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필견의 33편

트리스탄과 이졸데 - 바그너

정준극 2007. 12. 6. 13:46

트리스탄과 이졸데

(Tristan und Isolde)

Richard Wagner

 

리하르트 바그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12번째 오페라이다.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과 같은 비극적인 사랑이 테마이다. 이 오페라에 나오는 사랑의 테마(Liebestot) 음악은 그러한 비극적인 내용을 압축하여 표현하고 있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가 46세 때인 1859년에 완성하였으며 초연은 그로부터 6년후인 1865년 뮌헨에서 있었다. 기왕에 뮌헨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저명한 지휘자 두명이 뮌헨의 같은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다가 그 자리에서 쓰러져 세상을 떠난 일이 있다. 마치 주인공인 트리스탄이 죽음을 선택한 것처럼! 한사람은 비엔나 출신의 유명한 지휘자 겸 작곡가인 펠릭스 모틀(Felix Mottl: 1856-1911)이다. 1911년 7월 2일 뮌헨 오페라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제2막을 지휘하던중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또 한사람의 지휘자는 독일 출신의 유명한 요셉 카일베르트(Joseph Keilberth: 1908-1968)로서 1968년 뮌헨의 바로 그 극장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하던중 느닷없이 쓰러져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이다. 다만 생각컨대, 온 열정을 쏟아부으며 지휘해야 하므로 기력이 소진되어 쓰러지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다. 

                

  

지휘자 펠릭스 모틀(왼쪽)과 요셉 카일베르트(오른쪽)


1865년 6월 10일 뮌헨 오페라극장에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은 유명한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ülow: 1830-1894)가 지휘했다. 이 지휘자에게도 사연이 많다. 폰 뷜로브는 열렬한 바그너 후원자였다. 그의 부인은 프란츠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 리스트(Cosima Liszt)였다. 코지마는 나중에 바그너와 뜻이 맞아 폰 뷜로브와 이혼하고 바그너의 두 번째 부인이 된 사람이다. 말로는 이혼을 하고 바그너와 재혼한 것처럼 들리지만 실은 남편을 버리고 바그너를 따라 스위스로 도피하여 함께 지내다가 나중에 이혼을 한 것이다. 지휘자 폰 뷜로브는 자기 부인인 코지마가 바그너와 이상한 관계에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트리스탄과 이졸데’ 초연의 지휘를 맡았다. 그만큼 바그너 신봉자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본은 바그너 자신이 썼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쓰부르크(Gottfried von Strassburg: - c 1210)가 남긴 중세독일의 낭만적 스토리를 기본으로 삼은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서구 고전음악 작곡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구스타브 말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알반 베르크, 아놀드 쇤베르크 등은 모두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썼다. 사람들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고전음악의 근간이 되는 전통적인 화음과 음조로부터 벗어나 20세기의 무조운동을 이끈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을 지휘한 한스 폰 뷜로브. 그의 부인이 나중에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이 된 코지마였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함에 있어서 마틸데 베젠동크(Mathilde Wesendonck: 1828-1902)와의 연애사건, 그리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의 철학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오늘날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세계 오페라 레퍼토리에 있어서 정상에 있는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바그너의 천재적 기법에 의해 완성된 작품이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이 오페라에서 크로마티시즘(Chromaticisim), 조성(Tonaility), 오케스트라 색채, 하모니 계류(Harmony suspension)를 사용하는 선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그너와 염문을 뿌렸던 시인 마틸데 베젠동크 


1849년 바그너는 드레스덴 오페라의 지휘자 직책을 박탈당했다. 이른바 ‘5월 혁명’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5월 혁명’은 베를린에서 불길이 올라 전 독일로 파급되었고 드레스덴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겉으로는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였지만 속으로는 공화제를 바라는 운동이었다. 혁명이 진정되자 간접적이나마 ‘5월 혁명’ 운동에 관여했던 바그너를 체포하라는 현상 포스터가 붙었다. 바그너는 첫번째 부인인 여배우 민나(Minna)를 드레스덴에 남겨둔채 스위스의 취리히로 도주했다. 몇 년후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오토 베젠동크(Otto Wesendonck)라는 사람을 만났다. 베젠동크는 뉴욕과의 비단무역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었다. 베젠동크는 바그너 열렬한 후원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수년동안 바그너를 조건 없이 재정 지원했다. 베젠동크의 부인인 마틸데도 바그너를 대단히 숭배하였다. 베젠동크 부인은 문학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게다가 상당한 미모였다. 바그너와 마틸데의 관계는 작곡가와 후원자 이상의 이성적인 것으로 발전하였다. 당시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의 두 번째 작품인 '발퀴레'의 제2막을 작곡하고 있었으나 마틸데와의 열애로 인하여 독일 중세로부터의 전설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어찌보면 자기 자신과 마틸데와의 사랑이 그와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만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하여 손을 뗄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정신을 빼앗기다 보니 ‘니벨룽의 반지’는 밀려서 그로부터 11년후에나 완성되었다. 사족이지만, 바그너의 ‘베젠동크의 시에 의한 5편의 가곡’(Wesendonck Lieder)은 마틸데의 시를 가곡으로 만든 것이다. 마틸데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대사(가사)를 도와주기도 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을 비유한 클림트의 '키쓰' 디테일


