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뚜아네트
1755-1793
[비운의 왕비]
프랑스의 마리 앙뚜아네트도 당연히 합스부르크의 일원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딸이기 때문이다. 마리 앙뚜아네트(Marie Antoinette)는 프랑스식 이름이며 원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이다. 그리고 진짜 호적상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Habsburg-Lothringen)이라는 상당히 긴 것이다. 역사에서는 그를 일반적으로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부른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지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란시스1세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1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는 모두 16명이며 그중 마리 앙뚜아네트는 열다섯번째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14세에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하여 프랑스 및 나바르(Navarre)의 왕비라는 타이틀을 가졌다. 나바르는 지금의 피레네 산맥의 프랑스와 스페인 접경지역에 있는 공국으로서 보통 프랑스 왕의 타이틀에는 나바르의 왕이라는 표현을 포함한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남편 루이16세와 함께 기요틴(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비운의 인물이다. 남편 루이16세의 죄명은 반역죄, 마리 앙뚜아네트의 죄목은 미풍양속 위반, 국가 재정 파탄 등 여러가지. 하지만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죄목은 어느것 하나 증거를 가지고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의 둘째 아들 루이17세(루이 샤를르)도 열 살의 어린 나이로 감옥에서 죽었다. 그러나 일설에는 루이17세가 교묘하게 감옥에서 탈출하여 어디론가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루이17세를 ‘잃어버린 왕세자’(Lost Dauphin)라고 부른다.
12세 때의 마리아 안토니아 (가장 아름다운 초상화) -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랑스 식 이름
[비엔나에서의 어린 시절]
마리 앙뚜아네트는 비엔나 시내에 있는 호프부르크(Hofburg)에서 1755년에 태어났다. 태어난 후의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38세 때였다. 공교롭게도 마리 앙뚜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짧은 생을 마감하던 것은 38세 때였다. 어린 마리안 안토니아는 ‘키가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주 건강한 아이’였다고 한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에서는 제일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사실상 마리 앙뚜아네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별로 미인이 아니었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태어난후 대공비(Archduchess)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왕족의 남자에게는 대공(Archduke)이라는 호칭을 주고 여자에게는 대공비(Archduchess)라는 타이틀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 나중에 비엔나 궁정에서는 마리아 안토니아가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이 확정되자 ‘마담 앙뚜안’(Madame Antoine)이라고 불렀다. 마리아 안토니아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대단히 진보적인 생각은 가진 여성으로 궁정 생활의 여러 예절과 관습을 현실에 맞게 편한 방향으로 바꾸었다. 예를 들면 궁정 출입에 제한을 두지 않은 것이다. 그전까지는 궁정출입을 하려면 일정한 신분의 사람이거나 또는 국가에 대한 공로가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일반 백성들도 필요하면 언제라도 궁정에 출입할수 있게 했다. 구경하러 오든지 또는 쉬러 오든지 상관이 없었다. 드레스 에티케트도 완화하였다. 특히 여자들의 경우에는 완전무장이나 하듯 정장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궁정의 의전절차, 또는 예법도 이상한 것은 폐지하거나 간소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왕비가 출산할 때에는 의전상 열명이 넘는 귀부인들이 왕비의 침실에 빼곡히 들어와서 출산 장면을 지켜보는 관습이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관습을 아주 싫어하여 출산할 때에는 방에서 모두 나가 있도록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족의 개인생활을 중시했다. 아무리 딱딱한 궁중이라고 해도 가족들의 생활은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가족들이 먹고 잠자는 공간에는 외부 사람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했다. 아이들은 궁전에서 일반 백성들이 입는 간편하고 평범한 옷을 입도록 했다. 아이들이 놀 때에도 일반 아이들을 불러다가 함께 놀도록 했다. 자기 형제자매들 끼리만 놀도록 하는 것은 폐쇄적이라는 생각 때문에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기의 15명 자녀들이(1명은 사산하였음) ‘보통 인간’으로 자라기를 바랐다. 이 영향을 받아서인지 마리아 안토니아는 나중에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지낼때 일부러 소박한 농촌 스타일의 거처를 만들어 지냈다.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라는 별채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태어난 비엔나의 호프부르크(Hofburg) - 사진은 궁전 정문인 마하엘문
위대한 외교관이기도 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자기 자녀들을 제국의 외교정책에 십분 활용코자했다. 왕실 사이에 서로 혼인관계를 맺어 국가안보에 기여코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 안토니아는 막내딸이기 때문에 너무 어려서 어머니의 결혼외교 관심대상에서 제외되기가 일수였다. 자연히 어머니의 관심을 많이 받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나중에도 마리 앙뚜아네트와 어머니와의 관계는 그다지 명랑한 것이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여러 딸들 중에서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제일 좋아했다. 착하고 교양 있는 딸이었다. 더구나 두 사람은 생일이 5월 13일로서 같았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어머니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 있었기 때문에 교육도 다른 형제자매들에 비하여 표준이하로 받았다. 그래서 마리아 안토니아는 12살이 될 때까지 모국어인 독일어조차 정확하게 읽고 쓸줄 몰랐다고 한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언니 마리아 크리스티나 (마리아 테레자가 가장 사랑했던 딸)
[프-오 친선 목적]
마리아 안토니아를 프랑스의 왕세자(Dauphin)와 결혼시키려하는 움직임은 마리아 안토니아가 10살 때인 1765년부터 추진되었다. 그해 8월, 마리아 안토니아의 아버지인 프란시스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자 홀로 남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의 딸들을 외교적 목적으로 출가시키려는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였다. 우선 마리아 안토니아의 언니인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는 나폴리의 페르디난드 왕과 결혼토록 하였다. 한편, 파르마 대공인 돈 페르디난드(Don Ferdinand)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 중에서 한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했다. 당시 파르마는 합스부르크의 우산 아래 있었으므로 합스부르크의 리더인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과 결혼한다면 신상에 좋을것 같아서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1750년대에 접어들면서 이른바 7년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평화를 위한 제스추어로서 여러 나라들의 왕실과 혼인에 의한 인척을 맺는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대상국은 합스부르크의 영향아래에 있는 파르마, 나폴리를 비롯하여 러시아, 그리고 특히 오랜 적대국인 프랑스였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들은 그저 어머니의 하명에 따라 신랑감을 만나고 식을 올려야 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총애하는 딸 마리아 크리스티나(Maria Christina)는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눈물로 간청하여 전부터 사모해오던 작소니(Saxony)의 알베르트(Albert)왕자와 결혼할수 있었다. 가장 큰 딸인 마리아 안나(Maria Anna)는 장애자였기 때문에 결혼외교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 여제(女帝)
[천연두와이 싸움]
그러던중 1767년, 천연두가 창궐하여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을 공격했다. 당시 천연두는 불치의 병이었다. 이때의 천연두로 큰 아들 요셉 황제의 부인인 요제파(Josepha)가 우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다음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자신도 천연두에 걸렸으나 철의 여인, 의지의 여인답게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겨 죽음의 사자를 멀리 쫓아 버리고 살아남았다. 나폴리 왕과 결혼한 아홉째 딸 마리아 요제파(Maria Josepha)는 큰오빠의 부인 요제파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관 앞에서 울다가 관이 제대로 밀봉되어 있지 않는 바람에 병균에 감염되어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안토니아는 다행히 아주 어릴 때 천연두에 걸려 면역이 생겼기 때문에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았다. 다섯째 딸인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도 천연두에 걸렸으나 천우신조로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마자국이 생겨서 얼굴 모습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결혼 대상자 리스트에서 빠지게 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나폴리의 왕과 정혼한 마리아 요제파가 결혼생활도 하지 못하고 죽자 보상차원에서 그 아래 딸인 마리 카롤린(Marie Caroline)을 나폴리 왕과 결혼토록 했다. 딸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마리아 아말리아(Maria Amalia)는 전부터 합스부르크의 딸과 결혼하고 싶어한 파르마의 돈 페르디난드와 결혼시켰다. 이제 남은 숙제는 몇 년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프랑스의 왕세자와 혼인관계를 맺는 일이었다. 해답은 당시 12살인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당시 프랑스의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는 13세였다. 그만하면 서로 나이도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빨간 벨벳 드레스를 입은 마리 앙뚜아네트(1779)
[지참금 20만 크라운]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정부는 마리아 안토니아와 루이 오귀스트의 결혼협상을 서로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진척시켰다. 마침내 결말이 났다. 신부측의 지참금은 20만 크라운으로 결정했다. 양국 대표단은 관례대로 서로의 초상화와 반지를 교환했다. 양국 대표는 결혼식 날짜를 협의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두 사람의 결혼이 확정되자 마리아 안토니아는 당시의 관례대로 우선 비엔나에서 대리결혼식을 치루었다. 대리결혼식이란 신부가 다른 나라로 시집갈 때 자기 나라에서 먼저 하나님 앞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일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대리결혼식은 1770년 4월 19일 비엔나의 호프부르크에 연계되어 있는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치러졌다. 대리신랑은 오빠중 한사람인 페르디난트였다. 그로부터 마리아 안토니아는 프랑스 스타일로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고쳐 부르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결혼한 프랑스의 루이 오거스트(루이16세)
[마리아 테레자의 16자녀들]
이쯤되면 도대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이 누가 누구이고 뭐가 뭔지 결치만 아프게 되므로 차제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자녀들에 대하여 정리해보고 넘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전술(前述)한대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 프란시스와의 사이에서 모두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5남 11녀이다. 아들들 중에서는 둘째아들 샤를르 요셉(Charles Joseph)만이 16세로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는 50대에서 60대까지 살았다. 딸들이 워낙 많다보니 사연도 많았다. 첫째 딸은 6세때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 딸은 고작 1년을 살았다. 일곱째 딸은 사산이었다. 여덟째 딸은 12년을 살았다. 아홉째 딸은 16년을 살았다. 그리고 둘째 딸은 불구자였고 다섯째 딸은 어릴때 천연두에 걸려 얼굴에 흉터가 심하게 남아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그러므로 토털 11명의 딸들 중에서 5명만이 결혼 대상자였다. 아무튼 16자녀의 명단을 보면 다음과 같다. 딸들 중에는 이름이 같은 경우가 있다. 일찍 세상을 떠난 딸을 기억하여 다음에 태어난 딸에게 그 이름을 붙여 주었기 때문이다. 모든 딸들의 이름은 마리아로 시작한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신앙심이 두터워서 성모 마리아의 이름을 빌려 썼던 것일까? 아니면 자기의 이름을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였을까?
1. 마리아 엘리자베트 (1737-1740). 6세때 사망
2. 마리아 안나 (1738-1789). 51세로 사망. 불구자
3. 마리아 카롤리네 (1740-1741). 1년 넘게 살다가 사망
4. 요셉 (1741-1790). 49세로 사망. 아버지의 뒤를 이어 1765년부터 신성로마제국 황제. 1780년부터는 오스트리아 대공, 헝가리 왕, 보헤미아 왕. 스페인의 이사벨라 공주와 결혼하였으나 일찍이 여의고 다시 바바리아의 마리 요제프와 결혼. 후사가 없음.
