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필견의 33편

투란도트 - 푸치니

정준극 2007. 12. 5. 14:30

투란도트

(Turandot)

G. Puccini

 

푸치니 기념우표. 푸치니 페스티발 50주년 기념이다. 배경은 나비부인 스코어 첫 출판 당시의 표지 그림이다.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 12. 22 - 1924. 11. 29)는 '투란도트'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사족이지만, 우리는 간단히 푸치니라고 부르지만 실상 그의 풀 네임은 상당히 길다. 자코모 안토니오 도메니코 미켈레 세콘도 마리아 푸치니(Giacomo Antonio Domenico Michele Secondo Maria Puccini)이다. 각설하고, 푸치니는 66세 때에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후두암 수술을 받은 후에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3막의 마지막 파트가 미완성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투란도트'의 미완성 부분은 공모라는 형식을 통하여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 1875-1954)라는 작곡가가 완성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무대에 올려지는 '투란도트'는 엄밀히 말하여 푸치나와 알파노의 공동작품이다. 하지만 알파노는 마지막 파트만을 완성했고 더구나 푸치니가 스케치 해놓은 것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에 '투란도트'가 푸치니와 알파노의 합작이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투란도트'의 초연은 1926년 4월 25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극장에서였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지 햇수로는 2년 후였다. 초연의 지휘를 맡은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완성한 부분까지 연주했으며 알파노의 추가부분은 공연하지 않았다. 오페라 '투란도트'의 대본은 카를로 고찌(Carlo Gozzi: 1720-1806)의 원작 희곡을 독일의 프리드리히 쉴러(Friedrich Schiller: 1759-1805)가 산문시로 만든 것을 다시 이탈리아의 주제페 아다미(Giuseppe Adami: 1878-1946)가 레나토 시모니(Renato Simoni)의 협조로 만든 것이다. 주세페 아다미는 푸치니와 콤비가 되어 3부작에서 두 작품인 La rondini(제비)와 Il Tabarro(외투)의 대본을 쓴 일이 있다.  

 

투란도트의 원작자인 이탈리아의 시인 카를로 고찌


'투란도트'(Turandot)는 페르시아어로 ‘투란(Turan)의 딸’이라는 뜻이다. 투란은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한 지역으로 오늘날 중앙아시아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곳이었다. 원래 페르시아에서는 투란독트(Turandokht)라는 전래동화가 있다. Dokht(독트)라는 단어는 고대 페르시아어로 ‘딸’이란 의미이다. 투란독트에 대한 전래동화는 고대 페르시아의 이야기를 모은 The Book of one Thousand and one Days(천일주화: 千一晝話)에 들어 있다. 이 이야기 책은 하룬 알 라시드 치하에서 나온 유명한 The Book of one Thousand and one Nights: 千一夜話)와는 다른 것이다. 천일주화에 따르면 투란독트는 얼음처럼 차가운 성격의 중국 공주이지만 나중에 사랑의 힘으로  온전한 성품의 여인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투란독트에 대한 이야기는 근대 페르시아의 시인인 니자미(Nizami)가 쓴 이야기와 내용이 흡사한 것이다. 역시 곤경에 처한 중국공주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투란도트에 대한 오리진이 페르시아의 천일주화인지 니자미의 대서사시인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어 준다. 천일주화에 들어있는 투란독트에 대한 이야기는 프랑스의 작가 프랑수아 프티 드 라 크로와(Francois Petis de la Croix: 1653-1713)가 번역하여 출판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투란독트라는 이름은 세월이 지나면서 투란도트로 변했다. 이탈리아의 카를로 고찌와 독일의 베르톨트 브레헤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드 라 크로와의 번역물을 바탕으로 삼아서 연극 대본을 썼으며 이탈리아의 작곡가 페루치오 부소니(Ferruccio Busoni: 1866-1924)는 1917년 역시 ‘투란도트’라는 제목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만큼 '투란도트'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를 끄는 것이었다. '투란도트'는 중국에서 한문으로 杜蘭都(떠란도우)라고 표기한다.