19세기 중반에 있어서 독일 낭만주의 음악은 중세로부터의 전설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 바그너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그너는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트리스탄', 그리고 ‘니벨룽의 노래’는 물론이고 볼프람 폰 에센바흐(Wolfram von Eschenbach)의 '파르지팔'(Parzival)로부터도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중에서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스토리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할 만한 로망스였다. 그러던중 바그너는 친구인 카를 리터(Karl Ritter)가 바그너에게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오페라로 작곡하라고 적극 권면하는 바람에 이윽고 작곡을 결심했다고 한다. 마침 당시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심취하고 있었다. 심각함 중에서 무아경의 황홀한 표현을 모색하는 것이다. 바그너는 이것이야말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스토리와 맞아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콘월 궁전의 정원에서 밀회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멜로트가 엿보고 있는 그림. Edumund Blair Leighton(1853-1922) 작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스토리가 매우 흥미롭고 감동적이기 때문에 중세로부터 음유시인(troubadour)들의 단골 메뉴였다. 음유시인들은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원래의 전설에 살을 붙여 더욱 실감나게 이야기를 끌어 나갔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 또는 민족에 따라 내용에 약간씩 차이가 있게 되었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스토리는 12세기에 이르러 처음으로 기록으로 정리되었으며 그후 많은 문인들이 그들의 작품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을 나름대로 각색하여 실어 놓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의 시성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는 그의 연옥(Inferno) 제5편에서 트리스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으며 훨씬 근대에 들어서서는 영국의 위대한 시인 테니슨(Alfred Tennyson: 1809-1892)이 그의 명작 Idylls of the King(왕의 에피소드)에 트리스탄의 이야기를 첨가한 것은 좋은 예이다.

 

테니슨의 '왕의 에피소드' 또는 '왕의 목가' 삽화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작곡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는 취리히에 있는 베젠동크의 저택에서 살았다. 베젠동크의 호의로 저택 한편에 있는 별장에서 마음 놓고 작곡에만 전념하게 된것이다. 바그너는 이곳에서 베젠동크의 부인인 마틸데와 열정적인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 관계가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 알수 없다. 한가지 흥미 있는 사실은 1857년의 9월 어느날 바그너는 몇사람의 지인들을 초청하여 자기가 쓴 대본을 읽어주는 시회(詩會)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 바그너의 현재 부인인 민나, 연인관계에 있는 마틸데 베젠동크, 그리고 장래의 정부가 되는 코지만 폰 뷜로브가 함께 참석했다는 것이다. 세 여인의 운명적인 회합이었다. 바그너는 오페라의 대본(Libretto)을 시(Poem)라고 불렀다. 1857년 10월 쯤해서 바그너는 제1막의 음악 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11월에는 5편의 마틸데의 시에 음악을 붙였다. 바그너가 마틸데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지를 이들 가곡을 베젠동크 가곡(Wesendonck Lieder)이라고 부른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이듬해 4월 바그너의 부인인 민나는 바그너가 마틸데에게 보내는 연애편지를 우연히 가로채어 보고는 속이 상해서 바그너와 마틸데의 불륜을 거칠게 비난했다. 당시 민나는 심장이 좋지 않았었다. 바그너는 민나를 겨우 진정시켜 온천장에 가서 휴양을 하도록 했다. 한편 오토 베젠동크는 자기의 부인인 마틸데가 바그너와 깊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일단 마틸데를 이탈리아로 보냈다. 한편, 민나는 바그너가 용서를 빌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를 믿지 못하여 결국 별거를 제안했다. 바그너는 기분도 꿀꿀하여서 베니스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제2막을 8개월간 베니스에서 귀양아닌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때 완성했다. 바그너는 베니스에서의 타향살이를 끝내고 작소니(Saxony)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아직도 현상수배가 해제되지 않아서 갈수가 없었다. 바그너는 스위스의 루체른으로 가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막을 완성했다. 1859년 8월이었다. 바그너의 첫째 부인 민나 플라너에 대한 일화는 ‘방랑하는 화란인’ 편에 조금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바그너의 첫째 부인인 민나 플라너(Minna Planer). 여배우였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무대에 올리기가 어려운 오페라였다. 연출과 무대 조건에 따라 음악의 해석이 달라질수 있기 때문이었다. 19세기 중엽이던 당시에는 파리가 유럽 오페라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파리에서 무대에 올리기를 꺼려 했다. 왜냐하면 파리에서의 '탄호이저' 공연이 대실패였기 때문이었다. 바그너는 칼스루에(Karlsruhe)오페라와 접촉했다. 그러는중 합당한 주연급 출연자를 물색하기 위해 비엔나를 방문하였다. 비엔나 궁정오페라극장(현 슈타츠오퍼의 전신)의 극장장(또는 지배인)은 바그너에게 칼스루에까지 갈 필요 없이 비엔나에서 초연을 갖자고 제안하였다. 궁정오페라극장장은 트리스탄 역으로 어떤 테너를 추천했다. 그러나 그 테너는 트리스탄에 대하여 잘 알지 못했다. 그러니 자기 역할이 무엇인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그래도 슈타츠오퍼의 극장장이 추천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참고 연습을 진행시켰다. 1862년부터 1864년까지 2년동안 리허설이 계속되었지만 진전이 없었다. 비엔나에서의 공연은 불가능했다. 칼스루에에서도 바그너 오페라를 소화할수 있는 테너와 소프라노(헬덴테너, 헬덴소프라노)를 구하기 어려워 당장 공연하기 어렵다는 통보가 왔다. 대신 이득도 있었다.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공연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라는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무대