5. 마리아 크리스티나 (1742-1798). 56세로 사망. 마리아 테레자가 가장 총애하는 자녀. 오빠 요셉의 부인인 마리 요세프와 동성연애 관계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두 사람은 친밀하였음. 그래서 오빠 요셉으로부터 미움을 받았음. 다른 딸들이 정략적 결혼을 한데 비하여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를 설득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작소니의 알베르트 왕자(테셴 대공)와 결혼하였음. 마리아 크리스티나의 무덤은 비엔나의 아우구스틴 교회에 있으며 애도하는 조각상들이 특히 인상적인 아름다운 작품이다.
6. 마리아 엘리자베트 (1743-1808). 65세까지 살았으나 어릴때 천연두로 얼굴이 심하게 얽어 결혼 대상에서 제외
7. 샤를르 요셉 (1745-1761). 16세로 세상을 떠남.
8. 마리아 아말리아 (1746-1804). 58세로 세상을 떠남. 파르마공작 페르디난드와 결혼함. 자녀는 없음.
9. 레오폴드 (1747-1792). 45세에 사망. 형 요셉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됨.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자 공주와 결혼.
10. 마리아 카롤리네 (1748년 사산)
11. 마리아 요한나 가브리엘라 (1750-1762). 12세에 사망
12. 마리아 요제파 (1751-1767). 16세에 사망. 나폴리 왕과 결혼하였으나 사망하여 동생인 마리아 카롤리네가 다시 나폴리 왕과 결혼.
13. 마리아 카롤리네 (1751-1814). 62세에 사망. 언니 마리아 요제파가 나폴리 왕과 결혼하였으나 일찍 죽는 바람에 나폴리 왕 페르디난드와 결혼.
14. 페르디난드 (1754-1806). 62세에 사망. 1803년부터 브라이스가우 대공. 브라이스가우와 모데나의 왕위 계승자인 마리아 베아트리체와 결혼.
15. 마리아 안토니아 (1755-1793). 마리 앙뚜아네트. 38세로 죽음. 프랑스의 루이16세와 결혼.
16. 막시밀리안 프란시스 (1756-1801). 45세로 사망. 1784년 쾰른의 선임 추기경이 됨.
[라인강변의 켈]
마리 앙뚜아네트는 1770년 5월 7일,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루이 오귀스트(1754-1793) 왕세자에게 인계되었다. 루이는 마리안 안토니아보다 한 살 위였다. 인계되었다고 하니까 마치 물건을 전달한 것처럼 생각할지 모르나 사실은 어머니의 의향에 순종하여 정략적으로 결혼하는 것이므로 사랑이니 애정이니 하는 것은 당장 생각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인계 장소는 켈(Kehl)이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지대인 라인강변의 작은 마을로서 현재는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바로 건너편에 있는 마을이다. 프랑스 왕실을 대표하여서 드 노아이유(de Noailles)백작 부부가 마중나왔다. 누가 마중나왔느냐는 것까지 설명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핀잔을 줄지 모르지만 영접대표단의 드 노아이유백작부인은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인 루이 왕세자의 공식 정부(情婦)로서 임명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 왕실에서는 왕이나 왕세자등이 공식적으로 정부 겸 애인을 둘수 있는 이상한 관습이 있었다. 더구나 그런 정부나 애인을 부모가 공식적으로 임명까지 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일 뿐이다. 임자가 있으므로 다른 사람들은 얼씨거리지 말라는 의미에서 였을 것이다. 영접단원 중에는 마담 엘리자베스(Madame Elisabeth)도 있었다.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와 대단히 단짝으로 지낸 여인이었다. 결혼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도팽느(Dauphine: 왕세자비)라고 불렸다.
라인강이 흐르는 켈(Kehl). 마리 앙뚜아네트가 결혼하기 위해 프랑스에 첫발을 디딘 곳.
[초야에 대한 관심]
마리 앙뚜아네트와 왕세자 루이 오귀스트의 결혼식은 1770년 5월 16일(훗날 우리나라에서 5.16군사혁명이 일어난 날), 콜로르노 공작궁(Palais ducal de Colorno)에서 거행되었다. 프랑스의 영화(榮華)를 보는 것과 같은 초호화 결혼식이었다. 프랑스에서의 결혼은 초야(初夜)를 잘 치루는 것으로 완성된다는 관습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되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신혼부부의 초야를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며 일이 잘 치루어졌는지를 확인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오귀스트의 첫날밤 베드 신도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았다. 후문에 의하면 두 사람은 별다른 일을 치루지 않고 멀뚱멀뚱 지내다가 겨우 잠들었다고 한다. 하기야 14살 어린 새댁이 알면 얼마나 알것인가? 하지만 두 사람이 초야에 아무 일도 치루지 않았다는 것은 왕국의 종사를 위해서 불충한 것이라는 구설수가 그후 7년동안 두 사람을 괴롭히며 맴돌았다.
[왕세자비의 생활]
프랑스의 왕세자(Dauphin)와 오스트리아 공주의 결혼은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문제는 그 반향이 긍정적인 측면보다는 부정적인 측면이 강했다는데 있었다. 긍정적인 측면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일반 대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백성들이 모인 첫 공개석상에 나타난 것은 결혼 3년후인 1773년 6월 8일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를 보기 위해 파리의 튈러리 정원(오늘날의 튈러리 공원)에 운집한 시민들만 5만명이 넘었다고 한다. 일부 시민들은 눈물까지 흘리며 열광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오페라에 참석한 것도 대성공이었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무대는 보지 않고 로열박스에 앉아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만 열심히 쳐다보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오페라를 보던 마리 앙뚜아네트가 박수를 치면 관객들도 덩달아 열심히 박수를 쳤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활동에 참여하자 사람들은 ‘왕세자비 마마는 하늘이 보내신 분이야!’라면서 감격해 했다. 어느날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떤 가난한 사람의 임종을 직접 지켜보면서 가족들을 따듯하게 위로한 일이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유가족들이 정부로부터 생활보조비를 받도록 해주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람들은 그저 고맙고 황송해서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파리 시내의 튈러리공원(멀리 보이는 건물이 튈러리 궁전). 마리 앙뚜아네트를 보기 위해 파리 시민들이 모여들었던 곳
[화려한 베르시아유 궁전]
그러나 궁정(宮庭)에서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베르사이유의 잘난체 하는 귀부인들은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마리 앙뚜아네트를 저 변방에서 온 촌사람으로 취급하였다. 더구나 당시만 해도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적대적인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 앙뚜아네트를 얕잡아 보고 무시하기가 일수였다. 당초에 프랑스의 왕족들은 왕세자 루이 오거스트의 배우자를 색손(영국을 말함)의 공주중에서 선택되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오스트리아의 공주가 선택되었다. 영국에 우호적인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에서 온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하여 호의적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 오거스트의 고모 및 숙모가 되는 마담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뒤에서 노골적으로 l'Autrichienne(로트리시엔느)라고 수군댔다. 글자그대로 본다면 ‘오스트리아 여인’이지만 실은 발음이 거의 같은 l'Autruchienne라고 빈정댄 말이었다. 이 말은 autruche와 chinne의 합성어로서 번역하면 ‘타조같이 못된 년(영어로 ostrich bitch)’이라는 욕이 된다. 어떤 귀부인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위대하신 루이14세에게 꼬리를 쳐서 태양왕 루이14세를 오스트리아의 노예처럼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마리 앙뚜아네트 때문에 프랑스 궁정의 아름답고 우아한 전통이 무너지고 있다고 공격했다. 아무튼 프랑스의 귀부인 및 마담들이란 여자들은 참으로 못돼 먹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의 말에 순종하여 멀리 고향을 떠나 물설고 낯 설은 파리에 와서 시집살이 하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따스하게 보살펴 주지는 못할망정 온갖 비난과 험담을 퍼붓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말이 나온 김에 14살 소녀가 알긴 뭘 안다고 첫날밤을 잘 치루지 못했다느니 하면서 구시렁대는가 말이다. 프랑스 여자들은 10대의 소녀시절에 이미 남녀간의 모든 일을 완전 경험하고 숙달했단 말인가? 불쌍한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가 살았던 베르사이유 궁전
[차가운 마담 뒤 바리]
당시 루이15세의 정부로서 베르사이유에서 무시못할 존재인 마담 뒤 바리조차도 마리 앙뚜아네에게 미지근하게 대하였다. 마담 뒤 바리는 오스트리아-프랑스의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왕세자와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힘쓴 에티안느-프랑수아(Etienne-Francois) 공작을 베르사이유에서 축출하는데 한 몫을 했다. 따라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기를 싫어하는 마담 뒤 바리 등과 가깝게 지내지 못했으며 결국 마리 앙뚜아네트는 고립되지 않을수 없었다. 이처럼 마리 앙뚜아네트가 베르사이유에서 어색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들은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 오스트리아 궁내부장관인 플로리몽 클로드(Florimond Claude) 등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제발 고개를 숙여라! 마담 뒤 바리와 가깝게 지내라! 너도 좋고 우리도 좋은 일이다!’라며 화해를 종용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꾹 참고 1772년 신년하례 모임에서 마담 뒤 바리에게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건넸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담 뒤 바리에게 한 말은 ‘요즘 베르사이유에는 참 여러 사람들이 많이 있네요!’가 전부였다. 하지만 루이15세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담 뒤 바리와 얘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를 비교적 쌀쌀맞게 대한 마담 뒤 바리. 이 그림에서는 아주 착하게 생겼는데.
여기서 잠시 루이 14세부터 16세까지의 세사람을 확실히 구별할 필요가 있어서 이들의 주민등록증을 살펴보면,
- 루이14세 (1638-1715: 재위 1643-1715)
- 루이15세 (1710-1774: 재위 1715-1774)
- 루이16세 (1754-1793: 재위 1774-1792)이다.
[바람 잘날 없는 친정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는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에 대하여 딸로서 갸륵한 감정이 없었다. 평소 비엔나에서 지낼때 자기에게는 관심도 보여주지 않고 다른 언니들, 특히 마리아 크리스티나만 유독 총해했기 때문에 섭섭했었다. 더구나 자기 생각과는 상관없이 어린 자기를 머나먼 타향 파리로 시집보내지 않았던가?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가 너무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자기를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머니이지 않는가?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사방에서 자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형편에 그래도 의지할 데라고는 친정어머니 밖에 없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도 막내딸을 프랑스로 시집보내고 나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걱정을 하지 않을수 없었다. 잘못하다가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의 싸움으로 번질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거의 정기적으로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편지를 보내 이모저모로 코치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가장 큰 관심사항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어서 아이를 낳은 일이었다. 시집간 딸에게 친정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사실 그 것이 제일이었다. 그래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어떻게 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아 성공적이고도 정열적인 잠자리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하여도 코치를 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단기간내에 16명의 자녀를 출산했던 경험이 있는 잠자리의 베테란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만일 루이 왕세자가 마리 앙뚜아네트와의 잠자리에 흥미가 없다면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관심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여 걱정했다.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어릴 때 너무 승마를 많이 하여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하며 ‘그 놈의 말만 많이 타지 않았어도!’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마리아 테레지아가 가장 아끼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는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이었다.