 

칼라프 왕자를 만나는 타르타르의 왕과 류. 테아트로 델로페라 디 로마의 무대


푸치니는 1918년 뉴욕에서 3부작(외투, 수녀 안젤리카, 자니 스키키)의 초연을 가진 후에 새로운 오페라의 주제를 선정하지 못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본가인 주세페 아다미, 레나토 시모니와 점심을 함께 하는 자리에서 두 대본가들은 푸치니에게 투란도트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면 어떻겠느냐는 제안했다. 이미 투란도트의 스토리에 대하여 알고 있었던 푸치니는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결정하고 곧바로 구상에 들어갔다. 사실 푸치니는 오래전에 베르디의 '아이다'를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이다'와 같은 그랜드 오페라를 작곡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아이다'가 카이로에서 초연된 때는 푸치니가 16세의 소년이었고 푸치니가 '아이다'를 처음 본것은 18세 때에 피사(Pisa)에서였다. 가난했던 푸치니는 피사에서 '아이다'를 보기위해 고향 루카에서 피사까지를 몇시간에 걸쳐 걸어갔다가 다시 걸어오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므로 어쩌면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아이다'와 같은 그랜드 오페라를 만들겠다는 꿈을 실현코자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유럽 사람들은 이국적인 풍물, 특히 동양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컸다. 처음에는 터키를 비롯한 중근동과 알제리아 등 북부 아프리카 지역을 동양(오리엔트)이라고 간주하여 관심을 기울였으나 차츰 극동인 중국과 일본등에 대하여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라보엠'과 '토스카' 이후 오페라의 새로운 소재를 찾던 푸치니가 동양적인 소재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하여 태어난 것이 사실상 '나비부인'이었고 '투란도트'였다. 한편, 푸치니는 바로 몇해전인 1917년에 부소니가 내놓은 오페라 '투란도트'로부터도 많은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칼라프 왕자(플라치도 도밍고)에게 사랑의 마음을 전하는 류

 

푸치니는 거의 1년에 걸친 구상을 마치고 이듬해인 1921년 1월부터 정식으로 작곡에 착수했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나기 3년전이었다. 1924년 3월쯤에는 투란도트공주와 칼라프 왕자와의 마지막 듀엣만 남겨 놓고 거의 작곡을 마친 입장이었다. 그러나 10월 8일까지 통 진전을 보지 못했다. 마지막 듀엣에 대한 아다미의 가사가 별로 마음에 들이 않아서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이틀후인 10월 10일 후두암으로 진단을 받았고 몇주후에 벨기에의 브뤼셀로 치료를 받으러 떠나야 했다. 푸치니는 11월 24일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닷새후인 11월 29일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어떤 기록에는 11월 28일 수술을 받았으며 다음날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되어 있지만 아무튼 11월 말에 세상을 떠난 것만은 틀림없다. 푸치니는 이탈리아를 떠나 벨기에의 병원에 오기 전에 '투란도트'의 마지막 부분에 대한 스케치를 남겨 놓았다. 36페이지에 달하는 스케치였다. 푸치니는 미완성 부분을 리카르도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 1883-1944)가 완성해야 한다는 메모도 남겨 놓았다.

 

알툼 황제와 투란도트 공주

 

장례식이 끝난후 악보출판가인 리코르디는 푸치니의 유언대로 찬도나이에게 미완성부분의 완성을 부탁하려 했으나 느닷없이 푸치니의 아들인 토니오(Tonio)가 반대했다. 이유는 확실치 않았지만 당시 찬도나이가 너무 유명하여 혹시 아버지인 푸치니의 이름이 가려지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 결국 토리노(Torino)음악원장인 프랑코 알파노가 푸치니가 남긴 스케치에 살을 붙이도록 선정되었다. 알파노는 마지막 파트의 아리아에 자기 자신의 음악을 추가하였고 가사부분도 덧붙였다. 가사부분은 푸치니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부분이었다. 알파노의 버전은 악보출판가인 리코르디와 지휘자인 토스카니니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이게 아닌데!’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알파노는 마지막 부분을 다시 손질해야 했다. 리코르디가 염려하였던 것은 알파노의 재능이 아니었다. 알파노는 훌륭한 재능을 보여 주었다. 다만, 리코르디는 '투란도트'의 마지막 파트를 마치 푸치니가 직접 작곡한 것처럼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파노는 마지막 파트를 다시 완성했다. 현재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알파노의 두 번째 버전이다. 물론 아직까지도 첫 번째 버전이 더 훌륭하다는 의견이 있기는 하다.


