 태생이지만 태어난후 거의 1년 몇 달 밖에 살지 않고 드레스덴으로 갔으므로 실상 드레스덴 출신이라고 할수 있다. 어린 바그너는 어머니와 함께 드레스덴의 가이어 집에서 14년을 살았다. 때문에 소년이 될 때까지의 이름은 리하르트 바그너가 아니라 빌헬름 리하르트 가이어(Wilhelm Richard Geyer)였다. 나중에 바그너는 어릴 때 세상을 떠난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친아버지가 아니며 친아버지는 가이어라고 생각한 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나저나 루드비히 가이어는 바그너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유태계였다. 그러므로 만일 루드비히 가이어가 바그너의 친부(親父)라고 한다면 얘기는 이상해진다.

 

바그너의 어머니 요한나 로지네 바그너


바그너는 약관의 23때에 뮌헨에서 크리스티네 빌헬미네 플라너(Christine Wilhelmine Planer)라는 4년 연상의 여배우를 만나 결혼하였다. 모두들 그녀를 민나(Minna)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바그너가 민나와 결혼하게된 얘기도 글로 쓰지만 한이 없지만 생략한다. 그런데 여배우라는 사람이 거의 모두 그렇듯 민나도 사치가 보통이 아니었고 생활 씀씀이도 대단했다. 게다가 민나는 여인의 정절에 대하여 별로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뮌헨에 있을 때에는 연극 출연을 위해 극장장이나 연극 감독과도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 여기에 바그너 자체도 사치하고 분방한 생활을 했으므로 결국 바그너는 빚 방석에 앉게 되었다. 두 사람은 빚장이들의 눈을 피해서 당시 제정러시아에 속하여 있던 발트 3국중의 하나인 라트비아(Latvia)의 리가(Riga)에 가서 살았다. 마침 바그너가 리가의 어떤 극장의 지휘를 맡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러나 앞서도 약간 언급했지만 리가는 제정러시아에서 리투아니아의 빌니우스(Vilnius)와 함께 유태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유태인들의 직업은 대부분 고리대금업이었다. 그러므로 바그너가 라트비아에서 유태인들로부터 돈을 빌려 썼을 것이라는 추측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그건 그렇고 바그너와 결혼한지 얼마 후에 라트비아의 리가로 온 부인 민나는 몇주후에 어떤 제정러시아의 장교와 눈이 맞아 바그너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야반도주하였다. 얼마후 민나는 그 장교가 민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바람에 다시 바그너를 찾아 왔다. 바그너는 민나를 받아 들였다. 바그너는 민나와 26년을 법적인 부부로서 지냈다. 그러나저러나 바그너는 생애의 전반에 걸쳐 빚을 갚느라고 죽을 고생을 했다. 갚아도 갚아도 없어지지 않는 빚! 민나의 역할이 컸다.

 

바그너의 첫 부인 민나 플라너(Minna Planer). 배우였다.