커스튼 던스트(Kirsten Dunst)가 마리 앙뚜아네트의 역을 맡은 영화
[프랑스 패션의 선두주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 루이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루이의 관심을 끌게 되면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계속되는 잔소리로부터 벗어날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화려한 드레스, 신발, 가발, 화장품 등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촌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드레스 만드는 사람, 머리 손질하는 사람, 구두 만드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러들이고 돈을 썼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 무슨 물건이 나왔다고 하면 베르사이유에서 파리 시내로 나가 쇼핑을 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의 이멜다(Imelda)는 저리가라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사이유 패션의 선두주자였다. 화려하게 치장하고 보니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필요가 있었다. 몇몇 짝꿍들과 모여 수다를 떠는 일에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고 그것도 심심해지자 카드놀이와 경마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원래 할 일없는 몇 사람들이 모이면 노름을 하기 마련이며 노름을 하면 돈을 잃기 마련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씀씀이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왕세자비로서의 임무는 거의 거들떠보지 않게 되었다. 예를 들면 왕세자비는 지급받는 생활비 중에서 일정액을 자선을 위해 써야 하는데 돈이 모자라다보니 자선은커녕 빚만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깨와 가슴을 드러내는 드레스를 처음으로 유행시켰다.
[마사모의 등장]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기 주위에 모여드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서클을 만들어 밤낮으로 함께 지내며 먹고 노는 일에 치중했다. 가장 주목할 만한 멤버는 드 랑발(de Lamballe)공주였다. 예민하지만 순수한 마음을 지닌 청상과부였는데 외로운 입장에서 서로 가까워 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드 랑발 공주를 왕세자비의 가사(家事)를 돌보는 책임자로 임명했다. 유흥전문가인 폴리냑(Polignac) 백작부인 가브리엘르(Gabrielle)는 마리 앙뚜아네트 서클의 핵심멤버로서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왕비가 되자 ‘왕비폐하 사조직’(Societe Particuiere de la Reine: 일명 마사모) 구성의 책임자 역할을 했다. 가브리엘르는 한때 마리 앙뚜아네트 아이들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도 가브리엘르를 친구로서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마사모’(마리 앙뚜아네트를 사랑하는 모임)의 또 다른 멤버로서는 루이의 누이동생인 마담 엘리사베스(Madame Elisabeth), 그리고 유일하게 남성으로서는 루이의 남동생격인 다르투아(d'Artois)백작이 있다. 다르투아백작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좋아하여 파리의 마리 앙뚜아네트와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자 사이의 편지 연락책으로 자원봉사했다. ‘마사모’의 핵심멤버는 아니지만 존경받는 멤버로서는 유명한 작곡가 글룩(Christoph Willbald Gluck)이 있다. 글룩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비엔나에 있을 때 음악선생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파리에 오자마자 글룩의 후원자가 되었다. 음악사에서 유명한 사건인 ‘부퐁전쟁’(제2차)은 글룩을 후원하는 마리 앙뚜아네트와 글룩을 반대하는 마담 뽕빠두(Madame Pompadou)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다. 어쨌든 ‘마사모’는 당시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귀족사회에서도 서로 ‘마사모’ 스타일의 모임을 구성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주로 여자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재잘대다보니 나중에 ‘마사모’는 동성연애자(레스비안)들의 모임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건 그렇고, 마리 앙뚜아네트는 파리에서 글룩의 ‘얼리드의 이피게니’(Iphegenie en Aulide) 초연을 보고나서 옛 스승님의 뛰어난 재능에 감동하여 글룩의 공식 후원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글룩은 독일 사람이다. 그러니 반오스트리아주의자들이 입방아를 찧지 않을수 없었다. 글룩대 피치니의 전쟁이 일어난 것도 그 때였다. 이 전쟁에 대하여 설명하자면 한참 걸리므로 여기서는 생략!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백남옥 교수가 쓴 ‘오페라 로만티카’라는 책을 보면 좋겠다. 글룩대 피치니의 전쟁과 연계하여 불붙은 마리 앙뚜아네트와 마담 뽕빠두와의 부퐁논쟁 때문에 시끄러워서 그랬는지 아무튼 루이15세가 곧이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1774년 5월 10일, 64세의 늙은 나이에 때아닌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이어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 오거스트가 새로운 프랑스 왕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루이 오거스트(루이16세)와 결혼식을 올린 콜로르노공작궁
[렝대성당에서의 대관식]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 오귀스트는 1774년 6월 11일 렝(Rheims)의 대성당에서 루이16세로서 대관식을 가졌다. 파리에서 서쪽에 있는 고도(古都) 렝은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그런데 당시 20세의 마리 앙뚜아네트는 왕비로서 관을 쓰지 못했다. 과거에는 남편이 프랑스 왕으로 대관식을 가질 경우, 부인도 왕비로서 대관(戴冠)으 의식을 가졌다. 그러나 마리 앙뚜아네트는 대관식에서 다만 남편 루이16세를 수행하였을 뿐이다. 이런 것을 보면 프랑스 왕실이 오스트리아를 얼마나 우습게보았는지 알수 있다. 따지고 보면 마리 앙뚜아네트의 남편 루이 오귀스트는 어린 시절부터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그런데 운명의 수레바퀴가 돌고 돌아 부인을 오스트리아 여자로 맞게 되었던 것이다. 루이 오귀스트는 프랑스 왕으로서 루이16세가 되자 노골적으로 반오스트리아 감정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두 사람의 유공자가 있다. 재상 장-프레데릭 펠리포(Jean-Frederic Phelypeaux)백작과 외무장관인 샤를르 그라비에(Charles Gravier)백작이다. 루이16세를 포함한 3인방은 반오스트리아 정책의 권위자들이었다. 그런 와중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조국 오스트리아와의 협력을 추진할수 있는 드 수아슬(de Choiseul) 공작을 새 정부에서 중용해 달라고 남편 루이16세에게 부탁했다. 당연히 3인방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오스트리아 운동의 기수들인 3인방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오스트리아에 유리하도록 프랑스 정책에 간섭할 것 같아 노심초사하였다. 프랑스 정책에 대한 마리 앙뚜아네트의 영향력은 곧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자에게 영향력을 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루이16세가 대관식을 올린 렝의 노트르담(성모) 대성당
[선동적인 언론]
그러던중 마리 앙뚜아네트가 더 조심해야할 일이 생겼다. 남편 루이가 루이16세로 대관식을 가진지 약 한달후, 루이16세의 동생으로 마리 앙뚜아네트의 편인 아르투아 백작의 부인 마리 테레스(Marie Therese)가 아들을 낳았다. 아기의 이름은 루이 앙뚜안(Louis Antoine)이라고 붙였다. 만일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 사이에 아들이 있다면 7세에 프랑스의 차기 왕위계승자가 된다. 그러나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는 아들은 커녕 딸도 없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문제는 리벨르(Libelles)라는 선동적인 신문이 루이 앙뚜안의 탄생 기사를 다루면서 마치 작심이라도 한듯 루이16세는 임포텐스(성기능불능자)이어서 자녀가 없으며 반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으로부터 만족을 얻지 못한 나머지 섹스의 화신이 되어 남녀 불문하고 은밀한 성생활을 하고 있다고 과장보도를 하였다. 그러면서 리벨르지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동성연애 대상자가 남편 루이16세의 여동생인 드 랑발 공주이며 남자 연애대상자는 루이16세의 동생격인 다르투아 백작이라고 썼다. 속이 상할 대로 상한 20세의 마리 앙뚜아네트가 할 일은 무엇인가? 더 화려한 드레스를 사고 더 많은 돈내기 노름을 하여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었다. 어느때는 파리에서 도박꾼들을 불러다가 3일을 연속해서 카드놀이를 한 일도 있다. 드레스로 말하자면 파리의 로즈 베르탕(Rose Bertin)의상실이 단골이었다. 당대의 로즈 배르탕은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의상 디자이너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와 함께 마리 앙뚜아네트는 자기의 사조직인 ‘마사모’에 여자들 뿐만 아니라 마음에 드는 남자들도 끌어 들이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드 베센발(de Besenval)남작, 드 수아니(de Choigny)공작, 발렌탱 에스터하지(Valentin Esterhazy)백작 등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가깝게 지낸 드 랑발 공주
[프티 트리아농]
베르사이유 궁전의 한쪽에는 프티 트리아농(Petit Trianon)이라는 별채궁전이 있다. 원래 루이15세가 지은 건물이다. 그 건물을 루이16세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대관식 기념선물로 주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 건물과 정원을 자기 취향에 맞게 고쳤다. 어린 시절 비엔나에서 친구들과 함께 정원에서 뛰어 놀던 것을 생각하여 정원을 자연스러운 영국 스타일로 개조하였다. 소박한 시골풍경의 정원이 되었다. 그러나 프티 트리아농의 내부는 얘기가 달랐다. 어느 곳보다도 화려하게 꾸며 놓았다.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벽을 치장해 놓았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당시 프랑스정부는 재정에 허덕이고 있었다. 프랑스는 ‘7년 전쟁’에서 패배하고 전쟁배상금을 갚어야 하기 때문에 허리가 휘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신대륙의 식민지인 미국에서 오랜 원수인 영국과 전쟁을 치러야 하므로 재정부담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러한 때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외상이라면 황소도 잡아먹는다는 말과 같이 그저 죽어라고 돈을 쓰고 빚을 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친정에 SOS를 치게 되었고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는 큰 아들 요셉(당시는 이미 신성로마제국 황제)에게 파리에 가서 도와주어야 할 상황인지 아닌지를 알아보라고 당부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큰 오빠인 요셉은 볼테르의 영향을 받아 평소 자유주의 계몽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아무리 시집간 막내 여동생이지만 허랑방탕하게 돈을 쓰고 빚을 갚지 못해 쩔쩔매는 모습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았다.
루이16세가 대관식 기념으로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선물한 프티 트리아농 건물
[큰오빠 요셉의 자문]
한편, 요셉은 명색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데 쪽팔리게 기껏 한다는 일이 누이동생 빚이 얼마인지 알아보고 갚아줄수 있으면 갚는 그런 임무여서 파리 방문을 무척 내켜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간곡한 부탁이니 듣지 않을수 없었다. 어머니 마리아 테레자의 부탁사항은 한가지 더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 사이에 왜 아직도 아이가 없는지 속사정을 알아보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요셉이 파리 방문을 수락한 것은 계몽주의 사상이 무르익고 있던 당시의 파리 사정을 살펴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러므로 어머니가 부탁한 임무가 마땅치 못했지만 파리행을 수락한 것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요셉은 1777년 4월 18일, 팔켄슈타인(Falkenstein)이라는 가명으로 파리의 막내 누이동생을 만나러 갔다. 요셉은 비엔나에서 할 일도 많지만 파리에 무려 6주동안 머물렀다. 요셉은 기왕 파리에 머무르는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동생 부부에게 무슨 문제가 있기에 아직 아이가 없는지 알아보아야 했다. 당시 소문으로는 루이16세의 물건이 포경이어서 발기가 되지 않으므로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수술을 받지 않아 부부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요셉은 이 개인적 및 신체적 문제를 가지고 루이16세와 단독회담을 했다. 요셉이 내린 결론은 루이16세의 물건이 만족스러울 정도로 발기는 되지만 문제는 상대방의 해당 장소에 들어가서 오래 머물지 못하며 따라서 사정(射精)도 하지 못한채 그냥 나온다는 것이다. 요셉으로서는 처남 루이16세의 사정(事情)이 딱했지만 어떻게 해줄 방안이 없었다. 그저 ‘마음을 집중하라’ 등등 몇가지 자문만 했다. 요셉은 ‘만일 루이16세가 자기의 물건을 일찍만 고쳤더라면 지금은 당나귀처럼 펑펑일 터인데 그렇지 못해서 걱정이다. 하지만 정성으로 힘쓰면 안될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아무튼 루이16세는 처형인 요셉에게 열심히 노력하여 처가 식구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일이 잘되느라고 그랬는지 어땠는지, 또는 요셉이 루이16세에게 코치 및 자문을 잘해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셉이 비엔나로 돌아간지 얼마후인 그해 8월 30일,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는 처음으로 만족스러울만한 잠자리를 함께 했다. 그로부터 두 사람의 잠자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루어졌다. 이듬해 4월에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한 것같다는 얘기가 나돌았고 다음달인 5월 16일에는 임신이 확실하다는 베르사이유의 발표가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큰오빠 요셉 (신성로마제국 황제 요셉2세). 동생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검소하게 살라고 충고함.