 

그때 바바리아의 루드비히2세 왕이 바그너에게 뮌헨에서 공연할수 있도록 주선해 주겠다고 제안하였다. 루드비히2세는 나중에 매드 루드비히라고 불린 사람으로서 바그너의 추종자였다. 한스 폰 뷜로브가 지휘자로 선정되었다. 부인 코지마 폰 뷜로브와 바그너가 불륜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휘를 맡았다. 초연은 1865년 5월 15일 예정되어 있었으나 이졸데 역을 맡은 소프라노 말비나 슈노르(Malvina Schnorr)가 갑자기 목에 이상이 생가는 바람에 초연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트리스탄 역의 테너는 루드비히 슈노르(Ludwig Schnorr)로서 소프라노 말비나와는 부부사이였다. 그리하여 거의 한달 후인 6월 10일에 겨우 역사적인 초연을 갖게 되었다. 그로부터 3주후, 네 번째 공연을 마친 때에 트리스탄 역을 맡은 루드비히 슈노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트리스탄 역이 너무 힘들어서 견디지 못하고 죽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트리스탄의 운명적인 저주를 받아서였다는 소문이 돌았다. 나중에 지휘자 펠릭스 모틀과 요셉 카이베르트가 죽은 것도 트리스탄의 지휘가 너무 힘들어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죽음이라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는 듯 싶다. 

 