바그너 가족은 빚쟁이들의 성화에 견디지 못하고 리가를 탈출하여 런던 경유 파리에 도달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으므로 재론할 필요가 없다. 바그너는 리엔치를 1840년 파리에서 완성했다. 그러나 파리 오페라극장은 리엔치의 공연을 거부하였다. 발레도 나오지 않는데다가 무슨 오페라가 길기는 왜 그렇게 길기만 하냐는 것이 이유였다. 다행하게도 드레스덴 궁정극장이 리엔치를 공연하겠다고 나섰다. 바그너는 당장 지긋지긋한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함께 드레스덴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6년동안 지냈다. 이 기간 중에 리엔치와 함께 ‘방랑하는 화란인’(3막의 수정본),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렸다. 바그너 팬들이 상당히 생겼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왕정을 반대하고 공화제를 지지하는 민중봉기에 참여하는 바람에 당국의 수배를 받게 되어 어쩔수 없이 취리히로 피신하였다.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시인 겸 작가인 마틸데 베젠도크(Mathilde Wesendock)라는 매력적인 여인과 알게 되었다. 마틸데는 비단무역으로 돈을 모은 오토 폰 베젠도크(Otto von Wesendock)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오토는 바그너의 음악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열렬 팬이었다. 바그너와 민나는 베젠동크 부부의 호의로 1856년부터 2년 동안 베젠도크 저택의 별채에 기거했다. 그러는 중에 바그너와 마틸데는 서로 죽지 못하도록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바그너는 마틸데와의 뜨거운 로맨스를 생각하여서 저 유명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였다. 트리스탄은 바그너였고 마틸데는 이졸데였으며 오토는 마크왕인 셈이었다. 나중에 마틸데는 이성을 되찾았는지 남편 오토에게 ‘잘못 했으니 용서해 주세요!’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남편 오토는 마틸데에게 ‘당신 때문에 위대한 오페라가 한편 탄생하였는데 뭘 그 까짓것 가지고...’라면서 오히려 더 있다가 왔으면 하는 눈치였다고 한다. 바그너는 마틸데는 진정으로 사랑했다. 바그너는 오페라 이외의 곡은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 다만 일부 가곡이 있을 뿐이다. 베젠도크 가곡(Wesendock Lieder)은 마틸데가 쓴 시에 곡을 붙인 것으로 마틸데에게 헌정된 것이다.


바그너와 코지마


바그너는 이제 부인 민나에게서 더 이상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 결혼생활 26년! 결국 1866년 민나가 세상을 떠남으로서 바그너는 민니와 영원한 결별을 했다. 바그너는 실상 전부터 드레스덴 극장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의 부인인 코지만 폰 뷜로브(Cosima von Bülow)와 염문을 퍼트리고 있었다. 바그너 추종자인 한스 폰 뷜로프는 새로운 버전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세계 초연을 지휘한 인물이며 그의 부인 코지마는 헝가리 출신의 저명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딸이다. 당시 리스트와 마리 다구 백작부인과의 로맨스 겸 스캔들은 세상이 다 아는 빅 뉴스였다. 아무튼 코지마는 명성 높은 지휘자 남편이 있고 두 딸까지 두었는데도 불구하고 24세 연상의 바그너와 열애에 빠졌다. 나중에 바그너는 코지마를 16세때에 처음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다고 털어 놓은 일이 있다. 아무튼 바그너와 코지마의 관계를 알게된 리스트는 바그너에게 ‘당신 내 친구 맞아?’라며 펄펄 뛰면서 두 사람의 연애를 막으려고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딸이 둘이나 생겼던 것이다. 두 사람은 자기들의 관계를 더 이상 감출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위스로 도피하여 결국 결혼했다. 바그너는 코지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들의 이름을 이졸데(Isolde)와 엘자(Elsa)라고 지었다.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후 코지마는 남편 바그너의 위업을 계승하여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를 주관해 왔다. 두 사람이 정식으로 결혼한 후에 태어난 아들 지그프리트(Siefried)는 작곡가가 되어 오페라도 여러 편 작곡했으며 어머니 코지마의 뒤를 이어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를 관장하였다. 이렇듯 바그너의 여성 편력은 복잡하고 화려하다.   

 

바그너의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1869-1930)와 부인 비니프레트(Winifred). 바그너와 코지마 사이에서 태어난 지그프리트는 동성연애자이면서 양성이었다. 지그프리트는 28세 연하의 비니프레트와의 사이에서 네자녀를 두었다. 지그프리트 역시 '방랑하는 화란인'이었다.