[엄마가 된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하고 있는 기간중에 두가지 사건이 발생했다. 모두 나중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었다. 첫째는 스웨덴 출신의 미남 레이디 킬러인 악셀 폰 페르젠(Axel von Fersen)백작이 프랑스에서의 군대 생활을 위해 파리에 온 것이다. 웬만큼 나이든 사람으로서 페르젠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1970년대 초반, ‘베르사이유의 장미’라는 만화가 대단히 유행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페르젠에 대한 연애를 다룬 만화였다. 그 페르젠이 스웨덴에서 파리로 온 것이다. 얼마후 페르젠은 프랑스와 영국간의 식민지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나 4년동안 있었다. 하지만 베르사이유에 머무는 동안 마리 앙뚜아네트와 뜨거운 사이였다고 한다. 또 하나 사건은 친정 오빠 요셉이 바바리아의 왕위 계승권을 찾는데 프랑스가 지원해 줄것을 요청했지만 프랑스 정부가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다된 밥에 재를 뿌려 아예 못먹게 만들은 것이다. 이는 프랑스 정부 내에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정치적 영향력이 아주 미약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 주인공들
[첫딸 마리아 테레자]
스웨덴 출신의 레이디 킬러(Lady killer) 페르젠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뒤로 미루고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 아이에 대한 사항을 언급하지 않을수 없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렇게도 고대하던 아이를 1778년 12월 19일 낳았다. 아들이 아니라 딸이었다. 베르사이유에서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23세 때였다. 대단한 난산이었다고 한다. 관례에 따라 방안에 빽빽이 들어선 많은 궁중 여인들이 출산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것도 마리 앙뚜아네트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비엔나에서는 그런 관습이 이미 폐지되었는데 베르사이유에서는 아직도 왕비가 출산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속이 상했다. 그나저나 의사가 산후처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마리 앙뚜아네트는 많은 출혈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이를 낳은후 기절하여 쓰러졌으며 그 후에는 출산으로 인한 치질로 대단히 고통스러워했다고 한다. 태어난 아이는 마담 공주(Madame Fille du Roi)라는 타이틀을 받았으며 이름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요청에 의해 외할머니의 이름인 마리아 테레자(프랑스어로 마리 테레스)라고 붙였다. 그러나 궁정 사람들은 그 아이를 마리 테레스라고 부르는 대신에 마담 로얄(Madame Royale)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솔직히 말해서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은 궁정 사람들은 ‘마리아 테레자가 뭐 말라 죽은 귀신이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편,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아기 출산에 대하여 왕실에 우호적이 아닌 리벨르(Libelles)지는 아이의 아빠가 정말 누구인지 검사해 봐야 한다면서 왕비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 주장에 앞장 선 사람은 프로방스 백작(Comte de Provence)이었다. 이 양반이 누구냐 하면 기회만 있으면 무능한 루이16세를 물러나게 하고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은 루이16세가 듣지 않아 친권 테스트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얼마후 이번에는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력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실로 마리 앙뚜아네트는 너무나 힘든 초산(初産)을 경험했기 때문에 정말로 임신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친정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자에게 보낸 편지에 ‘건강이 너무 허약해져서 또 다시 아이를 갖게 되어도 출산하기 힘들것 같다’고 쓴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어찌어찌하여 마리 앙뚜아네트는 곧 또 임신하였다. 그러나 1779에 유산했다. 첫 딸 마리아 테레스를 낳은 다음해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 딸 마리아 테레스 샬로테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 루이16세의 승인을 받아 궁중의 몇가지 규범을 과감히 개혁하였다. 예를 들면 마치 나귀의 양 옆에 짐을 실은 것처럼 부풀린 치마(Panniers라고 부름)를 입지 않도록 하고 화장도 지나치게 짙게 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옷은 편하게 입도록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무슬린(모슬린: 옥양목) 드레스를 솔선하여 입었다. 르브렁(Lebrun)이 그린 마리 앙뚜아네트의 1783년 초상화를 보면 무슬린 드레스가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될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의상 및 화장 등에 대한 개혁과 함께 아마추어 연극을 장려하였다. 아무나 연극에 참여하고 싶으면 무대에 올라가 연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는 스타일을 말한다. 이를 위해 마리 앙뚜아네트를 위한 별도의 극장을 지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가끔씩 이 극장에 가서 다른 부인들과 함께 직접 무대에 올라가 연극에 참여하기도 하고 노래도 부르며 즐거워했다. 프랑스 정부에 대한 마리 앙뚜아네트의 영향력은 첫아이를 낳은 이후 차츰 커지기 시작했다. 역시 여자는 아이를 낳아야 큰소리를 치는 것 같다. 1780년에는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 1780년, 마리 앙뚜아네트가 후원한 사람이 재무장관(Jacques Necker)이 되었으며 그 재무장관의 추천한 두 사람, 즉 드 캬스트리(de Castries)후작은 해군장관이 되었고 드 세구르(de Segur)백작은 전쟁장관에 임명된 것이다. 하지만 이로써 마리 앙뚜아네트를 은근히 경계하는 무리들이 생긴 것도 숨길수 없는 사실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서클 활동
[마리아 테레자의 서거]
파리에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입김이 커지고 있는 때에 비엔나에서는 마리아 테레자가 호흡곤란증과 몸이 붓는 부종(浮腫)이라는 병마들과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결국 마리아 테레자는 1780년 11월 29일, 63세를 일기로 비엔나에서 저 먼 요단강을 건너갔다. 유럽 전체가 애도했다. 유럽의 거의 전역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럽 전체가 애도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리아 테레자의 죽음으로 프랑스-오스트리아의 관계가 악화되지 않을까, 나아가 자기에게 무슨 영향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오빠 요셉 황제가 마리 앙뚜아네트가 직접 편지를 보내 ‘그런 일을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프랑스와의 동맹을 깨트리지 않겠다는 약속이었다.
비엔나 마리아 테레자 플라츠에 있는 마리아 테레자 기념상. 마리 앙뚜아네트가 25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나의 아들 왕세자?]
마리아 테레자가 세상을 떠난지 3개월쯤 지나서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곧 이어 베르사이유는 1781년 3월,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해 7월, 오빠 요셉 황제가 다시 파리를 방문하였다. 무슨 큰 일이 있어서 방문한 것은 아니며 다만 프랑스-오스트리아의 동맹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간 김에 마리 앙뚜아네트를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 왕실의 재화를 몰래 요셉에게 빼 돌렸다는 것이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지만 그만큼 프랑스 궁정에서는 오스트리아를 모함하는 부류들이 있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왜 저렇게 죽어라고 오스트리아를 미워하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여 그렇게 바라던 왕자 아기씨가 1781년 10월 22일 태어났다. 루이 조셉 사비에르 프랑수아(Louis Joseph Xavier Francois)라는 긴 이름이 붙여졌으며 공식 타이틀은 드 브레타뉴 공작(Duc de Bretagne)이었다. 하지만 왕세자였기 때문에 모두들 도팽(Dauphin)이라고 불렀다. 그날 사냥을 하고 있던 루이16세는 아들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상당히 기뻤는지 사냥일지에 ‘마담, 그대는 나와 프랑스의 소원을 들어주었소이다. 당신은 왕세자의 어머니요’라고 썼다. 그러나 나중에 궁정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따르면 루이16세는 ‘당신은 왕세자의 어머니요’라는 문구에 원래는 ‘당신은 나의 아들인 왕세자의 어머니요’라고 쓰려고 했다는 것이다. 아빠인 루이16세가 ‘나의 아들’이란 말을 주저주저하다가 삭제한데 대하여 시비가 많았다. 마침 왕세자가 태어나기 전날, 미국에서 프랑스군과 전쟁을 벌이던 영국군이 항복했다는 기쁜 소식이 들어왔다. 루이16세로서는 아무튼 기쁜 일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첫 아들 루이 조셉 (8세로 세상을 떠남)
[반오스트리아 정서]
그러나 왕세자 탄생으로 축하 무드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마리 앙뚜아네트의 영향력이 커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로서는 섭섭한 입장이었다. 비엔나의 요셉은 동생 마리 앙뚜아네트를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얼간이’라고 비난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오빠! 난 별로 힘이 없어요. 남편이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반(反)오스트리아 교육을 받은 사람이어요. 장관들도 거의 모두 우리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아요. 제가 할수 있는 일이 없어요. 남편 루이는 제가 정치문제에 뭐라고 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해요. 그렇게 싫어하는데도 불구하고 장관들 회의에 나가서 우리 오스트리아를 위해 뭐라고 말하면 남편이 좋아하겠어요? 나만 더 이상하게 되어요!’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아무튼 마리 앙뚜아네트는 조국 오스트리아를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장관들에게 남편 루이 폐하의 말이라고 하면서 자료나 정보를 달라고 했다. 장관들이야 폐하의 양해사항이라고 하니 필요한 정보자료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그런 속임수도 한두번이지 만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탄로가 나면 큰 일이 날것이므로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나마 그 일도 몇 번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루이16세 폐하의 신임을 단단히 받아 권력이 대단히 높아진 것으로 생각하며 고분고분했다. 참으로 사람 사는 세상 우습기도 하다.
화려한 의상을 입은 프랑스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의 초상화
[가정교사 드 폴리냑 공작부인]
정치에서 손을 떼기로 한 마리 앙뚜아네트가 할 일은 두 아이에게 전념하는 것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이들을 직접 교육하고 양육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것은 베르사이유의 규칙이 아니었다. 왕실의 아이들은 ‘프랑스의 아이들’이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아이들’은 여러 명의 궁정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교육을 받아야 했다. 궁정 사람들은 자기들의 장래 출세를 생각하여 ‘프랑스의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임명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로비를 했다. 그런 와중에 왕비마마께서 아이들의 교육을 직접 담당하시겠다고 하니 궁정의 가정교사 후보자들이 좋아할리 없었다. 마침 그때까지 가정교사로 있던 로한-게메네(Rohan-Guemene) 공주가 파산하여 왕실가정교사를 사임하게 되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내 아이들을 가르칠 선생님을 선정하는데 왜 딴 사람들이 나서는가?’라면서 드 폴리냑(de Polignac) 공작부인을 직접 신임 가정교사로 임명했다. 아름다운 드 폴리냑 공작부인은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6세 위로서(1749-1793) 베르사이유 궁전의 가수였다. 그러자 궁정에서 반대가 일어났다. 공작부인은 지위가 너무 높으므로 타당하지 않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가 그대로 밀고 나가 드 폴리냑 공작부인이 왕세자 루이 조셉과 공주 마리 테레스의 가정교사로 임명되었다. 드 폴리냑 공작부인에게는 아이들이 있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 아이들도 궁전에 들어와 자기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배려했다. 궁정의 다른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이같은 조치에 극히 불쾌감을 가지게 되었다. * 마담 드 폴리냑의 원래 이름은 욜란드 가브리엘르 드 폴라스트롱(Yolande de Gabrielle de Polastron)으로 일본 만화인 '베르사이유 장미'에서는 레이디 오스카(Lady Oscar)라는 가명으로 등장한다. 만화에서 레이디 오스카의 이름은 오스카 프랑수아(Oscar Francois)이다.