 

프랑코 알파노


초연은 1926년 4월 25일 일요일 라 스칼라에서였다. 정확히 말하면 푸치니 사후 1년 5개월만이었다. 푸치니를 가장 잘 이해한다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가 지휘했다. 오페라 '투란도트'에 대하여는 푸치니가 작곡을 착수할때부터 수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었으므로 이날의 초연은 그야말로 세계의 관심을 받는 것이었다. 제3막의 중간이 지날 무렵 토스카니니는 갑자기 바톤을 내려놓고 지휘를 중단하였다. 그는 객석을 향하여 몸을 돌려 Qui finisce l'opera, perche a questo punto il maestro e morto(여기에서 오페라가 끝납니다. 이 부분에서 마에스트로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떤 기록에 의하면 이 장면에서 토스카니니가 보다 시적(詩的)으로 ‘선생께서는 이 부분에서 펜을 내려 놓으셨읍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장내에서는 숙연한 박수가 물결을 이루었다. 커튼이 천천이 내려졌다. 그 다음의 공연부터는 알파노의 마지막 파트가 포함되었다. 마지막 미완성 부분에 대하여는 2001년 루치아노 베이로(Luciano Beiro)가 나름대로 별도론 작곡한 것이 있으나 오늘날 거의 연주되고 있지 않다. 오페라 아메리카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투란도트'는 북미에서 가장 사랑받는 20대 오페라중 12번째이다.


 

생전의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밀라노에서)

                                    

오페라 '투란도트'는 슬프면서도 환희에 넘친 스토리도 구성되어 있다. 비통한 과거의 아픈 상처와 새로운 사랑의 기쁨이 공존하여 있는 작품이다. '투란도트'의 무대는 화려하면서도 신비스럽다. 동양적인 무대와 의상과 멜로디가 전편에 걸쳐 현란하게 수놓아져 있기 때문이다. '투란도트'는 스토리가 재미있다. 황궁의 현자들인 핑, 팽, 퐁 세사람이 엮어내는 코믹 연기, 그리고 이들의 격언과 같은 대사는 전체적으로 비극적인 흐름에 청량제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오페라에는 절세미모의 공주(투란도트), 담대하고 열정적인 왕자(칼라프), 나라를 잃고 방랑하는 왕(티무르), 왕자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여노예(류)등 흥미를 끌기에 충분한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이렇듯 오페라 '투란도트'는 드라마틱하며 로맨틱한 오페라로서 모든 구성요소가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에 덧 붙여서 비단과 같이 아름답고 매끄러운 아리아들...그 중에서도 칼라프왕자의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는 테너라면 반드시 한번 쯤은 도전해 보고 싶은 말할수 없이 감미롭고 열정적인 아리아로 유명하다. '투란도트'의 무대는 중국의 베이징. 전설 속의 임의 시기이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무대

 

