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최후의 황태자 오토
비엔나의 카푸친교회에 안치된 오토와 레지나의 관
[국제범유럽연맹 명예회장]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였던 합스부르크의 오토(Otto)는 1차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2년 비엔나 근교에서 태어나 98세를 일기로 2011년 7월 4일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푀킹(Pöcking)이란 곳에 있는 빌라 아우스트리아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오토를 추모하는 장례식(Trauerfeier)은 푀킹, 뮌헨, 오스트리아의 마리아첼 순례교회, 그리고 7월 16일 비엔나의 성슈테판대성당(슈테판스돔)에서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오토의 시신은 관례에 따라 비엔나 카푸친교회의 지하에 있는 제국영묘(카이저그루프트)에 안치되었으며 이때 먼저 세상을 떠난 그의 부인 레지나의 시신도 함께 안치되었다. 오토의 심장은 부인 레지나의 심장과 함께 합스부르크의 관례에 따르지 않고 헝가리의 파논할마(Pannonhalma) 대수도원에 보존되었다. 관례에 따르면 합스부르크 황족들은 죽으면 심장을 따로 관리해서 비엔나의 호프부르크 궁전에 연결되어 있는 아우구스틴교회에 보관하도록 되어 있다. 헝가리 파논할마에서의 심장 안치의식은 7월 17일에 거행되었다. 이에 앞서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성슈테판성당에서도 오토에 대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아버지 카를의 대관식에서 오토 황태자(가운데)
오토는 아버지 카를(Carl: Charles) 황제와 어머니 치타(Zita) 황비 사이에서 태어난 여덟 자녀중 장남이다. 물론 오토가 태어날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 카를이 황제가 아니었고 그저 일반적인 황족이었다. 그러다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뒤를 이어 제국의 황제가 될 페르디난트 대공이 사라예보에서 저격을 당해 세상을 떠나자 오토의 아버지 카를이 다음 황위 계승자로 지명되는 바람에 황태자의 아들로서 지내다가 아버지 카를이 황제가 되자 어릴 때에 황태자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아버지 카를 황제는 1916-18년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겸 헝가리 왕이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추방생활을 해야 했다. 오토의 아버지 카를 황제는 합스부르크 최후의 황제였다. 제국 시절, 오토의 공식 타이틀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황태자’였다. 비엔나를 떠나서 생활해야 했던 오토는 훗날 바바리아 기독사회연맹(CSU)이 주도하는 유럽의회(European Parliament)의 의원을 지냈으며 세상 떠나기 직전까지 국제범유럽연맹(International Paneuropean Union)의 명예회장을 지냈다. 오토는 1922년 선친인 카를 황제가 세상을 떠나자 장남으로서 자동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대표가 되었다. 비엔나를 떠난 오토는 최종적으로 독일 남부의 바바리아의 푀킹(Pöcking)에 정착해서 살았다. 그는 독일, 오스트리아, 크로아티아, 헝가리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그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Otto von Habsburg(합스부르크의 오토)이지만 조국인 오스트리아가 헌법에서 누구든지 von이라는 귀족 명칭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바람에 Otto Habsburg-Lothringen(오토 합스부르크 로트링겐)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헝가리에서는 Habsburg Ottó(합스부르크 오토)라고 불린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오토 대공(Archduke Otto of Austria) 또는 오스트리아의 오토 황태자(Crown Prince Otto of Austria)라고 높여 불렀다.
어머니 치타와 형제자매들과 함께. 모두 8남매였다. 앞줄 가운데가 오토
[노황제의 사랑을 받은 어린 시절]
오토는 1912년 11월 20일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에 있는 빌라 봐르톨츠(Villa Wartholz)에서 태어났으며 4살 때인 1916년 프란츠 요제프 1세 노황제가 서거하고 아버지 카를이 황제로 즉위하는 바람에 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위 계승자인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위 계승의 첫 서열에 들어 있던 오토는 태어난 후 세례를 받을 때에도 비엔나 대주교인 프란츠 사비에르 나글(Franz Xavier Nagl) 추기경이 봐르톨츠를 방문하여 직접 세례를 주었다. 세례를 받을 때 카를의 대부(代父)가 프란츠 요제프 황제였으므로 참석할 줄 알았으나 바뻐서 참석하지 못했고 대신 오토의 삼촌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이 대신 참석하였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뒤를 이을 황위 계승자였던 페르디난트는 황족과 결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황태자(크론프린츠)라는 호칭으로 불리지 않았다. 페르디난트 대공은 1914년 사라예보의 총성과 함께 죽임을 당하여 1차 세계대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인물이다. 오토의 대모(代母)는 외할머니인 포르투갈의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 공주였다. 오토의 아래로 7명의 동생들(남동생 4명, 여동생 3명)이 있다. 망내 동생인 엘리자베트는 유복자였다. 아버지 카를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두달후에 스페인에서 태어났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증손자 오토 (여자 아이처럼 보이지만 남자임)