악보를 들고 있는 마담 드 폴리냑(가브리엘르 드 폴라스트롱). 왕자와 공주의 가정교사.
[마사모에 정부예산 집행]
1783년 6월,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시 임신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28세 때였다. 같은 달에 스웨덴 출신의 레이디 킬러 페르젠(Fersen)백작이 미국으로부터 돌아왔다. 페르젠은 1778년, 베르사이유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를 처음 만나 레이디 킬러로서의 재능을 선보였던 일종의 고급제비였다. 돌이켜 보면,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들이 페르젠을 레이디 킬러라고 하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고 미남 백작인 페르젠과 가까우면서도 뜨겁게 지냈던 것은 첫째 딸을 임신하고 있는 때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첫 딸을 낳은후 이듬해에 다시 임신하였다. 임신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얼마후 페르젠백작은 영국군과 식민지 전쟁을 벌이고 있는 프랑스군을 지원하겠다고 하며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얼마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임신중인 아이를 유산했다. 그리고 4년이란 세월이 흘러 1783년이 되었다. 때를 맞추어 미국에 갔던 페르젠백작이 베르사이유로 돌아 왔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반가운 마음에 페르젠을 ‘마사모’에 참여토록 했다. 두 사람은 옛날 기분이 되살아났는지 서로 떨어지지 않고 지냈다. 그러기를 두달! 페르젠백작은 마침 유럽을 순방중인 스웨덴 구스타브왕의 경호장교로서 임명되어 베르사이유를 떠나게 되었다. 두달후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시 유산하였다. 그리고 정말 전보다 더 건강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페르젠백작을 처음 만난 직후, 베르사이유의 프티 트리아농에 아모(Hameau)라고 하는 농촌 마을을 만든 것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농가 11채와 물레방아가 있는 작은 마을이다. 초호화 궁전에서 사는 것이 싫증 날 때도 있으므로 조용한 시골에서 지내는 기분을 갖기 위해 농가들을 지었다. 농가 주변의 터에는 잡초가 우거지게 하여 자연적인 기분을 내도록 했다. 작은 농가를 10여채나 지었기 때문에 마리 앙뚜아네트가 농촌마을인 하모에 있다고 해도 어느 집에 있는지 모른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사이유 안에 만들어진 이 농촌마을에서 마사모 멤버들을 만났다. 페르젠백작과 자주 만나던 곳도 이곳이었다. 그건 그렇고, 베르사이유 궁전내의 농촌마을에 투입된 공사비가 얼마인지 알게된 국민들은 다시한번 기가차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리고 왕실을 더 증오하게 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열기구(熱氣球)에도 관심이 많았다. 열기구를 타고 지겨운 베르사이유를 떠나 멀리 알프스를 넘어 비엔나로 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직접 열기구 여행을 하지는 않았지만 열기구 제조 및 운행을 지원했다. 또 많은 돈이 들어가는 취미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에 건설된 농촌 마을 아모(Hameau)
[도팽의 건강]
마리 앙뚜아네트가 파티, 유행, 도박, 초콜릿 따위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지만 실제로 가장 관심을 두었던 일은 아들 왕세자(루이 조셉)의 건강문제였다. 1784년 페르젠이 베르사이유로 돌아오자 마리 앙뚜아네트는 마사모 및 페르젠에만 신경을 썼었으나 도팽(왕세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듣자 그제서야 엄마로서 모성애가 발동했던 것이다. 주위에서는 왕세자가 얼마 살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심지어 루이 왕과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가 지금의 왕세자가 죽을 것에 대비해 다시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왕세자에 대한 불확실한 괴소문이 나돌고 있는 참에 파리에서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이 공연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어린 시절 만났던 모르차르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처음에 ‘피가로의 결혼’이 공연되자 당국은 당장 공연을 중지시켰다. 귀족 알기를 우습게 아는 내용이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얼마후 공연허가가 나왔다. 실제로 보마르셰의 2부작 소설은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으며 마리 앙뚜아네트와 서클 사람들도 재미나게 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다 알고 있는 내용인데 오페라라고 해서 금지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후문에 따르면 마리 앙뚜아네트가 ‘피가로의 결혼’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서 공연허가를 주었다고 한다. 그나저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도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를 몰아내는 프랑스혁명에 기여한바가 컸으니 이 또한 아이러니였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
[사랑의 페르젠백작]
미국에서 돌아온 페르젠이 6주동안 베르사이유에 머물다가 돌아간 후 마리 앙뚜아네트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제 식구들이 늘어나게 되자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하여 별도의 부동산을 마련하고 싶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생 클루(St Cloud) 성(城)을 사서 나중에 아이들에게 물려줄 생각을 했다. 복덕방이 협상을 추진했다. 집값은 6백만 리브르(livres)였다. 집단장과 가구 비용까지 합한다면 1천만 리브르가 넘는 거액이었다. 왕실 재무담당은 외채도 갚지 못해 걱정이라면서 난색을 표명했지만 결국 개인용도의 부동산을 사려던 계획은 원래대로 추진되었다. 1785년 3월 27일, 마리 앙뚜아네트가 25세 때에 둘째 아들이 탄생했다. 루이 샤를르(Louis Charles)였다. 태어나자마자 노르망디 공작이라는 타이틀을 받았다. 루이 샤를르는 병약한 큰 아들 루이 조셉과는 달리 골격도 튼튼하고 키도 컸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둘째를 너무 사랑하여 ‘수 다무프’(chou d'amour)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말하자면 ‘아이구, 내 강아지’였다. 둘째의 생긴 모습이나 체격이 첫째와 비슷하지 않자 자연히 ‘아빠가 누구냐?’는 궁금증이 나돌았다. 혹시 페르젠의 아이가 아니냐는 뒷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감히 루이16세의 아들을 보고 무슨 이득을 보겠다고 ‘친자확인이나 하자!’고 나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둘째 아들에 대한 괴소문은 더 이상 구설수에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둘째에 대한 루머는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증오심을 한겹 더해주는 것이었다.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이미지는 방탕, 음란, 낭비, 탐욕 등 이었다. 게다가 생 클루(St Cloud)성의 매입과 친정 오빠 요셉에게 프랑스 왕실의 보화를 빼돌렸다는 소문까지 있어서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인식은 점점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었다. 궁정 사람들은 물론, 백성들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합스부르크의 꼴통’이라고 부르며 깔보고 무시했다. 이러한 때에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이 터졌다.
페르젠백작 (1755-1810). 어, 좀 늙어 보이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
왕세자 루이 조셉이 태어나고 나서 몇 달후, 왕비는 유명한 보석상인 뵈메르(Boehmer)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로한(Rohan)의 추기경인 루이(Louise) 공자가 주문한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관한 내용이었다. 로한의 추기경이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를 위해 산다고 했으나 값을 치루지 않고 있으니 최종 소유자가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오래전부터 로한의 추기경을 경멸해 왔다. 왜냐하면 마리 앙뚜아네트가 파리로 시집 온 후 로한의 추기경이 비엔나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었는데 그 때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하여 좀 못마땅하게 과장하여 얘기한 일이 있었다. 그 얘기가 프랑스 신문에 실리자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입장이 난처했던 일이 있었다. 그래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추기경이 비엔나에서 파리로 돌아오자 여러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추기경을 힐책한 일이 있다. 실은 그 목거리는 마리 앙뚜아네트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마담 뒤 바리가 주문한 것인데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 사지 않겠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졌지만 실은 마담 뒤 바리가 사지 않은 그 목걸이를 로한의 추기경이 왕비에게 잘 보이려고 선물로 샀다는 것이다. 추기경은 나중에 자기의 정부가 된 드 라 모트-발루아(de La Motte-Valois)백작부인인 잔느(Jeanne)를 통해 그 목걸이를 샀다. 잔느는 왕비가 자기를 거들떠보지 않는다고 하여 왕비를 싫어한 여인이다. 그러나 영악한 잔느는 추기경에게 가짜 편지를 만들어 보여주며 왕비가 자기를 신임하여 목걸이를 받아오도록 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목걸이와 관련된 백그라운드 스토리는 마치 미스터리 소설을 읽는 것처럼 복잡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할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다이아몬드 목걸이는 과연 누구의 수중에 들어갔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괴도 루팡이 가져갔는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보석상이 어느 누구로부터도 대금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파급 영향은? 몇가지 괴소문이 퍼진 것이다. 예를 들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가 목걸이를 손에 넣기 위해 로한의 추기경과 베르사이유의 어떤 으슥한 곳에서 만나 섹스상대를 해주었다는 소문, 중간에서 누군가 협잡을 부려 목걸이 대금을 가로채고 그걸 마치 왕비가 돈을 지불하지 않은 것처럼 했다느니 하는 소문 등이 주인 없이 나돌아 다녔다. 결국 보석상 뵈머의 청원에 의해 의회에서 이 문제를 조사하게 되었다. 당시 의회는 루이16세에 대하여 호의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확실한 근거도 없이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를 간통죄, 사기죄, 횡령죄 등으로 엮어 넣을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문제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이 목걸이로 전함 한척을 살수 있다고 한다. 오른쪽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The Affair of the Diamond Necklace)라는 책을 쓴 드 라 모테 백작부인 잔느.
[자업자득?]