베버의 국민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바그너는 베버와 마찬가지로 독일통일과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그의 뮤직 드라마에 담아 내 놓았다. 이와 함께 바그너의 작품에는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전시하는 내용이 은연중 포함되어 있다. 그러한 바그너를 히틀러가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치켜세우고 숭배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따라서 히틀러가 바그너의 음악을 나치의 선전도구로 활용했음은 물론이다. 선전과 선동의 전문가인 히틀러는 어둠의 장막 속에서 대규모 집회를 갖기를 즐겨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피를 끓게 하는 횃불이 타오르고 스와스티카 깃발이 출렁일때 히틀러는 ‘독일 국민이여! 게르만민족의 승리는 눈앞에 있다. 나가자 성스러운 전쟁을 위해서!’라고 외쳤다. 이어서 군중들은 열광적인 함성으로 Sieg Heil(승리 만세)를 세 번 소리치며 이어 바그너의 힘찬 음악이 밤하늘에 울려 퍼진다. 나치가 특히 좋아했던 바그너의 음악은 ‘로엔그린 서곡’, ‘탄호이저 서곡’, ‘발퀴레’에서 ‘발퀴레의 행진’, 그리고 ‘방랑하는 화란인’에서 선원들의 합창 등이다. ‘방랑하는 화란인’에서의 합창은 노도광풍이 몰려오더라도 힘차게 바다를 향하여 나아가자는 내용이다. ‘로엔그린’은 정의를 위해 악인을 퇴치하는 내용이다. ‘탄호이저’는 숭고한 사명을 위해 모든 세상 열락을 저버리고 순례자가 되어 이상을 찾아 떠난다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나치 병사들을 전쟁터로 몰고 가는 데에는 이런 음악들이 더할수 없이 적격이었던 것이다.

 

달란트와 젠타

    

베버와 바그너. 두 사람 모두 드레스덴에서 성장하고 활동했다는 것은 독일 음악사에 있어서 흥미로운 일이다. 베버는 드레스덴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이었다. 바그너는 드레스덴에 있으면서 베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드레스덴은 매일 밤마다 오페라와 발레가 스테이지를 장식하는 곳이다. 예술에 대한 애정이 남다를 곳이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작곡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으며 초자연에 대한 감정을 키워왔다. 베버와 바그너는 대체로 오페라에 게르만민족의 신화나 전설을 소재로 사용했다. 그러나 베버의 오페라가 소박하고 발랄한데 비하여 바그너의 오페라는(나중에는 뮤직 드라마라고 부름) 우주적이면서도 어둡다. 어떤 평론가는 바그너의 오페라에 작위적인 요소가 상당히 들어 있다고 주장하면서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억지로 연계시키려는 의도는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방랑하는 화란인’은 어떠한가?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전설은 13세기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지만 정작 꽃을 피우게 된 것은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였다. 외로운 화란인 선장은 일생을 바다에서 정처없이 방랑해야하는 저주를 받는다. 이 저주로부터 벗어나 구원받으려면 어떤 청순한 처녀로부터 운명적으로 진실한 사랑을 받아야 한다. 이런 전설은 괴테의 파우스트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다. 파우스트는 악마 메피스토의 유혹에 빠져 영혼을 담보로 젊음을 되찾는다. 파우스트는 방탕한 생활을 함으로서 씻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짓지만 청순한 처녀 마르게리트의 희생적인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 이같은 사랑의 위대함과 자유를 향한 집념은 19세기 낭만주의의 전형이었다.

 

바이로이트 무대. 현대적 연출

 

하이네의 스케치에 의하면 ‘방랑하는 화란인’의 배경은 스코틀랜드였다. 바그너는 프러시아에서 런던으로 항해할 때 노르웨이 해안에서 조난당했던 것을 생각하여 무대를 노르웨이로 변경했다. 바그너는 ‘방랑하는 화란인’을 단막으로 처리했다. 그러다보니 세트 준비에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3막으로 고쳤다. 그 후에도 바그너는 여러번 스코어를 수정하였다. 그리하여 초연으로부터 40년후인 1880년 최종 개정본이 무대에 올려지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감상하는 ‘방랑하는 화란인’은 개정본이다. 그러므로 초연 때의 음악과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알길이 없다. 리엔치에 이어 ‘방랑하는 화란인’이 공연되었을 때만해도 사람들은 바그너 오페라의 진면목을 눈여겨보지 못했다. 다만 과거의 표준적이며 전통적인 오페라와는 사뭇 다른 시도였다고 생각했다. 관현악의 구성이 그러했고 무대 세팅이 그러했다. 그리고 멜로디는 가슴을 파고드는 신비스런 것이었다.