1916년, 1차 대전이 한창일 때에 노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세상을 떠나자 노황제의 손자가 되는 카를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즉위하였다. 따라서 카를의 장남인 오토도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의 황태자로 책봉되었다. 오토의 아버지는 1차 세계대전의 핵심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제가 되었으며 오토는 다음 황제 계승자인 황태자가 되었던 것이니 파란만장의 생애는 그때부터 예견되었던 것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막을 내려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독립 헝가리 왕국이 되었다. 헝가리는 다시 왕국이 되었으나 카를은 결코 왕좌에 오르지 못했다. 대신, 미클로스 호르티(Miklos Horthy)가 섭정왕(Regent)이라는 타이틀로 1944년까지 헝가리를 통치했다. 따라서 헝가리는 1918년부터 1944년까지 거의 30년동안 국왕이 없는 왕국이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장례식에서 칼 황제와 치타 황비, 그리고 오토 황태자
[힘들었던 추방 생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종말과 함께 오토는 부모를 따라 스위스를 거쳐 포르투갈령인 대서양의 고도 마데이라(Madeira)에서 추방생활을 하였다. 오토의 아버지 카를 황제는 1922년 마데이라에서 기관지염과 폐렴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다. 오토는 당시 10세였다. 한편, 새로운 오스트리아 의회는 1919년 4월 3일자 ‘합스부르크법’(Habsburgergesetz)을 통과시켜 오스트리아 영토에서 합스부르크 왕가를 공식적으로 축출했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모든 재산을 몰수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공화국으로 되었기 때문에 오토가 황제의 자리를 요구할 입장은 아니었으며 더구나 오스트리아가 합스부르크를 축출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으나 헝가리 왕국은 아직도 오토가 왕위에 오를 자격이 있었다. 물론 그런 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미클로스 호르티라는 사람이 헝가리 섭정왕을 자처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오토와 가족들은 마데이라를 떠나 스페인에서 잠시 살다가 벨기에로 갔다. 오토는 벨기에에 살때에 르벤(Leuven)가톨릭대학교의 사회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칼 황제의 헝가리국왕 대관식에 참석한 치타 황비와 오토 황태자. 1916년 부다페스트에서.
[나치에 대한 저항]
오토는 2차 세계대전중 나치를 피하여 벨기에로부터 파리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워싱턴으로 올수 있었다. 오토는 대전중인인 1940-44년을 워싱턴에서 보냈다. 오토의 사촌인 호엔베르크(Hohenberg)공작 막스(Max)와 에른스트(Ernst)공자는 비엔나에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다가 거의 처형되기 직전에 전쟁이 끝나는 바람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합스부르크의 다른 가족들도 히틀러의 나치에 의해 거의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비참한 생활이었다. 오토가 벨기에를 떠나 미국으로 온 것은 나치의 독수로부터 피하기 위해서였다. 열렬한 오스트리아 애국자인 오토는 1938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Anschluss)하자 외국에 있으면서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히틀러는 오토를 사형에 처하도록 선고하고 그렇지 않으면 가족 모두를 데리고 유럽을 떠날 것을 명령하였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할 때의 비밀작전 코드는 오토(Otto)였다. 오토는 가족과 함께 유럽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오토와 가족들은 벨기에에서 프랑스로 피난하여 왔으나 파리가 나치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남불(南佛)의 보르도 지방으로 옮겨갔다. 다행히 보르도의 포르투갈 영사가 오토 가족들에게 포르투갈 비자를 내주어 포르투갈로 갔다가 영국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갈수 있었다. 그후 어머니 치타를 비롯하여 몇몇 동생들은 캐나다의 퀘벡으로 가서 살았다.
바바리아 지방 푀킹의 빌라에서. 벽에는 증조할머니가 되는 엘리자베트(씨씨)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오토의 정치 경력]
1961년 오토는 용단을 내려 과거 오스트리아 황제와 관련된 모든 요구를 포기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오토의 이같은 포기를 환영하고 마침내 1966년 오토가 조국 오스트리아를 방문해도 좋다고 허용하였다. 전후의 오스트리아는 1955년 4강의 신탁통치가 끝날 때까지도 독립국이 아니었다. 오스트리아가 4강의 통치를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완고한 공화주의자들과 합스부르크에 유감을 품고 있던 자들은 합스부르크 가족들의 오스트리아 귀환을 적극 반대했다. 오토가 오스트리아 황제와 관련한 모든 요구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이를 수용했지만 실제로 유럽의 다른 왕가들은 오토를 위대한 합스부르크 왕조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대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모나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스페인, 그리고 영국 왕실에 대한 오토의 영향력은 무시할수 없는 것이었다.