제1막은 황궁 앞 광장이 무대이다. 무대 한쪽에는 황궁으로 통하는 궐문이 높이 서있고 궐문 앞에는 커다란 공(Gong: 구리로 만든 징과 같은 타악기)이 걸려 있다. 황궁에는 신비스러움에 가려있는 천하제일의 미인 투란도트(Turandot: Sop)공주가 아버지인 알툼(Altoum: Ten) 황제와 함께 살고 있다. 연로한 황제는 어서 속히 공주를 혼인시켜 황제의 위를 이양하려한다. 공주는 결혼에 대하여 극심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아버지 황제의 지극한 간청에 못이겨 세가지 수수께끼를 내걸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선포한다. 하지만 수수께끼를 풀지 못할 경우, 청혼자는 참수를 당해야 한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이미 여러 왕자들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의 수급이 황궁의 담장에 걸리게 되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공주를 어름과 같이 차갑고 냉혹한 시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공주가 어찌하여 그토록 냉혹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사연은 제2막에서 공주가 부르는 아리아 In questa Reggia(이 황궁에서)에 설명되어 있지만 미리 아는 것이 도움이 될것 같아 소개한다.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의 '투란도트' 무대
     

‘먼 옛날 베이징의 황궁에서는 참혹한 비명이 울려 나왔어요/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지금도 귀에 들리는 그 비명소리/ 로우링(Lo-u-ling)여왕은 인자하고 아름다운 분/ 백성들을 사랑하셨지요/ 그런데 야만적인 타타르의 왕이 침략하여 사랑스러운 로우링 여왕을 능욕한 후에 잔인하게 살해하였지요/ 가여운 여왕님. 원수를 갚겠어요/ 순결했던 여왕님의 비명과 비참한 죽음/ 지금도 내 마음속에 남아 있답니다/ 그 잔혹한 비명소리가 사라지지 않는한 누구에게도 나를 맡길수 없어요/ 수수께끼는 세 개. 죽음은 하나/ 수수께끼를 풀수 있는 사람만이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수 있답니다....’라는 내용이다.

 

테아트로 델로페라 디 로마의 무대. 류의 죽음 장면. 진시황제능의 의용을 엑스트라로 사용하여 이채롭다.
                                         

페르시아 왕자가 투란도트의 수수께끼에 도전했지만 풀지 못한다. 달이 떠오를 때에 페르시아 왕자를 참수형에 처한다는 포고문이 내걸린다. 군중들은 마치 피에 굶주린듯 어서 처형 준비를 하라고 소리친다. 군중들의 소란 속에 어떤 노인이 쓰러져 있고 젊은 여인이 그 노인을 돌보고 있다. 남루한 모습이 걸인과 다름없다. 군중들 틈에 섞여 있던 어떤 젊은이가 이 노인을 알아보고 놀란다. 노인은 추방당한 타르타르(Tartar)의 왕 티무르(Timur: Bass)이고 젊은 여인은 타르타르 왕궁의 노예 류(Liu: Sop)이다. 그리고 젊은이는 티무르의 아들 칼라프(Calaf: Ten)이다. 티무르 왕과 칼라프 왕자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서로의 생사를 모르고 있었으나 우연히 베이징의 황궁 앞에서 만나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다. 하지만 신분이 발각되면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므로 말을 하지 못한다. 여노예 류는 유일하게 티무르 왕을 모시고 방랑의 길을 함께 걷고 있는 마음씨 착하고 아름다운 여인이다. 류는 오래전 타르타르의 왕궁에서 칼라프 왕자를 보고 사모의 정을 간직하고 있었지만 노예라는 신분 때문에 자기의 속마음을 한번도 내색하지 못했었다. 이날도 류는 우연히 베이징의 황궁 앞에서 오매불망하던 칼라프 왕자를 만나 기쁜 마음이 한이 없었지만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다.

 