1865년 초연의 루두비히 슈노르(트리스탄)와 말비나 슈노르(이졸데) 부부


이제 코지마에 대한 얘기를 조금 하고자 한다. 코지마는 프란츠 리스트와 마리 다구(Marie d'Agoult)백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백작부인은 오래동안 리스츠의 정부였다. 그러므로 코지마는 사실상 사생아였다. 그렇지만 리스트의 딸로서 모든 대우를 받았다. 코지마는 1857년 피아노의 귀재이며 교사 겸 지휘자인 한스 폰 뷜로브와 결혼했다. 결혼후 코지마는 바그너와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코지마를 바그너에게 소개한 사람은 아버지 리스트였다. 바그너는 코지마보다 24세 연상이었으며 그때까지만 해도 배우인 민나 플라너(Minna Planer)와 결혼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지마와 바그너가 연애에 빠질줄은 아무도 몰랐다. 두 사람은 1863년에 급격히 가까워졌다. 그리고 3년후인 1866년에는(한국에서는 고종황제 시절에 배재학당이 문을 연 해) 루드비히2세 왕이 돈을 지불한 스위스 루체른 호반의 별장에서 함께 동거하기 시작했다. 코지마와 바그너는 결국 알게 된지 17년후인 1870년 8월 25일 결혼하였다. 남편 한스 폰 뷜로브가 마침내 이혼을 승낙한 직후였다. 끈질긴 사랑의 결실이었다. 코지마는 이혼과 결혼을 위해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했다. 바그너는 루터교신자였다. 당시 코지마는 첫 번째 남편인 한스 폰 뷜로브와의 사이에 두 아이가 있었다. 그리고 바그너와 동거하면서 세 아이를 두었다. 딸의 이름은 이졸데와 에바였고 아들은 지그프리트(Siegfried)였다. 첫 딸의 이름을 이졸데라고 붙인 것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영향이었으며 아들 이름도 ‘니벨룽의 반지’의 지그프리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지그프리트는 나중에 작곡가가 되었지만 아버지 바그너의 그늘에 가려 별로 이름을 날리지 못했다. 실력도 별로였고! 코지마는 1869년부터 바그너가 세상을 떠난 1883년까지 일기를 써놓았다. 나중에 책자로 출판된 코지마의 일기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 쪽은 베트만(Bethmann)이라는 잘 알려진 유태인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런데도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더 지독한 반유태주의자였다.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 코지마 바그너. 프란츠 리스트의 딸. 지그프리트 바그너의 어머니. 솔직히 말해서 인물은 없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스토리는 너무 유명하여서 오페라 이외에도 연극과 영화로도 많이 제작되었다. 그러나 내용은 조금씩 다르다. 그러므로 원래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의 스토리가 어떤것인지를 아는 것도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데 필요할것 같아 간략히 소개한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입문하기 위한 배경 스토리이다. 이야기는 트리스탄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된다. 트리스탄의 아버지는 파르메니(Parmenie)의 왕 리왈린(Riwalin)이었다. 어느때 리왈린왕은 콘월(Cornwall)왕 마크(Marke)를 방문한다. 리왈린은 콘월 궁전에서 마크왕의 여동생 블랑슈플로(Blanchefleur)를 처음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된다. 얼마후 블랑슈플로는 임신하게 된다. 리왈린은 블랑슈플로를 데리고 몰래 파르메니 왕국으로 돌아간다. 모든 사실을 파악한 콘월왕 마크는 군대를 소집하여 리왈린을 공격한다. 리왈린은 콘월과의 전투에서 칼에 찔려 세상을 떠난다. 이 소식을 들은 블랑슈플로도 어치피 살아 있어도 마크왕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므로 사랑하는 리왈린을 따라 죽음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바로 그 때 출산이 임박하여 블랑슈플로는 사내아이를 낳는다. 트리스탄이라고 이름을 붙인다. 트리스탄이라는 이름은 슬픔에 넘쳐 있다는 뜻이다. 트리스탄을 낳은 어머니 블랑슈플로는 곧 세상을 떠난다. 세월은 흘렀다. 트리스탄은 파르메니 왕국에서 리왈린 왕의 충신인 루알(Rual)의 아들로서 성장한다. 그러던 어느때 상선 한척이 파르메니 항구에 정박하였고 그 배의 노르웨이 선원들이 트리스탄을 납치하여 멀리 바다로 떠난다. 노예로 삼기 위해서였다. 바다에서 노르웨이 상선은 심한 풍랑을 만나 거의 난파직전에 있게 된다. 선원들은 트리스탄을 납치한 것이 신의 노여움을 받았다고 생각하여 가까스로 해안에 배를 붙이고 트리스탄을 떨어트려 놓는다. 그곳이 마침 콘월이었다.

 

1980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무대. 이졸데 역에 소프라노 귀네스 존스

 

트리스탄은 한떼의 사냥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이들은 트리스탄의 사냥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들은 트리스탄을 데리고 마크왕의 궁전으로 들어간다. 마크왕의 궁전에서 지내게 된 트리스탄은 여러 업적을 쌓아 왕으로부터 총애를 받는다. 한편, 트리스탄이 없어진후 그를 키운 루알은 몇해동안 트라스탄을 찾아다니던중 마침내 콘월에서 트리스탄을 발견한다. 그런데 실은 루알이 마크왕의 사촌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마크왕은 자기의 사촌으로 밝혀진 루알이 트리스탄을 양육하였다는 것을 알고 트리스탄을 더욱 우대하여 콘월의 기사로 임명한다. 그러나 마크왕은 트리스탄의 출생비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따지고 보면 트리스탄은 마크 왕의 여동생의 아들이므로 조카이다. 아일랜드의 왕 구르문(Gurmun)은 콘월을 무시하여서 동생 모롤드(Morold)를 콘월에 보내 조공을 바치도록 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강요한다. 거구의 모롤드는 아일랜드 최고의 전사이다. 트리스탄은 모롤드와 결투를 자처하여 그를 쓰러트리지만 모롤드의 독이 묻은 칼에 상처를 입는다. 트리스탄의 상처를 치료할수 있는 사람은 아일랜드 구르문왕의 부인으로 의술에 능한 이졸데 왕비(현자 이졸데: Isolde the Wise)뿐이다. 트리스탄은 탄트리스라는 가명으로 아일랜드로 간다. 다행히 아일랜드에서 치료를 받은 트리스탄은 이졸데 왕비의 딸인 이졸데 공주(Isolde the Fair)의 아름다움에 자기도 모르게 깊은 사랑을 느낀다. 트리스탄은 사랑의 마음을 간직한채 콘월로 돌아간다.