 

무대를 일부러 경사지게 구성했다. 마을 여자들이 물레를 돌리고 있고 젠타는 벽에 걸린 방랑하는 화란인의 초상화를 뚫어지게 바라만 보고 있다.


제1막. 폭풍이 휘몰아치는 어두운 바다. 노르웨이 선장인 달란트(Daland: Bass)와 선원들이 죽을힘을 다하여 노도광풍과 싸운다. 마침내 달란트 선장은 가까스로 배를 험준한 표르드 해안으로 피신시킨다. 달란트는 무사히 폭풍우를 피했다는 안도감에 Mit Gewitter und Strum(폭풍 속을 헤치고)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그리고는 너무나 지친 나머지 깊은 잠에 빠진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랑하는 딸 젠타(Senta: Sop)를 생각하며...다시금 하늘이 어두워지고 폭풍이 밀려온다. 그때 핏빛처럼 붉은 돛과 검은 돛대의 유령과 같은 배 한 척이 험준한 해안으로 피신하듯 들어오며 달란트의 배 옆에 정박한다. 유령선에서 내린 선장(화란인: Bass Bar)은 Die Frist ist um(그때가 다가왔도다)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자기의 저주받은 운명에 대한 독백이다. 그는 악마의 저주를 받아 ‘심판의 날’까지 망망대해를 방랑하며 죽지 못할 삶을 살아야 한다. 다만 7년마다 한번씩 육지에 내려서 그를 온전히 사랑해 주는 여인을 만나면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방랑하는 화란인 선장은 오늘이 바로 7년째 되는 날로서 그를 사랑하여 저주에서 구원해줄 여인을 찾아야 했다. 
                               

피날레 장면. 아리조나 오페라

 

깊은 잠에서 깨어난 달란트 선장이 갑판으로 나온다. 달란트는 그때서야 미지의 배 한 척이 그의 배 옆에 정박해 있는 것을 본다. 유령선이 틀림없는 으스스한 모습의 배이다. 배에서 내린 달란트는 먼저 내려와 있는 유령선 선장을 만난다. 화란인 선장은 바다를 방랑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라고 설명하며 그 저주받은 운명은 어떤 청순한 여인이 자기를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보여줄 때에만이 구원받을수 있다는 얘기를 덧붙인다. 화란인은 달란트에게 금은보석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를 보여주면서 이 보화들이 자기를 사랑하는 여인을 찾기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어 화란인은 달란트의 집에서 하룻밤 머물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 달란트는 언제인가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전설을 들은 것을 기억하며 바로 이 사람이 그 화란인이란 것을 알고 놀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달란트는 화란의 저주받은 운명을 동정하는 심정에서, 또 한편으로는 만일 딸 젠타와 화란인 선장이 결혼하게 되면 많은 보화를 얻을수 있다는 생각에서 화란인을 집으로 데려 가기로 한다. 달란트는 화란인에게 자기에게 젠타라는 딸이 있다고 얘기한다. 달란트는 젠타도 자기가 누군가를 운명적으로 구원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얘기를 하려다가 지나친것 같아서 그만둔다. 그 얘기를 들은 화란인은 운명적으로 이제야 저주에서 자기를 구원해줄 여인을 만날 수 있다는 예감을 갖는다. 폭풍이 걷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달란트와 화란인은 각각 배를 몰고 달란트의 집이 있는 항구로 향한다. 선원들이 기운찬 합창을 하면서 돛을 높이 올린다.