핀랜드 내셔널 오페라 공연


군중들이 다시 광장으로 몰려나온다. 군중들은 달이 떠오르기만을 고대하면서 Perche tarda la luna(어찌하여 달은 늦게 뜨는가)라는 합창을 부른다. 드디어 사형집행 행렬이 도착한다. 황궁의 담장 저 높이 투란도트 공주의 모습이 비로소 보인다. 공주는 페르시아 왕자를 처형하라고 냉혹하게 명령한다.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칼라프 왕자는 투란도트 공주를 보는 순간 운명적인 사랑을 느낀다. 왕자는 공주의 사랑을 얻기 위해 누구도 풀지 못했던 수수께끼에 과감히 도전키로 결심한다. 왕자가 수수께끼에 도전하기 위해 궐문 앞에 걸려 있는 공을 울리려고 할때 황궁에서 핑, 팽, 퐁이 나타나 칼라프 왕자에게 어찌하여 쓸데없이 목숨을 버리려 하느냐면서 도전을 만류한다. 핑(Ping: Bar)은 승상과 같은 높은 지위의 사람이며 팽(Pang: Ten)은 황제의 시종장(또는 창고관리인)이고 퐁(Pong: Ten)은 황실 주방장이다. 중국에서는 주방장이 대단히 높은 지위이다. 이들은 칼라프에게 ‘투란도트는 하나의 여자일 뿐, 여자 한 사람 때문에 젊은 인생을 포기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서 세상에는 아름답고 매력 있는 여자들이 얼마든지 있으므로 굳이 공주를 마음에 둘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더구나 공주의 수수께끼는 그 누구도 풀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들은 ‘그대가 말하는 사랑이란 것은 환상에 불과한 것이며 죽은 후에는 그 환상조차 있을수 없다’고 말하면서 다시한번 단념할 것을 당부한다. 티무르와 류도 칼라프를 만류한다. 류는 칼라프에게 오래전부터 사모하고 있었다고 처음으로 고백하며 만일 왕자가 죽임을 당한다면 그 괴로움은 견딜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때 부르는 류의 아리아가 Signor, ascolta(주인님, 들어주세요)이다. 하지만 칼라프는 투란도트에 대한 사랑이 운명적인 것을 다시한번 생각하고 Non piangere, Liu!(울지 말아요, 류야!)라는 아리아를 부른후 만일 자기가 죽게 되면 아버지를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는 공(Gong)을 크게 세 번 울린다.

 

황궁의 세 사람(핑, 팽, 퐁)이 칼라프를 설득하고 있다.


제2막의 첫 장면은 황궁의 어느 방이 무대이다. 황궁의 세 사람이 ‘이번에는 결혼식이 될까? 그렇지 않으면 장례식이 될까?’라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협의하고 있다. 세 사람은 만일 투란도트 공주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정말 큰일이라고 걱정한다. 너무나 냉혹하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공주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어서 나타나 계속되는 이 끔찍한 처형이 제발 끝나게 되기를 바란다. 장면은 바뀌어 무대에는 황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높이 설치되어 있다. 황궁의 관리들과 병사들이 계단을 중심으로 도열해 있다. 계단의 맨 위에는 여덟명의 현자들이 서 있다. 이들은 세가지 수수께끼가 적혀있는 비단 족자를 들고 있다. ‘미지의 왕자’인 칼라프가 천천히 들어와 계단 아래에 선다. 이제 공주가 등장한다. 계단의 중앙에 자리 잡은 공주는 앞에서 설명하대로 In questa Reggia(이 왕궁에서)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자기의 마음이 왜 이렇게 차갑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아리아이다. 이어 공주는 ‘수수께끼는 세가지, 목숨은 하나’라고 말하며 칼라프에게 목숨을 걸지 말라고 충고한다. 칼라프는 ‘수수께끼는 세가지, 삶은 하나’라고 대꾸하며 굳센 의지를 밝힌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투란도트 무대

      