 

1938년 런던 코벤트 가든 무대. 이졸데에 키르스텐 플라그스타드, 트리스탄에 라우리츠 멜키오르


마크왕은 아일랜드의 부당한 강압으로부터  콘월을 구출한 트리스탄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다. 하지만 콘월의 신하들은 트리스탄을 시기하여 마크왕에게 어서 결혼해서 후사를 가지라고 종용한다. 신하들은 마크왕에게 아일랜드의 이졸데 공주와 결혼하라고 주장한다. 아일랜드의 이졸데 공주를 볼모처럼 삼아 결혼하면 아일랜드가 더 이상 콘월을 괴롭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내 마크 왕은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서 청혼사절로서 트리스탄을 아일랜드에 보낸다. 마크왕의 신하들은 만일 아일랜드 왕이 콘월의 청혼을 모욕으로 생각하여 트리스탄을 죽인다면(더구나 아일랜드 왕의 동생인 모롤드를 죽인 사람이므로) 그것도 어차피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트리스탄은 자기의 신분을 감추고(만일 트리스탄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목숨이 위험하므로) 탄트리스라는 이름으로 아일랜드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트리스탄은 백성들을 괴롭히는 못된 용을 처치한다. 아일랜드 왕은 용을 처치하는 사람과 딸 이졸데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트리스탄은 이졸데 공주와 결혼할수 있게 된다. 한편, 전에 탄트리스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몸에 박힌 칼끝이 모롤드의 것임을 알게된 이졸데는 탄트리스가 모롤드를 죽인 트리스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이 목욕하는 중에 몰래 상처를 다시한번 확인하고 복수의 심정에서 트리스탄을 죽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졸데의 어머니인 왕비가 제지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트리스탄은 그제야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아일랜드와 콘월의 화해를 위해 이졸데 공주를 마크 왕의 신부가 되도록 하기 위해 청혼하러 왔다고 설명한다. 아일랜드왕은 콘월과의 평화를 위해 이졸데공주를 마크왕과 결혼시키기로 결정한다. 이에 트리스탄은 이졸데와 함께 배를 타고 콘월로 향한다.

 

시애틀 오페라 무대. 이졸데에 아날네라 페르손, 트리스탄에 클리프턴 포르비스.

                                  

이졸데의 어머니인 왕비는 공주를 모시고 가는 시녀 브란게네(Brangaene)에게 몰래 사랑의 묘약을 쥐어주며 마크왕과 공주가 결혼 초야에 이 약을 마시게 되면 두사람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게 될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항해중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이 묘약을 마시게 된다. 실수로 마시게 된것인지 또는 시녀 브란게네의 깊은 배려에서 마시게 된 것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묘약을 마신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서로 사랑을 맹세한다. 일설에 의하면 시녀 브란게네가 두 사람의 사랑을 눈치채고 두 사람에게 은밀히 묘약을 마시도록 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두 사람은 콘월에 도착하기 전까지 배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콘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만나 사랑하는 시간을 갖기 위해 여러 구실을 만든다. 예를 들면 결혼초야에 이졸데 대신 시녀 브랑게네를 마크와의 침실로 들여보낸것 등이다. 마크왕은 취중에 브랑게네를 이졸데로 생각하여 초야를 치룬다. 간혹 마크왕은 이졸데의 행동에 대하여 의심을 갖지만 그렇다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은밀한 데이트를 알아채지는 못한다.

 

이졸데와 브랑게네. 달라스 오페라 무대

                      

그러나 막말로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마크왕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어 두 사람을 궁전에서 추방한다. 멀리 떠난 두 사람은 산속의 동굴(Love Grotto: 사랑의 동굴)에 거처를 정하고 비록 누추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낸다. 마크왕이 우연히 근처에 왔다가 동굴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나란히 누워있는 모습을 본다. 그러나 트리스탄은 마크왕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고 재빨리 칼을 자기와 이졸데 사이에 놓아 마치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한다. 당시의 관습으로서 아무리 부부간이라고 하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 칼을 놓아두면 원수지간이란 뜻이 된다. 이를 본 마크왕은 두 사람이 서로 연인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여 두 사람을 데리고 궁전으로 돌아온다. 그러다가 얼마후 마크왕은 정말로 두 사람이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보게된다. 트리스탄은 급히 도망하여 멀리 노르만디까지 간다. 트리스탄은 이곳에서 아룬델(Arundel)공작의 딸 이졸데를 만난다. 또 다른 이졸데이다. 보통 하얀손의 이졸데(Iisolde of the White Hands)라고 불리는 아가씨이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쓰부르크의 시는 트리스탄이 두명의 이졸데에 대하여 감정적인 혼돈을 빚고 있는 트리스탄의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이졸데에 아날레나 페르손, 브랑게네에 마가렛 제인 레이. 시애틀 오페라 무대
                             