 

달란트의 선원들.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 무대

 

제2막. 달란트의 집이다. 벽에는 전설적인 화란인 선장의 창백한 모습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언제부터인지 젠타는 방랑하는 화란인에 대한 전설에 마음이 끌려 전설 속의 화란인을 그린 초상화를 벽에 걸어놓고 매일같이 상념에 잠겨 있다. 오늘도 젠타는 화란인의 초상화를 자기도 모르는 힘에 이끌린듯 응시하고 있다. 마을 처녀들이 벽난로 옆에 앉아 ‘물레의 노래’를 부른다. Humm und brumm, du gutes Rädchen(흠, 휘히, 물레질하세)라는 합창이다. 처녀들의 노래라서 그런지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곡이다. 마치 천사들이 부르는 노래와 같다. 앞으로 일어날 구원의 역사(役事)를 예견해 주는 듯한 노래이다. 이윽고 처녀들은 바다에 나간 애인들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에릭(Erik: Ten)이 젠타를 너무 좋아하는것 같다고 하면서 놀린다. 사냥꾼 에릭은 사실 오래전부터 젠타를 사랑해 왔으며 젠타도 그를 사랑한다고 얘기한 일이 있다.


젠타와 화란인. 바바리아 슈타츠오퍼 무대

 

젠타는 그런 놀림에 아랑곳하지 않고 벽에 걸려 있는 화란인의 초상화만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젠타는 아직 한번도 만난 일이 없는 전설속의 화란인과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젠타는 마을 처녀들에게 저주받은 화란인 선장과 유령선에 대한 전설을 얘기해 준다. Traft ihr das Schiff?(그 배를 보았나요?)라는 유명한 젠타의 발라드이다.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숨막히는 전율의 세계로 빠져들게 하는 아리아이다. 무섭도록 황홀한 곡이다. 어떤 평론가는 ‘조용한 가운데 이 노래를 들으면 마치 자기도 모르게 환상의 세계로 이끌려 가는 듯한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젠타는 그 저주 받은 화란인 선장을 사랑으로 구원하겠다고 말하자 마을 처녀들은 어떻게 그런 무모한 사랑을 할수 있느냐면서 놀란다.

 

마을 사람들의 축하 무대. 현대적 연출

 

에릭이 들어와 달란트의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고 전한다. 마을 처녀들은 모두 선원들을 마중하러 항구로 나간다. 에릭은 젠타에게 운명적 사랑에 대한 허황된 꿈 때문에 멀리 떠나려 하지 말고 고향마을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젠타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잠시후 문이 열리며 달란트가 어떤 사람을 데리고 들어선다. 놀라는 젠타! 바로 초상화의 그 화란인 선장이었다. 젠타는 마법에 취한듯 전율한다. 달란트는 젠타에게 Mögst du mein Kind?(얘야 그렇게 할수 있겠느냐?)라는 아리아를 통해 화란인과 결혼할수 있겠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만일 수락한다면 내일이라고 결혼식을 올리겠다고 말한다. 달란트는 딸 젠타에게 보석들을 보여주지만 젠타의 눈은 화란인에게만 고정되어 있다. 화란인은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여인이 그토록 꿈속에서조차 찾아 헤매던 사람임을 확신한다. 모든 것이 운명인 것을 믿는 젠타는 죽음이 올 때까지 화란인을 사랑하겠다고 선언한다. 화란인은 구원의 기쁨에 넘쳐 그의 배로 돌아간다.

 

브레겐츠 무대. 화란인과의 운명을 생각하고 있는 젠타

 

제3막. 무대 앞쪽에는 달란트의 집이 있고 한쪽으로는 바다가 보인다. 화란인의 유령선은 어둠 속에서 희미한 모습이지만 달란트의 배는 불빛으로 환하다. 달란트의 배에서는 선원들이 무사히 집에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합창이 울려 퍼진다. Steuermann, lass die Wacht(망보는 선원이여, 이제 그만)이라는 내용이다. 힘차고 웅장한 합창이다. 아무리 노도광풍이 몰려온다고 해도 망망대해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합창이다. 마을 처녀들이 먹을 것과 마실 것을 화란인의 배에 가져다주기 위해 몰려나온다. 그러나 화란인의 배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달란트의 선원들은 마을 처녀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유령선의 선원들은 모두 죽었고 선장은 바로 전설 속의 저주받은 화란인이라며 떠들어 댄다. 마을 처녀들은 은근히 두려운 나머지 먹을 것을 담은 바구니를 맡겨놓고 모두 집으로 돌아간다.