의회는 왕과 왕비를 죄인으로 몰아 붙일수 없다. 하지만 왕의 권위에는 도전할수 있다. 의회는 왕비의 죄행(罪行)과 낭비를 비난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왕을 공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이래저래 마리 앙뚜아네트만이 동네북이 되었다. 자업자득! 1786년, 의회는 조사결과 로한의 추기경이 무죄임이 밝혀졌지만 도의적 책임을 물어 직위해제하고 궁정에서 추방하였다. 라모트-발루아 백작부부는 절도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 이외의 사건 관련자들은 견책과 함께 재산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왕비에 대하여는 비난의 화살을 쏘아댔다. 다이아몬드 사건이 왕비의 사치 때문에 야기되었다는 이유에서였다. 의회의 재판이 진행되는 중인 1785년 11월 2일,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느덧 30세 생일을 맞이하였다. 여자 나이 30! 마리 앙뚜아네트는 지난 날의 모든 허영과 사치가 아침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다. 화려한 드레스가 무슨 소용이 있으며 구두와 모자와 가발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살이 찌기 시작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시 임신하였다. 출산에 따른 고통 때문에 심히 걱정이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조산(早産)을 했다.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피 엘레네 베아트릭스(Sophie Helene Beatrix)는 이듬해인 1786년 7월 9일 태어났다. 예정보다 몇주 일찍 태어났다. 마리 앙뚜아네트 자신이 걱정한대로 임신으로 건강이 많이 쇠약해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출산후 숨 가쁜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연습하는 마리 앙뚜아네트 (베르사이유에서)
[명사회의 활동]
프랑스의 재정은 계속 기울고 있었다. 특히 왕실 부대인력들에 대한 경비지출이 너무 많았다. 웬만한 왕실 사람들은 보통 한사람이 수십명의 시종과 종자들, 그리고 이른바 식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 부대인력들에 대한 경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정부는 우선 부대인력의 수를 줄여 예산절감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도 낭비적인 요소는 많이 남아 있었다. 의회는 대대적인 예산 삭감을 요구하고 나섰다. 왕실의 재무장관 샤를르 ?론느(Charles Calonne)로서는 남감했다. 결국 왕의 요청으로 이른바 명사회(名士會: Assembly of Notables)가 소집되어 왕실 예산 삭감에 대한 사항을 맡기로 했다. 명사회 첫 의원회의가 1787년 2월 22일 열렸다. 왕은 참석하지 않아도 되지만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는 참석해야 했다. 하지만 참석하지 않았다. 명사회는 왕비가 명사회의 업무를 가볍게 여기고 의원들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여 왕비를 비난했다. 왕비가 참석하지 않은 명사회는 실패였다. 어떤 구체적인 개혁책을 통과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왕의 권위에 대항했다는 의미에서는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 이 기간에 마리 앙뚜아네트는 정치문제에 참여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아이들(Children of France)을위해서 그렇게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다이아몬드 사건’이후 사방이 적들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인식하고 훗날 아이들을 위한 보장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당시 마리 앙뚜아네트를 그린 그림만 보더라도 혼자 있는 것 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있는 그림이 많은 것은 아이들의 앞날을 보장해야 한다는 일종의 시위용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아이들
[마담 데페시트]
마리 앙뚜아네트를 지지하던 재무장관, 예를 들어 캬론느 백작과 같은 사람이 왕실의 재정회복에 성공하지 못하고 물러난 것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큰 실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비록 명사회가 노력은 하였지만 왕실 가족들에 대한 천문학적인 재정 지원은 별로 줄이지 못했다. 왕실의 재정은 적자의 길로 달렸다. 실제로 왕실 가족인 프로방스 백작, 마담 탕트등이 쓰는 돈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썼던 돈 보다도 더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비난은 왕비에게 향해졌다. 왕비에게는 ‘마담 데피시트’(Madame Deficit: 적자 마마)라는 유명한 별명이 붙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 정부를 무너트리려고 일부러 적자재정을 야기했다는 주장도 일어났다. 그럴때에 막내딸인 소피(Sophie)가 유치통(乳齒痛)이 악화되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 이번에도 왕비에 대한 비난이 퍼부어졌다. 왕실 사람들은 왕비가 왕실 관습을 물리치고 그렇게도 아이들 교육과 양육에 매달렸는데 결과는 이렇듯 비참한 것이 아니냐면서 화살을 돌렸다. 설상가상으로 ‘다이아몬드 사건’으로 종신형을 살고 있는 잔느 드 라모트(Jeanne de Lamotte)가 감방에서 탈출하여 영국으로 도망간 사건이 일어났다. 잔느 드 라모트는 영국으로 도망가서 조용히 살았으면 좋았은텐데 왕비를 ‘다이아몬드 사건’의 주범으로 모는 책을 발간하여 결과적으로 왕비의 얼굴에 심하게 먹칠을 해주었다.
마담 잔느 드 라 모트-발루아(1756-1791)
[병약한 도팽]
1787년 11월, 루이 왕은 측근들의 말만 듣고 의회를 해산하였다. 루이왕은 이른바 통치권(lit de justice)을 행사하여 의회를 추방하고 왕실의 권한을 높이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키려 했다. 뜻밖에도 당시 영향력이 있는 오를레앙 공작(duc d'Orleans) 루이 필립 조셉(Louis Philippe Joseph)이 루이16세의 정치를 비난하며 새로운 법을 반대했다. 오를레앙공작은 프리메이슨 멤버로서 프랑스의 계몽주의를 주창한 사람이었다. 루이16세는 오를레앙 공작을 추방했다. 이듬해 5월, 이른바 ‘5월 칙령’(May Edict)이 공포되었다. 루이16세는 이번에도 통치권을 행사하였다. 백성들이 반대했다. 마침내 루이16세는 의회 없이 ‘3부회의’(Estates General)를 소집하여 운영코자 했다. 이렇듯 루이16세는 정치적으로 악수(惡手)만을 연속하여 두었다. 왕비는 얼마동안 정치문제에 관여했으나 3부회의 소집등 정치상황이 급격하게 변하자 관심을 접어두고 오로지 자녀들의 일에 더 신경을 썼다. 더구나 1787-88년에 큰아들 루이 조셉이 폐렴으로 고통을 당하자 병간호에 여념이 없었다. 루이 조셉은 폐렴을 앓고 나서 척추가 심하게 구부러졌다. 마침 전에 재무장관을 지냈던 자크 네커(Jacques Necker)가 마리 앙뚜아네트의 추천으로 신임 재무장관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만일 네커장관이 재정정책에서 실패하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생길 것으로 예견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예언대로 국가 재정상황은 악화되었다. 더구나 1788-89년 겨울에 동장군이 극성을 떠는 바람에 봄농사가 큰 타격을 입었다. 그로 인하여 빵값이 폭등하게 되었다. 그런 판에 왕세자 루이 조셉의 병은 악화일로였다.
오르렝앙 공작 루이 필립 조셉(1747-1793)
[죽음 아니면 빵을 달라]
1789년 3월, 루이16세는 궁전의 지붕 한쪽이 무너져 떨어지는 바람에 거의 죽다가 살아난 일이 있었다. 다음 달인 4월, 파리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배고프니 빵을 달라는 봉기였다. 5월에는 백성들의 식량문제를 다루기 위해 3부회의가 부활하여 개원하게 되었다. 왕비는 이 행사에 참석하였다. 왕비는 모처럼 파리 시민들을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아직 젊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한껏 치장하고 나타났다. 그런 왕비에 대하여 시민들은 비난을 퍼부었다. 오를레앙공작(duc d'Orleans)이 3부회의에 참석하여 지난 겨울 백성들의 굶주림을 보다 못하여 있는 재산을 털어서 백성들에게 빵과 돈을 나누어주었다고 과장되게 선전했다. 오를레앙공작은 루이16세에 대하여 거부감을 갖고 있다가 추방당한 인물이었다. 시민들은 오를레앙공작이 루이16세나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보다 더 훌륭하다면서 환호를 보냈다. 왕비는 3부회의에는 관심이 없었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큰아들 루이 조셉의 일에만 신경을 썼다. 루이 조셉 왕세자는 일곱 살 나이에 1789년 6월 4일 세상을 떠났다. 겨우 8세였다. 왕세자의 죽음은 국가적으로 애도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백성들이 외면했다. 백성들은 3부회의에 더 관심을 두었고 당장의 빵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매달렸다. 그러한 때에 왕비가 백성들의 피로 목욕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는 악의에 넘친 괴소문이 나돌았다. 왕비가 루이 조셉 왕세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그런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인식은 상당히 나빠 있었다.
대단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마리 앙뚜아네트(1779-89)
여기에서 잠시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딸 Marie-Therese-Charlotte (1778-1851) - 73세까지 생존.
- 첫째 아들 Louis-Joseph Xavier Francois (1781-1789) - 8세때 사망.
- 둘째 아들 Louis-Charles (1785-1795) - 10세때 사망.
- 둘째 딸 Sophie Helene Beatrix (1786-1787) - 2세때 사망.
화려한 베르사이유 궁전의 '거울의 방'
[라 마르세이유: 프랑스 혁명]
7월에 들어와서 사정은 더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의회는 국왕에게 더 많은 권리를 요구했고 국왕은 국왕대로 평민들이 주관하는 3부회의를 탄압하라는 귀족들의 요구에 장단을 맞추어야 했다. 7월 11일에는 재무장관인 네커가 해임되었다. 이 뉴스를 들은 파리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7월 14일의 바스티유감옥을 휩쓰는 것으로 절정을 이루었다. 그후 어깨에 힘깨나 주던 귀족들이 파리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제 파리는 시민들로 구성된 의회가 장악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너도나도 시민방위대에 합류하여 왕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마리 앙뚜아네트 왕비를 축출해야 한다고 위협했다. 시민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섭정에서 축출되려면 국왕이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8월 말에는 시민권리장전(La Declaration des driits de l'Homme et du cityoyen)이 채택되었다. 프랑스에 입헌군주정부가 공식적으로 들어서는 계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16세는 여전히 베르사이유를 지키며 궁정행사를 주관하였다. 9월에 가서는 빵부족이 더욱 극심해졌다. 그런데도 궁전에서는 왕실근위병을 위한 성대한 만찬이 열렸다. 이 소식이 혁명파 신문에 게재되자 시민들은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10월 5일, 아직도 베르사이유에는 빵이 넉넉하다고 생각한 시민들, 특히 시장에서 하루하루를 장사하며 사는 부인네들이 베르사이유까지 걸어와 빵을 달라고 고함쳤다. 다음날, 드디어 성난 시민들이 베르사이유 궁전 안으로 진입하여 들어왔다. 근위병 몇 명이 죽임을 당했다. 폭도로 변한 시민들은 ‘왕을 잡아 죽여라! 왕비를 잡아 죽여라!’라고 소리치며 왕궁 안을 휩쓸며 다녔다.
바스티유 정치범 수용소를 함락하는 혁명주의자들
[라파이예트 후작]
급기야 폭도 시민들은 국왕과 왕비의 거처까지 쳐들어갔다. 시민들은 국왕과 왕비, 아이들, 그리고 함께 있던 왕의 여동생 마담 엘리사베스, 프로방스 백작 부부등을 파리시에 있는 튈러리(Tuilleries)궁전으로 강제 이송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친구들을 통해 자신이 최근의 프랑스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발표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시민들의 보복이 두려웠다. 국왕과 왕비는 튈러리 궁전에서 연금되다시피 하며 지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프랑스의 국왕이었고 왕비였다. 그러한 사태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는 또 다른 잘못을 저질렀다. 드 라파이예트(de Lafayette)후작과 스캔들을 일으킨 것이다. 드 라파이예트 후작은 미국에서 영-불 전쟁을 치루고 개선한 장군이었다. 아무튼 왕비와 드 라파이예트 후작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뉴스가 신문에 게재되자 왕비에 대한 시민들의 적개심은 한층 고조되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로서는 외롭고 힘든 마음을 드 라파이예트후작과의 교분으로 달래려고 했을 뿐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언젠가는 아들이 왕이 되어 사태가 안정될 것으로 믿었다.