그러나 1160년대에 토마스(Thomas)가 남긴 시(詩)에는 이야기가 좀 더 진전되어 있다. 토마스는 영국 출신으로 고트프리트보다 일찍이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남겼으며 이를 기본으로 고트프리트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정리하여 썼다고 한다. 아무튼 토마스의 시에 의하면 트리스탄이 ‘하얀 손의 이졸데’와 결혼하지만 순탄하지는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어느날 트리스탄은 에스툴트(Estult)라는 기사와의 결투에서 독창에 찔려 깊은 상처를 입는다. 트리스탄을 고쳐줄 사람은 이졸데공주 밖에 없다. 이졸데공주는 어머니인 왕비로부터 의술을 전해 받았기 때문이다. 노르만디의 ‘하얀 손의 이졸데’는 이졸데공주를 데리고 올 배를 보낸다. 만일 그 배가 하얀 돛을 달았으면 트리스탄을 치료해줄 공주와 함께 오는 것이고 검은 돛을 달았으면 공주를 데리고 오지 못하는 것으로 정한다. 그러나 질투심에 불탄 ‘하얀 손의 이졸데’는 공주를 데리고 오더라고 검은 돛을 달도록 한다. 검은 돛을 본 트리스탄은 절망으로 결국 숨을 거둔다. 해안에 도착한 이졸데공주는 이미 숨을 거둔 트리스탄에게 키스를 하고 그 옆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마크왕과 트리스탄, 이졸데와 브랑게네. 비너 슈타츠오퍼.

                                 

이제 다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돌아가보자. 바그너는 이 작품을 작곡함에 있어서 대본에 대하여 많은 신경을 썼다. 그만큼 철저하고 의욕적이었다. 바그너는 고트프르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남긴 ‘트리스탄과 이졸데’ 스토리의 가장 오리지널한 내용만을 참고하였으며 다른 내용은 전혀 가필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바그너의 대본에는 트리스탄의 비극적인 탄생에 대한 설명이 없다. 트리스탄과 아일랜드의 기사인 모롤드와의 결투 장면도 삭제되었다. 그리고 트리스탄이 결투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아일랜드로 갔으며 이졸데공주의 치료를 받은 얘기 등도 모두 감추어져 있다. 어떤 버전에는 모롤드와 이졸데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로 되어 있다. 그래서 모롤드가 트리스탄의 칼에 죽임을 당하자 이졸데는 트리스탄을 원수로 삼고 있다고 되어 있다. 콘월과 아일랜드의 화해를 위해 마크왕이 이졸데와 결혼코자 한다는 내용도 어렴풋이 담겨 있을 뿐이다. 이제 오페라의 스토리로 들어가 보자.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쓰부르크가 사람들에게 '트리스탄'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는 그림


제1막은 아일랜드를 떠나 콘월로 향하는 배가 무대이다. 콘월의 마크왕과 결혼할 이졸데공주(Sop)와 시녀 브랑게네(MS 또는 Sop)가 트리스탄(Ten)의 호위를 받으며 콘월로 향하고 있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을 무척 원망하고 있다. 교묘한 말솜씨로 아일랜드왕인 아버지를 설득하여 자기와 콘월왕과의 결혼을 성사시켰기 때문이다. 이졸데는 자기가 팔려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 음악은 어떤 선원이 부르는 노래이다. 아일랜드의 항구에서 만나 잠시 즐겁게 지내다가 콘월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그대로 놓아 두고온 애인을 생각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이졸데 공주에게는 이 노래조차 아일랜드 여인에 대한 모욕으로 들린다. 기분이 울적한 이졸데는 선실로 들어가 시녀 브란게네에게 트리스탄을 불러오라고 한다. 트리스탄은 배가 안전하게 콘월에 도착할때까지 자리를 뜰수 없다고 하며 말을 듣지 않는다. 트리스탄의 충복인 쿠르베날(Kurvenal: Bar)이 트리스탄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자 선원들이 합창으로 화답한다.

 

마크왕(알프레드 라이터)가 숨을 거둔 트리스탄을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옆에는 이졸데(아날레나 페르손). 워싱턴 내셔널 오페라 무대.


이졸데는 시녀 브랑게네에게 지난날을 얘기하며 자기의 운명을 탄식한다. 아일랜드의 귀족인 모롤드(Morold)경과 결혼하려 했던 일, 그가 이름 모를 콘월의 기사에게 죽임을 당한 일, 부상당한 콘월의 기사가 아일랜드로 와서 자기의 치료를 받은 일, 그 기사가 은혜를 반드시 갚겠다는 인사와 함께 자기 나라로 돌아갔던 일, 얼마후 그 기사인 트리스탄이 아일랜드로 와서 마크왕과의 혼담을 추진한일 등이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간헐적으로 설명된다. 조금은 지루한 장면이다. 하지만 폭풍전야의 적막함 정도로 생각하면 오히려 눈여겨 볼 장면이다. 이졸데는 어떤 병이든지 고칠수 있는 묘약을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 어머니로부터 배운 재능이다. 이졸데의 어머니는 멀리 떠나는 이졸데에게 여러가지 약들을 가지고 가도록 챙겨주었다. 그 중에는 사람을 죽일수 있는 독약도 있고 ‘사랑의 묘약’도 있다. 다만, ‘사랑의 묘약’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은 시녀 브랑게네만이 알고 있다. 이졸데는 자기의 기구한 운명을 한탄하며 독약으로 원수인 트리스탄을 죽이고 자기도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한다. 배는 곧 항구에 도착할 예정이다. 트리스탄은 항해가 무사히 끝나가므로 이졸데를 만나러 간다. 이졸데는 트리스탄에게 포도주를 권한다. 트리스탄은 이졸데가 독약을 넣어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것을 눈치챈다. 하지만 그렇게 죽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포도주를 마신다. 그런데 실은 시녀 브랑게네가 독포도주 대신에 ‘사랑의 묘약’을 담아 놓았던 것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운명은 ‘사랑의 묘약’으로 완전히 바뀌게 된다. 두 사람은 어느덧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도니제티의 오페라 ‘사랑의 묘약’(L'Elisir d'Amore)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전설에서 소재를 잡은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배를 타고 콘월로 가고 있는 이졸데(올가 테렌티에바). 모스크바 노바야 오페라 무대.