드디어 공주가 수수께끼를 낸다. 첫 번째 수수께끼: ‘밤마다 유령처럼 떠돌아다니지만 동이 트면 마음속에서 다시 솟아나는 것은 무엇인가?’이다. 칼라프는 ‘희망’(La Sprenza)이라고 대답한다. 문제를 내는 황궁의 현자들이 놀라는 눈치이다. 두 번째 수수께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것, 승리에 도취하면 펄펄 솟구치며 해처럼 작렬하기도 하지만 죽음과 함께 차가워지는 것은 무엇인가?’ - 대답은 ‘피’(Il Sangue)였다. 황궁의 현자들이 더욱 놀란다. 마지막 수수께끼: ‘어름같이 차갑지만 불꽃처럼 뜨겁기도 한 것. 순간이 지나간 후에는 영원처럼 보이는 것이 무엇인가?’이다. 칼라프는 담대하게 ‘그것은 투란도트  바로 당신!'이라고 소리친다. 공주의 놀라움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풀지 못했던 공주의 세가지 수수께끼는 미지의 청년에 의해 모두 해답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공주의 마음은 누군지도 모르는 이 청년과 결혼할 생각이 추호도 없다. 공주는 신분도 모르는 사람과 결혼할수 없다고 말하면서 결혼하지 않겠다는 심정을 계속 다짐한다. 이에 칼라프 왕자는 만일 공주가 새벽까지 자기의 이름을 알아내면 자기가 죽임을 당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자기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다.

  

플로리다 그랜드 오페라의 포스터 그림

                    

제3막의 첫 장면은 황궁의 정원이다. 한밤중이다. 공주는 베이징의 모든 백성에게 ‘미지의 젊은이’의 이름을 알아내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잠을 잘수 없다고 명령한다. 그리고 만일 새벽까지 그 젊은이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하면 연관된 백성들을 모두 처형하겠다고 선언한다. 잠시후 칼라프 왕자는 공주의 침실 밖 정원에서 유명한 아리아 Nessun dorma(아무도 잠을 잘수 없도다: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부른다. 칼라프 왕자는 공주도 이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있음을 알고 있다. 칼라프는 어서 날이 밝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날이 밝으면 스스로 이름을 밝히고 두 사람의 결혼을 온 천하에 알린 작정이다. 그때 어둠 속에서 핑, 팽, 퐁이 나타나 칼라프에게 제발 이름을 알려 달라고 간청한다. 이들은 무고한 백성들이 처형당하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대신 칼라프에게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을 제공하겠다고 제안한다. 여러 명의 여인들이 나타나 칼라프 앞에서 매혹적인 춤을 추며 유혹한다. 그러나 칼라프는 흥미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세 사람은 이번에는 커다란 궤짝을 가져와서 그 안에 가득차 있는 금은보화를 모두 주겠다고 제안한다. 칼라프는 또 다시 거절한다. 세 번째로 세사람은 베이징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나라의 왕이 되도록 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칼라프는 그 어떤 것이라도 투란도트 공주와는 비교할수 없다고 말한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 무대

                        

마침 그 때 병사들이 티무르 왕과 류를 붙잡아 온다. 병사들은 이 두 사람이 ‘미지의 젊은이’와 함께 있었으므로 이름을 알것이니 밝히라고 강요하며 무자비하게 발길로 차고 때린다. 이 광경을 본 칼라프는 ‘이 두 사람은 나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외치며 병사들을 제지하려한다. 황궁의 발코니에 투란도트가 나타난다. 병사들에게 잡혀 있는 류는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티무르왕을 구하겠다는 생각으로 공주에게 자기만이 ‘미지의 젊은이’의 이름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공주는 젊은이의 이름을 밝힐 때까지 류를 고문하라고 명령한다. 류는 죽음이 오더라도 이름을 밝힐수 없다고 당당하게 나온다. 공주는 류의 태도에 감동한듯 류를 놓아 주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류에게 ‘무엇이 그런 용기를 갖게 했는가?’라고 묻는다. 류는 ‘사랑’이라고 대답한다. 류는 Tanto amore segreto(혼자말의 비밀스런 사랑)이라는 아리아를 통해 자기가 어떻게 왕자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얼마나 그를 사랑하는지를 설명한다. 그러면서 투란도트 공주에게 Tu che di gel sei cinta(그대가 어름처럼 차갑더라도)라면서 결국은 사랑에 정복당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마친 류는 옆에 있는 병사의 칼을 빼앗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모두들 순간적으로 일어난 이 끔찍한 일에 충격을 받는다.