미국 식민지 전쟁에서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드 라파이예트 후작
[튈러리 궁전에서의 생활]
튈러리궁전에 연금되어 있는 국왕을 탈출시키려는 계획이 있었다. 튈러리궁전에 함께 있는 신하들과 시종들이 계획을 주도했다. 하지만 루이16세가 최종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바람에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 때 등장한 인물이 한때 마리 앙뚜아네트와 각별한 사이였던 스웨덴의 페르젠백작이었다. 페르젠백작은 원래 마리 앙뚜아네트와 아이들만을 파리에서 멀리 떨어진 몽메디(Montmedy)요새로 탈출시키는 계획을 주도면밀하게 세웠다. 왕비는 이 계획을 반대하였다. 왕비는 국왕을 비롯하여 다른 가족들도 함께 떠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위험했다. 이 계획도 계획대로 추진되지 못했다. 루이16세가 함께 갈 사람을 확실히 정하지 않고 이랬다저랬다 했으며 탈출 날짜에 대하여도 확실한 태도를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시 계획을 세워야 했다. 마침내 1791년 6월 21일 밤중에 국왕과 왕비를 포함한 일단의 사람들이 튈러리 궁전을 탈출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24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른네(Varennes)에서 모두 붙잡혔다. 국왕과 왕비, 그리고 왕실 가족들은 파리로 끌려왔다.
1700년대 말의 튈러리 궁전
[쟈코뱅당의 등장]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파리 탈출은 참담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국왕과 왕비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때를 같이하여 공포정치의 대명사라고 할수 있는 쟈코뱅(Jacobin)당이 프랑스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막시밀리안느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rspiere: 1758-1794)가 주도하는 쟈코뱅당은 프랑스에서 더 이상 왕이 필요 없다고 하며 군주제도를 종식시키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래도 마리 앙뚜아네트는 새로 채택된 헌법이 실효를 거두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으며 나아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 겸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인 오빠 레오폴드가 프랑스에 압력을 넣어 자기를 구해줄 것으로 기대했었다. 당시 비엔나에서는 요셉 황제가 1790년 2월 20일 폐렴으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동생, 즉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오빠인 레오폴드가 요셉의 뒤를 이어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레오폴드는 누이동생인 마리 앙뚜아네트, 또는 그 가족을 돕기 보다는 프랑스의 혼란을 이용하여 그동안 눈치 보며 지내야했던 프랑스에게 한 방 먹일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레오폴드는 1992년 3월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프란시스 2세가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및 오스트리아 대공 및 헝가리-보헤미아의 왕으로 등극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16세를 처형하는데 앞장선 과격 쟈코뱅당의 리더 로베스피에르
[친정오빠들: 우리 오빠 맞아?]
레오폴드와 그의 뒤를 이은 프란시스의 프랑스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은 급기야 1792년 4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간의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프랑스 사람들의 눈에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는 적국 사람으로 비추어졌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반(反)오스트리아적인 언행을 하며 자기도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했지만 그런 것은 감성이 예민한 프랑스 사람들에게 해당이 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간에 전쟁이 일어난지 두어달후, 사정은 루이와 마리 앙뚜아네트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어찌된 일인지 프랑스군은 계속 패배만 했다. 의회는 국왕의 권한을 축소하고 전선의 장군들에게 권한을 주는 몇가지 제도를 건의했지만 국왕은 ‘옳다! 네 놈들이 나를 무시하더니 패배만하고! 이젠 군대 통솔권까지 내 놓으라고?’라면서 비토(Veto)했다. 그런 비토는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뒤에서 코치하여 국왕이 비토권을 행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에게는 또 하나의 별명이 붙었다. 이번에는 ‘마담 비토’(Madame Veto)였다.
7월 말이 되자 국왕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은 말할수 없이 높아졌다. 결국 의회는 8월 10일, ‘루이16세는 더 이상 프랑스의 국왕이 아니다’라고 발표하고 국왕의 권력을 공식적으로 중지하였다. 의회가 국왕을 폐하자 일부 왕당파들이 그래도 충성을 보이기 위해 소요를 일으켰다. 왕당파들은 국왕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스위스 용병들로 구성된 경비대를 튈러리 궁전에 배치하였다. 공화파들이 튈러리 궁전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스위스 경비대와 충돌하였다. 이로 인하여 사태를 지켜보던 수백명의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다. 당국은 왕실 사람들이 시내 한복판의 튈러리 궁전에 있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당국은 왕실 사람들을 마레(Marrais) 사원으로 옮기도록 했다. 튈러리에 비하여 형편없는 곳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1주일후, 왕실 사람들이 파리 코뮌(Paris Commune: 프랑스 혁명 때의 파리의 혁명적 자치 단체: 1792-94)의 심문을 받기 위해 끌려갔다. 그 중에는 드 랑발(de Lamballe)공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랑발공주는 ‘9월 학살’의 희생자였다. 파리 코뮌은 9월 2일 일부 왕실 사람들을 포함하여 왕당파들을 대거 학살한 일이 있다. 이를 ‘9월 학살’(September massacres)이라고 부른다. 혁명파들은 랑발공주의 목을 장대에 꽂아져 파리 시내를 마치 행진이나 하듯 돌아다녔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랑발공주의 목이 장대에 꽂힌 모습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소식을 듣고 기절하여 쓰러졌다. 9월 21일 프랑스 왕정은 공식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국민회의(National Convention)가 프랑스의 정권을 장악했다. 왕실 사람들은 캬페(Capets)라고 불렀다. 왕족을 경멸하여 부르는 호칭이었다. 국민회의는 국왕부터 심문키로 했다. 루이16세는 국가명예훼손이란 죄목으로 가족들과 떨어져 별도로 수감되었다. 재판은 12월부터 시작되었다. 쟈코뱅당이 주도하는 국민회의는 루이16세를 유죄로 인정했다. 일부에서는 루이16세를 인질로 잡고 있자는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나 쟈코뱅은 이를 거절하였다. 루이16세를 단두대(기요틴)으로 처형키로 결정했다. 이어 국왕의 가족들은 파리 시내에 있는 템플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비운의 드 랑발 공주
[1793년: 비운의 종말]
루이16세는 1793년 1월 21일 처형되었다. 38세였다. 이제 마리 앙뚜아네트가 남았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왕조의 몰락후 왕비라고 부르지 않고 ‘캬페 미망인’(Widow Capets)이라고 불렀다. 캬페는 부르봉 왕조를 일컫는 명칭이다. 부르봉 왕조를 시작한 위고 캬페(Hugo Capet)의 이름에서 따온 말이다. 마리앙뚜아네트는 남편 루이16세의 죽음으로 깊은 슬픔에 빠졌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남편의 죽음 이후 일체의 음식물을 거부하였다. 심지어는 최소한의 건강을 위한 산책도 거부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아들을 루이17세라고 부르는 것도 거부했다. 추방중인 프로방스백작이 자신을 신왕 루이17세의 섭정이라고 부른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건강은 급속히 악화되었다. 폐렴에 걸렸으며 심지어 방광암에 걸렸다는 얘기도 있었다. 실제로 마리 앙뚜아네트는 치질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루이16세의 죽음 이후 국민회의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리 문제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당장 처형하자는 주장이 있었는가 하면 신성로마제국에 붙잡혀 있는 프랑스 포로들과 교환용으로 이용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몸값을 받고 돌려보내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미국으로 추방하자는 주장도 했다. 1793년 4월에는 ‘공공안전위원회’(Committee of Public Safety)라는 것이 구성되었다. 온건공화파인 지롱드(Girondins) 당원들은 체포되거나 추방되었고 과격 쟈코뱅당이 득세하였다. 쟈코뱅 당원들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재판을 서둘러 진행하자고 주장했다. 왕세자(Dauphin)에 대하여는 계속 잡아두고 새로운 공화국을 위해 이용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이에 따라 왕세자인 루이 샤를르는 7월초 엄마 마리 앙뚜아네트로부터 떼어내어 시몬이라는 술주정꾼 신발장이의 감독아래 두고 감시하였다.
템플 감옥에서 단두대로 끌려가기전 가족들과 마지막 작별을 하는 루이16세
(왼쪽은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 오른쪽 끝 머리를 감씨고 있는 사람은 루이16세의 시종)
[죄수번호 280]
8월 1일, 혁명당국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그때까지 머물렀던 마레(Marrais) 타워로부터 끌어내어 파리 감옥(Conciergerie)에 죄수번호 280번으로 수감하였다. 이후 몇차례에 걸쳐 마리 앙뚜아네트를 감옥으로부터 구출하려는 계획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런 계획을 일체 거절하였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혁명재판소의 최종 재판은 10월 14일에 열렸다. 루이16세를 재판할 때에는 본인에게 변호할 기회를 주었으나 마리 앙뚜아네트의 재판은 완전히 형식적이어서 자신을 변호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더구나 쟈코뱅당원들로 구성된 혁명재판관들은 대부분 여성혐오자들이어서 재판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죄목은 여러 가지였다. 하지만 거의 모두 사실과는 다른 것이었고 심지어 시중의 소문을 근거로 죄목을 만든 것이 많았다. 예를 들면 베르사이유에서 난잡한 섹스파티를 열었다는 것, 수백만 리브르의 돈을 오스트리아로 빼돌렸다는 것, 루이16세의 정책을 반대해온 오를레앙 공작(duc d'Orleans)을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 어린 루이17세를 프랑스의 새로운 왕으로 선포했다는 것, 1792년 튈러리궁전 소요당시 스위스 수비대원들을 대량 학살토록 지시했다는 것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죄목은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것이었다.
생 드니 성당에 안치되어 있는 루이16세와 마리 앙뚜아네트의 유해. 두 사람의 기념상. 마이 앙뚜아네트의 가슴을 만지면 잘 산다고 믿어 가슴 부분이 반질반질해져 있다. 별 사람들도 다 있다.
아들인 루이 샤를르가 보호감시자의 코치를 받아 자기를 성적으로 학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린 아들을 성적으로 학대했다는 기소가 있자 그때까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마리 앙뚜아네트는 분연히 일어나 사실이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방청석에 있던 어떤 여인이 증인으로 나와 마리 앙뚜아네트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옹호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여인은 1789년 베르사이유에 난입하여 ‘왕비를 죽여라!’고 소리쳤던 여인이었다. 재판은 형식적이었다. 혁명당국은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판결을 이미 며칠전에 결정해 놓았었다. 재판이 시작된지 이틀후인 10월 16일, 마리 앙뚜아네트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날 오후 12시 15분, 마리 앙뚜아네트는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었다. 38세 생일을 며칠 남겨놓지 않은 날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시신은 라 마델레느(La Madelene) 공동묘지의 이름 모를 장소에 던져졌다. 라 마델레느 공동묘지는 이듬해인 1794년 문을 닿았다. 그로부터 22년후인 1815년 1월, 정부가 마리 앙뚜아네트와 루이 16세의 시신을 찾아내어 프랑스 역대 왕들을 안치한 생드니(St Denis)성당에 이장하였다. 나중에 나폴레옹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처음 연금되어 있던 마레의 타워를 부수어버렸다. 민중들에게 나쁜 인상을 줄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루이17세는 아버지 루이16세와 어머니 마리 앙뚜아네트가 모두 처형 당한후에도 여전히 감금되어 있었다. 일부 왕당파들은 루이17세를 프랑스의 새로운 국왕으로 받들었지만 루이17세가 실제로 국가를 통치한 일은 없었다.