               

제2막은 콘월 왕궁의 정원이 무대이다. 훈풍이 감도는 여름밤이다. 이미 이졸데와 결혼한 마크왕은 멀리 사냥을 떠났다. 정원에서 이졸데가 트리스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시녀 브랑게네는 이졸데에게 이번 마크왕의 사냥은 아무래도 함정같으니 트리스탄과의 만남을 조심하라고 경고한다. 마크왕의 신하인 멜로트(Melot: Ten)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뒤를 은밀히 쫓아다니며 밀회장면을 포착하려는 눈치이기 때문이다. 멜로트 역시 이졸데를 은근히 사모하고 있다. 음악이 격렬하게 고조되는 중에 트리스탄이 뛰어 들어온다. 두 사람은 포옹하며 사랑의 환희를 노래한다. ‘이졸데! 트리스탄! 사랑하는 그대’라는 듀엣이다. 이어서 음악은 부드럽게 가라앉으며 속삭이듯 조용히 흐른다. 두 연인은 밤의 평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노래하며 이 밤이 영원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두 사람은 사랑의 맹세를 다시 나눈다. 갑자기 사랑스런 음악이 거칠게 방해를 받는다. 멀리 사냥을 떠났다고 생각되는 마크왕과 멜로트경이 병사들과 함께 들이 닥친다. 트리스탄은 뜻하지 아니한 사태로부터 이졸데를 보호하고자 망토를 벗어 이졸데의 얼굴을 급이 가려 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한동안 무서운 침묵만이 흐른다. 침묵을 깨고 멜로트가 모욕적인 언사로 두 사람을 비웃는다. 그는 자기의 계략이 맞아 떨어져 두 사람의 밀회 장면을 발각한데 대하여 거만스럽게 우쭐댄다. 명예를 잃은 트리스탄으로서 할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버리고 멀리 사라지는 길 뿐이다. 트리스탄은 이졸데에게 작별을 고하면서 혹시 자기와 함께 떠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이졸데는 주저 없이 따라 가겠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멜로트경을 더욱 격분하게 만든다. 멜로트는 갑자기 칼을 빼어들어 트리스탄을 찌른다. 기사답지 않은 행동이다. 트리스탄이 중상을 입는다. 멜로트가 트리스탄의 목숨을 거두려 할때 마크왕이 가로 막는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트리스탄!

 

선상에서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허버트 드레이퍼(Herbert Draper: 1863-1920) 작품.


제3막은 브리타니에 있는 고성이다. 중상을 입은 트리스탄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충복 쿠르베날이 걱정스러운듯 보살피고 있다. 바다의 파도가 수평선의 공백을 넘실거리고 있다. 외롭고 쓸쓸한 광경이다. 양치기가 트리스탄이 걱정이 되어 다녀간후 그제야 트리스탄이 오랜 정적을 깨고 눈을 뜬다. 쿠르베날은 트리스탄에게 이졸데를 이곳으로 오도록 전갈을 보냈다고 말해준다. 중상을 입은 트리스탄에게 당장 필요한 사람은 이졸데뿐이기 때문이다. 트리스탄은 지난날 그와 이졸데가 마음을 주고받으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회상한다. 그리고 그 저주받은 운명의 날을 되새기며 괴로워한다. 양치기들의 피리소리와 함께 비통의 순간이 즐거움의 순간으로 바뀐다. 항구에 배 한척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딘다. 이졸데가 타고 온 배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극적인 재회를 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상처가 깊은 트리스탄은 끝내 이졸데의 품에 안겨 숨을 거둔다. 그 때 또 한 척의 배가 미끄러지듯 들어온다. 마크왕이 도착한다. 마크왕과 함께 온 멜로트가 동굴 안으로 뛰쳐 들어간다. 쿠르베날이 멜로트를 막아서서 단 한 칼에 그를 찔러 죽인다. 병사들이 쿠르베날을 에워싼다. 쿠르베날은 주인인 트리스탄의 앞에서 목숨을 끊는다. 쿠르베날의 죽음은 헛된 것이었다. 이졸데의 시녀 브랑게네가 그간의 모든 사정을 마크왕에게 설명하고 두 사람의 진정한 사랑이 성취될수 있도록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이에 감동한 마크왕은 드디어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용서한다. 그러나 이제 그 용서는 아무런 필요가 없다. 트리스탄을 품에 안은 이졸데는 유명한 Liebestod(사랑의 죽음)이라는 아리아를 부른다. 삶과 죽음을 가로막고 있는 장애물이 화해와 용서를 통해 허물어진다는 내용이며 사랑의 위대한 힘으로 승리함을 감사하는 찬미이다. 이윽고 이졸데가 독약을 마시고 사랑하는 사람 옆에 쓰러져 숨을 거둔다. 두 사람의 사랑이 하늘 높이 승천하듯 음악마저 고조된다. 마크왕은 비극적인 생을 마감한 두 사람의 결합을 비통한 심정으로 인정한다.