 

북경 성문 앞에서의 경극


군중들이 모두 퇴장하고 무대에는 칼라프 왕자와 투란도트 공주만이 남아 있다. 칼라프는 공주의 냉혹함으로 결국 류까지 목숨을 끊은데 대하여 원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공주에 대한 불타는 사랑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공주의 얼굴을 가렸던 베일을 벗기고 정렬적인 키스를 한다. (여기까지를 푸치니가 완성했다.) 칼라프는 공주에게 자기를 사랑해 달라고 간청한다. 처음에는 젊은이를 경멸했디만 뜨거운 키스 후에 차갑기만 하던 공주의 마음이 칼라프의 뜨거운 사랑으로 녹아내린다. 어느덧 공주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공주와 칼라프는 Del primo pianto(나의 첫 눈물)라는 듀엣을 부른다. 공주는 칼라프에게 아무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할 때에 비밀을 간직한채 떠나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칼라프는 공주에게 자기가 정복당한 타르타르의 티무르 왕의 아들 칼라프 왕자라고 밝히며 그의 목숨을 공주의 손에 넘긴다. 공주는 타르타르라는 말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저 옛날 로우링 여왕을 생각해서이다. 공주는 지금이라도 칼라프를 파멸시킬수 있다. 밤이 지나고 아침에 밝아 온다는 나팔소리가 울린다. 만일 지금이라도 투란도트 공주가 칼라프라는 이름을 밝힌다면 약속대로 칼라프 왕자는 목숨을 내 놓아야 한다.


투란도트 (에바 마튼)


장면은 바뀌어 제2막에서의 계단이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아침이 밝았다. 알툼 황제를 비롯하여 황궁의 모든 관리들이 나와 있고 백성들도 몰려와 있다. 백성들 사이에서 칼라프의 모습이 보인다. 드디어 투란도트 공주가 나타난다. 공주는 ‘미지의 젊은이’의 이름을 알아 냈다고 말한다. 백성들은 큰 안도의 기색이다. 공주는 그 젊은이의 이름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칼라프 왕자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공주와 감격스러운 포옹을 한다. 모든 백성들이 O sole! Vita! Eternita(오 태양이여, 삶이여, 영원이여!)라며 환호하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대구 오페라축제에서의 투란도트

                                    

[한마디] 중국은 오랫동안 투란도트의 공연을 금지하였다. 중국과 중국인민들을 좋지않게 그렸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말에 가서 금지조치가 해제되었다. 1998년 9월 투란도트는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8일 동안 매일밤 공연되었다. 중국 정부가 많은 지원을 했다. 자금성을 무대로 사용토록 허락한 것도 그렇고 중국인민해방군을 엑스트라로 동원한 것도 그렇다. 야외공연이었지만 자금성의 태화전(太和殿)을 무대로 한 공연이었으므로 그 찬란한 무대는 필설로 설명키 어려운 것이었다. 자금성에서의 투란도트 공연은 국제합작이었다. 안무는 중국의 유명한 장 이무(Zhang Yimou: 張藝謀: 1951-)가 맡았고 지휘는 인도 출신의 주빈 메타(Zubin Metha)가 맡았다. 투란도트 공주역은 이탈리아 출신의 소프라노 조반나 카솔라(Giovanna Casolla)였으며 칼라프 왕자역은 러시아 출신의 세르게이 라린(Sergey Larin)이었다.

 

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 그런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투란도트는 사랑이라는 해답을 얻는다.
                                  

[한마디 더] 푸치니는 나비부인에서처럼 동양적인 선율을 감칠듯이 사용하였다. 투란도트에서는 중국 전통음악을 주제로 한 파트가 8곳이나 등장한다. 중국의 민요인 Mo Li Hua(茉莉花: 자스민)의 멜로디도 여러번 반복되어 나온다.