 

바이로이트 무대. 현대적 연출

 

바다는 잠잠한데 오직 화란인의 유령선 주위에서만 파도가 높이 치솟는다. 갑자기 화란인의 배 갑판에 파란 불꽃이 넘실댄다. 불길 사이로 선원들의 모습이 유령처럼 나타난다. 선원들은 이번에도 화란인 선장이 신부를 찾지 못하면 자기들도 또다시 7년을 방랑해야 하는 운명임을 비참해 한다. 잠시후 바람과 파도가 언제 그랬냐는 듯 잠잠해 진다. 젠타가 집에서 나온다. 뒤따라 나온 에릭은 젠타가 낯선 사람을 따라 가겠다고 약속한데 대해 몹시 화를 내고 있다. 에릭은 예전에 젠타가 그를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을 회상하며 Willst jenes Tags du nicht dich mehr entsinnen(그날을 더 이상 기억하려하지 않는구려)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이 소리를 들은 화란인은 젠타의 순결하지 않음을 비난한다. 다른 사랑했던 경험이 있는 여인은 화란인을 구원해 줄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구원의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생각한 화란인은 선원들에게 돛을 올리라고 소리친다. 화란인은 비통한 심정에서 Fort auf das Meer(또다시 바다로 떠나야 한다)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젠타는 화란인에 대한 자기의 사랑이 진실되고 영원하다는 것을 눈물로서 호소한다. 이 모습을 본 에릭은 젠타가 악마와 손을 잡았다고 하면서 안타까워한다.

 

브레겐츠 무대

 

화란인은 젠타가 자기에 대한 사랑을 신에게 서약하지 않았으므로 자기와 마찬가지로 악마의 저주에서 피할수 없다고 말하며 젠타의 호소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젠타는 화란인에게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있었으며 무슨 희생을 치루더라고 저주에서 구원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화란인은 젠타를 믿지 않고 다시금 운명의 바다로 떠나기 위해 배에 오른다. 젠타가 화란인을 따라 배에 오르려 하자 아버지 달란트와 에릭, 그리고 마을 처녀들과 선원들이 말린다. 드디어 화란인의 배가 항구를 빠져 나가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그때서야 젠타를 놓아 준다. 젠타는 화란인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심정에서 해변의 절벽으로 올라가 바다로 몸을 던진다. 죽음으로서 화란인에 대한 자기의 순결을 증명코자 한 것이다. 그러자 화란인의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더니 곧 이어 파도가 소용돌이치는 가운데 화란인과 젠터의 형상이 바다로부터 솟아오른다. 두 사람은 마침내 사랑으로 저주를 극복한듯 포옹한채 하늘로 올라단다. 막이 내린다.

 

선원들과 마을 사람들의 축제


이 오페라의 매력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탈리아 스타일이면서도 독일적 낭만주의가 함축되어 있는 작품이라는데 있다. 바그너의 음악은 다분히 초자연적이고 관념적인 표현성을 지닌다. 이 오페라에서도 전편을 통해 초자연적인 음악의 세계가 펼쳐진다. 그리고 항거할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에 과감히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오페라는 아무리 극복할수 없는 초자연적인 난관이라고 해도 순결한 사랑의 힘으로 극복할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젠타는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하나의 순진한 여인일까? 그러나 젠타야 말로 이상을 현실로 승화시키는 순수함의 표상이라고 할수 있다. 젠타는 입센의 노라와 같은 존재이다. 젠타는 사랑의 승리와 사랑의 자유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강인한 여인이다. 그것은 바로 게르만 민족의 강인함을 대변하는 것이다. 바그너의 오페라에는 그런 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오페라 ‘방랑하는 화란인’의 중심 테마는 ‘사랑을 통한 구원’이다. 이후 ‘사랑을 통한 구원’이라는 테마는 바그너의 후속 오페라에 반복적으로 표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