'사랑의 죽음'(Liebestod)의 가사는 대략 다음과 같다.


Softly and gently

How he smiles

how his eyes fondly open

- do you see, friends?

- do you not see?

How he shines ever brighter

star-haloed

rising higher

Do you not see?

 

파리 오페라의 무대.

                       

바그너 오페라의 진면목을 가사나 멜로디에서 찾으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무대에서의 드라마틱한 연기에서 찾으려는 것도 무리이다.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음악과 시의 융합(musio-poetic)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 오페라에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물리적 및 외부적인 요소는 모두 배제되어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는 가치관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트리스탄을 용서하고 그를 사랑하게 된 이졸데의 행동을 보자. 이졸데에게 있어서 트리스탄은 자기와 결혼하려던 사람을 죽인 원수이다. 이졸데는 그러한 그를 용서하고 죽음에서 구해 주었다. 더구나 상심에 빠져 있는 이졸데를 마크왕과 정략결혼시키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이기도하다. 어떻게 그렇게 할수 있을까? 대답은 사랑의 힘이라고 할수 있다. 트리스탄은 어떠한가? 그는 명예를 목숨보다 귀중하게 여겨야 하는 기사이다. 그러한 그가 아일랜드왕을 찾아가 자기가 마음에 두었던 이졸데를 콘월왕(어떤 버전에 따르면 콘월왕 마크가 트리스탄의 삼촌으로 되어 있다)에게 결혼시키려고 설득한다. 더구나 이졸데는 자가의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아닌가? 그 해답은 사랑의 본질에서 찾을수 있다. 사랑은 모든 장벽을 허물고 모든 비합리성을 뛰어 넘는다는 본질이다. 이 오페라가 시적인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예는 여러 장면에서 발견할수 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맹세할 때 트리스탄은 자기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지만 이졸데는 신비스런 밤의 세계를 두고 맹세한다. 이졸데는 밤이야 말로 두사람의 사랑을 보호해주는 장막이라고 믿었다. 이졸데는 여러 가지 묘약을 만드는 비법을 알고 있다. 신비한 비법과 어둠의 세계는 상통하는 면이 있다. 그래서 밤이 신비한 사랑의 세계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예로부터 시인들은 어두운 밤이 사랑을 잉태케하고 사랑을 성숙하게 만든다고 믿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바그너도 그러한 인식의 세계에 있었던 것이다.

 

이졸데 역의 전설적인 바그너 소프라노 비르기트 닐쓴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음악사의 진로를 바꾸어준 위대한 작품이다. 뮤직드라마(악극)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해준 것이기 때문이다. 바그너의 작품 중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의 작품들, 즉 ‘니벨룽의 반지’에 속한 일련의 작품들은 실제로 무조주의(Atonalism)의 색채를 띤 것이다. 이것은 그로부터 반세기후 쇤베르크(Arnold Schonberg)와 부소니(Ferruccio Busoni)가 시도한 ‘부정확한 음조’의 첫 시도였다.

 

[한마디] 바그너는 3막의 이졸데 아리아인 Lieberstod를 콘서트 버전으로 편곡하여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초연되기 3년전인 1862년 별도로 초연을 가졌다. 이졸데가 트리스탄의 부활 비전을 볼때 부르는 아리아이다. 바그너는 이 별도의 콘서트 곡을 'Prelude and Liebestod'라고 불렀다. 오페라에서는 이졸데의 Lieberstod를 Verklärung, 즉 변형(Transfiguration)이라고 불렀다. 이 콘서트 버전의 Lieberstod는 오케스트라로서만 연주할수도 있고 소프라노와 함께 연주할수도 있다. 바그너의 후원자이며 나중에는 장인이 된 프란츠 리스트는 Liebestod를 포함하여 이 오페라에서 발췌한 곡들로 여러 편의 피아노곡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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