마리 앙뚜아네트 가족이 갇혀있던 파리 콩시에르제리 감옥
[마리 앙뚜아네트 진실공방]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떤 성격의 사람이었으며 실제로는 어떻게 생겼는가? 미인이었는가? 아니면 평범하게 생겼는가? 사람들은 그를 정말로 싫어했는가, 아니면 좋아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들은 마리 앙뚜아네트를 선함의 심벌로 여겼다. 남들에게 친절하고 따듯하게 대했으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걱정해주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반면, 마리 앙뚜아네트를 모든 나쁜 것의 대명사로 말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문제는 나쁜 여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마리 앙뚜아네트라고 하면 무조건 사치, 허영, 질투, 낭비, 스캔들의 상징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프랑스혁명의 희생자이며 순교자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어떻게 생겼는가? 지금까지 남아있는 초상화들을 살펴보면 별로 뛰어난 미인이라고 할수없는 모습이다. 합스부르크의 전형적인 모습을 닮아 얼굴은 갸름한 계란형이 아니라 둥근 찐빵 같으며 눈은 바세도씨병을 앓았던 사람처럼 튀어나오고 키도 크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마리 앙뚜아네트의 옆에서 함께 지냈던 몇몇 사람들이 남긴 설명을 보면 하얀 피부, 가즈런한 치아, 붉은 입술, 사슴처럼 순진한 눈망울, 키는 중키에 아담한 편으로 결론적으로 대단히 교양 있는 귀부인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당시 일반적인 프랑스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다. 프랑스의 초상화가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마리 앙뚜아네트의 모습을 그릴 때 되도록이면 좋지 않은 인상을 심어주도록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남편 루이16세의 죽음후 감옥에서 검은 상복을 입고 성경을 읽으며 지내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모습
[페르젠과의 러브 스토리]
마리 앙뚜아네트가 비참하게 세상을 떠난지 약 1백년후부터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여러 방면에서 솟아나왔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젊은 장교 악셀 폰 페르젠(Axel von Fersen)과의 러브 스토리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새로 평가하는 토픽 중의 하나였다. 마침 19세기 말에 페르젠백작의 후손중 한 사람이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를 저널 인타임(Journal Intime)이라는 잡지에 기고한 일이 있다. 논란의 핵심은 나중에 루이17세로 불러진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가 실제로는 페르젠의 아이였다는 것이며 루이16세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페르젠백작이 남긴 서한이나 메모를 보면 루이 샤를르가 분명히 페르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주장이었다. 특히 어린 루이 샤를르가 감옥에서 비참하게 죽었을 때 페르젠이 남긴 애달픈 글은 루이 샤를르가 자기 아들임을 확실히 표현하는 것이었다는 주장이었다. 또 다른 사람들은 비록 마리 앙뚜아네트와 페르젠이 몇 년에 걸쳐 사랑을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만일 그렇다면 루이16세는 물론, 말 많기가 이를데 없는 왕실 사람들이 루이 샤를르를 왕세자로 고분고분 인정하고 나중에는 루이17세라고 부르도록 했겠느냐는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에 우정은 있었지만 육체적인 사랑은 절대로 없었다고 주장했다. 루이17세(루이 샤를르)는 10세의 어린 나이로 감옥에 구속된채 영양실조로 죽었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나중에 루이17세). 페르젠백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10세의 어린 나이에 감옥에서 온갖 학대를 받다가 폐렴과 영양실조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의 프로포즈]
모차르트는 마리 앙뚜아네트보다 한 살 어리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1755년에 태어났으며 모차르트는 1756년에 태어났다. 모차르트는 7살때에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서 마리아 테레자를 비롯한 왕실가족들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일이 있다.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오던 모차르트는 유리같이 반질반질한 쇤브룬 궁전의 마루바닥 때문에 넘어졌다. 이때 앞줄에 앉아있던 마리 앙뚜아네트가 직접 나와 모차르트를 일으켜 세우며 ‘어디 다치치는 않았니?’라고 물어보았다. 모차르트는 이 친절하고 예쁜 공주에게 반하여 ‘난 나중에 당신과 결혼할 거야!’라고 말했다. 만장한 사람들은 ‘고놈 참 당돌하고 귀여운 놈이네!’라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 마리 앙뚜아네트는 8살이었다. 모차르트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비엔나 근교의 락센부르크(Laxenburg)성에서도 잠깐 만난 일이 있다. 어떤 설명에 따르면 쇤브룬궁전에서 마리 앙뚜아네트가 넘어진 모차르트를 일으켜 세운 일이 없으며 모차르트가 대뜸 ‘당신과 결혼하겠다!’고 선언한 일도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모차르트는 피아노 연주를 마치고 마리아 테레자의 무릎에 뛰어 올라 앉아 ‘키스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는 것이며 마리아 테레자는 그런 모차르트를 귀엽게 여겨 뺨에 키스를 해주었다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35세로 1791년 세상을 떠났고 마리 앙뚜아네트는 38세가 되는 1793년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오페라 속의 백작부인이 되고 싶어했던 것 같았다. (영화 장면)
[베르사이유의 장미]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스토리는 소설, 영화, 연극, 뮤지컬 등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소설로는 ‘몬테크리스토 백작’으로 유명한 알렉산더 뒤마(Alexander Dumas)가 쓴 ‘빨간 집의 기사(騎士)’(Le Chevalier de Maison-Rouge)가 단연 유명하다. 감옥에 갇혀있는 마리 앙뚜아네트를 구출하려는 이른바 ‘카네이션 작전’(Carnation Plot)에 대한 이야기이다. 페르젠백작이 주도한 작전이었다. 원래 ‘빨간 집의 기사’는 마리 앙뚜아네트에 대한 뒤마의 6부작중 제5부에 해당한다.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도 6부작중의 한편이다. 뒤마는 소설에서 마리 앙뚜아네트를 동정적으로 그렸다. 영화로는 1938년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마리 앙뚜아네트’라는 타이틀의 작품으로서 노르마 쉬어러(Norma Shearer)가 타이틀 롤을 맡은 것이 있다. 이외에도 여러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최근에는 한나 카리나(Hanna Karina)가 주연한 ‘마리 앙뚜아네트’가 화려함으로 각광을 받았다. 특히 파리 오페라극장에서 실제로 촬영한 가면무도회 장면은 압권이라는 평이었다. 역사물로서는 1998년 엘레나 마리아 비달(Elena Maria Vidal)이 쓴 트리아농(Trianon), 2005년 캐롤리 에릭슨(Carrolly Erickson)의 ‘마리 앙뚜아네트의 숨겨진 일기’(The Hidden Diary of Marie Antoinette)가 유명하다. 1970년대 초반, 일본 리요코 이케다(Riyoko Ikeda)가 제작한 장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The Rose of Versailles)는 대단한 인기를 끈 것이었다. 만화에는 페르젠백작도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친구인 오스카 프랑수아(Oscar Francois)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마담 드 폴리냑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카)
[케이크를 먹도록 하라!]
Qu'ls mangent de la brioche!(케이크를 먹도록 하라: Let them eat cake!)라는 말은 마리 앙뚜아네트가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마차를 타고 베르사이유에서 파리 시내로 갈 때에 궁전 문 앞에 몰려 있던 농민들이 ‘배고파서 못살겠으니 빵을 주시오, 빵을!’이라고 외치자 왕비는 ‘아니,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되지 않는가? 케이크를 먹도록 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실제로는 장-자크 루쏘(Jean-Jacques Rousseau)가 인용한 말이라는 것이다. 루쏘에 따르면 루이14세의 왕비가 될뻔했던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 마리 앙뚜아네트의 어머니가 아님)가 농민들이 먹을 빵이 없다고 소리치자 내뱉었던 말이라고 한다.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는 S'il ait aucun pain, donnez-leur la croute au loin du pate라고 말했다는데 번역하면 ‘만일 빵이 없다면 그들에게 고기파이의 부스러기를 주어라’이다. 스페인의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농민들에게 이 말을 했다는 것도 확실한 근거가 없다. 당시 궁정에서 영향력이 있었던 프로방스(Provence)백작이 마리아 테레사 공주가 그렇게 말했다고 전했기 때문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마리 앙뚜아네트의 화려한 침실
[아들을 독살?]
마리 앙뚜아네트가 첫 아들을 독살했다는 괴소문이 나돈 일이 있다. 어떤 버전에는 페르젠백작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를 다음 왕위에 오르도록 하기 위해 첫째 아들을 독살했다는 얘기까지 있었다. 이것은 아마 마리 앙뚜아네트가 페르젠백작과 너무 가깝게 지내고 있을 때에 둘째 아들을 낳자 이에 대한 친권문제가 논란이 되었던 것과 연관이 있는 소문이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둘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 페르젠백작과 성관계를 맺었다는 가정아래 그런 소문이 나돈 것이다. 하지만 루이16세는 한번도 아들 루이 샤를르에 대한 친권문제를 거론한바 없다.
마리 앙뚜아네트의 둘째 아들 루이 샤를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과 진실공방]
마리 앙뚜아네트가 개인적으로 ‘다이아몬도 목걸이 사건’을 부추겼다는 주장이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거추장스러운 로한의 추기경을 궁정에서 축출하려 했고 이를 위해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조작했고 결과적으로 로한의 추기경을 궁정에서 몰아냈다는 것이다. 이것도 사실과는 거리가 멀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이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로한의 추기경을 궁정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추기경은 마리 앙뚜아네트의 환심을 다시 사기 위해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구입해서 바치려고 했다는 얘기가 사실이라고 한다. 루이16세도 추기경을 개인적으로 싫어했기 때문에 왕비를 통해 사태를 호전시키려 했다는 얘기다. 그러므로 이미 추방당한 추기경을 또 다시 몰아내기 위해 왕비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을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마리 앙뚜아네트가 추기경을 증오했던 것은 추기경이 비엔나주재 프랑스 대사로 있을 때 마리 앙뚜아네트를 모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로한의 추기경 루이
[목장의 소녀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는 베르시이유 궁전의 한쪽에 하모(Hameau)라는 이름의 농촌 마을을 재현해 놓았다. 이곳에 오두막집 10여채를 지었고 물레방아도 만들어 놓아 전원 분위기를 만끽하도록 했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이곳에서 목장의 소녀로 분장하여 젖소의 우유를 짜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연극일뿐 실제로 우유를 짜지 않았으며 통에 담은 우유는 인근 목장에서 배달해 온 것이었다고 한다.
베르사이유 궁전 안에 있는 오두막집 농가
[술꾼 마리 앙뚜아네트?]
마리 앙뚜아네트가 남편 루이16세 처럼 술을 좋아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신문에서는 루이16세가 대단한 술꾼이어서 거의 매일 술에 젖어 있다고 보도했지만 사실 루이16세도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지는 않았다. 마리 앙뚜아네트는 술을 마실 경우에는 다브레이(d'Avray)마을에서 특별히 주문한 생수를 대신 마셨다는 것이 측근들의 얘기였다.
[왕비의 사람들]
리벨르지는 마리 앙뚜아네트가 여자들과는 동성연애를 했고 남자들과는 이성연애를 했다고 주장하며 대상자는 여성의 경우 랑발(Lamballe)공주와 폴리냑(Polignac)공작부인, 남자로는 다르투아(d'Artois)백작, 드 라파이예트(de Lafayette)후작, 루존(Luzon)남작 등이 상대역이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진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되는 페르젠(Fersen)백작의 이름은 한번도 거론되지 않았다.
마리 앙뚜아네트와 염문을 뿌린 페르젠 백작. 명성에 맞게 생겼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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