오토는 유럽의 통일을 주장하였다. 오토는 1986년부터 2004년까지 국제범유럽연맹(IPU)의 회장을 지냈으며 새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명예회장이었다. 오토는 1979년부터 1999년까지 유럽의회의 의원이었으며 또한 몽플르랭협회(Mont Pelerin Society)의 주요 후원자였다. 오토는 유럽연합(EU)이 태동할 때부터 가장 핵심적인 지지자였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이 유럽의 통일을 가시화하여 국경 없는 유럽을 지향하고 있는 이면에는 실로 오토의 기여가 컸다. 이제 유럽의 거의 대부분이 여권 없이 국경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으며 하나의 화폐(유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오토로서는 감회가 깊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특히 오토는 헝가리의 EU 가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편 오토는 3신앙포럼(Three Faiths Forum: TFF)의 후원자였다. 영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3신앙포럼은 아브라함을 선조로 모시는 여러 민족간에 화합과 친선을 증진하자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TFF는 유태교인, 기독교인, 무슬림간의 친선과 이해증진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오늘날 TFF 의 활동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다.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황태자인 칼, 그리고 오토의 즐거운 한때
[21세기의 오토]
오토는 러시아의 푸틴(Putin)이 히틀러와 마찬가지로 유럽에게 커다란 위협이 되고 있다고 경고했었다. 얼마전 오토가 부다페스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어떤 저명한 저널리스트와 대담을 나눈 일이 있다. 저널리스트가 ‘보리스 옐친과 블라디미르 푸틴을 비교한다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을 던졌다. 오토는 “옐친은 혼돈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소한 민주적인 원칙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푸틴은 23세 때부터 러시아 의 비밀경찰이었습니다. 푸틴은 지금도 비밀경찰이나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푸틴의 정신 상태는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다릅니다. 푸틴 자신도 그런 점을 진지하게 얘기한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푸틴은 러시아 대통령에 선출되고 나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대폭 증강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말에 대하여 어떤 경고를 주었습니까? 아닙니다. 서방 세계는 그저 나름대로 군비축소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토는 푸틴이 히틀러와 스탈린의 중간쯤 되는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푸틴은 독재자로서의 성질(physique du role)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러시아에서는 스탈린 시대에 대한 향수와 국수주의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오토의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일들이다.
2006년 12월 오토는 9.11 사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9.11 사태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미국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것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국가이며 어느 때든지 미국에게 도전하는 국가가 있다면 그들에게 폭탄 세례를 줄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미국은 적국들이 반격 해올 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감상적인 생각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미국은 처음으로 그들이 당면한 위기가 무엇인지 이해하였을 것이다.”
[가정생활]
오토는 1951년 독일 마이닝겐(Meiningen)-힐드부르그하우젠(Hildburghausen) 왕가의 레지나(Regina) 공주와 결혼하였다. 슬하에는 7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이미 아들 딸 들이 가정을 꾸며 손자들이 23명에 이른다. 오토는 부인과 함께 바바리아 지방 슈타른베르거 호수(Starnberger See) 부근 푀킹(Pöcking)에 있는 빌라 아우스트리아(Villa Austria)에 살았다. 자녀들의 이름은 안드레아(Andrea), 모니카(Monika), 마하엘라(Michaela), 가브리엘라(Gabriela), 발부르가(Walburga), 카를(Karl), 게오르그(Georg)이다.
독일 마이닝겐-힐드부르그하우젠 왕가의 레지나 공주와 결혼식을 올린 오토
[에피소드]
- 유럽의회의 의원인 이안 파이슬리(Ian Paisley)는 오토의 절친한 친구였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8년 유럽의회를 방문하여 연설할 때 갑자기 파이슬리가 교황에게 ‘당신이 적그리스도임을 선언하노라’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온 피켓을 들었다. 피켓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적그리스도’라고 적혀 있었다. 다른 의원들이 파이슬리를 식장 밖으로 몰아냈다. 함께 있었던 오토로서 낭패의 순간이었다. 오토의 부탁으로 파이슬리가 그런 돌출 행동을 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 유명한 극작가인 빌리 와일더(Billy Wilder)는 어릴때 비엔나에서 살았다. 와일더는 1916년 비엔나에서 노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장례식을 지켜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4살 밖에 되지 않았던 오토는 하얀 색의 헝가리 기병장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너무나 깜찍스러운 모습에 어린 와일더는 부러움으로 그 날의 일을 잊지 못했다. 세월이 흘러 와일더는 유명한 영화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미국에 살고 있었다. 어느날 바로 그 오토가 와일더를 찾아 왔다. 회색 양복을 입은 신사였다. 오토는 와일더에게 다뉴브 왕조(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에 대한 영화를 만들 의향이 있다면 기꺼이 도와주겠다고 제안했다. 와일더는 어릴 때의 기억 때문에 오토와 함께 일하고 싶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 오토는 결혼 전까지 골초였다. 하루에 다섯갑의 담배를 피웠다. 그러한 오토였지만 노년에 접어들자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다만, 1년에 하루 ‘세계금연일’(World No Tobacco Day)에는 담배를 피웠다.
- 전 서독 수상이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는 오토와 같은 때에 유럽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합스부르크는 오토와 브란트가 함께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마땅치 못하게 생각했다. 오토는 브란트 사무실의 도어에 ‘사무실 임대’라는 쪽지를 붙여 놓았다. 오토와 같은 생각이었던 동료 의원들은 ‘사무실 임대’라는 쪽지를 누가 떼지 못하도록 3주 동안이나 감시했다.
스위스 추방생활 시절의 오토와 가족. 뒤에 서 있는 사람이 아버지 칼. 오토는 오른쪽에 두번째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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