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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제지아의 아버지 샤를르 6세 (Charles VI)

정준극 2008. 1. 24. 09:24

마리아 테제지아의 아버지 샤를르 6세 (Charles VI)

1711-1740

 

마리아 테레자의 아버지 샤를르 6세(카를 6세).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원인제공자.


 

샤를르 6세(독일어로는 카를[Karl] VI)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로서 29년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군림한 인물이다. 샤를르 6세의 가장 큰 치적(?)은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원인제공을 한 것이다.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겠다고 주장한 바람에 일어난 전쟁이다. 샤를르 6세는 어느 틈엔가 건강이 나빠져서 한창 나이라고 할수 있는 50대 중반부터 병마와 싸우며 지냈다. 샤를르 6세는 머지않아 요단강을 건너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끝에 생기기도 듬직하게 생긴 장녀 마리아 테레지아를  자기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고 기타 타이틀도 계승한다는 특단의 조치를 발표하였다. 이를 국사조칙(國事詔勅: Pragmatic Sanction), 즉 국가의 기본법이 되는 조칙이라고 한다. 그러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하는 선제후들 및 기타 연고권이 있는 나라들은 ‘아니, 여자가 황제가 된다니 말도 안된다! 옛날에 막시밀리안 1세 황제 시절에 모두 합의해서 만들어 놓은 금인칙서에 의하면 황제는 남자만 된다고 했는데 지금와서 그걸 뒤집으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라며 당연히 샤를르 6세의 새로운 조칙에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을 일어났다. 만일 샤를르 6세에게 관찮은 아들이 하나라도 있었으면 그런 전쟁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인데 불행하게도 하나 있던 아들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문제가 복잡해진 것이다. 샤를르 6세는 전쟁이 일어난 해인 1740년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6세는 1711년부터 1740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신성로마제국 황제였으며 그 이전인 1703년부터 1711년까지는 카를로스(Carlos) 3세라는 이름으로 스페인 왕위 후보자 영순위였었다. 이게 무슨 말인고 하니...

 


샤를르 6세의 부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나(마리아 테레자의 어머니) 

 

샤를르 6세는 1685년 10월 1일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Leopold) 1세이고 어머니는 레오폴드의 세 번째 부인인 엘레오노레-막달레나(Eleonore-Magdalena) 공주이다. 샤를르는 족보로 보아 스페인-합스부르크와 연관이 된다. 마침 당시 스페인의 왕인 카를로스(샤를르) 2세에게는 후사가 없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의 어른들은 자식이 없는 스페인왕 카를로스 2세에게 ‘에 또, 샤를르 6세를 후사로 삼는 것이 대단히 바람직하다’고 권고했다. 카를로스 2세도 그런 권고에 공감하여 샤를르 6세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얼마후 카를로스 2세는 느닷없이 필립 5세라는 사람을 후계자로 삼는다고 선언했다. 자칭 태양왕이라고 하는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이같은 계약위반을 뒤에서 사주했다. 이로써 이른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1702년 일어난 이 전쟁은 1713년까지 11년동안 진행되었다. 전쟁이 끝나게 된 것은 1711년 샤를르 6세의 형으로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근무하던 요셉 1세가 갑자기 요단강을 건너는 바람에 동생인 샤를르 6세가 헝가리 및 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였고 이어 얼마 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는 바람에 스페인 왕위 문제는 자연히 없던 일로 되었기 때문이다. 샤를르 6세는 정치에 있어서 서투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샤를르 6세 때에 합스부르크의 위상은 크게 높아졌다. 부인 엘리자베트의 보이지 않는 영향력도 작용했다. 엘리자베트의 아버지는 당시 유럽 왕가에서 무시못할 존재인 브룬스위크-뤼네브르크(Brunswick-Lüneburg)의 루이 루돌프(Louis Rudolf) 대공이었다. 엘리자베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지낸 프레데릭 3세의 후손이었다. 

 

   

 샤를르 6세의 아버지 레오폴드 1세와 어머니 엘레오노레-막달레나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날 때, 슬하에는 딸 둘만 있었다. 큰 딸 마리아 테레자와 둘째 딸 마리아 안나였다. 아들이 있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고안해 낸 방안이 국사조칙이었다. 딸들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제국이 분열되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샤를르 6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결국에는 마리아 테레자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여왕으로  및 오스트리아의 군주(대공비)로 등극했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여자이기 때문에 안된다면서 샤를르 7세라는 사람을 황제로 선출했다. 그후 몇 년 동안에 걸친 샤를르 7세의 치하가 끝나자 마리아 테레자의 영향력 아래 남편인 로레인의 프란시스가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이것은 앞으로 다른 가문은 곤란하고 다만 합스부르크의 라인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를 계속 연결하여 차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호프부르크에 연결되어 있는 스페인궁정승마학교(Spanische Hofreitschule)

 

샤를르 6세는 스페인에서 지낸 일이 있다. 그래서 스페인 궁정의 여러 관습을 비엔나에 도입하였다. 그 중에서도 ‘스페인승마학교’를 설립한 것은 대표적인 일이었다. 샤를르 6세 시절에 호프부르크 궁전에 연결하여 국립도서관과 제국수상집무실(Reichskanzlei)이 완성되었다. 비엔나의 대부분 바로크 스타일 건축물은 샤를르 치하에서 건설된 것이다. 예를 들면 호프부르크의 미하엘 동(棟)이다. 샤를르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다. 어린 시절, 유명한 작곡가이며 음악이론가인 요한 요셉 푹스(Johann Joseph Fux)에게서 음악을 배웠다. 샤를르는 하프시코드를 잘 연주했으며 궁정밴드를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샤를르는 향년 55세로 1740년 10월 20일 세상을 떠났다. 독버섯 요리를 먹고 죽었다고 한다. 복잡하고 귀찮겠지만 다시 한번 샤를르 6세의 직계 조상들을 살펴보면,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레오폴드 1세이며 할아버지는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3세였고 증조할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페르디난트 2세였다. 어머니는 노이부르크(Neuburg)의 엘레오노레-막달레나이며 외할아버지는 팔라타인(Palatine) 선제후인 필립 빌헬름이었고 외할머니는 헤쎄-다름슈타트의 엘리자베트 아말리에였다. 그 이상의 호적 조회는 관심이 없을 것 같아 생략! 사족! 샤를르는 보헤미아에서 카렐(Karel)이라고 불렀으며 헝가리에서는 카롤리(Karoly)라고 부른다.

 

 샤를르 6세의 음악 선생 요한 요셉 푹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