 

미국 산타 페에서의 공연

 

[또 한마디 더] 푸치니가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뉴스는 당장 로마에 도착했다. 마침 그 시간에는 로마의 코스탄치 극장에서는 라 보엠이 공연되고 있었다. 극장장이 무대 앞에 나와 푸치니의 서거 소식을 전했다. 오페라는 즉시 중단되었다. 잠시후 오케스트라는 쇼팽의 장송행진곡을 연주했다.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밀라노에서의 푸치니 장례식에서는 라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가 토스카니니의 지휘로 푸치니의 첫 오페라인 Le Villi(빌리)에 나오는 ‘안나의 장송곡’을 연주했고 무쏠리니가 추도연설을 했다. 푸치니의 유해는 처음에 친구인 토스카니니의 가족묘지에 안장되었으나 2년후 아들 토니오의 주장에 따라 푸치니가 생전에 작품을 쓰며 지냈던 호수마을 Torre del Lago(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별장에 특별히 마련한 채플로 옮겨졌다.

 

오스트리아에서 발행한 투란도트 기념우표


[마지막으로 한마디] 푸치니는 Turandot를 ‘투란도’라고 발음하고 마지막의 t는 발음하지 않았다. 투란도트 공연에서 타이틀 롤을 자주 맡았던 로사 라이사(Rosa Raisa)도 항상 ‘투란도’라고만 발음했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더] 미완성인 '투란도트'를 프랑코 알파노가 완성했다는 것은 다 아는 사항이지만 이탈리아의 현대 작곡가인 루치아노 베이로(Luciano Beiro: 1925-2003)도 '투란도트'의 엔딩 부분을 완성하였다. 다만, 프랑코 알파노는 푸치니의 유족들, 그리고 동료인 토스카니니의 요청에 의해 완성하였지만 베이로는 자발적으로 완성하였다. 베이로가 완성한 '투란도트'는 2002년 1월 24일 라스 팔마스에서 처음 공연되었으며 그해 말에는 로스안젤레스에서 공연되었다.

 

류의 크리스틴 젭슨. 메트로폴리탄

 

[마지막으로 한마디] BC 5세기에서 3세기에 이르는 기간에 중앙아이사에는 페르시아(파사)제국이 있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아하수에로왕과 하만 총리에 대한 이야기는 페르시아 제국 당시의 이야기이다. 이 제국의 한 파트로서 투란(Turan)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투란이라는 말은 '투르(Tur)의 나라'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투란의 백성들, 즉 투란 사람들(Turanians)은 원래 이란 사람들(Iranians)라고 할수 있다. 투르는 전설적인 이란의 왕인 페레이둔(Fereydun)의 둘째 아들이다. 투르라는 말은 '용맹하다'는 뜻이다. 투르 왕자가 어느날 자기와 자기 형제들을 공격한 용을 용감하게 무찔렀기 때문에 투르라는 이름이 붙었다. 페레이둔 왕은 죽음을 앞두고 아들들에게 나라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투르에게는 오늘날의 투르키스탄과 중국을(아마 서역에 가까운 중국 땅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됨) 주었다. 이로써 투란 왕국이 시작되었다. 투란왕국은 이란의 이웃으로서 라이발이었다. 투란도트는 '투란의 딸'이라는 의미이다. 짐작컨대 투르왕의 후손일 것이다. 원래 페르시아 전설에 의하면 투란의 딸은 투란독트(Turandokt)라고 불렀다. 독트라는 말은 이란어로 딸(Daughter)라는 뜻이다. 페르시아어로는 투란독트이지만 이탈리아어로는 투란도타(Turandotta)이지만 대본을 쓴 카를로 고찌(Carlo Gozzi)가 베니스 사람이므로 베니스 사투리에 의해 마지막 실러블의 자음은 발음을 하지 않으므로 투란도(Turando)가 되지만 남자의 이름처럼 들리므로 Turandot 라고 쓰게 되었다. 물론 이탈리아에서의 발음은 투란도트가 아니라 투란도라고 한다. 하지만 투란도트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 일반화되어서 요즘엔 이탈리아에서도 투란도가 아닌 투란도트라고 부른다.

 

베로나 야외극장에서의 공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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